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초롱꽃과 조병화 시인

시조시인 2013. 9. 2. 13:15

초롱꽃과 조병화 시인

 

김 재 황

 

여름 내내, 기다림의 환한 등불을 켜고 있는 꽃이 있다. 그 이름 초롱꽃. 초롱꽃은 그 누구를 기다리며 숲 속에서 불을 밝히고 있는가. 산바람 불 적마다 흔들리는 불빛 속으로 걸어오시는 이 누구인가. 어두움의 망각 속에서 묵묵히 다가오는 그리움의 얼굴. , 어머니. 어머니를 그리는 사람이라면, 조병화(趙炳華) 시인보다 더한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 초롱꽃이야말로,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그리움을 지닌 조병화 시인의 심상을 지녔다.

 

어머님, 당신은 지금/ 사람으론/ 갔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세상에

계시옵니다/ 때론 가까이/ 때론 멀리/ 제 곁에 항상 계시오며/ 하얀 제

눈물 속에 계시옵니다.

------------- 작품 어머니중에서

 

“1962년 음력 63일 어머님은 81세를 그 생애로 이 세상을 떠나셨어요. 어머님은, 그러니까 아주 구식의 한국 여성이셨지요. 신식 교육을 받으신 일이 없는 산골 여성이셨습니다. 집에서 언문을 배우신 정도였어요. 그러나 나는 나의 어머니에게서 실로 위대한 철학, 그 인간을 배웠습니다. 학문적인 지식이 아니라, 뭘 배워서의 감성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경험하고, 한 인간으로서 터득하고, 한 인간으로서 충실히 살아온 그 철학, 지식, 감정이었지요.”

초롱꽃은 6월부터 8월에 걸쳐서 꽃이 핀다. 초롱 모양의 꽃이 두서너 개가 아래로 늘어져 피는 모양이 꽤나 서정적이다. 마치, 옛 주막에 길손을 위해서 내걸어 놓은 등불 같은 따뜻한 인정이 담겨 있다. 꽃의 색채는 흰빛이나 또는 연한 보랏빛이고 붉은빛 작은 점이 흩어져 있다. 나는, 초롱꽃 중에서도 흰색 바탕에 자줏빛 점이 있는 꽃이 더욱 조병화 시인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가련미가 깃들어 있기 때문에.

큰 꽃보다는 작은 꽃을, 이름난 꽃보다는 이름 없는 꽃을, 황홀한 꽃보다는 빈약한 꽃을, 다채로운 꽃보다는 조촐한 꽃을, 으쓱대는 꽃보다는 가려진 꽃을 좋아하는 나의 심정은 뭘까요. 장미보다도, 국화보다도, 백합보다도, 모란보다도, 글라디올러스보다도, 다알리아보다도, 해바라기보다도, 카라보다도, 카네이션보다도, 작은 들꽃에 마음이 끌리는 까닭이겠지요. 생존 경쟁에 늘 처지기 때문이겠지요.”

약한 꽃을 좋아한다는 조병화 시인. 그것은 바로 조병화 시인 자신이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약합니다. 인정에 약하고, 사는 데 약합니다. 생활에 약합니다. 때문에 고마운 정, 고마운 마음, 고마운 악수, 고마운 말 앞에 항상 감사를 느끼며 그 감사에 보답하는 내 인생의 밑천을 생각하곤 합니다. 가진 것이 그리 없습니다. 뜨거운 심장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정리를 하며, 너무 무거운 신세를 이 세상에서 지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는 겁니다. 고마우면 고마운 만큼 그만큼, 다정하면 다정한 만큼 그만큼, 가까우면 가까운 만큼 그만큼, 멀면 먼 만큼 그만큼, 헤어지는 연습, 작별하는 연습, 물러서는 연습을 하면서 사는 겁니다.”

그게 시인의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리. 그게 바로 초롱꽃의 심상이 아니고 무엇이리. 이 풀숲과 같은 도시에서 환한 불을 밝히고 있는 초롱꽃과 같은 시인. 저 높은 곳에 계시는 분이 보시기에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

초롱꽃의 꽃부리는 끝이 얕게 다섯 개로 갈라져 있고, 다섯 개의 꽃받침조각 사이에는 뒤로 젖혀진 부속체마저 있어서 당당한 자존을 생각하게 한다. 수술은 다섯 개이고 암술은 한 개이며 암술머리는 세 갈래로 갈라져 있다.

초롱꽃은 도라지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 줄기는 곧게 서고, 온 몸에 거친 털이 돋아나 있으며, 가지를 거의 치지 않는다. 잎은 마디마다 서로 어긋맞게 난다. 생김새는 달걀처럼 길둥근 모양으로 끝이 뾰족하고, 윗부분의 것은 자루가 없으며, 가장자리에 고르지 않은 톱니를 지닌다. 그런데 뿌리에서 나오는 잎은, 긴 자루가 있으며 하트모양을 보인다. 그게 바로 사랑이며 시심(詩心)’일 성싶다. 그렇다면, 조병화 시인이 추구하는 시()는 과연 어떠한 것일까.

