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절초와 정완영 시인
김 재 황
쓸쓸한 바람이 부는 가을, 먼 고향 언덕에서 그리움을 안고 마중하듯 피어나는 꽃이여. 반가움을 얼굴에 가득 머금고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는 꽃이여.
구절초(九折草)는 고향에 계신 할아버지 모습으로 피어나는 꽃이다. 그렇듯 의젓하고 너그러움을 한 아름 지니고 있는 꽃이기에, 나는 그 앞에서 더할 수 없는 아늑함을 느끼며 자못 어리광이라도 부리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이 구절초와 닮은 시인으로는 대체 누구가 있을까. 그야 말할 것도 없이 백수(白水) 정완영(鄭椀永) 시인이 있다.
“그는 스스로 통속적 시인으로 내세우기를 꺼려하고 있었다. 은사(隱士)로서 자적하며, 뒤안길에서 홀로 남몰래 각고하며, 시조에의 소명을 감당해 나갈 탈속(脫俗)의 자세를 단단히 갖추고 있었던 듯하다. 끝내 세상의 눈이 무디어, 그 때 그를 이끌어 세우지 않았던들, 우리는 이 시대에 그를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요,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우리 시조시(時調詩)의 전반적인 눈부신 성장을 가져오기는 영 틀린 노릇이었을 것임이 확실하다.”
박경용 시인의 말이다. 그렇다. 정완영 시인이야말로, 어쩌면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일지도 모른다. 그 음성으로나 그 모습으로나 그 삶으로나 모두가 은사의 것이요, 탈속의 멋을 지녔다.
저무는 먼 숲속에 싸락눈이 내리듯이/ 영혼의 허기진 골에 일모(日暮)는
쌓이는데/ 보채는 저녁 놀 같은 내 외로움이 있습니다.// 피 묻은 발자국을
두고 가는 낙엽들의/ 무덤으로 가는 길은 등불만한 사랑으로/ 오늘도 밝혀야
하는 내 설움이 있습니다.// 한오리 실바람에도 흔들리는 물결 속에/
차고도 단단한 물먹은 차돌처럼/ 말없이 지니고 사는 내 마음이 있습니다.
----------- 작품 ‘내 마음이 있습니다.’ 전문
사실, 구절초는 신식(新式) 꽃은 아니다. 구식(舊式)의 의미가 강하다. 그런 면에서, 옛 선비의 냄새를 물씬 풍긴다. 그러니, 그런 분이라면, 지금 정완영 시인밖에 없지 않겠는가.
“반세기가 아니라, 한 1세기쯤 미리 세상에 태어나서 살다가 갔더라면 평가는 마치 몰라도 내 자신 행복하긴 훨씬 더 행복했으리라고 늘 생각해 오곤 하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빠르고 바쁘고, 두들겨 부숴 버리고, 죽이고, 각박하고, 모든 것이 대형화한 채 인성만이 메말라가는 문명했다는 현대라는 살벌보다, 조금은 배고프고, 조금은 목마르고, 조금은 모자라고, 조금은 애달펐던 채로, 인정에는 배불렀던 한 1세기쯤의 그 세월을 살고 갔더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정완영 시인의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 올 듯하다.
구절초는 엉거시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이다. 들국화의 한 종류로, 산기슭의 풀밭에서 많이 만날 수 있다. 줄기가 곧게 서므로, 곧은 선비의 기상이 있다. 키는 30cm 정도. 뿌리와 밑동에서 나오는 모든 잎은, 깊게 깃 모양으로 갈라진다. 이 또한 하늘로 오르려는 선비의 몸짓을 보인다. 이를테면, 구절초는 그 근본부터 선비풍의 들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완영 시인은, 1919년 11월 11일, 경북 금릉군 봉산면 예지동에서 출생했다. 예지동은 ‘추풍령 높은 영마루에서 흰 구름 한 자락을 얹어놓고 걷노라면 절로 거문고 소리라도 들려 올 듯한 상념의 하늘 아래, 금 가고 땟국도 묻은 조선백자처럼 말없이 앉아 있는 마을’이었다. 즉, 경상도 중에서도 북단 추풍령을 등에 지고 소백산맥의 첫자리 융기봉(隆起峰)인 황악산(黃岳山)을 안(案)하여 앉은 고을이었다.
“내 고향은 경상도 중에서도 아주 오지, 멀리 황악진산(黃嶽鎭山)을 바라보며 추풍령 남록 한 자락을 깔고 앉은 대촌이었습니다. 5백호 가까운 호수도 호수려니와 2백 호가 넘는 즐비한 기와집들은 이 집들이 입고 있는 연륜과 연대(年代)로 하여 이 마을의 정감과 두량(斗量)을 더해 주기도 했습니다. 저잣거리가 아닌 순수한 반촌으로 이만큼 큰 대촌이 남대문 밖 삼남(三南)에는 없다는 이 마을에서 나는 대대문반(代代文班)인 문한가 (文翰家)의 16대손으로 태어났습니다.”
정완영 시인은 어릴 때부터 꽤나 총명해서 천자문, 동몽선습(童蒙先習)은 물론, 통감 12권, 소학, 대학까지를 한 해에 후딱 외워 버렸다 한다.
