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꽃과 천상병 시인
김 재 황
땅을 기며 살아가는 온유한 마음들, 빛이 내리는 저 하늘을 향해 목마른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일까. 비스듬히 일어서고 있는 여린 줄기처럼 다시 쓰러져도 결코 멈출 수 없는 사랑을 꽃 피우고 있다.
봄철마다 보슬비같이 내리는 햇살을 받고 마냥 행복에 겨워서 웃고 있는 양지꽃을 보면, 봄소풍을 나온 어린이를 만나는 기쁨이 있다. 아, 그렇구나. 양지꽃의 그 얼굴. 양지꽃이야말로, 이 세상으로 잠깐 소풍을 왔다가 간, 천상병(千祥炳) 시인의 바로 그 얼굴이 아닌가.
천상병 시인은 이 세상에 소풍을 온 어린이답게 남들이 그냥 지나쳐 버리는 작은 일들을 통해 큰 기쁨을 얻었다. 그는 길을 가다가, 혹은 차안에서 예쁜 여자를 보면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또 아이들을 만나도 ‘요놈, 요놈, 요 예쁜 놈’하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만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대상이 누구든, 사람이 아닌 모든 물체라도 마찬가지다. 만났다 헤어지고, 헤어졌다 또 만나는 기쁨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즐거운 것이다. 길을 가다가도 여러 사람과 만난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고 기쁘지만,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대로 마주치면 그래도 눈길이 가는 사람이 있다. 모두가 살아 있기에 만나는 얼굴이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에도 눈길이 마주치면 마음속으로 외치며 반가운 정감을 느끼게 된다. 불가에서 말하는 인연이라고 해야 될지 아무튼 반갑다.”
이런 천상병 시인이, 한번은 어느 봄날 선글라스를 장만했다 한다. 그를 따르는 한 시인 지망생이 사다 준 싸구려 선글라스였는데, 그 선글라스를 말하는 천상병 시인의 얼굴은 늘 행복한 양지꽃의 표정이었다 한다. 그 이유는, 여름에 선글라스를 끼어 보니까 머리를 뚫어 버릴 것처럼 맹렬하던 그 잔혹한 햇빛이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순해지고 이 세상이 살기에 알맞은 온도와 습도 속에서 부드러워지더라는 거였다.
항상 이 세상이 봄같기만 하기를 바랐던 천상병 시인. 이 세상을 소풍 온 아이처럼 구경하며 살다가 간 천상병 시인. 그는 자기 주변의 세계에 만족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다.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 작품 ‘행복’ 전문
양지꽃은 장미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이다. 줄기가 비스듬히 옆으로 서고, 줄기와 잎에 긴 털이 있다. 이 털로 보아서도 솜털이 돋은 어린이를 생각하게 된다. 잎은 깃털 모양을 보이는 겹잎이다. 즉, 잔잎이 모여서 깃털과 같은 생김새를 만든다. 아무래도 하늘로 돌아가자면 날개가 있어야 될 테니까, 이 역시 ‘귀천(歸天)’을 노래한 천상병 시인과 무관하지 않을 성싶다. 잔잎의 수는 홀수. 크기가 고르지 않으며, 그 가장자리에 무딘 톱니를 지닌다. 이 또한 보는 이로 하여금 아픔을 느끼게 한다. 양지꽃은 산지에 난다. 북한의 일부 지역을 제외한 우리나리 각지 및 일본, 동부 아시아에 널리 분포하고 있다.
천상병 시인은, 1930년 1월 29일, 일본 히로시에서 아버지 천두용(千斗用)과 어머니 김일선(金日善) 사이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내가 왜 일본에서 태어났는가 하면 천석꾼의 아버지가 일본인의 사기에 휘말려 재산을 다 날리고 일본에 건너가 살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중학교 2학년 때 해방을 맞았다. 우리 식구는 곧 귀환해 마산에 정착했다.”
천상병 시인은 어릴 적에 몸이 약해서 늘 어른들의 걱정을 샀다고 한다. 4살 대부터 초등학교 2학년까지 진동에서 살다가 일본으로 건너갔던 그는, 해방을 맞자 또다시 마산으로 돌아와서 살았다. 그는 마산중학교 2학년에 편입했고 중학교 6학년이 되자, 어느 대학을 갈까 망설이다가 모든 학과를 종이쪽에 써서 멀리 날아간 것을 택한 게 서울대 상대였다. 그는 상대에 입학했지만, 학과 공부보다는 문인들과 어울려 지내는 게 일과였다고 한다.
양지꽃은 보통 4월부터 6월에 걸쳐서 핀다. 잎 사이로부터 여러 대의 꽃자루가 돋아 나와 그 끝에 몇 송이씩의 노란 꽃을 피운다. 하늘의 은총에 감사하며 기쁨의 꽃을 피운다. 5장의 둥근 꽃잎이 있고, 꽃자루에 약간의 잎이 생겨서 날갯짓을 한다. 하늘로 향한 확고한 믿음의 몸짓이 아닐 수 없다.
