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꽃과 고은 시인
김 재 황
이 세상의 온갖 바람 속에서 네 생명은 태어났으니, 이 세상의 온갖 바람 속에서 네 영혼은 아름다워라. 높은 산으로 올라가서 그 모습 쓰러지지 않고, 낮은 자리로 내려와서 그 마음 더럽혀지지 않아라.
한여름, 산을 올라가서 만나게 되는 바람꽃은 언제나 큰 감동을 준다. 그 모습과 이름이 어쩌면 그렇게도 잘 어울리는지 감탄을 하게 되고, 그 꽃의 순결성에서 더없는 연민의 정을 갖게 된다.
세상의 바람이란 바람은 다 머금은 듯한 그 눈빛, 그 찢어진 잎사귀가 거센 세상의 바람을 잘 암시해 준다. 그래서 나는 바람꽃을 볼 때마다 고은(高銀) 시인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사람처럼 많은 바람을 간직한 이가 또 있던가.
김승희 시인은, ‘세상의 바람의 이름을 다 합쳐도 끝끝내 명명되지 않는 바람, 바람의 이름들보다 더 큰 바람이어서 도무지 무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그런 정체 불명의 바람이 이 세상에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그리움과 공포의 불안을, 고은 연대기를 쓰는 앞자리에서 황당하게 불쑥 다시 그것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하고 자문한다.
우리 한 덩어리 얼싸안는 날/ 바람아 제 바람아 석달열흘만 불어라/ 천지의
물 거룩하게 뒤집혀/ 물결 일어라/ 여기 고려의 자식 길러/ 출무성히 길러/
하늘가 먼 세월 다하여 꽃피는 나라/ 나비 하늘하늘 노는 나라/ 총검 녹여/
맨살의 흙가슴 한 삽 두 삽 뜨는/ 삽이어라/ 어찌 삼천리 땅의 이 벅찬 역사/
이 아니 자랑일손가.
------------ 작품 ‘아침이슬’ 중에서
고은 시인의 바람은 우선 그의 다양했던 직업을 통해서 엿볼 수 있을 듯하다. 1951년, 그가 18세 되던 해,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가 군산으로 돌아와서, 그는 미군 제21 항만사령부 운수과 검수원으로 취직을 한다. 그러나 얼나 후에, 직장을 그만두고 옥구군 대야에서 엿장수 생활을 하다가 친척이 설립한 군산북중학교에 국어 및 미술 교사로 특채가 된다. 그것도 잠깐, 그는 19세가 되던 해에 ‘혜초’라는 승려를 만나게 되어 출가(出家)를 한다. 출가 후, 바람의 탓인지, 그의 법명이 여러 번 바뀐다. ‘중장(中藏)’에서 ‘일초(一超)’로, 그리고 ‘일초’에서 ‘분마(奔馬)’ 또는 ‘바람’으로, 또 ‘분마’에서 ‘무단(無丹)’으로, 그리고 스스로를 ‘파옹(波翁)’이라 칭하기도 했다. 승려가 되고서도 그는 전국 각지를 떠도는 행각승으로 방랑을 한다. 그러다가 서울에서 총무원장을 맡게 된 효봉 스님을 따라 상경하여 총무원 간부와 교구 본사 주지, 불교사 주간을 거쳐 불교 신문 초대 주필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나이 28세 때, 그는 종단의 현실에 실망하여 평승려로 돌아갔으며, 마침내 그 다음해에는 ‘한국 일보’에 환속 선언을 하기에 이르른다. 환속 후에는 제주시 화북동에 도서관을 설립하고 관장을 맡았으며, 금강 고등 공민학교를 개교하여 교장과 국어, 미술 교사직을 맡았다. 그 후, 그는 서울로 올라와서 본격적인 시작(詩作)을 하게 된다. 물론, 서울에 와서도 ‘동화 통신’에 부장 대우로 한 달에 15일만 출근하기로 하고 취임하였으나, 몇 달 뒤에 권고 사직을 당하였다. 이 모두가 그에게 있어서 ‘들바람’이었다.
