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스토리문학 신작특집 작품-권혁모 시인 시조작품 5편에 대하여)
그리움 적시고 남을, 그 속눈썹 긴 우수
김 재 황
(1)
시조는 민족시가(民族詩歌)이다. 그 안에 민족혼의 내재율(內在律)이 들어 있다. 그게 바로 3장(章)6구(句)이며, 우리의 삶 자체가 모두 3장6구의 시조가락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활’을 아주 잘 쏘았다. 그렇기에 일본을 ‘칼’의 나라라고 하면, 우리 대한민국은 ‘활’의 나라이다. 다시 말해서 일본은 무사의 나라이고, 우리나라는 선비의 나라이다.
시조에는 흐름(流)이 있고, 굽이(曲)가 있고 마디(節)가 있고 풀림(解)이 있다. 즉, 화살 통에서 화살 하나를 뽑는 게 바로 ‘흐름’이고, 그 화살의 오늬를 시위에 메우는 게 ‘굽이’이며, 그 화살과 함께 시위를 당기는 게 ‘마디’이다. 그리고 힘껏 당겼던 시위를 과녁에 명중되도록 겨냥하여 놓는 게 바로 ‘풀림’이다. 이 때, 3장에 있어서 ‘흐름’은 초장을 이루고, ‘굽이’는 중장을 이루며, ‘마디’와 ‘풀림’이 종장을 이룬다. 이로써 종장은 변용을 가져온다. 이를 가리켜서 우리 시조의 ‘내재율’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시조는 정형시이다. 모두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시조에는 기본율이 있다. 그러나 시조는 고루하게 기본율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내재율만 잃지 않는다면 얼마큼의 글자 가감이 자유롭다. 그러나 이를 아무나 함부로 흉내 내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오랜 동안의 ‘시조 짓기에 대한 경륜’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공자의 말을 빌려서,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 무엇이든지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의 경지에 오른 사람만이 시도할 수 있다. 너무 지나치게 파격을 하면, 자칫 시조로서의 정형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그러면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권혁모 시인의 신작특집 5작품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겠다. 그 첫 번째 작품은 시의 제목이 ‘낙타’이다. 낙타는 사람의 힘으로 하기 어려운 일을 조금의 반항이나 거부도 없이 묵묵히 해낸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순종하는 어질고 착한 짐승이 다름 아닌 낙타이다. 그런데 사막을 횡단하는 외봉낙타 한 마리가 등에 실을 수 있는 적재량은 170~270킬로그램이라고 한다. 또, 시속 4킬로미터의 속력으로 모래 위를 횡단하고, 보통 하루에 47킬로미터 정도를 걷는다고 한다. 낙타 등에는 지방질이 축적되어 있다. 사막을 횡단할 때, 이 혹의 지방이 용해되면서 영양분과 수분의 공급을 대행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 거대한 지방질은 사막의 격렬한 직사광선을 차단하는 매우 훌륭한 절연체로서 밖의 열을 막아 준다는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
억만 별이 지던 사막과 그래도 남은 별 사이를/ 사랑도 눈물까지도 번갈아 되새김질하며/ 흙바람 뜨겁게 안고 사바 언덕을 넘는 길.//한 사람에 이끌린, 한 사람밖에 모르는/ 그리움 적시고 남을 저 속눈썹 긴 우수/ 목숨 끈 묶인 업보를 무심히 따릅니다.// 하루를 지우며 그렇게 가는 거라고/ 순종의 가슴으로 당신 앞에 서는 거라고/ 저무는 지평은 그렇게 붉게 타나 봅니다. -작품 ‘낙타’ 전문
이 작품은, 권혁모 시인 자신의 어려운 삶을 형상화했다고 여겨진다. 먼저 첫 수를 살펴보면, ‘남은 별 사이를’ 가는 길은 바로 ‘사바 언덕을 넘는 길’이다. 그리고 이게 시인의 길이기도 하다. 높은 격조(格調)를 느낄 수 있다. 둘째 수의 초장에서 ‘한 사람에 이끌린’은 ‘타의에 의한’이라는 뜻이고 ‘한 사람밖에 모르는’은 ‘자의에 의한’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중장의 ‘속눈썹 긴 우수’는 ‘언단의장’(言短意長)의 묘미를 나타낸다. 그림으로 치면 넉넉한 공백이다. 이 중장은, 시인의 시심을 대표한다고 여겨진다. 종장으로 가면, 타의이든 자의이든 그가 가고 있는 길, 즉 시인의 길은 ‘업보’라고 말한다. 업보이기에 ‘무심히’ 따를 수밖에 없다. 셋째 수는, 그야말로 평사낙안(平沙落雁, 모래펄에 날아와 앉은 기러기)의 경(境)을 보여 준다. 특히 종장은 가슴을 울컥하게 만드는 ‘언외언’(言外言)을 나타낸다. ‘저무는 지평이 붉게 탄다.’니, 나로서는 더 할 말이 없다. 작품이 난해하지도 않고 진솔하다.
