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와 김후란 시인
김 재 황
비록, 이 낮은 삶이라고 하여도 그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모습이 진정한 사랑을 나타낸다. 따뜻한 햇살 아래, 아무런 근심을 지니지 않고 봄을 노래하는 모습이 진정한 평화를 느끼게 한다. 아, 이 세상에 사랑과 평화의 모습으로 피어나는 꽃, 민들레.
민들레의 이미지를 지닌 시인이라면, 김후란(金后蘭) 시인이 있다. 항상, 얼굴에 봄볕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 모습에서, 우리는 사랑과 평화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후란 시인은 분명 봄의 시인이다.
“시를 쓰고 싶은 밤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자꾸자꾸 써질 것 같은 밤이 있습니다. 그건 특히 먼데서 강물이 풀리는 어둑새벽의 한때, 어디선가 훈훈히 배어 나오는 상그레한 오렌지 맛의 봄기운, 지금 막 기지개 켜며 일어서려는 봄의 여신. 그 화사한 옷자락이 안개처럼 피어나는 시간. 이제 봄은 우리집 대문턱에 들어섰습니다. 아니, 내 마음 가운데 입좌한지는 이미 오랬습니다. 이제 곧 새록새록 연둣빛 잎사귀들이 일제히 작은 깃발처럼 펼쳐 나오고, 또 얼마 안 있어 온통 푸른 천지의 합창이 벌어지겠지요. 이 화기로운 봄의 찬가에 귀를 기울일 때, 자연의 슬기로운 입맞춤을 이맛전에 느낄 때, 투명한 나의 의지는 한 편의 사랑스런 기쁨을 갖습니다.”
김후란 시인은 누구보다도 봄을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그는 겨우내 매일 아침이면 봄이 오는 길목을 깨끗이 쓸고 맑은 손으로 영접하기 위해 봄을 기다린다.
대지가/ 향유(香油) 바르는 시각/ 유리창에 엉긴/ 어제를 닦는다//
어제의 매듭을 풀고/ 어제의 눈물을, 빗방울을/ 구석구석 닦아내어/
산정호수(山井湖水)를 내 방 앞에/ 끌어다 놓았다// 속눈썹이 자란/
이 땅 버들눈이/ 나를 들여다본다/ 봄을 기다리는 이의 속가슴을.
----------- 작품 ‘봄맞이’ 전문
민들레는 꽃상치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로, 우리나라 각지의 산과 들에 저절로 난다. 이른 봄, 묵은 뿌리에서 둥글게 자리를 잡고 방석처럼 잎이 돋는다. 잎은 주걱꼴이지만 가장자리가 깊게 갈라져 깃 모양을 하고 있다. 갈라진 잎조각이 세모꼴에 가깝게 끝이 뾰족해서,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그 가벼운 시심(詩心)을 읽을 수 있다.
김후란 시인은, 그가 27살이 되던 1960년, 문단에 데뷔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1959년 ‘현대문학’지에 시 ‘오늘을 위한 노래’로 제1회 추천을 받고, 1960년 ‘현대문학’지에 ‘문(門)’으로 제2회 추천을 받았으며, 이어서 ‘달팽이’로 제 3회 추천을 완료하였다.
김후란 시인의 본명은 김형덕(金炯德). 데뷔 당시, 그는 직장인 한국일보사 직속 부장이었던 신석초(申石艸) 선생이 그의 이름 ‘형덕’이 남자 이름 같다 하여 필명을 ‘후란(後蘭)’이라고 지어주셨다는데, 그 후에 ‘후란(后蘭)’으로 고쳤다 한다.
시인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천성으로 타고나야 한다. 어릴 때부터 무엇이 달라도 다르기 마련이다. 저 민들레처럼.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한 소녀였습니다. 여학교 1학년 2학기 초에 몸이 약해서 장기 휴학을 하면서 아버지 서재에 꽂힌 책을 모조리 읽었습니다. 책을 읽다가 피곤해지면 창가에 누운 채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을 한없이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 때부터 내 정신의 내부엔 고독이 들어앉았던 거예요. 커다랗게 흔들리는 등불을 보듯이 몇 시간이고 내 안에 침잠(沈潛)해서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이듬해 봄, 완쾌한 몸으로 등교를 했지만 나는 그전의 소녀가 아니었어요. 정신적으로 쑥 자란 새로운 모습으로 나 혼자만의 기쁨인 독서에 점점 더 몰입해 갔습니다.”
그 때 그의 학교 ‘부산사범(釜山師範)’에는 시인 이숭자(李崇子)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 선생님 수업 시간이면 난초 같은 신선함이 온 교실에 감도는 걸 느꼈다고 한다. 그는 상급반이 되면서 문예반 활동을 하며 삼인시집(三人詩集) ‘푸른 꿈’을 내었고, 교내 백일장에서는 장원(壯元)으로 뽑히기도 했다.
그의 문학적 자질이 시(詩) 쪽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건, 문단 선배들의 영향이라고 그는 여기고 있다. 서울대 사대(師大) 재학시에는 김남조(金南祚) 시인, 직장에서는 김용제(金龍濟) 시인과 신석초 시인이 모두 그의 스승이었다.
