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구꽃과 김남주 시인
김 재 황
여름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높은 산을 오르다가 보면, 어느 용맹스러운 전사(戰士)가 벗어서 걸어 놓고 떠난 듯싶은 투구 모양의 꽃을 만날 때가 있다. 그 이름은 바로 ‘투구꽃’.
용기와 헌신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자줏빛 투구꽃. 도대체 그 투구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어쩌면 전장에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어느 병사(兵士)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자기가 믿는 종교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던진 어느 순교자(殉敎者)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시인 중에도 투구꽃의 이미지를 간직한 사람이 있을 터였다. 과연 그가 누구일까. 이 시대의 전사는 과연 누구일까. 나는 마침내 무릎을 탁 쳤다. 아, 그 투구꽃의 임자야말로 시인(詩人)이기보다는 전사(戰士)이기를 원한 김남주, 바로 그 사람이 분명하다.
“나는 전문적으로 시를 쓰자고 덤비는 소위 직업 시인은 아니오. 출발부터가 그러했소. 나에게 있어서 시작활동은 내 사회적 활동의 한 부산물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소. 다시 말해서 내가 바라는 이상사회를 만드는 과정에서 여분으로 생긴 부산물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나의 시는 혁명에 종속하는 것이오. 시가 먼저 있고 혁명이 있는 게 아니고, 혁명적 실천이 먼저 있고, 시는 그 자연스러운 산물인 것이오. 나에게 있어서 시는 혁명의 무기일 뿐이오.”
그는 혁명적 싸움 없이는 단 한 줄의 시(詩)도 쓸 수가 없었노라고 말한다. 아니, 쓰고 싶지도 않았다고 실토한다. 민족을 억압하고 민중을 착취하는 무리들이 없어지면, 그의 시(詩)도 쓰이지 않을 거라고 그는 단언했다. 그러한 그의 믿음은, 그의 시(詩) ‘손’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묻겠네 친구/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며 한낮의 이랑 속에서 배추
포기를 키우는 사람이/ 가장 싱싱한 채소를 먹어서는 안 되는가/ 척박한
땅에 사과나무를 심고 땀을 흘리는 사람이/ 과일의 가장 맛있는 부분을
먹어서는 안 되는가/ 지성으로 자식보다 귀하게 소를 키운 사람이/ 겨울의
화롯가에서 등심구이를 먹어서는 안 되는가/ 연장 대신에 이 손에 무기를
쥐어주고/ 그 무기를 내 시가 노래해서는 안 되는가.
-------- 작품 ‘손’ 중의 끝 구절.
투구꽃은 현삼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이다. 줄기는 곧게 선다. 그 얼마나 늠름한 모습인가. 잎은 마디마다 서로 어긋나게 자리한다. 서로 믿음의 힘을 보탠다. 줄기의 밑동 가까이에서 돋아나는 잎은 다섯 갈래이지만, 위쪽에 자리하는 잎은 세 갈래를 보인다. 갈라진 조각이 마름모꼴이며 가장자리에는 거칠고 큰 톱니를 보인다. 이 또한 찢긴 옷자락으로, 고통스럽게 핍박받은 형상을 떠올리게 된다.
김남주 시인은 1979년 남민전(南民戰) 사건으로 15년을 선고받고 1988년 특사로 출감하기까지 9년여 동안이나 감옥 생활을 했다. 그렇게 어두운 감방에서 우유곽이나 담뱃갑에 못으로 긁어 쓴, 그의 시에는 어두운 밤하늘에 별처럼 빛나는 영혼이 지금도 살아 있다.
1946년, 전남 해남군 삼산면에서, 그는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지난 힘겹던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초등학교 때고 중학교 때고 낮에 공부해 본 적이 없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학교 가기 전까지 소를 먹이거나 꼴을 베어야 하고, 학교가 파하면 곧장 집에 와서 역시 소를 먹이거나 또는 높은 산에까지 지게를 지거나 망태를 메고 올라가 갈퀴나무며 풀 나무를 해 와야 했기 때문이지요. 밤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공부를 할 수 있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지요. 기름이 닳아진다고 어서 불 끄고 자라고 부모님이 성화였으니까요.”
그 어려운 시절, 고달픈 시절이 있음으로 해서, 그의 시(詩)가 비로소 태어나게 됐다고 그는 역설했다.
“나의 시는 보릿고개에서 태어났지요. 보리밥으로는 배가 차오르지 않아 보리알을 맷돌에 갈아서 멀겋게 죽을 쑤어 꾸룩꾸룩 들이켜야 헛배라도 불러 어지럼증이 가시고 고꾸라지지 않고 남의 일을 해주며 목숨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마을에서 태어났지요. 나의 시는 또한 이웃이 보리밥은커녕 보리죽도 천신 못하고 허덕이는 판에 버젓이 ‘에그 프라이’를 먹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저주의 마당에서 태어났지요. 그래서 내 시의 관심거리는 밥상 위에 오른 밥 한 그릇이고 김치 한 접시이고 된장국이고 그것을 마련하기 위한 노동입니다. 그래서 내 시는 이 노동의 과실을 훔쳐 먹는 자들에 대한 투쟁의 정서이지요.”
