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눈을 감고 있어도 가을 산은 뜨겁다

시조시인 2011. 10. 22. 23:17

                               눈을 감고 있어도 가을산은 뜨겁다

 

                                                                                                김 재 황(상황문학문인회 회장)

 

(1)

이 세상에는 갖가지 꽃들이 피어나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 그리고 사람들 중에는 시인들이 있어서 우리 마음을 아름답게 만든다. 그렇다면 시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나는, 한 마디로 심미적 감수성(審美的 感受性, aesthetic sensitivity)이 풍부한 사람을 가리켜서 시인이라고 부른다. 이는, 바로 예술적 감수성이다. 아마도 공자는 이를 일컬어서 어짊’()이라고 말했을 성싶다. 시인이 지녀야 할 가장 큰 성품도 이 어짊이라고 나는 믿는다.

예나 이제나 시인은 선비이다. 어떤 사람이 맹자에게 선비는 무슨 일을 합니까?”라고 물었다. 맹자는, “뜻을 높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뜻을 높인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하고 다시 물었다. 그 질문에 맹자는, ‘어짊()을 몸에 두르고 옳음()을 따라가는 것’(居仁由義)이라고 대답했다. 그렇다. 시인이야말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다. 어찌 그게 쉬운 일이겠는가. 그래서 시인은 늘 외롭고 쓸쓸하다. 그러면 이제부터 이시환 시인의 작품을 보며 그 아름다운 시심에 젖어 보고자 한다.

 

(2)

이시환 시인이 보내온 16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먼저 시 여래에게·49’를 본다.

 

내가 눈을 감고 있어도

가을산은 뜨겁구나.

-여래에게·49’ 전문

 

이 작품을 읽자, 내 몸에 전율이 왔다. 이보다 심미적 감성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 어디 또 있을까. 그 모습이 아름답게 떠오른다. 놀랍게도 시각적 감각을 훌쩍 뛰어넘어서 촉각적 감각으로 승화되어 있다. 이는, 아주 오랜 동안 시심을 갈고 닦지 않고는 결코 얻기 어려운 시상이다. 그런가 하면, ‘눈을 감고 있는 가을산, 바로 선비의 모습이기도 하고 이시환 시인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 몸과 마음이 그리 뜨겁지 않고는, 시인은 그 큰 외로움쓸쓸함을 견디기 어렵다. 이를 뒷받침하는, 또 한 작품이 있다.

 

저 눈부신 외로움을

어찌 감당하시려고요?

 

이쯤에서 그저 바라만 보아도

이 몸이야 다 녹아내릴 것만 같은데

 

저 눈부신 외로움을

어찌 감당하시려고요?

-설봉전문

 

절로 탄성이 나온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 할까? 아니, 여기에서 말하는 설봉또한 남이 아니다. 이시환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설봉은 추위를 지녔다. 시인만큼 추위를 지닌 사람은 찾기 어렵다. 그뿐만 아니라, 그 빛깔이 하얗다. 시인이라면 당연히 그 몸과 마음의 빛깔이 희어야 한다. 희니 외롭다. 그렇기에 이시환 시인은 눈부신 외로움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시인은 밤을 하얗게 밝히며 그 영혼을 살라서 시를 쓴다. 그게 여기에서는 몸이 다 녹아내리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게다가 첫 연과 마지막 연에 같은 내용을 앉힘으로써 그 아픔과 외로움이 나에게로 왈칵 밀려든다. 나 또한 감당하기 어렵다.

앞에서 말했듯이, ‘어짊을 몸에 두르고 옳음을 따라가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자신을 다스리는 데에 엄격함이 있어야 한다. 절제가 있어야 한다.

 

깊은 산 속에 다소곳이

숨어 있는 것도 아니고

 

험하고 험한 길 끝에 위태로이

붙박여 있는 것도 아니건만

 

평생 떠나지 못하는

나의 암자.

-나의 헤미티지중 일부

 

헤미티지, ‘암자은둔처를 가리킨다고 한다. 오래 전부터, 불교뿐만 아니라, 기독교에도 가까운 단어라고 한다. 그렇듯 수도자들은 외딴 곳에 은둔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 여기에서 이시환 시인은 시를 쓰는 자신의 삶헤미티지로 형상화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시인 또한 스스로 정한 길을 평생 떠날 수 없다. 시인도 수도자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놀랍게도, 헤미티지가 클로즈업되어 하나의 명확한 존재로 나타난다.

 

그래, 사람들은 쉬이 너를 외면하지만

실은 그런 독도 하나씩을

저마다 가슴 속에 품고 살지.

 

그래, 그곳에 가면, 그곳에 가면

실로 오랫동안 나를 기다리며 정좌해 있는,

다름 아닌 내가 있을 뿐이네.