나는 내가 살기 위해서 시를 쓰고 시를 살아오는 것이지, 문학을 하기 위해서, 예술을 하기 위해서 시를 써 온 것은 아닙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나의 작품의 주제는 이며, ‘그 인생이며 그 죽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나의 작품의 소재도 나 자신이며 인생 그것이며 죽음 바로 그것이지요. 나는 문학의 사조(思潮)를 따지지 않습니다. 문학의 주의를 따지지 않습니다. 문학의 유파(流派)를 따지지 않습니다. 그 양식이나 형식을 또한 따지지 않습니다. 때문에 나의 작품, 나의 시, 나의 언어는 나를 살리고 있는 생명의 호흡이며, 살기 위해서 고독과 그 존재를 허덕이고 있는 가쁜 숨소리, 바로 그것뿐이지요. 다만 주어진 조건, 그 상황 속에서 때로는 순응하며 나를 수호하는데 열심하였고, 나를 성장시키는데 열심하였고, 나를 사는데 열심하였고 그 라는 미지의 인간을 탐구하고 추구하는데 열심했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나의 작품, 나의 시, 나의 언어는 사기가 없는 나의 존재의 증인, 바로 그것입니다.”

순수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조병화 시인은, 분명히 이 어두운 시대에 초롱꽃과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순수한 모습으로 아름답게 여름을 장식하는 초롱꽃. 그 삶이 어찌 향기롭지 않겠으며, 그 향기가 어찌 먼 세월 그 멀리까지 가서 머물지 않겠는가.

 

 

산으로 올라가 등불을 켜고/ 들로 내려와 종을 울린다/ 눕고 일어나는

때를 알려/ 세상을 새로 태어나게 한다/ 어디에나 있는 문이/ 오늘은 땀

맺힌 초롱꽃에 열린다/ 빛과 소리가 날개를 달고/ 천사처럼 사랑을 전한다.

---------- 졸시 초롱꽃

 

초롱꽃은 그 모양이 등불과 같기도 하지만, 또 어찌 보면, ()을 닮기도 했다. 그래서 초롱꽃을 일명 종꽃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온 세상에 믿음의 울림을 전하는 꽃이라니, 조병화 시인에게 있어서의 믿음이란 어머니’, ‘고향’, ‘자연이 아닐까 한다.

나는 자연을 사랑합니다. 그 깊이를 사랑합니다. 그 변함을 사랑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공적무한(空寂無限)의 충만을 사랑합니다. 자연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마는, 나는 그러한 자연 속에서도 외떨어져 있는 공적무한의 충만! 적적하고, 소박하고, 좀 가난하고, 쓸쓸한 충만이 가득한 그러한 자연을 사랑합니다. 나와 같이 위안이 되고, 위로가 되고, 편히 그 속에서 쉴 수 있기 때문에, 온 생존의 세계에서 꼭 나를 닮았기 때문에.”

조병화 시인은 192152,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안성 읍내에서 동북쪽 30, 오산 인터체인지에서 동으로 40, 용인 금량장리에서 남으로 30, 경기도 도청이 있는 수원에서 남동으로 80, 그리고 서울에서 남으로 160리가 되는 산골,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난실리이다. 이 마을은 경기도 안성군에서도 벽촌이었지만, 지금은 마을 앞으로 큰 도로가 나 있다. 대대로 내려오는 한양(漢陽) 조씨(趙氏) . 조병화 시인은 지주이며 한학자인 난포(蘭圃)’ 선생의 막내아들이다. 이 곳에서 자라, 송전 공립보통학교를 1년 마치고, 부친의 삼년상을 치르고서, 그는 서울로 올라왔다. 그 다음해에 미동(美洞) 공립보통학교 2학년으로 들어간 후,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 하지만, 조병화 시인은 고향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앞산과 뒷산 사이를 줄줄 졸졸졸 흐르고 있는 진위천(振威川) 상류인 가는 개천을 가운데로 해서 경작되어 있는 논과 밭, 그 둑에 우뚝우뚝 솟아오른 미루나무들, 오래 나이 먹어서 층층이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 느티나무들, 그리고 제멋대로 자리잡아서 제멋대로 야생하고 있는 아카시아 나무들이 메우고 있는 산에는 밤나무, 참나무, 물오리나무, 자작나무, 소나무, 노간주나무들을 비롯해서 산벚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지요. 들을 봐도 녹색이며, 산을 봐도 녹색이며, 마당과 뜰을 봐도 녹색입니다. 나는 이 녹색을 먹고 여름을 지냈어요. 마을 호수는 중심부가 약 30, 아랫마을을 합하여 약 50호 가량됩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도 해와 더불어 기침을 하고, 해와 더불어 흙일을 하고, 해와 더불어 취침을 합니다. ”

조병화 시인은 서울에서 경성사범학교 보통과를 졸업한 후에,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 고등사범에서 물리 화학 전공을 했다. 그리하여, 광복이 되자, 모교에서 물리를 가르쳤다. 학창시절, 그는 뛰어난 과학자가 되려고 생각했다. 때문에 물리 화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 후, 혼란 속에서 그 꿈이 좌절되었다. 방황을 하면서, 많은 혼자를 살았다. 그 많은 혼자를 사는 동안, 그는 말을 하나하나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문학의 출발이었던 셈이다.

