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삶과 사람, 그 아름다운 만남

시조시인 2011. 4. 10. 19:38

 

              삶과 사람, 그 아름다운 만남

 

                                             김재황(시인, 상황문학문인회 회장)

 

1.

 

 이 세상의 산과 들에는 갖가지 꽃들이 피어나기에 아름답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는 여러 시인들이 살고 있기에 따뜻하다. 그런데 시인은 결코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하늘로부터 중대한 사명을 지니고 태어난다. 한마디로 말해서 천부적天賦的이다. 시인은 시를 쓰지 않고는 이 세상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슬픔이라든가 기쁨이라든가 아픔 따위에 대한 느낌이 너무나 커서 주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느낌을 가리켜서 심미적 감수성審美的 感受性,(Aesthetic Sensitivity)이라고 한다. 이는 곧 ‘너그러움’(仁)이다. 그렇다면, 이 ‘너그러움’을 어떻게 다시 풀이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뜻을 밝히고 있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함)이란 말에 동감한다.
 그러므로 시인은 ‘인’(仁)한 사람이며 누구보다도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렇듯 사람을 꽃처럼 사랑할 수 있음은 그 마음이 순수하기에 그렇다. 맑은 마음에는 저 먼 하늘까지 환하게 비치게 마련이다. 어느 때에는 그 하늘이 꽃 한 송이를 던지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그 하늘이 슬픈 놀빛을 뿌리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시인의 마음은 크게 출렁거리며 시를 빚는다.
 도이 김재권 시인의 시집 ‘그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에 실릴 작품들을 읽어 보면 ‘사람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이 시집은 모두 4부로 나누어져 있다. 그 소제목은, 제1부가 ‘여행길’이고 제2부는 ‘그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이며 제3부는 ‘순애’純愛이고 제4부는 ‘동자승의 미소’로 되어 있다. 그러면 지금부터 각 부에 실려 있는 작품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2.

 

 김재권 시인은, 제1부의 ‘여행길’에서 ‘산과 강과 바다’ 등을 만나게 되지만, 그 안에서 눈길은 사람과 사람의 체취에 더욱 짙게 머문다. 그렇기에 오래 남는 게 있다. 그 ‘만남’이 더없이 아름답고 무엇보다 소중하다.


가는 데마다
올 적마다
그리움 한 점 두고 오면
그 많은 그리움은
다 어쩌나

- 작품 ‘여행길’ 중에서


 ‘회자정리’會者定離란 말이 있다. 이는,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헤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어찌 그게 사람의 경우뿐이겠는가. ‘산야’의 아름다운 모습 또한, 만남이 있으면 반드시 헤어짐이 있다. 그리고 헤어짐에는 ‘그리움’이 따른다. 물론, 그 그리움의 크기는 ‘만남의 감동’만큼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는 데마다’ 그리움을 남기게 되고, 그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찾아가게 된다. 그런데 ‘갈 적마다’ 그리움은 더욱 쌓인다. 그러니 ‘그 많은 그리움을 다 어쩌나!’하는 자탄自歎이 절로 나오게 된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행을 왜 하는가? 지리를 익히기 위해서? 아니면, 아름다운 경치를 그저 즐기려고? 그도 아니라면, 어떤 역사적 사실을 현장에서 확인하기 위해? 모두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김재권 시인은 ‘그리움을 쌓기 위해’ 여행길에 오른다. 그렇기에 그 걸음이 물 흐르는 듯하다.


