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햇빛 같은 웃음, 그 해바라기의 꿈
김재황(상황문학문인회 회장)
1.
이 땅에 꽃이 피어나지 않는다면 어찌 살겠는가. 갖가지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어둡고 쓸쓸하겠는가. 그렇기에 아무리 춥고 외로운 겨울이라고 하여도 꽃이 피어나는 봄을 기다리며 우리는 따뜻하고 환한 꿈을 꿀 수 있다.
그렇다고 어디 땅에서만 꽃이 피어나는가. 우리의 가슴에서도 갖가지 아름다운 꽃이 환하게 피어난다.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서 ‘시’(詩)라고 부른다. 들에서 피어나는 꽃들과 같이 가슴에서 피어나는 시들도 그 생김새가 다르고 빛깔도 다르며 그 향기 또한 다르다. 게다가 가슴에서 피어나는 꽃인 ‘시’는, 철을 가리지 않고 한겨울에도 아름답게 피어난다. 아니, 춥고 외로운 겨울일수록 더욱 아름답게 피어나서 향기를 풍긴다.
그러면 이춘원 시인의 가슴에는 어떠한 꽃들이 피어나고 있는가. 그 꽃들을 만나보기 전에 우리는 이춘원 시인에 대해 사전지식이 조금 필요하다. 그는 서울시 공무원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는가 하면, 아주 깊은 믿음을 지닌 신앙인이다. 그리고 이번에 제6시집을 펴내는 중견시인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 가슴에 피어나는 꽃인 ‘시’가 얼마나 탐스럽겠는가.
우선 이 시집의 ‘자서’를 본다.
한 송이 해바라기이고 싶다
통 크게 웃어
세상을 환하게 하고 싶다
어둠에서 빛을 바라고
헝클어짐 속에서 길을,
눈물 속에서 환한 미소를
절망 속에서 밝은 꿈을 꾸고 싶다
-‘자서’ 중에서
자, 어떠한가. ‘한 송이 해바라기이고 싶다’라는 시 한 줄에서 우리는 그 가슴에 피어 있는 아주 탐스러운 꽃을 만날 수 있다. 해바라기처럼 키 크게 서서, 서울 여러 시민들에게 아름다운 웃음을 내보여 주는 공무원의 이미지가 금방 떠오른다. 이게 바로 봉사하는 공무원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세상을 환하게’ 만든다. 그런가 하면, 신앙인으로서의 해바라기는 더 이상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도대체 ‘신앙’이란 어떤 것인가? ‘어둠에서 빛을 바라는 것’이고, ‘헝클어짐 속에서 길을 찾는 것’이며, ‘눈물 속에서 환한 미소를 지니는 것’이고, ‘절망 속에서 밝은 꿈을 꾸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시인으로서의 ‘해바라기’는 어떠한가. 무엇보다도 그 꽃의 빛깔이 따뜻한 시심을 나타낸다. 나는 시심을 ‘심미적 감성’(審美的 感性)이라고 여긴다. 이는,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눈이요, 세상을 따뜻하게 껴안는 마음이다. 시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이보다 더 큰 덕목은 없다. 이를 가리켜서 공자는 ‘인’(仁)이라고 했다. 사실, 꼭 집어서 ‘인’을 내보이기는 어렵다. 그래서 공자는 ‘강의목눌(剛毅木訥)이면 근인(近仁)’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강’은 ‘강인함’이고 ‘의’는 ‘과감함’이며 ‘목’은 ‘질박함’이고 ‘눌’은 ‘언중함’이다. 다시 말해서 ‘강인하고 과감하며 질박하고 언중하면 인(어짊)에 가깝다.’라는 말이다.
2
제1부로 들어가서 첫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은 ‘달무리’이다. 이 작품은 어쩐지 앞의 ‘서시’에 비해 쓸쓸함이 느껴진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하루 중에도 밝은 대낮과 어두운 밤중이 있듯이, 우리의 삶에도 뜨거움이 있으면 차가움도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달무리’는 쓸쓸하면서도 그 안에 따뜻함이 숨겨져 있다. ‘달무리’에서 ‘무리’란 ‘대기 가운데 떠 있는 작은 물방울에 의한 빛의 굴절이나 반사 등으로, 달의 둘레에 때때로 생기는 백색의 둥근 테’를 말한다. 이게 또 ‘껴안는’ 모습이다. 참으로 놀랍다. 언제 어디에서나 ‘사랑하는 마음’을 놓지 않는다.