둘째 작품은, 시제가 ‘석양 앞에서’이다. 그 ‘결이 삭은 날’들이 살뜰하다. 아니, 살뜰하다 못해 곡진한 느낌에 젖게 만든다. 이를 가리켜서 ‘포시법’(捕詩法)이라고 하는가. 결코 만나기 쉽지 않은 ‘묘품’(妙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천 날을 소지 올리며/ 만의 연등을 달고// 결도 삭아 이제는/ 넘치도록 겨운 날들// 한 자락/ 타는 점점이/ 나를 던져 넣는다.// 비 오고 바람 불고/ 너를 만나기까지// 사랑과 미움으로/ 하늘 길 건너기까지// 그 푸름/ 안으로 감추고/ 저기 산불 번진다. -작품 ‘석양 앞에서’ 전문
첫 수의 초장에서 ‘소지’와 ‘연등’이 ‘석양’과 오버랩(overlap)된다. 아름다운 석양은, 그리 쉽게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 소지나 연등 같은 정진(精進)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중장으로 가면 ‘결도 삭아 이제는 넘치도록 겨운 날들’을 떠올리게 된다. 종장은 숨이 막힌다. 자신까지도 ‘던져 넣는다.’라니, 그 몸까지 공양한다는 말인가. 둘째 수의 초장에서 ‘너를 만나기까지’와 중장의 ‘하늘 길 건너기까지’는 모두 그리움이 가득하다. 그 그리움은 종장에서 ‘그 푸름’으로 마침내 드러난다. 그런데 그 ‘풀림’이 ‘저기 산불 번진다.’로 되어 있다. ‘산불’은 ‘단풍’을 의미하는 듯싶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득 떠오르는 게 있다. 나는 2008년에 산문집 ‘숫시인 싯다르타’를 펴낸 바 있는데,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싯다르타가 가야시사(Gayassisa)산에서 1천 명의 벗들과 머물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싯다르타는 산 위에서 멀리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수행자들이여, 모든 게 불타고 있다. 모든 게 불타고 있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눈은 불타고 있다. 눈의 식별작용은 불타고 있다. 눈의 대상과 식별작용의 부딪침은 불타고 있다. 눈의 부딪침에 의해서 생겨난 즐거움이나 괴로움,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감정 등의 느낌, 이것도 불타고 있다. 그 불은 어떤 불인가? 탐욕의 불, 혐오의 불, 미혹의 불이다. 그리고 태어남, 노쇠함, 죽음, 근심, 슬픔, 고통, 번뇌와 번뇌의 불에 의해서 뜨겁게 타고 있다.”