천상병 시인의 믿음은 반석 같았다.
“시인인 내가 조심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아닌 가치 없는 일에 사로잡힐까 그것이 걱정이다. 되도록 인생에 큰 무게를 주는 사실에 치중하여 그것을 시에 반영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고독해야 하기 때문에 언제나 음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 하느님은 나의 절대의 존재이다. 나는 고독할 때면 언제나 하느님을 생각하고 고독해지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니 어떻게 생각하면 언제나 고독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내가 시에서 무고독을 생각하는 것은 일면의 진실이 있다. 우리는 언제나 있는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고독하지 않다. 하느님은 언제나 나를 위로해 주신다.”
천상병 시인은 ‘늘 하느님이 나하고 함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한다. 가까이서 그의 몸짓, 발짓, 손짓을 일일이 지켜보시고 마음까지 읽어 내서 잘못하면 벌을 주시는 분이라고 무서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평생에 겪은 3번의 죽을 고비로 하느님이 벌을 주시고 또 살려내시기도 하셨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3번의 죽을 고비, 그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첫번째는, 그가 7살 때에 일어났다. 산에 나무를 하러 가는 형을 졸졸 따라갔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순간적으로 이제 죽었구나 생각했는데, 나뭇가지에 몸이 대롱대롱 매달려서 살아났다고 한다.
두번째는, 1967년에 벌어졌다. 세칭 ‘동백림 사건’에 천상병 시인이 연루되어 약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혐의인 즉, 천상병 시인이 동백림 사건의 핵심 인물이며 서울대 상대의 동기 동창인 강빈구가 간첩인 것을 알고 협박하여 돈을 뜯어냈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 후, 천상병 시인은 고문의 후유증에다 영양실조까지 겹친 상태로 떠돌다가 행려병자로 취급되어 서울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이 때 친구들은 그가 죽은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한 권의 시집조차 남기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긴 친구들이, 뜻을 모아서 유고시집 ‘새’를 발간하였다. 이로써 살아 있는 시인의 유고시집이 발간되는 일화를 남겼다. 여기에서도 천상병 시인은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졌다.
세번째는, 1988년의 일이었다. 급성 간경화증으로 또다시 죽음 문턱에까지 간 것이었다. 복수가 차서 배는 만삭의 임산부 같았고 멈추지 않는 설사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 개씩 기저귀를 갈아야 했다.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통고 받았으나, 천상병 시인은 기적적으로 소생하였다.
하느님이 이처럼 살려주신 목숨이니, 천상병 시인은 늘 주위의 작은 일에도 감사하며 살았다. 친구들에게 동료에게 아내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늘 고마움을 나타내며 살았다. 하느님이 늘 곁에 계시니 무엇이 두려울까. 그래서 자신의 불행을 잊고는 낙천적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를 연발하며 그 특유의 까치 웃음을 웃었을 것이다.
“급성 간경화로 응급실에 들어갔을 때, 그 병원 원장이며 절친한 친구인 정 박사가 들어왔어요. 남편은 몇년 만에 친구를 그런 모습으로 만나게 되니 아픔도 잊었는지 눈물을 흘리면서 큰 소리로 외쳤어요.
‘야 이 자식아. 이게 몇년 만이냐.’
‘이 자식 이 배가 뭐냐? 아들이냐 딸이냐?’
‘내 마누라가 애기를 낳지 않으니, 아들 딸 같이 낳겠다.’
반가운 해후에 처음에는 울던 남편이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며 실컷 웃었어요.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남편을 보고, 일주일 후면 죽을 사람으로 생각했었지요. 그런데도 남편은 그런 사실을 전혀 자각하지 못한 채 아이처럼 떠들고 웃어댔습니다.”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 씨의 말이다.
양지꽃의 잎사귀를 보면, 그 잎사귀 하나 하나가 달걀꼴로 어린이 같은 모습이지만, 잎가장자리에 무딘 톱니가 있어서 쓸리는 아픔을 느끼게 한다.
“무구한 것들은 인간의 말에 의하여 훼손되거나 엉터리로 규정되지 않는 지복(至福)을 누릴 권리가 있을 터인데, 천상병의 웃음소리와 그의 입가의 침버캐와 그의 주머니 속의 천 원짜리 두 장이 그러하다. 그것들이 모두 합쳐져서 이루어지는 천상병 시인은 ‘백치 같은’ 이라고 말해야 할 무구함과, 이 세상을 향해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도 열어 버리는 놀라운 개방성 위의 자유인이다. 그는 그 개방성과 무구함 위에서 다만 자유롭지만 바라보는 나에게는 그 자유는 멸종 위기의 자유이고 멸종 위기의 슬픔이다.”