-나의 독도중 일부

 

내 눈에는 헤미티지독도가 오버랩으로 되어서 다가온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앞의 헤미티지에서는 그 안에 시인이 안겼으나, 뒤의 독도는 시인에게 오히려 그 섬이 안겨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렇다. ‘안긴다.’안는다.’의 차이를 나타낸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엄격한 절제를 통해서 마침내 어짊과 옳음의 넉넉한 눈을 뜨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둘이 합해져서 하나가 된다. 그 핵이 사랑이다.

우리 모두가 독도를 사랑하겠지만, 독도를 사랑함이 이보다 더 클 수는 없다. 독도가 그저 우리나라의 한 영토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독도는 바로 나이기 때문에 아무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는 외침이 여기 들어 있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시인이 어짊을 지니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을 뒤로 하여야 한다. 문득 교언영색 선의인’(巧言令色鮮矣仁)이라는, 공자의 말이 생각난다. 알고 있듯이 교묘하게 꾸민 말과 곱게 꾸미는 얼굴빛에는 어짊이 적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공자는, ‘군자는 말을 더디게 하고자 하며 행동을 민첩하게 하고자 한다.’(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라고 말했다. 쉽게 말해서 이는, ‘말이 많으면 어짊과 옳음을 지키기 힘들다.’라는 뜻이다. 다시 이시환 시인의 작품을 본다.

 

바람도

그곳으로부터 불어오고

 

강물도

그곳으로부터 흘러내려온다.

-묵언·1’ 전문

 

참으로 놀랍다. ‘말을 하지 않는 것(默言)으로부터 바람도 불고 강물도 흘러내려온다.’라니, 이 한 편의 시는 일발필중’(一發必中)의 묘함을 살리고 있다. 화살이 정곡(正鵠)을 맞추고 나서 그 깃을 부르르 떤다. 여기에서 바람은 불어오는 바람일 수도 있고 마음으로 원하는 바람일 수도 있다. 그리고 강물은 땅에 흐르는 강물일 수도 있고 가슴에 흐르는 강물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바람보람으로 여기면 되겠고 강물슬픔으로 여기면 되겠다. 다시 묵언이라는 제목의 다른 작품을 본다.

 

네 눈과 마주치는

나는 이미 너의 포로.

 

펄펄 끓는 황금물을 뒤집어쓴

너의 깊은 정수리로 걸어 들어가는,

 

눈먼 나는

너의 황홀한 포로.

-묵언·2’ 전문

 

시인은 묵언에 사로잡힌다. 말을 버려야만 시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묵언의 눈과 마주치기만 해도, 다른 곳으로 도망칠 수가 없다. 그런데 묵언은 그 정수리에 펄펄 끓는 황금물을 뒤집어쓰고 있다. 그 안으로 시인이 순순히 걸어 들어간다. 절로 몸과 마음이 닳아 오른다. 그렇게 이시환 시인은 뜨거운 몸과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 눈이 멀지 않고서야 어찌 묵언 속으로 들어가겠는가. 하지만 스스로 택한 붙잡힘의 길이기에 황홀하다.

그런데 묵언이 정수리에 뒤집어쓰고 있는 황금물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가. 내가 느끼기에, 이는 묵언의 마그마일 듯싶다. 말을 하지 않는 게 오히려 웅변일 수도 있다. 그래서 뜨겁고, 그래서 빛난다. 비로소 입을 열면 일언중천금’(一言重千金)이다.

이시환 시인의 묵언에 대한 노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아니한다.

 

, 인간세상은 여전히 시끄럽구나.

문득, 이 곳 중선암쯤에 홀로 와 앉으면

 

이미 말()을 버린,

크고 작은 바위들이 내 스승이 되네.

-상선암 가는 길전문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시끄럽다. 조용한 곳으로 가려면 위로 올라가야 한다. 가장 초입의 조용함이 깃든 곳하선암일 듯싶다. 그곳에서는 아무래도 제대로 된 묵언을 만나기 쉽지 않고, 적어도 중선암정도는 올라가야 반듯한 묵언을 만날 수 있다. 그 곳에는 이미 말을 버린 바위들이 있다. 이시환 시인은 그 크고 작은 바위들에게서 말 버리는 방법을 배운다.

물론, ()에게는,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게 아니다. 긍정적인 면도 있다. 이를 테면, ‘과 같다고나 할까? 그러면 이시환 시인의 작품 을 보자.

 

칼 속에는

속살을 드러낸 채 어둠이 누워 있고,

 

칼 속에는

구슬처럼 쏟아지기를 기다리는 빛이 고여 있다.

 

그 칼끝이 기우는 대로

세상은 어둠이었다가 빛이었다가 하지만

 

요즈음 칼 속에는

어둠의 말씀도, 빛의 말씀도 없다.

 

말씀 없는 칼만

요란스럽다.