바람꽃은 미나리아재비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로, 키는 30cm까지 자란다. 몸 전체에 거친 털이 돋았으며, 잎은 손바닥 꼴로서 뿌리에서 무더기로 난다. 긴 잎자루를 지닌 잎이 세 갈래로 찢어지고, 작은 잎마저 다시 두세 갈래로 찢어져서 거세었던 바람의 아픔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 영혼이 순수하고 맑아서 한여름에 흰 꽃을 피운다. 그런데 꽃잎처럼 보이는 게 알고 보면 모두 꽃받침이다. 세상을 노래할 수 있는 입술을 지니지 못한 꽃. 그것은 아마도 고은 시인의 슬픈 유년과 무관하지 않을 성싶다. 그렇다. 고은 시인의 20대가 ‘들바람’의 시기였다면, 그의 유년은 ‘물바람’의 시기가 분명하다.
고은 시인은 1933년 8월 1일 현재의 군산시 비룡동 138의 1번지에서 아버지 고근식(高根植)과 어머니 최점례(崔點禮)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다정다감하고 정이 많아서 자식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였지만, 어머니는 원래 무뚝뚝하고 말이 없는 편이었다. 아니, 어머니는 그를 사랑할 여유가 없었고, 특별히 차가운 성격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암반․돌․목석 같은 그런 분이셨다. 더욱이 그 당시는 일제의 말기였으니, 그 배고픔이 어떠했겠는가.
“참으로 가난했지요. 소나무 껍질을 벗겨서 그것을 씹어먹었지요. 띠 뿌리도 캐어다가 그것도 씹어먹었지요. 그러나 아무리 배가 고파도 싸가지 없는 이 시대의 겨울잠 자는 개구리를 잡아먹지는 않았지요.”
1945년, 그가 12살 때, 해방이 되었다. 그는, 국문을 알고 있어서, 초등학교 4학년으로 월반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에게 돌연한 일이 생겼다. 친일파 교장이 부임해 오자, 그를 쫓아내는 동맹휴학의 주동자가 된 것이다. 그는 그 일 때문에 희망하던 군산 사범학교를 못 가고 군산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때 그는 미술 교사의 영향을 받아, 그림에 열중하게 된다. 지금도 6․25전쟁이 없었더라면 그대로 화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그는 회상한다.
고은 시인의 유년 시절이 ‘물바람’이었다면, 그의 승려 생활은 단연코 ‘산바람’이 아닐 수 없다. 바람꽃이 높은 산 습한 자리에서 피어나듯,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그에게는 승려의 운명이 지워져 있었는지 모른다.
“6․25에 의해 입산, 4․19를 지나 하산이라는 나의 승려 시대 10년은 사실인즉 승려도 못 되고 시인도 못 되는 방황으로 채워지고 만 셈입니다. 이 땅의 자학과 독선이 끝내는 60년대의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으로 되고, 나는 그 허무의 매혹 이외의 어떤 것에도 적의를 뿜어 댔지요. 어쩌면 식민지 초기 망명가들을 사로잡은 파괴 주의자로서의 허무가 정치 행위가 아닌 시를 통해서 이어지는 형편인지도 모르거니와 나는 그것을 내 삶과 죽음을 장식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어요. 아니 그보다는 50년대 전후의 총체적 파괴야말로 허무 그 자체와의 일치에 직결되었던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 그에게 어찌 자살의 유혹이 없었겠는가. 그 찢어진 바람꽃의 잎사귀처럼 그는 네 번씩이나 자살을 기도했다. 그 때마다 번번이 미수에 그치고 말았지만.