밤하늘에
외로운 그림자 하나
머언 기억 속의
이름 하나 걸머지고
길을 간다
-‘달무리’ 중에서
이 작품 중에서 ‘머언 기억 속의 이름 하나 걸머지고’라는 시구가 긴 여음을 끈다. ‘머언’이란 그냥 먼 게 아니라 ‘아주 멀다’는 뜻일 테고, ‘기억 속의 이름’은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나타내는 성싶다. 누구인가 말했다. ‘잊히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은 없다.’라고. 그런데 그 ‘이름 하나 걸머지고’ 길을 가고 있다니, 이는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더없이 따뜻하고 향기롭다. 이를 두고 나는 ‘달꽃’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다. 지상에서는 해바라기가 하늘을 바라다보고, 하늘에서는 달꽃이 지상을 내려다본다. 나는 지금 ‘달꽃 하나를 따서 어깨에 걸머지고 밤길을 걸어가고 있는’ 이춘원 시인을 눈앞에 떠올려 본다.
또 한 작품을 본다.
내가 사는 땅은 꿈꾸는 마을
종아리 하얀 미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아름다운 숲이 있는
자작나무 숲에
이월이 휑하니 지나가고
겨울의 꼬리를 물고 오는 바람이
상긋거리는 날
-‘자작나무 숲에서1’ 중에서
자작나무 숲에 3월이 오려고 한다. 그래서 ‘바람’은 2월의 꼬리를 물고 온다. 그 앞에 ‘휑하니’가 붙어 어느 틈에 봄의 문턱으로 와 있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여기의 ‘바람’은 ‘부는 바람’이기도 하려니와, ‘바라는 바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바람마저도 상긋거린다.
자작나무는, 그 껍질이 잘 벗겨진다. 그런데 그 나무껍질을 태울 때에 ‘자작자작’하는 소리를 내며 잘 탄다. 그 때문에 그 이름을 얻었다.
자작나무는 문학 속에 많이 등장하는 나무이다. 무엇보다 나무껍질이 하얀 빛깔로 깨끗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 하얀 자작나무의 껍질은 종이처럼 얇으며 가로로 벗겨진다. 벗겨진 이 나무껍질을 보면 바깥쪽은 흰 빛이지만 안쪽은 갈색을 띠고 있다. 다시 말해서 흰 껍질은 여러 겹의 얇은 종이를 붙여 놓은 듯이 차곡차곡 붙어 있다. 그래서 한 장 한 장이 매끄럽고 잘 벗겨진다. 그것에 종이 대신으로 불경을 새기거나 그림을 그렸다고도 전한다. 게다가 껍질에는 썩는 것을 막아주는 성분이 들어 있다고 한다. 즉, 이 나무의 껍질 속에는 ‘큐틴’(cutin)이라는 방부제가 다른 나무보다 많이 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잘 썩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곰팡이도 잘 피지 않는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사용하는 ‘카누’(canoe)는 가볍고도 튼튼한 나무의 틀 위에 자작나무 껍질을 바르고 나무의 진으로 방수를 했다고 한다. 그 지혜가 놀랍다. 자작나무는 고원지대의 산 중턱에 자생하여 숲을 이루는데 누구나 그 숲속으로 들어가면 시 한 수쯤은 저절로 나오는 시인이 되곤 한다.
아무튼 자작나무는 하얀 나무껍질 때문에 깨끗한 느낌을 준다. 그런 나무들이 쭉쭉 뻗어 있는 숲을 보면 여학생들이 여름 교복을 입고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연상되곤 한다. 그래서 이춘원 시인은 ‘종아리 하얀 미인들’이라고 노래했다. 그리고 또, 한겨울에 하얀 종아리를 내놓고 있으니 시인의 마음이 얼마나 안쓰러웠겠는가. 그래서 이춘원 시인의 시선은 쉽사리 자작나무 숲에서 떠날 수가 없었으리라. 이 시집에는 ‘자작나무 숲에서’라는 작품들이 3편이나 들어 있기 때문에 누구나 이를 금방 알 수 있다.