지금 나주에 가면 하얀 배꽃과
거기 영산포 영산강에는
샛노란 유채꽃이 한창일 거야
미치겠어 가고 싶어서

- 작품 ‘지금 나주에 가면’ 중에서


 하얀 배꽃과 노란 유채꽃이 피어 있는 ‘지금’은 바로 ‘봄’이다. 이렇듯 나주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워하고 있음은, 김재권 시인이 어느 봄에 이미 그곳으로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음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나주’는 벌써 ‘그리움을 쌓은 곳’이다. 이쯤의 ‘그리움’이라면 여러 번의 여행이 이어졌을 성싶다.
 왜 안 그렇겠는가? 배꽃의 아름다움은 참으로 눈물겹다. 조선조 선조 때에 예조정랑을 지내다가 동서 양당의 싸움에 마음이 아파서 명산을 찾아다니며 여행을 마친 임제林悌의 시 중에, ‘달빛 밴 배꽃 안고 눈물짓는다’라는 구절이 있다. 배꽃은 달빛과 함께 서러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히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흰빛을 무척이나 좋아한 백의민족으로서 흰 꽃에는 유별나게 애정을 쏟았다.
 또 노란 유채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들판 가득히 유채꽃이 피어날 때면 마치 황금물결이 일렁이는 듯하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서 서 있으면 그 황금빛 꽃물이 몸과 마음에 물들 것만 같다. 이럴 때에는 아이든지 어른이든지 모두 꿈을 꾸게 된다. 그렇기에 김재권 시인은 ‘미치겠어 가고 싶어서’라고 외친다. 그러나 생활이 발목을 잡아서 훌쩍 여행을 떠날 수가 없으니 어쩌랴! 하는 수 없이, 김재권 시인은 ‘꿈에서라도 나는 가야 하리.’라고 스스로를 다독거린다.
 제2부는 본격적인 ‘사람 사랑’의 시들로 묶여있다. 누구에게나 사랑하는 사람은 있을 터이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어머니’만큼 그리운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겠는가. 이 시는 아들이 어머니에게 전하는 이야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어머니, 그거 기억나세요?
여름에 가는 회암사 풍경 말이에요
절에 가는 길가에는
아담한 원두막이 있는데
아버지는 늘 그곳에서
싱그러운 참외를
참 많이도 사주셨지요
그래서 회암사 가는 여름이면
먼저 참외 생각이 달게 나고는 했지요

- 작품 ‘어머니’ 중에서


 이 작품은 마치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하다. 얼마나 아름답고 정겨운 풍경인가? 어머니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절(寺)로 향하는 그 어린 마음이 마치 풍선처럼 한껏 부풀어 있다. 그 길은 결코 가까운 길은 아니었을 성싶다. 그래서 길을 걷다가 다리도 쉴 겸, 아버지는 원두막에 들러서 잘 익은 참외를 사 주셨을 게다. 때는 여름이니 많은 땀을 흘렸을 터이고, 원두막 밑의 시원한 그늘에 앉아서 먹는 참외 맛은 그야말로 꿀맛이었을 게 분명하다.
 그 향기가 지금 내 코로 스미는 듯도 하다. 이 시에서 ‘참외 생각이 달게 난다’라는 구절이 그 모든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다. 절창絶唱이다.


이 여름이 지나면
남도 거기 어디쯤서 본
산나리꽃도
간지럼나무라 불리는 백일홍
대숲 새 느껴보던 댓잎의 향도
모다 잊히겠지요?