일체를 포기하고 시를 썼지요. 그것만이 사는 길이었어요. 그것만이 위안이었어요. 그것만이 벗이었어요. 그것만이 나의 총생존(總生存)이었어요. 시로 다시 살아났지요.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지요.”

조병화 시인은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많은 시인들과 해후하게 된다. 김기림(金起林), 전봉래(全鳳來), 박인환(朴寅煥), 김수영(金洙暎), 정지용(鄭芝溶)……. , 조병화 시인은 이들과의 재회를 위해서,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마음의 등불을 환하게 켜 놓고 있을 게 분명하다. 저 초롱꽃처럼.

초롱꽃은 자반풍령초(紫班風鈴草)’, 또는 풍령초(風鈴草)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약효가 있어서 천식, 경풍, 한열, 보폐, 편도선염, 인후염 등의 약재로 쓰인다. 초롱꽃과 식물로는 전세계에 약 9015백여 종류가 있는데, 우리 나라에는 초롱꽃을 비롯하여 수염가래꽃’, ‘금강초롱’, ‘잔대’, ‘모시대’, ‘영아자’, ‘도라지’, ‘소경불알’, ‘더덕’, ‘숫잔대45종류가 살고 있다. 초롱꽃의 꽃말은 소원’.

조병화 시인은 보통학교 시절부터 그림을 좋아했다. 상급학교에 들어가서는 3학년 때까지 미술부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럭비부의 선수 생활이 본격화되면서 그림 그리기는 중단되었다.

그림에 대한 애착, 시에 대한 우정, 철학에 대한 동경심이 나의 생활을 가득히 충만시키고 있었지요. 틈이 나는 대로 미술실, 화실, 전람회 등지를 배회 산책을 했어요. 그리고 일본에도 해방 전엔 그리 화집이 없었지만, 미술 잡지나 화집 등을 통해서 서양의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과 약력 등을 알아두곤 했습니다.”

그림이건 시건, 조병화 시인에게 있어서 어머니만큼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존재는 없을 듯싶다. 그가 갖고 있는 두 개의 고향, 즉 자연의 지역적인 고향과 영혼의 정신적인 고향. 물론, 자연적인 고향은 난실리를 말함이요, 정신적인 고향은 어머니를 뜻한다. 그렇지만, 난실리 또한 어머니의 품안에 안겨 있는 지금, 그의 고향은 다만 어머니 하나뿐이다.

 

 

어머님, 절 늙게 해 주십시오/ 그곳 사자의 세계에 계신/ 당신을 훤히

볼 수 있는/ 경지로/ 절 늙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죽음이 절 툭툭

치더라도/ 까딱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 작품 어머님 절 늙게 해 주십시오에서

 

조병화 시인은, 1963년 한식날 삽을 넣어, 1966년 고향 난실리 뒷산에 집을 지었다. 이른바 편운재(片雲齋)’.

나는 평생에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엔 집을 짓지 않으려 했지요. 다시 말해서 변화무쌍한 이 인간 세상엔 집을 짓지 않으려 했지요. 그저 뜬구름처럼 지나가는 거! 이러한 시간의 나그네를 철두철미 지키려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님이 돌아가셨어요. 난실리 뒷산에 모셨지요. 이 때 사람은 죽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나도 죽으면 이 산에 묻히는 거! 그래서 어머님 무덤이 있는 솔밭에 삽을 넣어서 집을 짓기 시작했지요. 남의 도움 받지 않고 순수한 동기, 순수한 돈, 순수한 노동으로 한 3년 걸려서 대충 만들어 놓았어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미래시 시인회의 회원들이 매년 식목일을 기해서 식수(植樹)도 할 겸, 편운재를 찾곤 했다. 그 때마다, 조병화 시인은 어머님 무덤을 정성껏 손질하고 계시다가 초롱꽃처럼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시곤 했다. 그 때,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신, 조그만 자기 접시 하나를, 나는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초롱꽃은 깊은 산 풀밭에 산다. 번거로운 도시를 떠나, 구름이 머무는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그처럼, 고향 뒷산 장재봉(長才峰)에 산막을 짓고 머무는 조병화 시인은, 아무리 보아도 초롱꽃이다. ()을 울려 그리운 이를 부르고, ()을 밝혀 정다운 이를 기다리는 이 땅의 초롱꽃이다.

 

여담으로, 조병화 선생님이 타계하시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미래시 시인회의 회원들이 매년 식목일을 기해서 식수(植樹)도 할 겸 선생님을 뵐 겸, 편운재를 찾곤 했다. 그 때마다, 선생님은 어머님 무덤을 정성껏 손질하고 계시다가 초롱꽃처럼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시곤 했다. 이보다 더 큰 베풂이 어디 또 있겠는가. 그야말로 베풂의 본보기, 조병화 선생님이시다. 그 때,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신, 조그만 자기 접시 하나를, 나는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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