제2부로 들어서면 첫째 자리에 ‘물푸레나무’라는 작품이 앉아 있다.
물푸레나무 아래
푸른 바람이 분다
샘물에 담그면
푸레푸레 물푸레
푸른빛이 번진다는
물푸레나무
그대 가슴 가득
푸른 소망의 빛 여울질
물푸레 나뭇가지 하나 손에 들고
내려오는 길
휘파람소리가
잠자는 숲을 깨운다
-‘물푸레나무’ 전문
물푸레나무는, ‘물을 푸르게 만드는 나무’라고 하여 그 이름을 얻었다. 즉, 어린 가지를 꺾어서 껍질을 벗긴 다음, 그 껍질을 맑은 물이 담긴 하얀 종이컵에 살그머니 담그면 가을 하늘 같은 빛깔이 우러난다. 한문으로는 ‘수청목’(水靑木)이라고 쓴다. ‘물’(水)과 ‘푸르게’(靑) 및 ‘나무’(木)가 합하여져서 ‘물푸레나무’로 되었다고 생각해도 된다.
물푸레나무도 단독으로 있는 것보다 무리를 지어서 있는 것이 보기에 좋다. 물푸레나무 숲으로 가서 보면 쭉쭉 뻗어나간 줄기가 힘이 있다. 줄기는 회갈색이지만 백색의 수피가 가로로 얼룩무늬를 이루어서 무척이나 아름답다. 이 나무의 껍질은 훌륭한 약재가 된다. 한방에서는 그 이름을 ‘진피’(秦皮)라고 한다. ‘해열’ ‘진통’ ‘소염’ ‘수렴’(收斂) 등의 효능을 지니고 있어서 ‘류머티즘’ ‘통풍’(痛風) ‘기관지염’ ‘장염’ ‘설사’ ‘이질’ ‘대하증’ 등의 치료제로 쓰인다. 그리고 눈병을 고치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동의보감’에는 ‘두 눈에 핏발이 서고 부으면서 아픈 것을 비롯하여 바람을 맞으면 눈물이 계속 흐르는 것을 낮게 한다. 물을 우려내어서 눈을 씻으면 정기를 보호하고 눈을 밝게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물푸레나무의 목재는 물리적 성질이 좋기 때문에 악기나 운동기구의 재료로 쓰이며, 그 외에도 기구재나 도끼 자루 및 가구재 등으로 사용되어 왔다. 어디 그뿐인가. 눈이 많이 내리는 강원도 산골마을 등에서는 물푸레나무로 ‘설피’를 만들어 신었다고도 전한다.
물푸레나무의 가지로는, 옛날에 잘못을 저지른 아이의 종아리를 때리는 회초리로 많이 사용되었다. 내가 서당에 다니던 어린 시절, 우리들이 천자문을 제대로 외우지 못할 때에는 훈장님께서 용서 없이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셨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과거에 급제하여 금의환향을 할 때에 맨 먼저 자기 집 앞의 물푸레나무에게 큰절을 올렸다고 한다.
옛날, 북부 유럽에 ‘오딘’(Odin)이라는 신이 있었다. 유럽 사람들은 이 오딘이야말로 하늘의 해와 달을 떠오르게 하고 낮과 밤이 되는 것은 물론이며 이 세상의 모든 식물들을 자라게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오딘을 ‘만물의 아버지’라고 불렀으며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은 오딘뿐이라고 믿었다. 그 이유가 있다.
어느 날, 오딘이 바닷가를 거닐다가 물푸레나무를 보고 문득 사람을 만들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물푸레나무로 남자를 만들었다. 그래 놓고 보니까, 남자만으로는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오딘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마침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오리나무 한 그루가 서 있기에 그 나무로 여자를 만들었다.
