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물봉선과 김초혜 시인

시조시인 2013. 9. 13. 05:27

물봉선과 김초혜 시인

 

김 재 황

 

 

부푼 마디 사이에 보이는 물빛 시름 한 방울, 갸름한 잎 사이에 보이는 노을빛 아픔 한 자락. , 손이 닿으면 터져 버리는 그 순결한 진실이 핏빛 사랑 하나를 깨우는 물봉선이여.

한여름에서 초가을까지 꽃을 피우는 물봉선은, 그 입술이 붉디붉어서 누가 보아도 뜨거운 정열을 지닌 듯싶다.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성싶다. 어느 핸가 늦여름에, 나는 경기도 광릉수목원 숲길을 거닐다가 무리 지어 붉게 피어 있는 물봉선을 만나고는 깜짝 놀랐다. 어쩌면 그리도 같을 수가 있을까. 그 정열이, 그 사랑이 어쩌면 그리도 닮을 수가 있을까. 열에 들뜬 물봉선의 붉은 뺨을 보는 순간, 나는 김초혜(金初蕙) 시인을 떠올리고 말았다. 아니, 김초혜 시인의 사랑굿을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물봉선은 갈데없는 김초혜 시인의 이미지가 아닌가.

 

내 한숨 바람 되어/ 그대 목에 감기어 들면/ 그게 난 줄 알아/ 모른 체

비켜 주오// 살을 베어 살을/ 벌지 못하듯/ 물이 피가 될 리 없겠지마는/

잊은 마음 전혀 없어/ 바람이려오// 몇천 년을 살려고/ 그대 나의/

기쁨이어서는/ 아니 되오// 허리 묶인/ 홍사(紅絲) 풀어내고/ 나도 그대의

/ 꽃이 되고 싶으오// 돌을 심어 싹이 나도/ 아니 오시겠오/ 바람 불면/

멀어 있는/ 달로 오시게.

----------- 작품 사랑굿 10’ 전문

 

물봉선은 습한 자리에서 자생하는 한해살이풀이다. 우리나라 산이나 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가지를 잘 친다. 줄기가 곧게 자라지만 질이 연해서 쓰러지기가 쉽고, 줄기와 가지가 붉은 빛을 띠고 있어서 연민(憐憫)의 정을 갖게 한다.

나는 그 슬픔을 가늠하다가, 어쩌면 누구를 가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것도 이 세상에서는 만나지 못할 사람에게로 향한 슬픈 기다림.

그렇다면 김초혜 시인은 누구를 그처럼 기다리고 있는가. 슬픈 기다림은 대체 어떤 것인가.

내 나이 열 살 안쪽이던 때, 625동란이 일어났어요. 그 무서운 전쟁은 내 인생의 절반쯤을 도둑질해 가 버렸지요. 아버지는 무슨 영문인지 난리 중에 평소 당신이 하던 일과는 거리가 먼 C시의 경찰서 경감으로 내려가시겠다고 했어요. 주위 사람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너무나 엉뚱하게도 그런 단안을 내리신 것이었지요. 평소의 아버지는 노래를 좋아하시고 부드럽고 온화한 분이셨는데……. 그러니까 아버지가 경찰에 들어가게 된 것은 14후퇴 바로 전인 12월 중순 경이었고, 공비 토벌을 따라 나선 것은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던 12월 말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경찰 근무 일수는 모두 합쳐 15일 정도였고, 경찰옷은 한 번도 입지 않으셨는데, 납치를 당하셨는지 전사를 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날 떠난 아버지는 지금까지 소식이 없는 채, 전사한 것으로 간주되어 지금 국립묘지에 계시지요.”

그날 이후, 김초혜 시인은 슬픈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쪼그리고 앉아서 달을 보면, 그 구름 속에 아버지가 있었다. 그는 불현듯 달님에게 소원을 빌면 성취된다는 동화를 생각해 내고,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오래도록 빌었다. 밤마다 그의 기다림은 붉게 채색이 되었다. 둥근 달이 차츰 닳아지기 시작해서 접시 엎어놓은 것처럼 새벽 서산마루에 걸리고 말면 겹으로 설움이 밀려들었다. 그러다가 해가 바뀌어 전쟁은 끝났어도 그의 아버지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여고생 시절에도 아버지는 무시로 사무치는 그리움을 토해 놓고 가는 무정한 분이셨지요. 며칠씩 눈이 지천으로 내려 쌓이고 달이 차갑고 중천에 박힌 밤이면 무슨 열병 환자처럼 청주시를 가로지르는 무심천 강변을 헤매며 아버지의 음성을 줍고 그러다가 엉엉 목을 놓아 울어 버리고 싶은 절박감을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로 달래야만 했어요.”

물봉선의 잎은 마름모꼴에 가까운 달걀꼴 또는 넓은 바소꼴인데 서로 어긋맞게 돋는다. 짧은 잎자루를 가지고 있어서 줄기와 가깝지만, 잎의 가장자리에 많은 톱니가 있어서 쓸리는 아픔이 있다.