그의 첫번째 자살미수 사건은 1951년 그가 미군 제21 항만 사령부 검수원이었던 시절에 발생했다. 그는 자살할 결심을 하고, 술을 마신 뒤에 부두로 나가, 정박해 놓은 배와 부두 사이에 몸을 던졌다. 그러나 갑판에 있던 일본인 항해사에게 목격되어 구조되었다. 두번째는 그 얼마 후에 엿장수 노릇을 할 때였는데, 귀에 청산가리를 붓고 자살을 기도했으나, 한쪽 귀의 고막만 녹아 버리고 목숨은 건졌다. 세번째는 1963년에 벌어졌다. 자살할 결심을 하고 서울을 떠나 목포에서 제주행 가야호를 탔다. 승객들이 다 자는 시간, 커다란 돌을 줄로 묶은 후에 그 밧줄을 몸에다가 매고 바다로 뛰어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대로 거기에서 잠을 자 버렸다. 그가 눈을 뜨니까, ‘뚜우’하고 뱃고동이 울기에 보니까 제주의 항구 ‘산지포’가 보이더라 했다. 1970년 가을, 그는 네번째의 자살을 결심했다. 정릉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 낙엽을 모아서 누울 자리를 만든 후에, 약을 먹었다. 그런데 마침 그 날 그 곳에서 예비군 특별 훈련이 있어, 그는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이렇듯 끈질긴 그의 목숨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바람은 멎지 않았다. 이번에 불어닥친 것은 그 무시무시한 ‘칼바람’이었다.
어느 날, 그는 신문에 난 전태일 분신 자살 사건을 읽게 되었다.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못 죽었는데 이 사람은 왜 죽었나?’ 고은 시인은 비로소 우리 민족의 현실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70년대 벽두, 나는 이제까지의 예술 주의를 청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떤 이유로도 그 죄과를 가려 줄 수 없는 유신 시대의 개막은 나 자신의 역사에 대한 열정까지도 필요로 하는 싸움을 낳은 것이지요. 나는 새로 조국을 발견했고 갈라선 민족과 복합적인 질곡으로 살고 있는 민중의 현실을 각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문학에서 인식과 실천의 문제가 한층 더 절박했어요.”
40세가 된 고은 시인에게 전사적 재탄생이 이루어진다. 그가 자유 실천 문인 협의회를 창립하여 초대 대표 간사로 활약하던 중, 그는 체포 구금되어 고문을 당하고 풀려 나온다. 풀려 나온 후에 민주 회복 국민 회의의 문인 대표로 참가하면서 이 때부터 경찰서 정보부의 구금, 유폐, 연행이 다반사가 되었다.
1975년 고은 시인은 대통령 긴급 조치 9호 선포로 칩거를 당하고, 1977년 민주 구국 헌장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 및 유폐되었으며, 1978년 원주 집회 사건으로 10일간 구류되었는가 하면, 1979년 카터 대통령 방한 반대 시위 주도로 구속과 투옥되었고 그 당시 구타를 당해서 청각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1980년에는 내란 음모 및 계엄령, 계엄교사죄로 구금되었다가 1982년 8․15사면으로 석방되기도 했다.
“1980년 5월 17일 밤 자정, 나의 서재는 수사관들의 가택 수색으로 난장판이 되었고 몇 권의 책과 메모 따위를 증거물로 실어 갔습니다. 주무 수사관이 나간 사이에 어떤 때는 9명의 수사관이 나를 에워싸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한 사람이 ‘당신은 이제 끝장이야!’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계엄사 합동 수사 본부 지하 2층 감방으로 연행되어 간 것이지요. 신군부의 정권 탈취 과정에서 내란음모죄와 계엄법 및 계엄 교사라는 죄목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2개월 동안을 그는 햇빛 한 번을 못 보고 지냈어요. 손등에는 털이 났습니다. 엄청난 분량의 자술서를 강요받았고, 꼭 관을 세워 놓은 듯한 방에서 고통을 당했지요. 자신도 모르는 그 사건의 제목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었습니다.”