- 작품 ‘매혹’魅惑 중에서


 이 작품에서 만나는 ‘산나리꽃’이라든지 ‘백일홍’나무라든지 ‘대숲’ 등은 예사 식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인가 이 식물들과 맞닿아 있으리라고 여겨진다. 또한, 나는 나대로 이 식물들을 만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이 식물들 앞으로 한 발짝 더 다가가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산나리’는, 어느 한 식물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나라 나리속 식물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다. 우리나라에는 나리속의 식물이 많다. 보통 사람들은 그 식별이 쉽지 않다. 구별하는 방법을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잎을 보았을 때, 돌려났는가(輪生) 어긋났는가(互生) 등을 살핀다. 잎이 돌려난 것 중에서 그 꽃이 하늘을 향하고 있으면 ‘하늘말나리’이다. 그리고 꽃이 옆을 향하고 있으면, 그 잎이 1층인가 2층인가 등을 다시 살핀다. 1층이면 ‘말나리’이고, 2층이나 3층으로 되어 있으면 ‘섬말나리’이다.
 또, 잎이 어긋난 것 중에서 꽃이 하늘을 향하고 있을 때, 꽃대와 꽃덮이(花被)에 털이 있는지 없는지 등을 살핀다. 털이 있으면 ‘날개하늘나리’이고, 털이 없으면 ‘하늘나리’이다. 그리고 꽃이 옆을 향하고 있는 것 중에서는, 그 꽃의 빛깔이 홍자색인지 황적색인지 등을 다시 살핀다. 홍자색 꽃인 경우, 꽃덮이에 짙은 반점이 있고 꿀샘에 털이 없으면 ‘솔나리’이다. 그리고 꽃덮이에 반점이 없거나 약간 있으며 꿀샘에 털이 있으면 ‘큰솔나리’이다. 그 반면에 황적색 꽃인 경우, 살눈(珠芽)이 있으면 ‘참나리’이다. 그리고 살눈이 없을 경우, 식물체에 털이 많으면 ‘털중나리’이다. 그러나 식물체에 털이 없고 꽃잎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약간 짧게 4센티미터 정도이면 ‘땅나리’이고, 털이 약간 있든지 없으며 꽃잎 길이가 약간 길게 7센티미터 정도이면 ‘중나리’이다.
 어찌 되었든지 ‘산나리꽃’이라면 아름다운 여인의 심상을 지닌다.
 그 다음의 ‘간지럼나무라고 불리는 백일홍’이란, ‘배롱나무’를 가리킨다. 배롱나무는 나무의 모양이 일정하지는 않지만 수관樹冠이 옆으로 퍼지기 때문에 운치가 있으며, 줄기가 황갈색이지만 껍질이 벗겨진 자리는 희고 매끄러워서 아름다운 느낌을 준다. 일본에서는 이 나무의 줄기 껍질이 너무 반질반질하고 미끄럽게 보여서 ‘원숭이도 미끄러지는 나무’라는 표현을 쓴다. 또, 이 나무를 ‘파양수’怕痒樹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나무껍질을 손톱으로 긁어 주면 간지럼을 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어떤 사람은 이 배롱나무를 ‘자미화’紫薇花라고도 부른다. 보랏빛 장미를 닮았다는 말인 듯하다. 그러나 가장 많이 알려지기는 ‘나무 백일홍’이란 이름이다. 그 심상이 여성적이다.
 대숲이라고 하면, 나는 ‘오죽’烏竹이 먼저 생각난다. 그리고 ‘오죽’이라고 하면 ‘오죽헌’烏竹軒이 떠오른다. 이는,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에 있는 이율곡李栗谷 선생의 댁이다. 뜰 안에 오죽이 있어서 그 이름을 얻었다. 오죽은 키가 크면 20미터까지 자라고, 그 줄기가 처음에는 녹색이지만 다음해부터는 검게 된다. 바소꼴披針形의 잎이 가지 끝에 한 개에서 다섯 개까지 달린다. 산들바람이 불어오면 그 풋풋한 향기가 코로 스민다. 우리나라에 있는 대나무 종류는 죽순대孟宗竹, 솜대, 오죽, 반죽班竹, 산죽, 제주조릿대, 섬대, 고려조릿대, 갓대, 해장죽, 왕대, 완도산죽 등이 있다. 이 또한 여성적이다.
 제3부는 소제목이 ‘순애’純愛로 되어 있다. ‘순애’라는 이 여인은 누구일까? 아마도 김재권 시인의 반려자伴侶者일 듯싶다. 이를테면,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세상에서 부부애는 보기에 가장 아름답다. 그 뜨거운 사랑이 나에게까지 전해져 온다. 참으로 뜨겁다.