그의 시세계(詩世界)는 온통 봄빛이다. 그만큼 밝고 따뜻하다. 그는 시를 쓰는 목적과 방법에 있어서도 그 나름대로 명확한 해답을 얻고 있다.
“먼저 왜 시를 쓰는가 하는 자기 성찰을 해 보건대, 나도 모를 내적인 충동에 의해서 쓴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건 무심히 동경(銅鏡)을 문지르는 행위에 비길 수 있어요. 무심히 문지르다가 문득 들여다보았을 때, 거기 은은하게 혹은 영롱하게 비치는 내 얼굴을 발견하고 놀라는 기쁨, 이를테면 그런 기쁨이 시를 쓰게 하고 마음에 드는 시가 써졌을 때, 시인으로서의 자긍(自矜)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좀더 직접적인 표현을 한다면 시인의 역할은 이슬을 진주로 바꾸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시를 어떻게 쓰느냐 하는 문제는 극히 개인적인 자기 취향에 속하는 것입니다. 때와 기분에 따라 수시로 방법상의 변화를 볼 수 있어요. 나는 두 가지 방법을 다 쓴다고 할 수 있겠는데, 가령 묵화를 그리듯 한 호흡에 한 편의 시를 쓰는 경우가 그 하나입니다. 허나 대부분의 경우는 유화(油畵)하는 재미를 갖습니다. 조각처럼 하나의 오브제를 완성하기까지 겉으로 깎아 내리고 다듬는다기보다는 나의 경우는 캔버스에 첫 붓을 댄 후 안쪽으로부터 바깥쪽으로 발라 가지고 깎고 지우고 하면서 머릿속에 잡힌 어떤 윤곽이 제대로 형상화되도록 고민합니다.”
그의 시는 자연의 아름다운 생명의 미동을 잘 포착하여 따뜻한 정서로 감싼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러니 봄의 시인이랄 수밖에. 하지만 그의 봄을 향한 시선은 아름다움에게로만 향하지 않는다. 그해, 그 봄, 수많은 젊은 학도들이 산화해 간 3,4월을 그는 잊지 않는다.
무너진 둑 너머로 쓸려나오듯/한 줄기 흰 빛의 분류(奔流)를 타고/ 봄은 여기저기 분망한 아우성 속에/ 잊혀진 땅 위에 창조의 눈을 틔운다//
밀려가는 것은 다만 먼지였던가/ 그 속에 엉기어 몸부림치는/ 무너진
젊음의 손짓들인가/ 탈곡(脫穀)은 아픈 시련, 두고 기억하리라.
------------ 작품 ‘수반(水盤)의 꽃 속에’ 중에서
4월 경, 민들레는 잎이 뭉친 한가운데로부터 대여섯 개의 꽃줄기가 길게 자라나서 각기 한 송이씩의 노란 꽃을 피운다. 그 모습이 평화롭다. 물론, 민들레 중에는 흰 꽃을 피우는 종류도 있는데 ‘흰민들레’라고 부른다. 그 모습은 순결하다. 보면 볼수록 영락없이 김후란 시인을 닮았다.
김후란 시인은 1934년 12월 26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7남매 중에서 셋째 딸이었다.
“계절이 바뀔 때면 우리 어머니는 한층 바빠지셨어요. 온종일 재봉틀 앞에 앉아서 7남매의 옷차림을 바꿀 채비에 잠시도 쉴 새가 없었지요. 지금도 귓가에 맴도는 그리운 재봉틀 소리. 한 차례 놀다 들어오면 불러 세우시고 기장과 품을 맞춰 보시곤 했는데 그럴 때의 어머니 표정은 매우 진지하고도 우리만큼이나 즐거워 보였어요. 따르르따르르 울리던 재봉틀 소리가 멎을 때마다 우리 남매들은 번갈아 뛰어들곤 했습니다. 옷이 되어 가는 걸 보는 건 여간 신기하고도 재미있는 게 아니었어요.”
그의 여고 시절은 영혼의 불을 켜고 ‘나’라는 자아의식(自我意識)과 싸웠다. 그의 모교는 부산사범학교로, 남녀공학이었다. 그는 체육 시간을 싫어해서 운동장에서 활기 있고 시원하게 뛰놀아 보지를 못했다 한다.
1953년, 그는 부산에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가정과로 진학했다. 1․4후퇴 이후, 동대신동(東大新洞) 막바지에 판자 교실이 즐비한 가교사가 전부였다. 건물은 초라했지만 서울대생이라는 자부심으로 부푼 가슴에는 바다의 설레임이 있었다. 젊음과 의욕과 이상(理想)이 상승 작용을 하면서 끊임없이 바다의 유혹에 이끌렸다 한다.
그래서인지 김후란 시인의 바다에 대한 사랑은 유별나다.