물푸레나무로 만든 남자의 이름은 ‘아스크르’(Ascaeur)이고, 오리나무로 만든 여자 이름은 ‘엠블라’(Embla)라고 하였다. 이 ‘아스크르’와 ‘엠블라’가 바로 사람의 조상이라고 북부 유럽 사람들은 말한다.
물푸레나무는 참으로 긍정적인 나무이다. 그렇기에 그 아래에는 항상 ‘푸른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이 ‘희망의 나라로 가는 돛배’를 띄운다. 나 또한 ‘가자! 가자! 희망의 나라로!’라는 노래를 부르고 싶어진다. ‘푸른 바람’은, 바로 ‘푸른 소망’이다. 그러니 ‘산에 올랐다가 물푸레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산을 내려오노라면 절로 휘파람이 나올 법’도 하다.
앞의 ‘자서’에서 언급된 ‘해바라기’에 대한 작품이 제2부에 들어 있다.
내 모습이
해님을 닮아
빛을 잉태한 삶이 되고
언제나
밝은 미소로 벙글거릴 수 있는
그 즐거움보다
내가 웃어
그대 가슴에 기쁨이 되고
은빛 물결 이는
빛이 되는 것이
-‘해바라기’ 중에서
해바라기를 가리켜서 이춘원 시인은 ‘빛을 잉태한 삶’이라고 노래했다. 그렇고말고. 해바라기의 아름다움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 따뜻하고 밝음에 있다. 그 환한 웃음으로 하여 온통 주위가 따뜻해지니 이게 바로 커다란 베풂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춘원 시인은 ‘내가 웃어 그대 가슴에 기쁨이 되고’라고도 했다. 그런데 ‘은빛 물결 이는 빛’은 무엇을 뜻하는가? 아무래도 ‘내 모든 것을 내주는 빛’을 의미하는 성싶다. ‘은빛’이란, 모든 빛을 밖으로 내주기에 그렇다. 정말이지, 희생 없이는 진정한 사람을 전하기 어렵다.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그 큰 꽃송이를 내보이는 해바라기의 크나큰 고통이 나에게 전해지는 듯도 싶다.
해바라기의 원산지는 남미의 페루 및 멕시코를 비롯하여 아메리카의 평원지이다. 예로부터 그곳에서는 원주민들이 옥수수와 함께 가장 중요한 식용작물로 재배하여 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약 200여 년 전쯤에 서양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중국으로부터 전해졌다고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해바라기는 온대지방에 알맞은 식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열대와 아열대 및 냉대지방 등, 식물이 살고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지 해바라기를 재배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해바라기를 그냥 관상용으로 뜰에 심어서 즐기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1973년에 조생채유품종을 도입하여 영리재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어쩐 일이지, 지금은 해바라기의 재배를 보기 어렵게 되었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에는 ‘해바라기 전국 심기 운동’을 전개한 적도 있다. 그만큼 해바라기 씨의 기름은 가치가 높다. 특히 해바라기는 다른 식물이 자랄 수 없을 정도의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 또 그러한 땅에서 생산된 씨일수록 맛과 향 및 품질이 뛰어나다. 그러므로 버려진 땅에서의 해바라기 재배는 아주 긍정적이다. 게다가 농약을 쓰지 않아도 해바라기는 별 탈 없이 잘 자란다.
해바라기는 국화과에 속하는 한해살이풀이다. 줄기는 4미터까지 자란다. 그러나 보통은 2~3미터 정도이다. 줄기에는 굵고 거친 털이 나 있다. 가히 남성적이다. 꽃은 그 지름이 30센티미터 이상이 된다. 둘레에 있는 꽃은 꽃잎이 길고 수술이 없으며 암꽃만 있다. 가운데 꽃은 꽃잎이 없으며 암꽃과 수꽃이 한 곳에 있는 양성화이다. 하지만 타가수분을 한다. 사실은, 해바라기의 그 크고 둥근 ‘한 송이 꽃’은, 수많은 조그만 꽃들이 모여서 이루어져 있다.
