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 나의 문학(2)
김 재 황
1955년, 나는 은로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선린중학교로 진학하였다. 이는, 순전히 어머니의 강권에 의한 일이었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무엇보다 돈이 필요하고, 돈을 만지는 은행에 취직하려면 반드시 상업학교로 가야 한다고 하셨다. 그 때만 하여도 중학교를 선택하여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다. 그 당시에 나는 흑석동에서 살았는데, 선린중학교는 그리 거리가 멀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시험을 치르고 입학해 보니, 후회가 컸다. 주판이며 부기며, 모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그 다음해인가, 우리 가족은 서울중고등학교 옆의 종로구 신문로2가로 이사를 했다. 그 옆의 장소가 경희궁지이다. 그 때부터 학교에 전차를 타고 다녔다.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어느 날, 집의 조그만 꽃밭 옆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옆집에 사는 내 또래의 여학생이 다가와서 불쑥 물었다.
“너 무슨 책 읽니?”
나는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가슴이 어찌나 뛰는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마도 얼굴이 발갛게 되었을 게다. 이런, 이런, 바보라니! 그 여학생은 재미있다는 듯 야릇한 미소를 머금으며 돌아서서 걸어갔다. 그 후부터 나는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늘 눈앞에서 그 여학생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잠도 이룰 수 없었다. 차마 그녀에게 말을 건넬 용기는 없었지만, 그 대신으로 그녀가 읽고 감동을 받을 만한 편지를 써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월 시집 한 권을 구해다가 밤이 새도록 읽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고 나서 그 시를 흉내 내어 몇 줄의 편지를 썼다. 그런데 그 편지를 어떻게 전한단 말인가? 나는 며칠을 망설인 끝에 그녀의 손에 그 편지를 쥐어 주고는 뒤로 안 돌아보고 도망을 쳤다. 답장이 올까? 이젠 어떻게 하지? 더욱 마음을 졸였다. 아! 그런데 며칠 후에 그녀가 답장을 주었다.
‘네 시 좋더라.’
짧은 글이었지만, 나는 온 세상을 얻은 듯이 기뻤다. 이렇게 나는 시로써 첫사랑을 얻었다. 그 후에 그녀와 함께 나들이를 한 적도 있었는데, 나는 그녀에게 그 시는 그녀만을 위해서 쓴 작품이니 절대로 남에게 보여 주어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나 거듭 말했다. 여러 사람이 알게 되면, 소월 시의 모작임이 금방 들통 나게 될 것 같아서였다. 여하튼 그 일로 해서 시와 한 발짝 더 가까워지는 계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에게만 빠져 있지는 않았다. 내 주위에는 좋은 친구들이 많았다. 여름이면 그들과 함께 한강 백사장으로 가서 놀았다. 특히 한강 상류인 팔당은 그 당시에 손꼽히는 유원지였다. 잠수하여 강바닥을 손으로 훑으면 조개가 한 움큼씩 잡히곤 했다. 겨울에도 우리는 한강으로 달려갔다. 두껍게 얼은 빙판 위에서 썰매도 타고 팽이도 돌렸다. 그 때의 그 그리운 친구들을, 지금은 낡은 사진첩에서나 만날 수 있다.
빛바랜 사진첩에 어린 티로 머문 친구
머리는 박박 깎고 검은 교복 맞춰 입고
그리운 그 모습 그대로 의젓하게 앉아 있다.
지금은 손자 두고 주름도 깊었을 친구
공부는 키를 재고 싫은 청소 서로 돕고
아직도 그 이름 석 자 생생하게 외고 있다.
그때를 떠올리면 더욱 보고 싶은 친구
눈빛은 너무 맑고 고운 입술 굳게 닫고
잘생긴 그 얼굴 그대로 따뜻하게 웃고 있다.