셋째 번의 작품은 ‘뻐꾸기시계’이다. 지금은 이 시계를 보기 어렵게 되었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뻐꾸기시계’를 가지고 있는 집이 많았다. 신기하게도 제 때에 이르면 조그만 문이 열리며 뻐꾸기가 나와서 뻐꾹뻐꾹 하고 시간을 알렸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수많은 새 중에서 뻐꾸기일까? 어째서, 목소리가 좋기로 유명한 꾀꼬리는 안 되는 것일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오목눈이’라는 우리나라 텃새는, 그 몸의 크기가 겨우 14센티미터 정도이다. 오목눈이는 가지 사이에 타원형의 둥지를 만든다. 그리고는 둥지 속에 보통 10개 안팎의 알을 낳는다. 그런데 여름새인 뻐꾸기가 그 둥지를 노린다. 뻐꾸기는 자신의 둥지는 짓지 않고, 오목눈이와 같은 ‘새 둥지’에 1개씩 알을 낳는다. 그렇게 무려 15곳이나 되는 둥지를 찾아가서 틈을 엿보다가 자기의 알을 슬쩍 낳아놓고는 도망쳐 버린다. 그 뻐꾸기 알은 오목눈이 알보다 훨씬 크고 색깔도 다르다. 그러나 오목눈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알을 열심히 품는다. 품다 보면, 뻐꾸기 알이 일찍 깨게 된다. 그런데 끔찍한 일은, 갓 깬 어린뻐꾸기가 그 곳의 모든 오목눈이 알들을 등으로 밀어서 둥지 밖으로 떨어뜨린다는 사실이다. 이미 알에서 깬 어린오목눈이라도 그대로 두지 않고 밀어낸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미오목눈이는 자기보다 훨씬 큰 어린뻐꾸기를 정성껏 보살핀다. 그런데 얄밉게도, 어린뻐꾸기가 다 자라서 독립할 때가 되면 어미뻐꾸기가 그 근처로 와서 뻐꾹뻐꾹 하며 자기 새끼를 부른다.
‘도솔’하고 부르면 ‘미솔’로 화답하며/ 쓸쓸히 젖는 날에도 문 열고 나와 말 거는/ 한 번도 어긴 적 없는/ 순결의 새가 있다.// ‘도솔’이 사는 깊은 산 도솔봉 가는 길/ 어디에 있다는가, 인연 아닌 청산은/ 산 마음 솜구름 펴고 미지의 새가 스친다.// 어둠상자 그 속에서 삼천 갑자를 만드는/ 그러다 한참 쌓이면 밖으로 날려 보내는/ 이 적막 은반에 누워 물방울 소리 듣는다. -작품 ‘뻐꾸기시계’ 전문
이 작품은 재치가 번뜩인다. 첫 수의 초장에서 ‘도솔’과 ‘미솔’이 멋진 대비를 이룬다. 그러나 시제를 결코 잊지 않는다. 그래서 종장에서 ‘한 번도 어긴 적 없는’이라고 했다. 시계의 생명은, 시간을 어기지 않는 데 있다. 둘째 수로 가면 ‘도솔’이 ‘도솔봉에 사는 새’임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미솔’은 ‘미지의 새’를 가리키는 게 아닐까 한다. 셋째 수에서는 중장이 재미있다. 이는 ‘물이 차면 쏟아내는 물시계’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종장이 ‘일발필중’(一發必中)의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과녁에 명중하여 화살이 꼬리를 부르르 떤다. 물과 시간은 모두 ‘흐른다.’라고 말한다. ‘물방울 소리’는 시간의 단위인 ‘초’(秒)를 가리킨다. ‘물방울’이 모여서 강을 이루듯 ‘초’가 모여서 세월을 이룬다. 그러니 멋진 ‘적중어’(的中語)이다. 최근에 나는 산문집 ‘노자, 그리고 나무 찾기’를 탈고 하였는데, 그 내용 중 제27장에는 ‘선행무철적’(善行無轍迹)이란 구절이 나온다. 이는, ‘잘 가는 것은 지나간 자국이 없다.’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철적’은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국’을 말한다. 자국이 없기로 친다면 시간보다 더한 게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참으로 세월은 잘도 간다.