어쩌면 좋지? 물봉선의 붉은 줄기가 아버지에 대한 슬픈 기다림이라면, 그 예리한 톱날을 지닌 잎사귀는 어머니에 대한 슬픈 그리움일 테니까.

김초혜 시인의 어머니는 전쟁미망인으로서 여자 혼자의 힘으로 그 황량하고 암울한 전후의 세월을 살며 자식들을 훌륭히 키워 냈다.

비 내리는 세월을 사시는 동안, 단 한 번도 어머니는 그의 희노애락을 자식들에게 보인 적이 없으셨어요. 바위를 무너뜨리는 산이 있어도, 돌을 던지는 어두운 날이 있어도 결코 흔들리지 않으셨지요.”

그 어머니는 그 이후 20여 년을 부지런히 살고 그에 맞서 속으로 남편을 그리며 침묵으로 살다가 쉰 넷이란 아직 젊은 나이에 뇌출혈의 병명으로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너무나 허망하고 너무나 어처구니없게 부모를 잃고 난 후, 김초혜 시인이 삶의 괴로움과 운명의 혼돈에 사로잡혀 있을 때, 체념의 고독을 권고한 것은 역시 저 하늘에 말없이 뜨는 달이었다.

김초혜 시인은 194394일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다. 그와 나는 태어난 시기가 비슷하므로, 나는 그의 유년 시절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일제말기에 태어나 해방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었던 그 시절. 누가 더하고 누가 덜하고 없이, 모두가 살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을 쳤던가.

어렵던 어린 시절이 가고, 여고 시절이 되자, 그는 비로소 그 가슴에 뜨거운 불이 붙기 시작했다.

나는 여고 시절을 통하여 섭씨 삼천도의 열정으로 내 목숨을 사랑했고, 삼천도의 냉정으로 내 목숨을 학대하려 했었지요. 그래서 나는 그 누구보다 꿈을 많이 가진 여학생이었고 그 꿈들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 누구보다 진한 노력을 바쳤는지 모릅니다. 나는 시를 쓰고자 했고 그림을 그리고자 했고, 음악을 하고자 했으며 서예를 익히고자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신사임당을 능가하는 여인이고자 하는 터무니없는 욕심을 가슴속에 가득 품고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 잠시도 나를 방치하지 않았어요.”

이렇듯 김초혜 시인의 가슴에서 일어난 불은, 20대에 들어가서 더욱 크게 불꽃을 일으켰다. 청주여고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재학 시절이었다.

황혼의 색깔마저도 보랏빛으로 바뀌고 엄동 하늘의 별빛에서 고독의 눈물을 따던 나는, 릴케를 열망하던 시를 쓰는 겁 없는 시건방진 계집애였어요. ‘고독을 마시며 바다 속보다 더 어두운 고뇌를 앓던, 죽음을 초월한 영생의 시인 릴케여. 나의 시를 위하여 어느 한순간만이라도 무릎을 꿇어라.’ 나는 이렇게 소리 없는 부르짖음을 가슴 가득 안고 강의실보다는 아카시아 독한 향기에 덮여 캠퍼스 구석에서 시간을 보냈고, 캠퍼스보다는 어느 침침한 살롱의 구석 자리에서 온 우주의 고뇌를 송두리째 안고 우거지상을 짓곤 했지요.”

 

얼굴조차 잊었다/ 생각할수록 더욱 멀어질 뿐/ 빈 얼굴만/ 세월에 걸려 있다

// 바람이 불고/ 들끓는 아픔이/ 일상을 몰아치면/ 거울 속에 하늘/ 그게

당신이다// 눈먼 사람같이/ 귀먹은 사람처럼/ 내게 오는 가능성/ 돌아와 모른

/ 빗겨 지난다// 그의 기억은/ 젊은 나이로/ 살게 한다// 육순이 지난대도

당신의 가슴에/ 피어나는 꽃이다.

------------- 작품 환영(幻影)’ 전문

 

김초혜 시인은 대학 2학년 때에 시인으로 등단했다. , 1964현대문학지에 작품 ’, ‘문 앞에서’, ‘4이 추천되었다. 그 후, 시집 떠돌이별로 제21회 한국문학상을, 그리고 시집 사랑굿으로 제18회 한국시인협회상을 받았다.

물봉선의 꽃은 가지 끝마다 네댓 송이가 나와 핀다. 그 생김새는 봉선화와 비슷하고 빛깔은 보랏빛이다. 물론, 노란 꽃이 피는 노랑물봉선이 있는가 하면, 흰 꽃을 피우는 흰물봉선도 있다. 그 외에도 산물봉선’, ‘제주물봉선따위가 있다. 이 꽃을 보면, 분명히 여성적이고 사랑이 가득한 모습이다. 게다가 열매가 익었을 때에 앞으로 다가서면, 깜짝 놀라서 스스로 씨를 터뜨려 던지는 모습이, 여인의 심성을 그대로 쏙 빼어 닮았다. 톡톡 튀는 여인 같은 꽃. 그러니 이 물봉선을 어느 누가 사랑하지 않으랴.