해바라기와 마찬가지로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활짝 웃는 꽃이 있다. 그 이름은 바로 ‘참나리’이다. 이춘원 시인의 작품 ‘참나리’를 본다.
달섬에
달이 떠난 날
눈물이
뜨락에 흥건하다
사월의 모란은
그녀를 안고 떠난 뒤
진초록 치마저고리
저리 슬픈데
너만의 아픔 아니다
가슴에 흑점으로 박힌
흔적을 드러내며
웃고 있다
나는, 참 슬퍼서 웃는다
-‘참나리’ 전문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참나리’를 보면 기뻐서 웃는다고 여긴다. 그런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이춘원 시인은 ‘아픔’으로 이미지를 나타낸다. 그 이유가 있다. 모란이 ‘그녀를 안고 떠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참나리의 아픔’은 ‘가슴에 박힌 흑점’으로 나타나 있다.
‘참나리’는 여름이 되면, 줄기 위에 작은 가지가 갈라져서 그 끝에 주황색 꽃이 핀다. 여섯 개의 꽃덮이조각과 여섯 개의 수술, 그리고 한 개의 암술이 있다. 밖으로 길게 나와 있는 수술 끝에 달린 꽃밥이 짙은 적갈색을 띠고 있는 모습은, 귀엽기 이를 데 없다. 꽃이 지고 나면 협과(莢果)가 달리지만, 번식은 비늘줄기와 살눈(珠芽)이 맡는다. 아마도 이춘원 시인이 말하는 ‘흑점’이란 이 ‘살눈’, 즉 ‘주아’를 가리키는 성싶다.
참나리의 비늘줄기를 한방에서는 ‘권단’(卷丹) 또는 ‘중상’(重箱)이라고 부르며, 강장이나 진해 및 거담 등의 효능이 있어서 ‘신체허약증’ ‘폐결핵’ ‘산후의 회복증진’ ‘마음이 두근거리는 증세’ 등을 다스리는 데 쓰인다.
참나리는 줄기와 잎 사이, 즉 잎겨드랑이에 달리는 살눈(珠芽)이 퍽이나 인상적이다. 어찌 보면, 얼굴에 난 검은사마귀와 같고, 또 어찌 보면 검은콩이 달려 있는 듯도 하다.
세상의 일이란 참으로 가늠하기 어렵다. ‘슬퍼서 아름답기’도 하려니와 ‘슬퍼서 웃기’도 한다. 슬픔 안에 순수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제3부로 가면 작품 ‘풀무불 앞에서’가 해바라기의 이미지를 다시 따른다.
왜 그리도
힘들게 하는지
너무도 뜨거워 몸부림치는
아우성은
허무하게 돌아오는 메아리
-‘풀무불 앞에서’ 중에서
이 작품은 벌겋게 닳아 있는 ‘쇳물’을 연상하게 한다. 얼마나 뜨거울까. 그 ‘뜨거운 몸부림’이야말로 ‘개화’의 과정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한다. 그렇다. 펄펄 끓는 쇳물의 개화! 이러한 개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귀한 결실을 얻기 힘들다. 다른 말로는 이를 ‘연단’(鍊鍛) 또는 ‘단련’이라고 한다. 쇠붙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강하게 만들기 위하여 ‘고통으로 달구어서 두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해바라기’의 꽃은 눈길을 위로 주어야만 볼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아래로 내려다보기도 해야 한다. 낮은 자리에 있는 목숨일수록 더욱 따뜻하게 감싸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마침내 이춘원 시인의 눈길이 가난한 ‘달팽이’에게 가 닿았다.