-전문

 

칼은 목숨을 해치기도 하지만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도 말만 잘하면 천 냥 빚도 가린다.’라는 게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칼 속에 어둠이 있고 빛남이 있듯이, 말에도 어둠이 있고 빛남이 있다. 그게 이 시에서 어둠의 말씀빛의 말씀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에서 눈여겨 볼 게 있다. 이 아니라 말씀이라고 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말씀이란 몇 번이고 거듭 생각한 뒤에 꺼내는, 아주 정제된 말을 가리키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사리분별이 명확한 어른의 말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천둥벌거숭이인 아이들의 말만 요란하니, 어린아이가 칼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위태롭다.

 

사람들은 그저 돈이 아니면 칼로,

칼이 아니면 입으로

 

공허와 공허를 위장하려 하지만

공허가 사람들을 방생하고 있네.

-방생중 일부

 

정말이지, 말에도 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이 있어야 어진 말이 된다. 이 여기에서 공허로 표현되어 있는 것 같다. ‘돈이 지닌 금력이나 칼이 지닌 권력이나 입이 지닌 수다로서는 자유로워질 수 없다. 거기에는 이 없다. 자유로움은커녕 그들의 노예가 될 뿐이다. 여기에서 문득 다음과 같은 노자의 글 한 구절이 떠오른다.

찰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든다. 그 빔이 마땅하여 그릇의 쓰임이 있다.’(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이를 다시 언급하여 이렇게도 기록하였다.

길은 빈 그릇이다. 쓸 수 있고 늘 차지 않는다.’(道冲 而用之 或不盈)

이 글의 ’()은 사람마다의 이고 이시환 시인에게는 말할 것도 없이 시인의 길이다.

말은 가득 참을 나타내고 그와 반대로 묵언은 을 나타낸다. 느낌 또한, 가득 찬 소란스러움은 아주 거칠다. 그리고 비어 있는 조용함은 아주 부드럽다. 이 빔이 방생’, 즉 자유를 준다. 이시환 시인은 그러한 모습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작품 목련을 본다.

 

아니,

왜 이리 소란스러운가?’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여니

 

막 부화하는 새떼가

일제히 햇살 속으로 날아오르고

 

흔들리는 가지마다

그들의 빈 몸이 내걸려 눈이 부시네.

-목련전문

 

목련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목련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소란스러움이 멀리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 소란스러움이 막 부화하는 새떼로 형상화되어 있음으로써 느낌이 참 상쾌하다. 그런데 더욱 놀랍게도 새떼가 일제히 햇살 속으로 날아오른다.’라고 표현했다. 이는, ‘소란스러움의 어둠고요함의 밝음으로 바뀜을 의미한다. 또 한 번 몸에 전율이 온다. 그런가 하면, 마지막 연에서 흔들리는 가지들도 비어 있다. 거기에 더하여 빈 몸이 내걸려 있으니 눈이 부실 수밖에. 이를 가리켜서 점입가경(漸入佳境)이라고 하는 게 아닐까.

아름다움으로 친다면, 연꽃 또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꽃이다.

 

목을 빼어/ 저마다 한 곳을 바라보네.

-연꽃· 3’ 일부

 

나는 보았네./ 땅의 눈빛, 하늘의 미소.

-연꽃· 4’ 전문

 

연꽃이 목을 빼고 바라보는 곳은 어디일까? 그야, 저 하늘이다. 연꽃이라면 모두가 하늘을 바라본다. 그러나 이 많은 사람 중에서 하늘을 떳떳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 ‘어짊옳음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사람은, 하늘을 떳떳하게 바라볼 수 없다. 그리고 어짊옳음을 행함이 그리 쉽지도 않다. 그렇기에 늘 부끄럽다.

맹자의 말을 빌리면, 어짊은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부터 출발하고 옳음은 수오지심’(羞惡之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은 시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이 마음을 갈고 닦으면 어짊옳음을 몸에 지닐 수 있게 된다. 하늘을 바라보는 땅의 그 맑디맑은 눈빛을 보고, 하늘이 어찌 땅으로 곱디고운 미소를 보내지 아니하겠는가. 참으로 아름답다!

가시나무, 가시나무

나는 가시나무.

 

마침내 갈증의 불길 속으로

던져지는 가시나무

-가시나무중 일부

 

나무가 왜 가시를 지니게 되었을까?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사막에 사는 나무는 잎을 가시처럼 만든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자기 몸에 물을 보존할 수가 있다. 그 때문에 나귀 한 마리 쉬어 갈 수 없고, 한 조각 그늘도 들지 않는다.’라고 스스로 부끄러워한다. 이시환 시인의 이 마음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세속의 사람들에게 시인은, 함께 놀기 어려운 존재이다. 그 좋은 돈도 관심 없고 그 좋은 권세도 관심 밖이니, 무슨 대화를 나눌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시인은 마침내 갈증의 불길 속으로 던져지게된다. 시인은,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말리며 시인의 길을 걷다가 그 길에서 숨을 거둔다.