모든 죽음으로부터 삶으로 돌아가는 장엄한 부활로/ 너희들의 자유와 지혜의
관능으로 너희들의 집단으로/ 울릉도 독도 그 너머 한복판의 무한으로 가거라/
아 이 나라 욕된 시대 살아남지 않고 죽은 이들아/ 죽어서 집도 없는
무주고혼들아/ 혼이란 무엇이냐 다만 넋두리일 뿐 바람일 뿐/ 그것으로부터
과감하게 삶을 머금고 부활하라/ 저마다 다시 태어나 동해 몇억 조 파랑 앞에서/
어느덧 무거운 태풍의 먹구름 가버린 뒤의 달밤에/
하이얀 하이얀 동해 명사십리 모래밭에서 춤을 추어라.
------------ 작품 ‘조국의 별’ 중에서
고은 시인의 본명은 고은태(高銀泰). 그는 이름을 바꾸면서 ‘나는 이제부터 다른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빛나는 결의를 보였다. 그가 시인이 된 때는 1958년 25세가 된 해였다. 작품 ‘폐결핵’이 한국시인협회 기관지에 발표되고, 이어서 서정주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 11월호에 작품 ‘봄밤의 말씀’, ‘천은사운’, ‘눈길’이 발표되면서 그는 문단에 데뷔했다. 그는 지금까지(1994년 현재) 시집, 소설집, 평론집, 수필집 등 일백여 권의 책을 펴냈다. 그러나 이 책보다 더 많은 양의 저술이 그의 작업을 재촉하거나 대기하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요컨대 나는 문학 때문에 태어났고 문학 때문에 진작 몇 번이라도 죽어야 했던 삶으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필경 내 죽음마저도 문학 그 자체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 점에서 나는 한결 같은 문학주의의를 벗어날 길이 없어요. 문학이 가장 경계하고 배척해야 할 것은 거짓입니다. 문학이야말로 진실 그것의 최고 형태를 드러내기 때문에 어떤 거짓도 거기에 끼어들 수 없는 것입니다.”
고은 시인에게는 이제 ‘신바람’만 남아 있다. 문학에 온 정열을 쏟는 ‘창작의 신바람’. 1983년 5월 5일, 그는 이상화 교수와 결혼식을 올렸다. 수유동 안병무 박사의 집 뜰에서였다. 그 당시 쉰 살의 신랑은 벅찬 감회 때문인지 진지하고 핼쓱해 보였으며, 서른여섯의 화장 안 한 신부는 앳됐으나 창백하고 성스러워 보였다 한다. 하객은 백여 명, 모두 재야운동의 핵심적인 사람들이었고 창비쪽 문인들이 조금 초대되었을 뿐이라 한다.
고은 시인은 경기도 안성군 마정리 대림동산 장미골에 아담한 보금자리를 꾸몄다. 그의 집은 국도에서 한참 들어간 숲속에 있다. 대문에서 보면 붉은 이층집이지만 마당 쪽에서 보면 빨강 지붕에 흰 칠을 한 남불풍의 이층집이라 한다. 마당에는 분꽃, 백일홍, 천일홍, 맨드라미 같은 꽃들이 많이 피어 있단다. 그는 그림 같은 집에서 아내와 딸 ‘차령이’와 살고 있다.
그의 ‘풍운아’적인 삶도 이제는 막을 내리고, 앞으로는 그의 남은 생애에 그저 부드러운 ‘봄바람’만 불기를 바란다. 그리고는 가끔가다가 ‘신바람’을 일으켜, 보다 빛나는 문학의 금자탑을 쌓기를 바란다.
“민족문학은 반드시 세계문학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는 톨스토이의 문학이 러시아 민족문화인 것과 함께 세계문학이며, 그것도 영문학과 불문학 그리고 독문학 등의 서구문학을 능가하는 힘을 갖춘 것으로서의 세계문학인 것에 우리 민족문학을 번영시킬 수 있는 자존심의 경우입니다.”
바람꽃은 고은 시인의 이미지로 새로 태어나 우리들 가슴에서 더욱 아름답게 피어날 것임을, 나는 이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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