비 오는 날
거리에 나서 보면
외로운 사람들이 지천이다
나 하나만의 집을 머리에 이고
추적추적 내리는 빗길을 뚫고
어디를 가는지
함께 할 공간 하나 만들지 못하고
나만을 고집하다
흔들리다 흔들리다 뒤집히고 말
바람의 집 한 채 들고 가는
걸음이 위태하다
-‘달팽이’ 중에서
이 작품을 보면, ‘비가 내리는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이춘원 시인은 ‘달팽이’를 떠올렸을 성싶다. 아니다. ‘달팽이’를 보고 ‘비오는 거리의 사람들’을 떠올렸을 듯싶다. 어쨌든 ‘달팽이’는 집을 소중히 여긴다. 그렇기에 집을 ‘머리에 이고’ 다니는 게 아니겠는가. 그런데 사람도 ‘집’을 아주 소중하게 여긴다. 이 작품에서는, 그게 ‘바람의 집’이다. 그리고 그 집을 ‘남루하다’라고 여긴다. 이 집은, 외적으로 ‘우리가 사는 집’이기도 하려니와, 내적으로 ‘나만을 고집하는 아집’일 수도 있다. 집을 머리에 이고 다니는 사람을 그려 보면, 절로 웃음이 난다.
제4부로 가면 어릴 적의 일을 회상하는 작품들이 눈에 띈다.
동글동글한 동무들
푸르스름한 빛을 벗어 가는 보리
두 손으로 비비고, 후후후 불어
한 입에 털어 넣고 보니
고 녀석 입이 깜둥이가 되었네요.
-‘보리 서리’ 중에서
지금이야 이런 일을 하면 절대로 안 되지만, 예전에는 아이들이 곧잘 ‘서리’를 하곤 했다. ‘서리’란, 아이들이 ‘떼를 지어서 주인 몰래 농작물 등을 훔쳐 먹는 장난’을 말한다. 그렇기에 ‘수박’을 훔쳐 먹으면 ‘수박 서리’라고 하였으며 ‘고구마’를 훔쳐 먹으면 ‘고구마 서리’라고 하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보리 서리’는 보리를 훔쳐 먹는 일이다. 보리는 그냥 먹을 수는 없으니, 불길에 살짝 익혀서 먹는다. 그러니 그 입에 검댕을 묻히게 된다. 이는, 먹을 게 귀하였던 시절의 서러운 이야기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쌀밥을 먹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다가 쌀밥을 먹게 되면 그 밥의 양을 늘리기 위에 감자나 고구마 등을 넣어 먹었다. 지금 이런 밥을 먹게 되면 ‘별미’라고 하겠지만. 좋아도 한두 번이지 이런 밥을 계속 먹게 되면 얼마 안 지나서 물리게 된다. 그런 일도 지나고 보니, 그리워지는 게 사람의 마음인가 보다. 그래서 이춘원 시인은 ‘고구마밥’을 노래한다.
하얀 쌀밥에 묻혀 있는
노란 고구마의 속살이 보인다
동글동글한 형체를 조각내어
작은 쌀알 속에 푹 파묻으면,
자신의 존재를 삭혀
달콤한 고구마밥이 되어 있는
달콤한 인생은
고구마밥이 되는 것
-‘고구마밥1’ 중에서
이춘원 시인은 ‘고구마로 인해 그 밥이 달콤해진다’라는 사실을 ‘희생’이라고 말하고 있다. 밥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가장 중요하다.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살기 위해 먹는지, 먹기 위해 사는지’를 구분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니 그 밥을 달콤하게 만들면 그 인생이 달콤해진다. 정말이지, 나이가 들고 나니까 내 주변에는 맛있는 음식으로 낙을 삼는 사람들도 더러 보인다. 예전에 나는 감자밥을 많이 먹었는데, 이춘원 시인은 고구마밥을 많이 먹었는가 보다. ‘고구마밥’이란 제목의 작품이 3편이나 눈에 띈다. 그 부제는 첫 편이 ‘인생을 달콤하게 사는 법’이고 둘째 편은 ‘부부’이며 셋째 편은 ‘친구, 흰쌀과 고구마 같은’으로 되어 있다.
해바라기가 피는 계절에는 또 ‘매미’가 운다. 그에 대한 작품을 본다.
붉은 동백꽃을 송두리째 삼키고
고단한 섬사람들의 가슴에
울컥울컥 피를 토하게 하는
매미가 울고 있었다.