아, 뜨거운 염천을 견디고 피어나는 저 자줏빛 투구꽃을 보라. 줄기 끝에 여러 송이의 꽃이 이삭 모양으로 모여 피는 저 투쟁의 의지를 보라.
김남주 시인은 1974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잿더미’ 등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그는 옥중에서 쓴 시편들을 모아, 1984년에 첫 시집 ‘진혼가(鎭魂歌)’를 발간했고, 이어서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사상의 거처’ 등을 펴냈다.
그는 투구꽃처럼 치열한 삶을 살았다. ‘광주일고’에 재학할 당시, 그는 안정된 학교 공부를 거부하고 자퇴한 뒤에 검정고시로 전남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마저 곧 염증을 느껴서 스스로 대학을 떠났다. 1970년대 말, 그는 유신반대 투쟁에 참여했고 민중 문화 운동에 매진했다.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열성적이어서 결코 물러설 줄을 몰랐던 김남주 시인. 그를 풀꽃에 비유한다면 ‘투구꽃’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깊은 산으로 들어가/ 그늘진 자리를 잡고/ 그는 투구 쓴 용사로/ 한 손에는
칼과/ 또 한 손에는 방패를 든다/ 뜨거운 가슴에/ 여름의 훈장을 달고/
미치광이 바람과 싸워/ 햇살의 기쁨을 얻는다/ 불신의 어둠과 싸워/ 마침내
하늘의 영광을 얻는다.
------- 졸시 ‘투구꽃’
사실은 ‘투구꽃’에서 투구처럼 보이는 것은, 그 모두가 꽃잎이 아니다. 자세히 보면, 다섯 개의 꽃받침이 꽃잎 모양을 하고 있으며, 특히 위쪽에 자리한 꽃받침이 ‘투구’의 흉내를 내고 있다. 꽃받침의 크기는 30cm 안팎. 하늘빛을 띤 보랏빛으로 활활 불길이 인다.
꽃은 꽃받침에 감싸여 있다. 그렇구나. ‘투구꽃’ 역시 그 영혼을 꽃피우고 있구나. 진실의 꽃을 감추고 있구나. 그 꽃이 꽃받침으로 투구의 모양을 내보이는 것은, 이 꽃이 지닌 또 하나의 관념에 불과할 뿐이었구나.
그것은 김남주 시인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의 일이다. 시인이기보다 전사이기를 외쳤던 그였지만, 그 가슴에 서정의 푸른 싹을 키우고 있었음을, 나는 이제 안다. 그가 옥중에서 연인에게 쓴 편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광숙이, 서정시를 가끔 써 볼 작정이오. 뻣뻣한 사회적인 시만 골수에 박혀 있는 뇌수를 닦아 내고 사랑으로 가득 채우고 싶소. 모든 것이 메마른 이 곳에서 광숙이만이 나를 축축하게 해주는 이슬이오. 그대 입술이, 내 입술이 마르는 그때까지 사랑의 시를 써 보아야겠소. 사랑으로 고약하고 험한 세파를 이겨 나갑시다.”
김남주 시인이 만약 좋은 환경에서 성장할 수만 있었다면 훌륭한 서정시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의 투사적인 의식은 유년 시절에서부터 싹이 텄다. 그는 유년의 아픈 기억을 끝까지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해 추석에 마을 앞산에서 소를 먹이다가 동무들과 황톳길에서 구슬치기를 했어요. 소는 소나무에 댕댕하게 매어 놓고요. 그 모양을 아버지가 논에 다녀오다 보았던 것이지요. 그날 저녁에 아버지는 그런 나를 기둥에 새끼로 친친 감아 놓고 매질을 했었지요, 무섭도록. 나는 지금까지 두 가지 추억을 잊지 못해요. 초등학교 때, 시라는 것을 썼다가 선생님한테 창피 당한 것과 기둥에 묶여 아버지한테 매를 맞았던 것과-------.”
어린 마음에 그 상처가 얼마나 컸겠는가. 스프링을 누르면 더욱 큰 힘으로 솟구쳐 오르게 되듯, 그는 그러한 노여움을 없는 자의 편에 서서 풀려고 했을 지도 모른다.
김남주 시인은, 그가 남민전에 들어가게 된 동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시내 책방이나 남의 집 서가에서 책을 도둑질하곤 했는데 'Listen yankee'란 책은 광주 미문화원에서 훔친 거였어요. 이상하지? 이런 책이 그런 곳에 있다니. 미국이란 나라는 참 엉뚱한 데가 있는 나라에요. 나는 미국을 통해 레닌을 알고, 메니페스토를 읽고, 모택동을 읽고 게바라를 알곤 했죠. ----- 내가 ‘남민전’에 들어간 동기도 이런저런 책에서 얻은 지식 탓이었어요. 특히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 ‘레닌의 생애’, 스위즈ㆍ휴버만 공저인 ‘쿠바혁명의 해부’ 등의 탓이 컸을 거예요. 한 마디로 말해서 ‘혁명적 조직 없이는 혁명의 성공은 없다.’는 명제를 내 나름으로 가슴 깊이 새겼기 때문일 거예요.”