천 년 동안 연모한 당신입니다
현세에서야 연이 닿았습니다

-중략-

또다시 천 년이 흐른다 해도
부부의 연이 되고 싶습니다

- 작품 ‘순애’純愛 중에서


 그 지극함이 하늘에 닿았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천 년 동안의 연모’가 내 앞에 한 송이의 연꽃으로 피어나서 향기를 풍긴다. ‘그렇듯 긴 연모가 아니고는 내 앞에서 사랑을 말하지 마라!’ 김재권 시인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그런데 거기에서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또다시 천 년이 흐른다 해도 부부의 연을 맺고 싶다니, 그러면 ‘2천 년의 사랑’을 이루겠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어찌 성에 차겠는가. 여기에서 말하는 ‘천 년’이나 ‘2천 년’은 상징적인 것일 뿐, 김재권 시인은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부부의 인연이란 기막히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이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게다가 2천 년의 시공을 뛰어넘어서 만날 수 있는 확률은? 갑자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져 온다. 아무튼, 부부의 연은 소중하기 이를 데 없다.


순애는 이렇게 말했지요
“아, 바람개비 같아요.”
바람개비 된 하얀 꽃이
자꾸만 순애 손에서 떨어집디다

- 작품 ‘유월 애수’六月 哀愁 중에서


 맑은 꽃잎 하나를 따다가 손에다 쥐여 주었을 때, ‘바람개비 같다’라고 말했다.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꽃’이 아니라, ‘바람개비’라니? 다 알다시피, ‘바람개비’는 ‘빳빳한 종이를 여러 갈래로 자르고 그 귀를 구부려서 한데 모은 곳에 철사 같은 것을 꿴 후에 바람이 불면 돌게 만든 장난감’을 말한다. 말하자면, 이는 바람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내가 말하는 ‘바람’은 그냥 부는 바람이 아니라 ‘희망’이다. 그런데 ‘바람개비 같다는 그 꽃’이 자꾸만 손에서 떨어진다. 안타깝다. ‘희망’을 손에 쥐여 주었건만, 그 ‘희망’을 제대로 잡지 못하다니---. 그 이유가 있다. 이 시의 다음 연을 읽으면 누구나 그 까닭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제4부를 보면, 종교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김재권 시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자의 길을 가려고 했으나, 독실한 불교신자이신 부모님의 강력한 반대로 포기하고 부모님의 뜻에 따라 절에 다녔으며, 부친이 돌아가신 후에는 부인과 함께 기독교를 다시 찾게 되었고, 그 후 천주교 신자들이 된 딸들의 권유로 지금은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단다. 그래서 여기의 시들에서는 불교나 기독교 및 천주교의 색깔을 골고루 엿볼 수 있다.


그때에 어디선가 법당에 날아든
산모기 한 마리... 아, 아
차마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 작품 ‘산사의 가을풍경’ 중에서


 모름지기 시인이라면 하찮은 목숨까지 사랑해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목숨이 소중하다. 하물며 그 곳은 법당이 아닌가? 아무리 모기가 사람의 피를 빨려고 덤벼드는 ‘못된 놈’이라고 하여도,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지녀야 한다.
 인도의 수행자들은 우기 동안 여행에 나서지 않는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병이 많이 생길 뿐만 아니라 해충도 많아진다. 그런데 벌레나 작은 동물들이 길로 많이 나오기 때문에, 자칫하다가는 무의식중에 그 목숨들을 해칠 수도 있다는 게 더욱 큰 문제다. 그래서 그들은 그 기간 동안에는 밖으로 나다니지 않고 한 곳에 머물면서 명상을 하게 된다. 이를 범어로 ‘vassa'라고 하는데, 한역으로는 ‘우안거’雨安居이다. 이 ‘우안거’의 바탕에는 살생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짙게 깔려 있다.