넷째 번의 작품은 시제가 ‘밤꽃의 밤’이다. 시제만 보고도, 공연히 민망하다. 나는 금방 에로틱(erotic)한 느낌을 받는다. 왜 그럴까? 밤나무는, 5월부터 6월에 걸쳐서 이삭 모양의 꽃이 핀다. 이 밤꽃은 초록색 잎에 연한 가발을 쓴 것처럼 온통 나무 전체를 뒤덮는다. 그 꽃은 그냥 보통 꽃이 아니다. 꿀벌이 이 꽃에서 향기로운 ‘꿀’을 채취한다. 그런데 밤꽃이 한창 피어 있는 그 곁으로 가면 정말 이상야릇한 냄새가 풍긴다. 살짝 쉰 듯도 하고 시큼한 듯도 하며 약간 비린 듯도 한 냄새. 이 냄새가 ‘남자의 정액 냄새’와 비슷하다고 하여 ‘양향’(陽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옛 부녀자들은 이 냄새를 맡으면 몹시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밤꽃이 필 때면 외출을 하지 않고, 과부는 더더욱 몸을 사렸다고 전한다.
어둠이 취해 비틀거리나/ 숨 막힐 것 같은 전야// 달도 바다를 더듬는 다 낡은 등대려니// 오촉 등/ 불빛 저 아래/ 옷고름 푸는 나무들// 결국 불장난이지만/ 장난 아니었던 그날// 세월 먼 수평선에/ 부표처럼 뜨는 흔적// 아, 너도/ 함께 한 은하에/ 발을 떼지 못하나.
-작품 ‘밤꽃의 밤’ 전문
첫 수의 초장을 보면, 뒤의 구 ‘숨 막힐 것 같은 전야’가 내 느낌을 받쳐 준다. 그리고 중장의 ‘더듬는’이라는 게 그렇다. 또, ‘등대’의 생김새는 어떠한가. 종장으로 가서는 ‘옷고름 푸는’이라는 게 그러하다. 여기에서 ‘나무들’은 ‘밤나무들’을 가리킨다. 둘째 수로 가면, 결국은 밤에 ‘유백색의 수꽃차례를 이루는 양(陽)’과 ‘보통 3개씩의 암꽃이 한 군데에 모여 달리는 음(陰)’이 만나서 일이 벌어졌는데, 초장에 ‘불장난이었지만 장난은 아니다.’라고 한다. 앞의 ‘불장난’은 시인의 관점이고, 뒤의 ‘장난 아님’은 나무의 경우를 나타내는 성싶다. 그리고 종장으로 가면, 그야말로 ‘주마축지’(走馬蹴地, 달리는 말이 뒷발굽으로 땅을 찬다.)의 놀라움을 보게 된다. 즉, ‘함께 한 은하’가 바로 그렇다. ‘은하’는 ‘밤의 강’이고 ‘우주의 강’이다. 그 저지른 ‘흔적’이 질퍽하게 ‘부표’처럼 뜬다. 어디에? 밤에, 세월에, 우주에. 시인은 은하에 발을 담그고 있다. 아, 밤꽃도 여전히 밤에 머문다. 그래서 결코 그 은하에서 ‘발을 뗄 수’ 없다. 이로써 시제를 환하게 드러낸다. 나는 그만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마지막 작품은 시제가 ‘향기’이다. 이는, 딸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을 한 폭의 그림처럼 노래한 작품이다. 참으로 진솔하다. 딸의 향기와 아버지의 향기가 잘 어우러진다.
