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 대하여 11
김 재 황
늙직한 나그네가 여러 길 그 앞에 섰다
찬 날이 저무는데 몸은 이미 지쳐 있다
허름한 주막 하나쯤 열렸으면 좋겠다.
[해설]
고전 ‘노자’를 읽고 있다가 제11장의 ‘삼십폭공일곡’(三十輻共一轂)에서 문득 시상 하나를 얻었다. 내 처지를 떠올렸다. 간결하면서도 힘찬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다면 아무래도 단수 시조여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우선 초장을 잘 잡아야 한다. 나는 늘 생각했다. ‘젊은이들뿐만이 아니라, 70세가 넘은 나에게도 가능성은 열려 있다.’라고. 그래서 ‘먼 길 가는 나그네가 여러 길 앞에 멎는다.’라고 초장을 잡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먼 길 가는’이 마음에 걸렸다. ‘나그네’라는 말에는 ‘먼 길 간다.’는 의미가 담겨 있을 터이다. 게다가 처음부터 초장의 첫 음보를 ‘4자’로 하는 것보다 안전하게 ‘3자’로 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그래서 ‘먼 길 가는’을 ‘나이 든’으로 고쳤다. 다 같은 나그네라고 하여도, 나는 ‘나이 든’ 나그네가 아닌가. 마음에 든다. 그렇게 바꾸어 놓고 보니, 이번에는 ‘멎는다.’라는 말이 좀 껄끄럽다. 처음부터 ‘때’를 현재로 하면 중장과 종장이 꼬일 수도 있겠다는 우려 때문에, ‘나이 든 나그네가 여러 길 앞에 멎었다.’라고 초장을 잡았다. 그런데 이는, 둘째 구의 ‘첫 음보와 둘째 음보의 글자 수’가 ‘5’와 ‘3’으로 된다. 초장과 중장에서 뒤의 음보에 적은 글자 수를 두면 왠지 찌그러진 느낌이 든다. ‘3’과 ‘4’나 ‘4’와 ‘4’가 좋겠지만, 마땅한 게 얼른 떠오르지 않으니 아쉬운 대로 ‘여러 길 그 앞에 섰다.’라고 했다. ‘3’과 ‘5’이다.
중장으로 가서 생각나는 대로 ‘해는 지고 배고픈데 어디로 가야 할지’라고 초안을 잡았다. 먼저 첫 구에서 ‘배고픈데’가 어쩐지 품격이 떨어진다고 느꼈다. 해가 질 때까지 먼 길을 걸어왔으니 ‘배고플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선비라면 배고픔을 그리 쉽게 드러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또, ‘해는 지고’도 어느 동요에서 들은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날은 춥고 어두운데’라고 바꾸었다. 내 인생이 겨울이니 추워야 하고, 한밤을 향해 달리고 있으니 어두워야 한다. 앞의 구를 바꿈에 따라, 뒤의 구도 바꿀 수밖에 없다. ‘어디로 가야 할지’가 미래의 ‘때’를 나타낸다. 초장에서의 우려가 당장 여기에 나타났다. 초장의 때가 과거이니 중장의 때는 현재여야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로써 자연스럽게 중장의 다음 구는 ‘몸은 이미 지쳐 있다.’라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앞의 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추운 날이 저무는데'라고 바꾸었다. 첫 음보와 다음 음보의 글자 수는 2구 모두 ‘4’와 ‘4’이다.
다 알다시피, 종장의 첫 음보는 반드시 ‘3’ 자여야 한다. 중장의 ‘저물다’를 받아서 ‘불 켜진’을 종장 첫 음보로 삼았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그 다음 음보는 ‘5’ 자가 가장 좋고 ‘6’자 까지가 무난하다. 글자 수뿐만 아니라 그 음보 전체가 ‘불 켜진’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불현 듯 ‘조그만 주막’이 떠올랐으나 ‘불 켜진’에 이어 ‘조그만’이란 말이 썩 어울리지는 않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두 단어가 모두 ‘ㄴ’으로 끝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종장 둘째 음보를 ‘주막 하나쯤’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종장 첫 음보의 ‘불 켜진’은 둘째 음보의 ‘주막’과 ‘하나쯤’ 모두와 연관 짓게 된다. 다음은 종장의 둘째 구인데, 글자 수로 치면 첫 음보와 둘째 음보가 ‘4’와 ‘3’으로 되는 게 가장 좋다. 이를 ‘역진’이라고 하며, 끝을 오므리는 역할을 한다. 그에 비하여 ‘4’와 ‘4’는 무난하다. 그렇기에 이왕이면 ‘4’와 ‘3’으로 하기로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썼다. 그렇게 해놓고 보니, 중장의 끝이 ‘있다’로 되어 있다. 그래서 ‘있었으면’을 ‘보였으면’으로 고쳤다. 얼핏 생각해서 종장의 첫 구가 ‘불 켜진’으로 되어 있으니 다음 구가 ‘보였으면’으로 시작되는 게 어울릴 것도 같았으나, 종장은 초장과 중장을 이끌어야만 되기 때문에 초장의 둘째 구 시작인 ‘여러 길’에서 ‘여’의 음을 따서 종장의 둘째 구를 ‘열렸으면’으로 시작되도록 만들었다. 이 시조의 핵심이 ‘여러 길’에 있으므로 이를 다시 한 번 짚어야 한다. 종장의 음보 글자 수는 ‘3’과 ‘5’와 ‘4’와 ‘3’이다.
이 단수 시조는 전체적으로 보아서 음보에 따른 글자 수가 초장 ‘3 4 3 5’이고 중장 ‘4 4 4 4’이며 종장 ‘3 5 4 3’이다. 초장이 조금 마음에 안 든다. 글자 수로 보면 초장이 15 자이고 중장이 16 자이며 종장이 15 자이다. 그러므로 이 단수의 총 글자 수는 46 자이다. 1수의 글자 수는 45 자 안팎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중장에서 1자를 줄일 수 없을까? 그래서 중장 첫 음보의 '날은 춥고'를 '찬 날이'라고 바꾸었다. 그리고 중장을 바꾸는 터에 초장에서 '나이 든'도 '늙직한'으로 바꾸었다. 이렇게 해놓으니 모두 45 자가 되었다. 이 참에 초장을 차라리 ‘늙직한 나그네가 여러 길에 다다랐다.’라고 하면 어떨까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어쩐지 이미지가 확 닿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나의 한계다. 그래도 다행히 ‘초장은 과거, 중장은 현재, 종장은 미래’로 때는 제대로 잡았다. 그리고 초장의 시작이 ‘늙직한’으로 되었고 중장의 시작은 ‘찬 날이’로 되었다. 이는 초장을 중장이 잘 받은 것 같다. '늙직하다'는 것은 '나이가 찼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니까. 아,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초장의 첫 음보가 '늙직한'이고 중장의 첫 음보는 '찬 날이'며 종장의 첫 음보는 '불 켜진'이다. 아무래도 종장의 첫 음보는 초장의 첫 음보와 같이 '3자가 모두 붙어 있어야' 어울릴 것 같다. 그래서 급히 종장의 첫 음보를 '허름한'으로 바꾸었다.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할까 보다.(김재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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