시린 삶에 여위다 아무렇게 떨어져
엇붙은 모습을 한 마른 가지가지가
십자가의 형상으로 겹쳐있는 것이다

산길을 오름은 산사에 가려 함인데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나뭇가지마다
십자모양의 형틀로 느껴지고 있음은

- 작품 ‘묵시’黙示 중에서


 이 작품은 모두 5연으로 되어 있다. 앞에 예로 든 것은, 그 중에서 2연과 3연이다. 여기에는 묘한 ‘뉘앙스’nuance가 담겨 있다. 마른 나뭇가지가 떨어져서 ‘십자가의 형상’으로 겹쳐 있다. 이런 모습이야, 산을 오르다가 보면 언제 어디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는 그게 모두 예사롭지가 않다. 왜 저 나뭇가지는 죽어서까지 십자가의 모양을 내보이고 있는 걸까? 나는 내 나름대로 십자가를 ‘위로는 하늘을 바라보고, 옆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으로 가슴에 새기고 있다. 김재권 시인도 한때는 기독교의 믿음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성싶다.
 그런데 문제는, 하필이면 산사山寺로 갈 때에 나뭇가지가 십자가의 형상을 내보인다는 데에 있다. 게다가 우리가 껴안은 ‘믿음의 십자가’가 아니라 ‘형틀의 십자가’로 느껴지고 있음은 무슨 이유인가?

 ‘도둑이 제 발 저리다’라는 속담이 있다. 아마도 종교를 지닌 사람 중에는 더러 이런 생각을 해 본 사람이 있었을 게다. 그러나 이제는 종교도 너그러워질 때가 되었다. 내 종교가 귀하다면 남의 종교도 귀함을 알아야 한다. 더 나아가서 남의 종교도 내 이웃으로 껴안을 수는 없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 그런 일에는 누구보다도 시인들이 앞장을 서야 한다.

 

3.

 

 나는 시작詩作이 도道를 닦는 경우와 같다고 늘 생각한다. 시는 아름다움의 추구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그 영혼을 곱게 가꾸는 일에 게으름을 피우면 안 된다. 시인은 반드시 그 삶과 작품에 있어서 일치를 보여야 한다.
 또한, 문단에 등단하여 시인의 칭호를 받게 되는 그 순간, 시인은 열심히 시를 써서 발표해야 할 의무를 지니게 된다. 시인에게는 휴식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시를 쓰는 일이 있을 뿐이다. 그게 바로 시인의 ‘밥값’이다.
 시인은 늘 낮은 곳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또 그들에게 따뜻한 불빛이 되어 주어야 한다. 시인으로 등단하고서도 시를 게을리 쓴다면, 그것은 독자를 기만하는 행위이다.
 무엇보다도 시인은 현재진행형現在進行形이어야 한다. 과거에 아무리 좋은 시를 내놓았다고 하더라도, 지금 시 쓰는 일을 그만두었다면 그는 이미 시인이 아니다.
 그렇더라도 명심할 게 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시인은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 그 바라보는 눈빛이 아름답고, 말하는 목소리가 부드러우며, 그 걸음걸이는 춤을 추듯 흘러가야 한다. 말하자면, 시인이 쓴 모든 시는 아름다운 삶을 걸어가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절대로 시는 삶의 목표가 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시는, 시인이 아름다운 삶의 길을 걸어갈 때에 짚는 ‘지팡이’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시를 결코 자랑해서는 안 된다.
 김재권 시인을 과묵한 사람으로 나는 알고 있다. 말이 적고 행동으로 모든 일을 솔선수범한다. 몇 년 동안 내가 지켜본 결론이다. 작품 해설은 함부로 할 수가 없다. 시인의 삶을 알지 못하고는 올바른 해설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재권 시인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작품들이 그 삶을 진솔하게 노래하고 있다. 이와 같이 작품과 삶이 다 같이 정답게 다가옴은 큰 기쁨이다. 앞으로 김재권 시인의 더욱 빛나는 작품과 삶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