“우리 할아버지의 초달(楚撻)과 애휼(愛恤)과 관용(寬容)의 정은 준엄하여 높기가 위위한 산맥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천자문부터를 할아버님의 슬하에서 떼었을 뿐 서당 수학은 안 했었습니다. 책을 끼고 서당에 가서 ‘마상(馬上)에 봉한식(逢寒食)하니’를 매미 소리에 질세라 소리 높이 읽었을 뿐 정작으로 서당 선생에게는 글을 배운 적이 없었습니다.”
그 할아버님은 풍채가 좋으시고 늠름하신 키에 희고 긴 수염, 그리고 키보다 높은 청애장(靑艾杖)을 짚으셔서 그야말로 산신령의 모습이었다 한다. 할아버님은 어린 그에게 ‘관이라고 하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거추장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조심히 다루어야 하고, 조심해 다루지 않으면 다치기가 쉬운 것이다. 예로부터 이 관을 머리 위에 쓰는 것은, 매사에 다치기 쉬운 사람의 가는 길에서, 공경하고 조신(操身)을 잘 하라는 뜻이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그래서인지 그 할아버님은 항상 낮은 자리 낮은 집에만 앉으셨으며, 그에게 사는 법을 늘 그렇게만 가르쳐 주셨다 한다.
정완영 시인의 아버님 역시 그의 가문의 높은 봉우리셨는데, 팔순이 훨씬 넘어까지 계셨던 그 어른은, 귀 밑에 흰 터럭을 꽂고 돌아와 무릎을 꿇는 그 앞에선 언제나 광망(光芒)만 두르신 채 아득히 높은 대좌 위의 호신불(護身佛)과 다름이 없으셨다 하니, 과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어머님은 자식 사랑이 유난히도 극진하신 분이셨다 한다. 한번은 어느 추운 겨울, 그 어머님의 환후(患候)가 위중하시다는 급보를 받고, 그가 황급히 고향으로 올라갔을 때였다. 그의 발걸음이 뜰 앞에 이르자, 생각했던 거와는 달리, 그 어머님이 여윈 손으로 방문을 밀쳐 열고 무엇하러 왔느냐고 책망(?)을 하시더라는 거였다.
옛날 우리 어머님은/ 빨랫줄에 빨래를 널어야/ 비로소 하늘 문이/
열린 다고 하시었다/ 아득히/ 너무 푸르러/ 막막해진 하늘 문이.//
왜인지 나는 몰랐다/ 어린제는 몰랐었다/ 한 타래 다 풀어 넣어도/
닿지 않던 그 당사(唐糸)실/ 어머님/ 그 깊은 가슴 속/ 하늘빛을
몰랐었다.
------------ 작품 ‘어머님의 하늘’ 전문
정완영 시인이 자라난 고향에는 이제 16대가 한 자락에 누워 계신다. 할아버님, 할머님, 아버님, 어머님은 물론이요, 증조부, 증조모, 종형에 이르기까지 그가 모시던 지친만 해도 열 손가락이 모자라도록 산에 가서 잠들어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고향이란 아빠 엄마만이 자녀들을 기르며 사는 단세포 마을이 아니라 할아버님, 아버님의 석굴암 대불(大佛)과 할머님, 어머님의 관세음보살이 그 산천에 앉아 계시어 그 후광으로 자손들을 가호하고 있는 곳이 고향’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다.
구절초는, 9월에서 10월에 걸쳐, 가지 끝이나 줄기 끝에서 자라난 몇 개의 꽃대 위에 한 송이씩 꽃을 피운다. 보통은 흰 꽃을 피우는데, 때로는 슬픔을 머금은 듯한 연분홍빛 꽃을 피우는 개체도 나타난다. 그 꽃을 볼 때마다 나는 그 영혼의 순결성과 서러움에 가슴이 시려 온다.
아무래도 정완영 시인은 분홍빛 구절초보다는 흰 구절초를 더욱 닮았다. 높은 가을 하늘을 인 가을 고향에서 참을성 있게 피어나는 흰 꽃 구절초는, 누가 뭐래도, 시인의 심상이요, 선비의 모습이다.
정완영 시인은 오랫동안 한학 수업을 하면서 일찍부터 시조(時調) 창작에 전념하였는데, 1942년에는 그 일로 해서 일경에 검거되어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 향리에서 동인지 ‘오동’을 2집까지 간행했으나, 문단 데뷔는 늦었다. 1960년에 국제신문 신춘문예에 ‘해바라기’가 당선되었고, 그 다음해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조국’이 당선되었으며, 같은 해에 시조 ‘애모’ 등이 현대문학을 통해서 천료되었으니 말이다.