수없이 들락거렸을/ 한 마리 나비의 꿈// 딸아이가 쓰다 버린/ 화장품 통 속에서// 올해도/ 남은 찔레꽃/ 딸의 향기 맡는다.// 훗날 어느 날 나도/ 빈 콤팩트일 적에// 주워 들고 간직하며/ 아빠 향을 떠올릴까.// 사랑은/ 흐르다 지는 것/ 반딧불 반짝이며. -작품 ‘향기’ 전문
첫 수의 초장을 보면, ‘나비의 꿈’이 ‘언젠가는 부모를 떠날 딸의 경우’를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중장의 ‘쓰다 버린 화장품 통’에서 ‘딸이 출가했음’을 생각하게 한다. ‘쓰다 버린’과 ‘쓰고 버린’은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 그렇기에 아버지는 그 화장품 통 속에서 ‘딸의 향기’를 맡는다. 아니, 맡을 수 있다. 그런데 그 딸의 향기가 바로 ‘찔레꽃 향기’라고 말한다. 그렇다. 찔레꽃 향기는 풋풋하다. 어린 딸의 냄새다. 봄이면 따뜻한 햇살이 쏟아지는 산기슭이나 개울가에서 다정한 미소를 보이며 피어나는 꽃, 짙은 찔레꽃 그 향기는, 나를 먼 기억 속으로 이끈다. 찔레나무(Rosa multiflora)는 장미의 야생종이다. 그래서 ‘들장미’라고도 부른다. 둘째 수의 초장으로 가면, ‘빈 콤팩트’가 묘한 뉘앙스(nuance)를 풍긴다. ‘콤팩트’란, ‘분과 분첩 등을 넣는, 거울이 달린 휴대용 화장도구’이다. 그런데 비었다니, 그 안에는 달랑 거울만 남아 있을 게다. 그렇구나! 딸의 향기는, ‘나를 바라보게 하는 거울’이었구나! 그래서 중장으로 가면, ‘아빠 향을 떠올릴까’란 말이 나온다. ‘빈 콤팩트’이니, 향기를 맡을 수는 없다. 떠올릴 수밖에. 마침내 종장에서 ‘사랑은 흐르다 지는 것’이라고, ‘내리사랑’을 인식하게 된다. ‘아버지의 외로운 사랑’이 어둠 속에서 반딧불처럼 아름답게 반짝인다. 참으로 감동이 큰, 절창(絶唱)이다.
(3)
시조를 왜 읽어야만 하는가. 한 마디로, 우리 민족의 정신을 알기 위해서이다. 시조는 위대한 정신문화의 유산이다. 시조에는 우리 민족의 온갖 사고와 온갖 행위 및 온갖 습속이 모두 담겨 있다. 우리 것도 제대로 모르면서 세계를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나는 작년에 산문집 ‘씬쿠러, 콩쯔’를 펴냈는데, 여기에는 시에 대한 공자의 중요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공자는 시를 무척이나 사랑하였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왜 시를 배우지 않느냐? 시는 그것으로 감흥을 자아낼 수 있고 그것으로 살필 수 있으며, 그것으로 여럿이 모일 수 있고, 그것으로 불의를 원망할 수 있으며, 가까이는 아버지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길 수 있게 하며, 새와 짐승 및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
물론, 이 말은 ‘논어’에 들어 있다. 특히 ‘새와 짐승 및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多識於鳥獸草(木之名)에 나는 크게 공감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도 했다.
“시는 인정에 근본을 두어서 도리를 밝히고 풍속의 성쇠를 말하며 정치의 득실을 볼 수 있고 그 말이 온후하며 풍류를 지녔기에 이를 배우면 정치에 통달하고 말도 잘하게 된다.”
시가 이러한데, 하물며 시조에 대해서는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비록 이번에는 권혁모 시인의 시조 신작특집작품 5편을 가지고 논하였으나, 이는 최소한 시조 읽기의 문을 여는 데는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이렇듯 훌륭한 작품을 만날 수 있었음은 그 모두가 독자들의 크나큰 행운임을 여기에 분명히 밝혀 둔다.
(김 재 황 약력)
《월간문학》에 시조〈서울의 밤〉이 당선됨으로써 등단하였다. 시조집 『내 숨결 네 가슴 스밀 때』『그대가 사는 숲』『콩제비꽃 그 숨결이』『국립공원기행』『묵혀 놓은 가을엽서』『서호납줄갱이를 찾아서』및 시조선집『내 사랑 녹색세상』동시조집 『넙치와 가자미』등을 상재하였다. 시집과 산문집 다수가 있다. 평론집 『들꽃과 시인』과 『들에는 꽃, 내 가슴에는 詩』를 비롯해서 최근에는 인물전기 『봉쥬르, 나폴레옹』『숫시인 싯다르타』『씬쿠러, 콩쯔』(공자) 등을 펴냈다. 현재, 산문집 『노자, 그리고 나무 찾기』를 탈고하였으며 상황문학 문인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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