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쥬르, 나폴레옹

(62) 조그만 배에 오르다

시조시인 2008. 10. 26. 02:35

(62)

   마침내 어머니는 조제프와 나폴레옹이 거주하고 있는 읍까지 도망쳐 갔습니다. 다행이 일우명지에 그들이 머무르고 있었나 봅니다. ‘일우명지’(一牛鳴地)는 ‘소의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라는 뜻으로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이릅니다.

도착하자마자, 보나파르트 가족은 코르시카를 떠나기 위하여 조그만 배에 올랐습니다. 코르시카를 위하여 싸워 온 보나파르트 집안의 사람들은, 같은 코르시카 사람들에 의하여 섬을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코르시카를 떠나는 그들의 심중에는 천사만려가 꼬리를 물었을 겁니다. ‘천사만려’(千思萬慮)는 ‘여러 가지 생각과 걱정’을 말합니다.

이제는 치추지지도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치추지지’(置錐之地)는 ‘송곳을 세울 만한 좁은 땅’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는 ‘입추지지’(立錐之地)라고도 합니다. 아무런 대책도 없었지요.

‘대책’(對策)은 ‘상대편의 태도나 어떤 일에 대응하기 위하여 세우는 계획이나 수단 및 방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옛날에 종이가 없었을 때는 글씨를 비단이나 대나무쪽에 썼습니다. 그러나 비단은 너무 비쌌기 때문에 서민들은 주로 대나무를 쪼개어서 썼습니다. ‘책’(冊)이란 글자도 ‘글씨를 쓴 대나무쪽을 모아서 대나무 위쪽에 구멍을 뚫고 끈으로 묶은 것’을 그대로 나타낸 상형문자(象形文字), 즉 ‘그림글’입니다. 이처럼 대나무를 가느다랗게 쪼개어서 사용한 것을 ‘책’(策)이라고 했습니다.

중국 한나라 때의 시험방식은 좀 특이했다고 합니다. 지금처럼 모든 학생이 같은 문제를 푸는 게 아니라, 그들은 각자 다른 책(策)을 마주 대(對)하고 답을 쓰도록 했답니다. 그래서 그렇게 보는 시험을 ‘대책’이라고 하였다는군요.

보나파르트 집안의 사람들은 슬픔에 젖어서 눈물을 글썽거리며 정든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을 터이고, 억장이 무너졌겠지요. ‘주마등’(走馬燈)은 ‘안팎 두 겹으로 된 틀의 안쪽에 갖가지 그림을 붙인 다음, 그 틀이 돌아감에 따라 안에 켜 놓은 등화(燈火)로 말미암아서 그림이 종이와 천을 바른 바깥쪽에 비치게 만든 등(燈)’을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물이 덧없이 빨리 변하여 돌아감’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억장(億丈)이 무너지다.’는 ‘그 동안 공들여 해 온 일이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서 몹시 허무한 상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억장’은 본래 ‘억장지성’(億丈之城)의 줄임말입니다. 즉, ‘성의 높이가 억 장이 될 정도로 퍽 높이 쌓은 성’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은, 억 장이나 되는 성이 무너질 정도의 ‘엄청난 일’을 말합니다.

나폴레옹의 어머니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그 마음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나락’(奈落, 那落)은 ‘지옥’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구원할 수 없는 마음의 구렁텅이’를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입니다. 이는, 산스크리트어 ‘Naraka’에서 온 말로, ‘지옥’을 뜻하는 불교 용어입니다.

파오리의 정중시성이 이런 엄청난 결과를 빚었습니다. ‘정중시성’(井中視星)은, 우물 속에서 하늘을 보면 겨우 몇 개의 별밖에 볼 수 없음과 같이 ‘사심(私心)에  가리어지면 견해(見解)가 한편에 치우치게 된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그 모든 게 화생부덕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해야 마음이 편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화생부덕’(禍生不德)은, ‘고난을 겪는 것은 모두 본인의 덕이 없는 탓으로부터 되는 현상’이란 뜻입니다. 나폴레옹은 점점 멀어져 가는 산들을 바라보면서 주먹을 불끈 쥐고 입속말을 했습니다.

“반드시 나는 코르시카로 돌아오겠다.”

그렇게 그들은 코르시카를 떠났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코르시카에 머물러 있었을 겁니다. 나폴레옹은, 칠신탄탄이 아니라, 유아지탄을 했을 게 분명합니다. ‘칠신탄탄’(漆身呑炭)은, ‘몸에 옻칠을 하고 숯을 삼킨다.’는 뜻으로, 곧 ‘복수를 위하여 몸을 괴롭힘’을 이릅니다. 그리고 ‘유아지탄’(由我之歎)은 ‘자기 때문에 남에게 해가 미치게 됨을 탄식한다.’는 말입니다. 그는 코르시카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일은 창랑자취로 여기고, 그 가슴에 측은지심이 가득할 뿐이었습니다. ‘창랑자취’(滄浪自取)는 ‘좋은 말을 듣거나 나쁜 말을 듣거나 모두 제 할 탓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측은지심’(惻隱之心)은 ‘불쌍하고 가엽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입에 발린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입에 발린 소리’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겉치레로 하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입에만 발라져 있는 소리’라는 뜻으로, ‘진짜 마음속에는 없는 소리’라는 말입니다. ‘입바른 소리’와는 전혀 다른 말이므로, 잘 구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만사는 새옹지마이니,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자포자기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는, ‘인생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음’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이 말에 딸린 고사가 있습니다.

중국 북방 호지(胡地)와 가까운 곳에 한 늙은이(塞翁)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기르고 있던 말이 호지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이웃 사람들이 그 일을 알고 찾아와서 그 노인을 위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은 조금도 아깝다는 기색이 없이 말하였습니다.

“이 일이 어찌 복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과연, 몇 달이 지나자, 그 노인의 말이 이웃나라 땅에서 양마(良馬)를 끌고 돌아왔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서 이번에는 그 노인에게 축하의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노인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습니다.

“이 일이 어찌 화가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얼마 후, 말달리기를 즐기던 노인의 아들이 그 말에서 땅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그 바람에 그는 허벅다리를 크게 다쳐서 발을 제대로 못 쓰게 되고 말았습니다. 다시 이웃사람이 몰려와서 노인에게 위로의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태연자약하게 말했습니다. ‘태연자약’(泰然自若)은 마음에 무슨 충동을 받을 만한 일이 있어도 ‘태연하고 천연스러움’을 이릅니다.

“이 일이 또 복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 후, 일 년이 지났을 때에 노인이 살고 있는 나라로 오랑캐들이 쳐들어왔습니다. 그렇게 되니, 마을의 젊은이들은 모두 싸움터로 나가게 되었고,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노인의 아들은 몸이 불편하여 전쟁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목숨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포자기’(自暴自棄)는, 어떠한 희망도 바랄 수 없다고 여김으로써 ‘자신을 버리고 돌보지 아니함’을 나타냅니다.(김재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