하지만 어느 땐가, 그는 감옥에서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하여, ‘전사’로서 자신의 흔들림을 토로하기도 했다.
“지난번 면회 때 광숙이에게 나는 이런 말을 했소. 나는 직업 시인이 아니다, 전사다. 내 시는 해방 전사로서 내 사회적 실천의 산물에 불과하다. 그 때 광숙이는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어 버렸소. 광숙이, 사실 나는 전사에 값하는 그런 위인은 못 되고 그 옆에 얼씬거리지도 못할 것이오. 그뿐만 아니라, 전사 생활 또한 극히 짧은 것이었소. 그러나 광숙이, 현실을 근본적으로 변혁하려는 집단적인 싸움에서 나는 내 나름으로 최선을 다했소. 이 점은 인정해 주길 바라오.”
오히려, 그는 감옥에 있으면서, 전사보다는 시인이기를 갈망하기도 했다.
“시인에게 펜을. 나는 이 슬로건 밑에서 싸우다가 죽을지언정 펜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하루 한 끼가 아니라 세 끼를 몽땅 굶는 한이 있더라도,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펜의 자유를 위해 온갖 형태의 싸움을 할 생각입니다. 그 기회를 나는 엿보고 있습니다. 그 기회가 오면 바깥사람들의 응원을 기대합니다.”
일제 30여 년 동안/ 낫 놓고 ㄱ자도 모르셨던 어머니/ 미제 40여 년 동안/
호미 쥐고 ?표도 모르시는 어머니/ 일자무식 한평생으로/ 자식사랑밖에는
모르시는 어머니/ 지금 나처럼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구속자라 부르지
마세요/ 양심수라 부르지 마세요/ 정치범이다 뭐다 시국사범이다 뭐다 그런
이름으로도 부르지 마세요/ 그냥 애국자라 하세요.
-------- 작품 ‘어머니께’ 앞 구절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이웃 중에서도 아픔을 지닌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투구꽃’은 그 덩이뿌리를 ‘초오(草烏)’, 또는 ‘오두(烏豆)’라고 부르는데 진통(鎭痛)과 진경(鎭痙)의 효능이 있어서, 습기로 인하여 허리 아래가 냉해지는 증세를 다스려 주며 종기로 인한 부기를 가라앉혀 준다.
이 뿌리는 약이 될 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독(毒)이 되기도 한다. 옛날 왕이 벌로 내리신 사약(賜藥)은 바로 ‘투구꽃’의 뿌리를 달인 물이다.
이 또한, 시인과 투사의 두 극단적인 면을 지닌 김남주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나는 그냥 시인이고 전사이고 무난히 이 시대에 어울리게 말해서 혁명적 민주주의자입니다. 시인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한 마디 하고자 합니다. 러시아의 한 시인의 말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시인은 싸우는 사람과 동의어다.’라고. 나는 이 말씀이 퍽 맘에 듭니다.------ 극도의 억압 사회에서 시는 생활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여 근로 대중 앞에 드러내 보여주는 가장 적합한 문학 장르이기 때문일 겁니다. 러시아의 혁명가들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들은 하나같이 제 조국의 시인들 시들을 꿰고 있습니다.”
1994년 2월 13일이었다. 밤하늘에 빛나던 별 하나가 지듯, 김남주 시인은 다른 세상으로 갔다. 그는 1993년 11월 뒤늦게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주위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과 3개월 만에 이 세상을 영원히 떠나 버렸다.
그가 눈을 감기 한 달 전, 미래시시인회 모임에서 한 시인이 김남주 시인의 병문안을 가자고 제의 했을 때, 모두들 그게 좋겠다고 찬성을 하고서는 차일피일 미루다가 그만 실행에 옮기지를 못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내란의 무기 위에 새겨진/ 피의 이름// 시가전의 바리케이드에서 피어나는
꽃의 이름// 자유여 나는 부르지 않으리/ 함부로 그대 이름을.
---------- 작품 ‘꽃이여 피여 이름이여’ 중에서
그래도 위안이 되는 일은 있다.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와 여름이면 산에 ‘투구꽃’이 피어날 터이니, 우리는 그 꽃에서나마 김남주 시인이 벗어 놓고 간 ‘전사의 투구’를 만날 수 있으니까. 그는, 어두운 밤하늘에 한 마리 개똥벌레처럼 사라질 것이라고 했지만, 이제는 그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가슴마다에 ‘투구꽃’으로 피어나 영원히 살아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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