평론

월간문학 시조월평 '은근과 끈기, 그 아름다움'

시조시인 2008. 9. 10. 01:29

(월간문학 시조 월평 2007년 1월호)

 

                                          은근과 끈기, 그 아름다움

                                                 김 재 황

 

 시조는 民族詩歌이다. 그러므로 그 안에 우리의 민족 정서인 ‘은근’과 ‘끈기’가 담겨 있기 마련이다.

 ‘은근’은, ‘경박하지 않고 무게 있음’을 이르는 말이며, ‘촐싹거리지 않고 진득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말하자면, 겉보다는 안으로 짙은 빛깔을 머금는다. 이게 바로 우리가 말하는 인간덕성이며, 따라서 품격을 나타낸다.

 마치 수많은 풀들 중에서 단연코 한란이 귀하게 여김을 받듯, 높은 품격을 지닌 시조는 뭇사람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는다. 또한, 한란이 어둠 속에 감도는 향기를 지니듯, 격조 높은 시조에서는 그윽하게 풍겨오는 향기를 맡을 수 있다.

 ‘끈기’는 ‘오래 갈고 닦음’이라든가 ‘정성을 다함’을 의미한다. 한 편의 좋은 시조를 얻기 위해서는 구슬땀을 흘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그 안에 우리의 혼이 살아있게 된다. 이 또한 품격과 무관하지 않다. 이렇게 정성을 다한 시조 작품은, 밤하늘에 높이 떠서 반짝이는 별처럼 우리의 가슴에서 오래 빛난다.

 ‘月刊文學’ 12월호에 실린 작품 중에서 한 편을 본다.


 얼마나

 사랑이 컸으면

 이 가을에다 만점을 주실까.


 오늘만

 살기로 작심한

 절벽들도 돌려세우네.


 불현듯

 네 생각이 나

 보고즙다 전보를 치네.

                ---서우승, ‘단풍 이미지’ 전문


 참으로 아름답다. 이를 두고, ‘밝고 맑고 청정하다’라고 말할 수 있을 성싶다. 먼저, 초장을 보면, ‘만점을 받은 가을’이 눈앞에 떠오른다. 그야말로 ‘붉은 잎’이 산에 가득하다. 그런데 이 가을이 만점을 받은 이유는, ‘그분의 크신 사랑’ 때문이란다. ‘단풍’을 노래함이 이보다 더 은근할 수가 없다.

 게다가 중장으로 가면, 그 ‘은근’이 도를 더하여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도대체 ‘오늘만 살기로 한 절벽’은 무슨 뜻인가?  ‘절벽’이 ‘단절’이나 ‘거부’ 등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아마도 ‘오늘만 살기로 한 절벽’은, 그처럼 절박하고 막다른 길에서 종종 자살을 ‘작심’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는 듯싶다. 그러므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죽음을 택하려고 하는 존재까지도, ‘단풍’은 그  마음을 돌이키게 만든다는 뜻일 듯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짚어 보아야 할 게 있다. ‘오늘만 살기로 한 절벽들을 돌려세우는’ 힘은, 결코 단풍의 아름다움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단풍’보다 더한 것?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이 ‘단풍 이미지’이다. 이 ‘단풍 이미지’야말로 바로 ‘그리움’이다.

 그 이유는 종장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불현듯 누군가가 생각난다고 했다. 그는 ‘보고즙은’ 사람이다. 왜 ‘보고싶다’가 아니라, ‘보고즙다’일까? 간절히 보고 싶은 '너’는, 어릴 적의 고향 친구임을 쉽게 짐작하게 한다. 또, ‘전보를 친다.’에서 ‘빨리 만나고 싶은’ 그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렇듯 이 시조 작품에는 곳곳에 ‘은근’의 빛깔이 잘 스미어 있다. 다른 작품을 본다.


 너와 나

 서성이던 자리

 다시 와 서본다.


 창가에

 어린 놀빛

 지금도 여전한데,


 두고 간

 꽃물든 말들

 별이 되어 떠있다.