그렇다면 김초혜 시인의 사랑관은 어떠한가? 그 사랑의 정의는 어떠한가?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나와 아무런 연고도 없는, 그러나 언제인가는 나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르는, 가엾은 사람을 단 한 명이라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 누구도 모르게 진정한 사랑을 베풀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는 사랑을 일러, ‘사랑이라는 것은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뒷면으로 뒤집어 들고서 상대방과 자기의 얼굴을 비춰 보는 데서 시작된다. 사랑은 예리하게 날이 선 칼날 위에 발라진 꿀이다. 꿀을 핥는 동안에는 혀를 베게 되는 위험을 모른다.’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사랑이라는 것은 마음을 감동시키고 붙잡는 신()이다. 이해될 수 없는 것, 도저히 마음으로 표현될 수 없는 것, 철저하게 불완전한 것, 그러나 아주 작은 착함에도 큰마음을 가지고 서로 온전히 밝아지기 위해 순수한 성의와 진실을 다하는 것, 그러는 동안 빈 들판에 피는 꽃이 사랑이다.’라고 정의한다. 또 더 나아가, ‘사랑은 색깔과 냄새와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것들은 사람에 따라서 각기 다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두 밝은 색깔, 풋풋한 냄새, 탄력 있는 모습이라는 점이다. 칙칙한 색깔, 퀴퀴한 냄새, 시들은 모습이 되어 버렸을 때, 그걸 굳이 사랑이라고 부르진 않는다.’라고 그는 밝히고 있다.

꽃과 같이 밝은 색깔로 피어나는 마음. 꽃이 이슬을 머금듯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마음 또한 사랑의 모습이다.

물봉선은 잎사귀와 줄기, 그리고 뿌리를 약재로 사용한다. 생약명으로는 야봉선(野鳳仙)’, ‘좌녀초(座挐草)’라 부르는데, 잎과 줄기는 해독과 소종작용을 하기 때문에 종기 치료와 뱀에 물렸을 때에 쓰면 좋고, 뿌리는 강장효과가 있으며 멍든 피를 풀어 주는 효능 때문에 산후의 어혈로 인한 각종 증세의 치료약이 된다.

남의 아픔을 그냥 보고 있을 수만 없는 마음, 무엇인가는 그들에게 위안을 주어야만 한다는 생각. 그것은 바로 시인의 마음이요, 시인의 생각이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들이 의도적으로 시가 되어 탄생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누가 시켜서 시를 쓰는 것은 아니었어요. 누구와 경쟁을 하기 위해서 쓴 것은 더더구나 아니었어요. 쓰고 싶어서 쓰고 나면 배가 부른 듯하여 쓰기 시작한 게 시였어요. 언제부턴가 이 보수 없는 작업을 시작하면서부터 내 가슴엔 난초가 피기 시작했어요. 어느 세월이 어떻게 흐르고 어떤 세상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내 가슴에 피움짓는 난초가 시들 리 있을까요. 퇴색할 까닭이 있을까요. 아무리 험한 환경, 아무리 고달픈 분위기에 시달리어 괴로워도 어찌 모략을 익히고 아부를 배울 수 있을까요.”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지닌 것은 꽃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것은 시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꽃과 같은 시인이여, 시인과 같은 꽃이여.

 

 

깨어남과 잠든 것이/ 흙과 꽃의 가름임을/ 한마음에 두게 되었습니다/

꽃 속에 누운 얻음이/ 얻음이 아니고/ 산 속에 누운 잃음이/ 잃음이 아닙니다/

자랑이던 것이 상처가 되어/ 빈 터에 걸려 있습니다/ 빛 아닌 빛이 빛이라면

/ 구하던 만큼 버리고 싶습니다.

------------ 작품 일기 7 ’ 전문

 

사랑은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김초혜 시인은 그렇기에 만남을 소중히 여긴다. 그러한 만남을 소중히 여길 뿐만 아니라, 소중히 마음에 간직한다.

어둡고 괴로운 인간 세상을 살아가면서 잠깐씩이나마 반짝이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 있다면 그건 좋은 만남이 아닐까 싶습니다. 무엇과의 만남이든 만남은 싱그러운 것입니다. 자연과의 만남도, 진실과의 만남도, 슬픔과의 만남도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그건 새로운 세계, 그러면서도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문()이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불빛을 찾아낸 반가움, 그런 반가움이 좋은 만남의 진실한 얼굴입니다. 병들고 늙고 끝내는 죽어야 하는 삶의 여정 속에서 만남이라는 축전(祝典)이 없었다면 우리의 삶은 그 얼마나 지루하고 삭막할 것이겠습니까.”

그는 부모와 형제를 비롯해서 남편과 자식으로 이어진 만남, 그리고 스승과 친구들의 만남이 모두 사랑의 열매로 영글고 있음을 안다. 그래서 그는 시를 쓰면서 그의 시를 누군가가 읽고 그의 마음을 만나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 누군가가 그런 만남을 지어 준다면 그는 비로소 또 하나의 생명으로 탄생하는 것이라 믿는다.

여름 들길을 걸으며 물봉선을 만나고 그 앞에서 김초혜 시인의 시 한 구절을 읊는다면, 그보다 더한 성취가 어디에 또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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