“바다는 신비롭고 두렵고 아름답습니다. 마치 높은 곳에서 까마득한 벼랑 밑을 내려다보면 빨려들 듯 현기증이 일어나는 것처럼, 바닷가에 서면 그 큰 가슴이 팔을 벌려 날 쓸어 갈 것 같은 아찔함을 느낍니다. 나는 바다의 노여움을 모릅니다. 큰 배를 타고 깊은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는 일에서부터 기슭에서 보우트놀이를 즐기는 것조차 내 작은 심장은 허락하지를 않았어요. 맨발로 젖은 모래톱을 밟으며 찰랑거리는 물살의 희롱을 받아 주는 정도가 고작이었지요. 그래서 나의 바다는 언제나 유순하고 정답습니다. 바닷가 게는 호랑이가 무서운 줄 모른다는 듯이 바다의 핏발선 노여움에 부딪혀 본 체험이 없는 나에겐 한갓 무진장의 응답을 가진 미지(未知)의 바다일 뿐입니다.”
부엌으로 침입한 바다/ 도마 위에 바다가 출렁거린다/ 햇살에 도전하는/
갑옷을 벗기고 탁 탁/ 토막을 치기까지엔/ 진정 얼마간의 용기가 필요하다//
세계는 이미 눈을 감고 있다/ 바다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칼날을 물고
늘어지는/ 하얀 파도.
------------ 작품 ‘생선요리’ 전문
서울 환도와 함께 서울대학교 본교사로 돌아와, 당시 사범대학 문과는 을지로 6가에서, 이과는 용두동 교사에서 수업을 시작했다. 그의 용두동 교사는 훌륭하지는 못했으나 채광(彩光)만은 좋았었다 한다. 그 곳 교실에서 그는 김남조 시인의 강의를 큰 기쁨으로 들었다. 그분의 목소리는 나직하고도 힘이 있었으며 눈빛은 먼 바다로 이어져 있었다고, 그는 기억한다. 그 무렵, 그는 가정과 학생이면서 교지 ‘사대학보’에 소설을 쓰고, 경향신문 등에서 소설이 입선되고 있어서 장차 소설가가 될 것 같은 입장이었으나, 김남조 시인을 만남으로써 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다.
그 후, 그는 한국일보, 서울신문, 경향신문 등에서 문화부 기자 생활과 부산일보 논설위원을 역임하게 된다.
민들레는 꽃이 밝고 예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꽃이 지고 난 후의 모습도 아름답다. 꽃이 지고 나서 익게 되는 민들레의 씨에는 흰 갓털이 있어, 바람을 타고 멀리까지 날아간다. 그 모양이 마치 사랑을 전하는 ‘전도사’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사랑의 전도사? 그렇다. 민들레는 그처럼 아름답고 따뜻한 사랑을 지닌 꽃이다.
그렇다면 김후란 시인은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한 개의 화살로 가슴에 꽂혀 와 꼼짝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 뿌옇게 덮인 회색 구름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내리쏘아 나를 사로잡는 아찔함과도 같이 눈부신 환각으로 덮쳐 오는 것, 유독 선택받은 두 생명이 서로 섬광으로 얽히어 불꽃을 튀기는 황홀한 순간. 사랑은 현실적으로 고독한 인간을 더욱 고독한 자기만의 세계로 유폐시키면서 거기서 무한한 가능의 새 세계가 펼쳐지는 신비의 영지(領地)라 할까.’
뭐라 해도,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는 사랑이 가장 큰 사랑이리라 여겨진다. 민들레는 한방에서 ‘포공영(蒱公英)’이라 부르며 뿌리를 포함한 모든 부분을 약재로 쓴다. 땀을 내게 하거나 강장(强壯) 및 담즙의 분비를 촉진하는 효과가 있어서 기관지염, 늑막염, 담낭염, 소화불량, 변비 등의 치료제로 쓰인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 그야,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살 수 있나요?’ 또 묻는다. 그것은 아름답게 영혼을 가꾸는 방법밖에 없다.
김후란 시인은 아름다운 삶을 산다. 적어도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그 영혼이 민들레처럼 행복하게 피어난 것이 아닌가.
“아름다운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서 아름다운 것을 찾고 아름답기 위해서 아름다워지려고 합니다. 허나 살아가는 길은 화선지 두루말이를 펼치듯 그렇게 맑고 깨끗하기만 한 게 아니었습니다. 물방울 하나 튕겨도 얼룩이 지고 맙니다. 바람 한 자락 불어도 흙먼지가 일고 자칫하면 무참히 찢기기 일쑤입니다. 고운 물살을 휘젓고 지나가는 심술궂은 발길도 있습니다. 누군들 아름답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장미처럼 애틋하고 난(蘭)처럼 청초하기를 바라며 삽니다. 갓난아기의 솜털 보송한 뺨처럼 연연하고, 젖내 나는 숨결처럼 순결함으로 살고자 합니다.”
그는 교회 찬양회원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면 밤새도록 교인들 집을 순방하면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 노래를 부르던 적이 있었다. 민들레와 같은 사랑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도, 김후란 시인은 민들레 꽃씨처럼 그 많은 시가 온 세상에 날림으로써 보다 아름다운 민들레의 사랑을 실천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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