“섬겨야 될 조국이 없는 날에 내가 시조라는 나의 조국, 급기야 광복의 날은 돌아왔건만 사람마다의 가슴에 먹구름은 걷히지 않았습니다. 여순 사건이 일어나고, 대구 10․1사건이 일어나고, 6․25동란으로 이어지기까지 그 암울한 생각을 울며 읊조렸던 것이 후일에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나의 작품 ‘조국’입니다. 이만한 세월의 연력(年歷)을 겪어 오면서도 시조라는 작품을 들고 문단이라는 곳을 기웃거려 보지 못했던 것은, 내가 시골에 묻혀 살았던 고립무원(孤立無援)의 탓도 있었거니와, 그보다도 돈이거나 문단이거나 나를 허락지 않으면 책도 말고 문인도 말고, 하나의 초부(樵夫)로 묻혀 버리고 싶은 오기 때문이었습니다.”
박재삼 시인은 그의 작품을 ‘그 인생에서 건진 사념(思念)이 경험의 복잡한 곡절(曲折)을 겪어서 형상(形象)이 된 담담한 가락을 빚고 있다. 먼저 그 애조(哀調)와 절창(絶唱)이 용하게 한 자리에서 만나는 높은 기교(技巧)를 느낀다. 이것은 내용과 형식의 행복한 일치가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높이 평가한다.
높은 하늘 아래 피어서 온 우주를 껴안는 듯한 구절초. 그래서 정완영 시인 또한 사랑을 ‘우주 생성의 의지요, 만유에 편재(遍在)해 있는 빛이며, 사람마다의 가슴에 담겨 있는 핵보다 강렬한 에너지원(源)으로 규정짓는다. 그렇기에 사랑이 없었으면 만유의 생성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그 때문인가. 그의 믿음까지 넉넉하여, 종교에 안기는 게 아니라, 오히려 종교를 그 가슴에 안고 있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범종 소리는 크게 울리되 하늘을 돌아 산수(山水)에 와서 사무치는데, 교회의 종소리는 작은 목소리면서 비둘기처럼 하늘로 날아 흩어집니다. 천주교의 묵주(黙珠)는 장미 뿌리를 다듬어 쇠줄로 엮어 손에 쥐는가 하면, 불교의 염주는 보리수 열매를 따내어 실에 꿰어 목에다 걸어 둡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피 흘리는 것을 보이고 있고, 부처님은 연대에 앉아 그냥 미소인지 통곡인지 분간할 수 없는 것을 흘리고 있습니다. 교회당의 풍금 소리는 은혜에 대한 찬미로 들리는가 하면, 불전(佛前)의 목탁 소리는 청산을 쪼는 탁목조(啄木鳥) 소리로만 느껴집니다. 기독의 계명(戒銘)을 고삐를 잡고 사육하는 말이라고 하면, 부처의 계율은 고삐를 얹어두고 방목(放牧)하며 길들이는 소라고나 할까요?”
진실로 외로운 자(者)에겐 병(病)도 또한 정(情)이려뇨/ 세상살이 시들한
날은 자질자질 몸이 아프다/ 매화도 한 그루 곡조, 봄을 두고 앓는걸까.//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다 잃은 것만 같은/ 허랑(虛浪)히 보낸 세월이
돌아돌아 뵈는 밤은/ 어디메 비에 젖어서 내 낙엽은 춥겠구나.// 그 누가
주어준대도 영화는 힘에 겨워/ 시인이면 족한 영위(營爲)의 또 내일을
소망하며/ 한밤내 적막한 꿈이 먼 들녘을 헤맨다.
--------작품 ‘가을앓이’ 전문.
구절초는 줄기와 잎 모두를 약재로 쓴다. 시기적으로 보아, 9월 9일에 채취한 것이 가장 좋다고 하여, 구절초(九節草)라고 적기도 한다.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소화에도 도움을 주며, 주로 부인병을 다스리는 데 쓰인다. 특히 ‘월경불순’, ‘자궁냉증’, ‘불임증’ 등에 효과가 좋다고 한다.
내가 정완영 선생님을 처음 뵈온 것은, 1977년이라고 기억된다. 그 때, 나는 뒤늦게 시조공부를 시작해서 광화문 ‘초원다방’에서 선생님을 찾아뵙게 되었는데, 황송하게도 선생님께서는 내 설익은 작품을 보아 주시고, 게다가 몇 편 작품에는 ‘이만하면 괜찮다.’고 동그라미까지 쳐 주셨다. 하지만 몇 번의 만남에만 그쳤을 뿐, 나는 배은망덕하게 급히 서귀포로 떠난 채 소식 한 장 드리지 못했다. 그 후, 바람처럼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문단에 데뷔를 했으나, 나는 그 일로 너무 송구한 나머지 선생님 앞에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선생님은 나와는 고개 하나를 두고 사신다. 저녁에 잠깐이면 찾아가 뵈올 수 있는 거리인데도, 나는 번거로움을 드리기가 여간 송구해서 선뜻 선생님에게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한다. 요즘 선생님은 우산국, 울릉도의 향자목 단장을 짚으시고, 관악산 밑 굴참나무 숲을 지나, 바위너슬을 지나 약수터를 뒤로 하고 관음사(觀音寺) 맞은편 넓적한 반석(般石)을 자주 찾으신다고 하니, 나도 한 번쯤 그 곳으로 가서 선생님을 기다려 볼 심산이 있긴 하다. 그러나 앞에 나서기보다는 멀찍이에서 그 구절초와 같은 선생님의 모습을 가슴에 안아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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