-‘지심도에서 우는 매미’ 중에서
‘지심도’는 거제도 인근에 있는 섬이란다. 동백나무가 많아서 ‘동백섬’이라고도 부른다는데, 연인들이 많이 오기 때문에 ‘연인들의 섬’이라는 별명도 지니고 있단다. 여기에서 말하는 ‘매미’는 ‘나무에 붙어서 우는 매미’일 뿐만 아니라, ‘중형급 태풍의 이름인 매미’이기도 하다. 즉, 2003년 9월 6일에 발생하여 9월 13일 소멸한 중형급 태풍 이름이다. 어찌 태풍뿐이겠는가. 여름에는 홍수로 하여 재산 피해뿐만 아니라 인명 피해까지 입는다.
물이
길을 벗어나 제 뜻대로 흐르면
세상은 황톳빛 소용돌이에 휘둘려
아우성치는 아픔이 된다.
-‘홍수’ 중에서
물이 왜 제 길을 벗어나게 되는가. 그것은 모두 사람의 욕심 때문이다. 그렇기에 홍수는 천재지변이 아니라 사람에 의한 재해라고 해야 옳다. 여기에서 문득 ‘상선약수 수선리만물부쟁 처중인지소오 고기어도’(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라는, 노자의 글이 떠오른다. 이는,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모든 것에게 잘 보탬이 되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뭇 사람이 꺼리는 곳에 머무른다. 그 까닭에 길과 거의 같다.’라는 뜻이다. ‘다투지 않는 물’인데, 어찌 ‘뭇 생명들에게 아픔’을 주겠는가. 그러니 이런 생태를 파괴하는 인간이 그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홍수’로 인한 아픔은 우리가 우리 눈을 찌른 결과이다.
이제는 맨 마지막으로 되어 있는 제5부로 들어간다. 여기에서는 청각적 이미지가 나타난다. 여러 작품들 중 ‘공명’을 본다.
비어야 나는 것을
채우고 채우고 나서야
맑은 소리 기다렸구나
가슴이 비었을 때
진실의 울림이 있는 것
-‘공명’ 중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악기라는 것들은 그 모두 ‘빔’을 지니고 있다. 그 ‘빔’이 맑은 소리를 만들어 낸다. 그렇듯 우리도 가슴을 비우면 맑은 목소리를 지닐 수 있을 게다. 그런데 ‘빔’의 미학은 악기에서만 만나는 게 아니다. 노자는 다음과 같이 ‘빔’을 노래했다.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으로 향한다. 그 빔이 마땅하여 수레의 쓰임이 있다. 찰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든다. 그 빔이 마땅하여 그릇의 쓰임이 있다. 지게문과 들창을 뚫어서 방을 만든다. 그 빔이 마땅하여 그 방의 쓰임이 있다. 그 까닭에, 있음은 보탬을 삼으려고 하고 없음은 쓰임을 삼으려고 한다.(三十輻共一轂穀. 當其無 有車之用. 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삼십폭공일곡. 당기무 유거지용. 연식이위기 당기무 유기지용. 착호유이위실. 당기무 유실지용. 고유지이위리 무지이위용)’
이춘원 시인은 여러 악기 중에서도 ‘부는 악기’에 대해서 좀더 큰 관심이 있어 보인다. 그 중에서 한 작품을 만나 본다.
네 목소리에는 고향이 묻어 있다
작은 몸짓에
떨리는 그 여운의 깊이는
네 울음이 아니요
네 노래도 아니다
살아 있는 네 향(香)이다
-‘향피리의 노래’ 중에서
이 작품에는 향피리에 대한 설명이 다음과 같이 붙어 있다. ‘향(鄕)피리는 세(細)피리 및 당(唐)피리와 전통음악에 사용되는 피리의 한 종류이고 지공(指孔)이 여덟이다. 향토적인 음색을 지닌 피리이다.’라고. 그렇기에 이춘원 시인은 ‘고향이 묻어 있다.’라고 했다. 그런데 그 피리 소리는 ‘울음’ 도 아니고 ‘노래’도 아니란다. 그것은 바로 ‘살아 있는 피리의 향’이란다. 참으로 놀랍다. 청각적 감각을 훌쩍 뛰어넘어 후각적 감각에 이르고 있다. 시인의 감성이란 이렇게 예민한 법이다. 그러니 그 마음이 얼마나 여리겠는가. 남의 아픔을 함께 아파할 수밖에 없는 게 바로 시인의 마음이다. 이를 ‘측은지심’이라고 한다.