김훈 기자의 천상병론(論)이다. 천상병 시인의 슬픔을 시에서 본다.
아가야, 왜 우니? 이 인생의 무엇을 안다고 우니? 무슨 슬픔을 당했다고,
괴로움이 얼마나 아픈가를 깨쳤다고 우니? 이 새벽 정처없는 산길로 헤매어
가는 이 아저씨도 울지 않는데…….
아가야, 너에게는 그 문을 열어 줄 엄마손이 있겠지. 아저씨에게는 그런
사랑이 열릴 문도 없단다. 아가야, 울지마! 이런 아저씨도 울지 않는데…….
------------ 작품 ‘아가야’
천상병 시인은 술을 마셨다. 그가 술을 좋아하는 까닭은 세상의 고달픔을 잊게 하는 게 술이기 때문이었다. 인생의 어지러움 속에 살다 보면 인생의 고통으로부터 잠깐 해방되고 싶은 욕망이 생기게 되니, 술은 인생의 해방제라는 것이었다. 부인 목순옥 씨는 이렇게 회상했다.
“남편과 살아오면서 가장 어려웠던 일 중의 하나는 술과의 싸움이었어요. 술, 정말 남편의 인생에 있어 술을 빼 버린다면 이야기가 되지 않을 정도로 술은 끈덕지게 남편을 따라다녔지요. 남편을 평생토록 잘 돌보겠노라고 스스로와 약속을 했던 나는, 남편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첫째도 둘째도 술과 싸워야 했어요. 남편에게서 술을 떼놓기 위해 화도 냈고 울기도 했고 벌을 주기도 해 봤어요. 그런데 사람의 힘으로는 역부족인지 아니면 내가 덕이 없어서인지 내 노력만으로는 당치 않았지요. 남편은 기어이 술로 인해 몸을 다쳤고 그 자신의 말대로 ‘하느님의 벌’을 받은 후에야 절제하는 애주가로 변했어요.”
하지만 천상병 시인은 시인이었다. 하늘에서 소풍 온 시인이었다. 이 세상을 사랑하고,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겼던 시인이었다. 약이 되는 양지꽃처럼 남의 아픔을 감싸주는 시인이었다. 양지꽃을 생약명으로 ‘연위릉(筵萎陵)’이라 하며 뿌리를 포함한 모든 부분을 약재로 쓴다. 지혈 작용이 있고, 허약한 체질을 다스리는 효능이 있다고 한다.
마음이 여린 시인. 그렇기에 천상병 시인은 눈물이 많았다. 양지꽃 잎새에 동글동글 맺혀 있는 이슬 방울을 볼 때마다, 나는 천상병 시인의 눈물 방울을 생각한다. 천상병 시인은 아름다운 음악만 들어도, 좋은 그림을 봐도, 반가운 친구를 만나기만 해도 주저앉은 눈꼬리에서 어느 틈에 눈물이 소리 없이 번져 나기 시작했다. 그렇듯 정이 많은 천상병 시인. 그러니 진실을 사랑할밖에.
“시는 가장 진실하다는 것이다. 거짓말하는 시는 시가 아니다. 시는 가장 진실의 진실이다. 우리는 진실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기쁨도 진실의 의미이다. 우리는 진실을 위하여 살고 있다. 인생의 진실은 여기저기에 깔려 있다. 이것을 표현하는 것이 시이다.”
순수하고 어린이 같은 시인, 천상병 시인은 이제 우리 곁을 떠나 훨훨 날아서 하늘로 갔다. 마치 놀러 나왔던 아이가 문득, 저물녘 가물가물 깔리는 땅거미를 보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듯 그렇게 그는 갔다.
1993년 4월 28일, 아침 식사 도중이었다. 천상병 시인이 너무 밥을 급하게 먹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장모님이 물 좀 마셔 가며 먹으라고, 주전자를 건네주었다고 한다. 그걸 받아서 벌컥벌컥 물을 들이키던 천상병 시인은, 갑자기 쓰러졌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천상병 시인은 평소에 말하기를, 하느님으로부터 팔팔까지 살다가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이 ‘팔팔’이 88세를 뜻한다고 믿고 있었는데, 나는 아무래도 ‘팔팔이 육십사’가 아니었나 여겨진다. 신기하게도 그가 예순네 살에 운명하였기 때문이다.
천상병 시인은 지금 의정부 시립 공원 묘지의 한 켠 양지바른 자리에 누워 영원히 깨지 않을 잠을 자고 있다. 그 묘소 주변에는 유달리 꽃이 많다고 들었다. 봄이 되면 그 곳에도 양지꽃이 피어날 게다. 우리는 그 꽃에서 이 세상을 어린이처럼 살다 간 천상병 시인의 영혼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또한 우리의 기쁨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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