 

오늘은 내가 여기 앉아 쉬지만

내일은 다른 이가 앉아 쉬리라.

-단풍나무 아래서전문

 

눈을 감고 있어도 가을산이 뜨겁듯, 시인은 뜨거운 삶을 살다가 바람에 날려서 떠난다. 그렇다고 슬퍼할 것은 없다. 누군가는 이러한 삶을 이어받아서 내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있을 터이다. 사람이 사는 한, 뜨거운 삶의 단풍나무 같은 시인이 있게 마련이다.

 

불현 듯 네 앞에 서면

내 성급한 마음도

성난 마음도 다 녹아드는 것이.

 

불현 듯 네 앞에 서면

꽁꽁 숨어 있던 내 부끄러움조차

훤히 다 드러나 보이는 것이.

-꽃 선물을 받으며일부

 

사람이란, 얼마나 사느냐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에 의미가 있다. 이시환 시인은 아마도 꽃 선물을 받았을 때에 이런 생각을 떠올렸나 보다. 꽃이란 아름답지만 오래 가지는 않는다. 큰 빔이 있다. 욕심이 없고 순수하다. 그렇기에 꽃은 그 빛깔로서 하나의 깊은 세계를 지니고 그 생김새로서 하나의 착한 우주를 내보이게 된다.

이렇듯 이시환 시인은 작은 꽃송이 하나에서 그 넓은 우주와 만난다. 그리고 이번에는 하나의 돌멩이 속에서 사막을 본다. 사막과 돌멩이는 하나이고 그것은 분명히 살아 있다.

아직도 내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수수만년

모래언덕의 불꽃을 빚는

 

바람의 피가

돌기 때문일까.

 

 

아직도 내 눈물이

마르지 않는 것은

 

수수억년

작은 돌멩이 하나의 눈빛을 빚는

 

바람의 피가

돌기 때문일까.

-전문

 

피는 목숨을 상징한다. 그리고 피가 돌면 살아 있다.’라고 말한다. 사막에서는 그 오랜 동안 모래 언덕이 빚어진다. 그게 모두 숨을 쉬는 불꽃이다. 그 일을 바람이 수행한다. 사막은 바람으로 해서 생명을 얻는다. 그래서 시인의 가슴은 아직도 두근거린다. 이렇듯 자연스럽게 사막과 이시환 시인은 일체가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작은 돌멩이에는 그 오랜 동안 눈빛이 빚어진다. 그 일도 바람이 수행한다. 그게 바로 바람의 도는 피이다. 그렇게 돌멩이는 생명을 얻는다. 그에 대한 측은지심 때문에 시인의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시인은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을 아주 크게 지니고 있다. 살아 있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 이 생각을 하면 불쌍하지 않은 목숨이 없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도. 그러니 어찌 작은 돌멩이라고 해서 나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돌멩이이고 돌멩이가 나인 것을.

 

(3)

이시환 시인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어짊옳음을 분명히 기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누구보다도 풍부한 심미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 참으로 그 모습이 착하고 미덥고 아름답다. 나는 20년이 넘게 이시환 시인을 지켜보았다. 그의 삶과 그의 시가 일치한다. 시는 절대로 픽션이어서는 안 된다. 시인을 죽이는 것은, 위선(僞善)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을 착하고’ ‘미덥고’ ‘아름답다라고 하는가?

이에 대해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고자 함이 마땅하면 착하다.’라고 하며(可欲之謂善), 착함을 자기 몸에 지니고 있으면 미덥다.’라고 하며(有諸己之謂信), 착함이 몸속에 가득 차면 아름답다라고 한다(充實之謂美).”

그러므로 착함이 믿음과 아름다움의 근본이다. 사람이 착함을 지녀야만 측은지심수오지심이 생기게 되고, 그에 따라 어짊을 몸에 두르고 옳음을 따라갈 수도 있을 터이다.

단언하건대, 그렇고 그런 시()일망정 늘 시심에 잠겨서 시를 쓰는 사람이 시인이다. 어쩌다가 한두 편의 좋은 시를 쓰는 사람은, ‘시의 달인일 뿐이고 시인은 아니다. 하지만 늘 시심에 잠겨 있는 일, 어짊에 머무르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시인이 되기는 쉬워도 시인으로 살기는 어렵다. 그러니 시인의 삶은 뜨거워야 한다.

이시환 시인은 그 삶이 뜨겁다. 시인의 길을 제대로 걸어가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그의 모습이 내가 보기에 영락없이 눈을 감고 있는 가을산이다. 뜨거움이 곱게 물들어 있다. 이게 바로 시인의 말없는 베풂이다. 좋은 시들을 보여준 이시환 시인에게 고마움을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