          --한분순, ‘서성이다 꽃물들다’ 첫 수


 오래간만에 만나는 격조 높은 시조이다. 한 번 읽으니 입 안에 한란의 암향이 그득하다. 이런 작품은 쉽게 얻지 못한다. 구슬땀의 결정체이다. 여기에서는 누구나 ‘끈기’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

 초장에서는 ‘서성이던 자리’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만나던 자리’와 ‘서성이던 자리’는 아주 다르다. 우선 무엇보다도, ‘만나던’은 편안한 느낌을 지니는 반면에, ‘서성이던’은 불안한 느낌이 든다. 그렇기에 ‘서성이던’이란 말이 들어감으로써 그 ‘만남의 시기’가 사춘기로 여겨지게 이끈다. 그런 시기의 추억이 깃든 장소라면 누구든지 일평생 잊지 못한다. ‘다시 와 서게’ 만든다.

 중장으로 가면, 그 장소가 ‘은근히’ 좁혀진다. 바로 ‘창가의 자리’이다. 그런데 창가에는 그 때나 지금이나 놀빛이 어려 있다. 이 ‘놀빛’은 ‘애틋함’을 가리킨다. 그 애틋한 마음을 짐짓 ‘놀빛’으로 노래하고 있다. 이 또한, ‘은근’의 아름다움이다. 더 나아가서 초장의 ‘서성이던’과 중장의 ‘놀빛’이 잘 맞아떨어지고 있다.

 종장을 보면, ‘꽃물든 말들’이 초장의 ‘너와 나’를 예사로운 사이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아름다운 사랑의 말들은 별이 되어 떠 있다. 초장의 ‘서성이던’과 중장의 ‘놀빛’, 그리고 종장의 ‘꽃물’ 등이 흐름을 함께하는 가운데, 오직 ‘별’이 떠서 빛난다. 그래서 이 ‘별’은 많은 느낌을 갖게 한다. 연작으로 되어 있는, 이 작품의 둘째 수를 본다.


 한밤내

 종종걸음

 숨가삐 달려온 너.


 꿈인 듯

 달빛인 듯

 흰날개 펼쳐든다.


 눈가에 어린

 그모습

 풀밭속에 잠든다.

           --한분순, ‘서성이다 꽃물들다’ 둘째 수


 바야흐로 한밤이다. 첫 수의 종장에 ‘별이 되어 떠 있음’과도 잘 이어진다. 첫 수의 초장에서 ‘서성이던’과 둘째 수의 초장에서 ‘종종걸음’이 짝이 되고, 첫 수의 중장에서 ‘놀빛’과 둘째 수의 중장에서 ‘달빛’이 어울린다. 그런데 첫 수와 둘째 수에서는 변화를 일으킨다. 즉, 두 수가 함께 어울려서 잘 나아가다가 갑자기 종장에서 하늘(별)과 땅(풀밭)으로 크게 갈라져 버린다.

 이는, 쉽게 만날 수 없는, 기막힌 대비이다. 오랜 기간 동안 늘 작품을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니면서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지 않고서는, 결코 이런 작품을 얻을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민족성인 ‘끈기’를 꼭 필요로 하는 게 시조이다.

 이 시조 작품은 그 내용이 어렵지 않다. 아주 진솔한 작품이다. 귓가에 소곤소곤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 듯 감미롭기 이를 데 없다. 그게 잔잔한 감동을 가슴에 더한다.

 사실, 시조에 있어서 작품만 보고 그 담긴 뜻을 평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시의 화자와 어느 정도 친교를 갖고 있다면 그의 작품을 읽는 데 한결 쉬워진다. 즉, 그가 어떤 경력을 지녔고 그가 평소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그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를 아는 게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된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특히 시조에 있어서는 품격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화자의 품격과 작품의 품격이 일치해야만 한다. 만약에 그렇지 못하다면, 그 작품은 ‘가짜’라는 이야기가 된다. 가짜인 그런 작품을 누가 사랑하겠는가. 냉정하게 말해서 시조이든지 시이든지 그 모두가 삶을 아름답게 가꾸려는 방편일 뿐이다. 그렇기에 삶이 먼저이고 작품은 그 다음이 된다.

 더욱이 시조는, 원래에 ‘時節歌調’라 하여 시절을 노래한 시였다. ‘시절의 노래’라 함은, 그 당시의 인심이나 생활을 ‘적나라하게 노래한다.’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