3.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이란 1회성이다. 그러므로 아름답게 살되, 뜨겁게 사는 게 좋을 것 같다. 저 뜨거운 태양 볕 아래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해바라기처럼. 시인은 뜨거운 시를 창작한다. 어두운 밤을 하얗게 밝히며 시인의 길을 간다. 그 삶이 참으로 뜨겁다. 그러나 시를 쓴다고 하여 시인이 아니다. 시인이기에 시를 쓰는 거다. 그런데 글로 써야만 시가 되는 게 아니다. 몸짓으로도 시를 쓴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춤’이라고 한다. 춤에 대한 시 한 편을 본다.
빙글빙글 도는 너는
이 땅에 떠도는 한 맺힌 혼
아우르는 거룩한 몸짓
가벼워지는 걸음걸이에
가슴에 담긴 한이 녹아버리고
짓눌렀던 짐 하나 벗어짐이라
-‘살풀이춤’ 중에서
다 알고 있듯이, ‘살풀이’는 ‘흉살(凶煞)을 미리 피하도록 한다 하여 하는 굿’을 말한다. 그리고 ‘흉살’이란 ‘불길한 운수나 흉한 귀신’을 이른다. 또, 살풀이굿을 할 때에 추는 춤이 ‘살풀이춤’이다. 다시 말해서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해의 나쁜 운을 풀기 위해 굿판을 벌여 왔다. 그 때 무당이 즉흥적으로 나쁜 기운을 풀기 위해 펼친 춤을 ‘살풀이춤’이라고 한다. ‘도살풀이춤’이나 ‘허튼춤’ 등이 모두 같은 이름이다. 원래는 ‘수건춤’ ‘산조춤’ ‘즉흥춤’ 등으로 불리었으나, 춤꾼인 한성준 이라는 사람이 1903년에 극장에서 공연을 하면서 ‘살풀이’란 말을 시용한 데서부터 ‘살풀이’란 말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춤꾼은, 고운 쪽머리에 비녀를 꽂고 백색의 치마저고리를 입으며, 하얀 수건을 들고 살풀이 곡조에 맞추어서 춤을 춘다. 지금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춤은, 경기지방과 호남지방에서 계승된 춤으로 알려져 있다.이 춤은 예술적 가치가 높은 우리 고전무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도 이 춤을 관망한 적이 있는데, 하늘을 향하여 날을 듯이 아주 열정적으로 춘다. 그러고 보면, 이를 가리켜서 ‘해바라기의 춤’이라고 하여도 어울릴 듯싶다. ‘빙글빙글 돈다.’가 그렇고 ‘거룩한 몸짓’이 그러하며 ‘가슴에 담긴 한’이 또한 그렇다. 그 모두, 해바라기가 지닌 이미지들이다. 특히 그 한이 ‘까맣게’ 익어서 떨어진다.
이 시집을 음미하는 데 있어서 ‘자서’가 아주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그와 맥을 같게 하는 작품들을 골라서 징검다리처럼 디디며 여기까지 왔다. 끝으로 역시 이 시집은, 신앙시집이라고 해도 되겠구나 하는 느낌이 아주 강하게 들었다. 외적으로 그 냄새를 풍기지는 않았으나, 내재적인 그 색체가 그렇다는 말이다. 나는, 신앙이나 시까지도 삶의 한 방편에 속한다고 여긴다. 그것들이 삶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한 마디로 사람은, 무릇 그 삶이 아름다워야 한다. 이춘원 시인의 삶은 아름답다. 그러나 ‘아름다운 삶’이 이런 방편의 연속선 위에 있느니만큼 시 쓰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런 뜻에서 이 시집의 결실을 축하해 마지않는다. 앞으로 이춘원 시인의 시 세계가 더욱 아름답게 펼쳐지기를 마음 깊이 바라고 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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