-졸시 ‘그때 그 친구’ 전문
나는 서울보다는 시골이 좋았다. 그러니 상업학교가 적성에 맞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중학교를 졸업한 1958년에는, 시골의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려고 서울사범고등학교에 입학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1차 필기시험에는 합격했으나, 2차 실기시험은 자신이 없어서 포기했다. 다행이 사범학교가 특차였기에, 나는 배재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많은 문학작품을 탐독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심훈의 ‘상록수’에 심취하여 여러 번을 읽었다. 그리고 크게 감동하여 그러한 삶을 살고자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우리는 은평구 불광동으로 이사했다. 그 곳에서는 구파발이 그리 멀지 않았고, 구파발을 통해 북한산을 오르곤 했다. 그해 겨울방학 때였던 듯싶은데, 친구 몇이 북한산을 올랐다가 길을 잃었다. 모두들 기진맥진하여 산속을 헤매고 다니다가 날이 저물었다. 그 추운 겨울에 먹은 것이라곤 건빵 몇 개가 전부였다. 특히 내가 탈진하여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산길을 내려왔다. 그런데 천우신조였다. 천만 다행으로 캄캄한 밤에 한 초가집을 발견하고 문을 두드리니 할머니 한 분이 나오셔서 ‘이 아이들이 웬일이야.’라고 하시며 방으로 안내한 다음에 숭늉을 김이 무럭무럭 나게 끓여다가 한 그릇씩 나누어 주셨다. 아, 구수한 그 냄새와 맛을 어찌 잊겠는가. 며칠이 지나서 그 할머니에게 고마움을 답하려고 찾아갔으나 도통 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그리고 4월이 밝았다. 어느새 중순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날 바로 4.19날! 나는 학교의 교실에 앉아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밖에서는 양정고등학교의 학생들이 몰려와서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담임선생님께서 문을 가로막고 계셨다. 그렇더라도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어야 하는 건데, 지금 생각해도 우리는 비겁했다. 물론, 선생님은 제자들이 다칠 것만을 염려하셨으리라. 그로 인해, 나는 4.19라는 말만 나오면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한다.
너는 민주주의를 신봉하였다.
나는 무심코 네 옆을 스쳐 갔고
너는 길거리 좌판 위에서
자유롭게 뒹굴며 지내었다.
한 떼의 젊은이들이 길거리에서
민주주의를 목청 높여 외칠 때에도
너는 생긴 대로 그렇게 놓여 있었다.
나는 그러한 평화가 보기에 좋아서
걸음을 멈추고 손을 내밀었으며
너는 향기를 나에게 전하였다.
자유로운 모습과 평화로운 향기
나는 유심히 네 옆에 머물고
너는 몸으로 민주주의를 실천하였다.
새콤하게 맛으로도 보여 주었다.
-졸시 ‘못생긴 모과’ 전문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자, 나는 대학 진학에 ‘국문학과’와 ‘농학과’를 놓고 고심하였다. 시골의 조용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글을 쓰기에는 ‘국문학과’가 더없이 좋을 것 같았고, 또 한편으로는 시골에서 과수원을 경영하며 시를 쓰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여러 날을 끙끙거리며 지내다가, 자연에게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농학과’가 좋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1961년, 나는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농학과에 입학하였다. 농학과에는 배재고등학교 친구 4명이 입학시험을 치렀고, 그 절반인 2명이 합격하였다. 그런데 농학과 신입생 중에 이성선 형이 있었다. 그러니 이성선 형과 나는, 같은 대학 같은 과의 동기동창이다. 더군다나 이성선 형도 문학(詩)을 꿈꾸고 있었으므로 우리 둘은 금방 가까워졌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의 내 이름은 ‘만웅’(滿雄)이었으나, 졸업하면서 집안 항렬자에 따라 ‘재황’(載晃)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성선 형은 중학교 때까지는 그 이름이 ‘진우’(珍雨)였다고 한다. 그렇게 우리는 아명(兒名)까지 똑같이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성선 형과 함께 하였던 학창 시절은 그리 길지 못했다. 1962년 5월, 그는 훌쩍 학도병으로 입대해 버리고 말았다. 나는 학교에 남아서 고대 교수이신 조지훈 시인을 스승으로 삼고 쓸쓸함을 시로 달랬다. 참으로 멋진 스승이셨다. 작품도 더없이 향기롭거니와, 모습도 영락없는 선비셨다. 아니, 그보다도 그 인품이 학처럼 고고하셨다.
한 번은 시험 감독으로 들어오셨는데, 신문 한 장을 들고 오셔서 시험이 끝날 때까지 창밖을 향한 채로 읽고 계셨다. 그 믿음에 감동하였는지, 시험을 치르는 학생 모두가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조용하였다.
내가 대학을 입학하고 나서 얼마 안 되었을 때, 박정희 소장이 5.16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때문에 대학가는 매우 소란스러웠다. 연일 데모가 계속되었고, 나도 뜨거운 가슴으로 참가하였다. 그 매운 최루탄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몇 대학의 학생들이 모여서 최루탄문학회를 만들었다. 나도 이 문학회의 멤버였고, 우리는 대학의 한 귀퉁이를 빌려서 시화전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어느 날, 한 친구가 나에게 와서 ‘네 이름도 정보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더라.’라고 말했다.
나는 형제가 많다. 그래서 기회를 잡았을 때에 어떻게 해서든지 학업을 끝마쳐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정식으로 병역의무를 위한 입대는 2학년 때에 가게 되어 있었는데, 나는 병무청에 입대연기신청서를 제출하고 계속하여 학교를 다녔다. ROTC를 지원할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매력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 더군다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는 게 사실이라면 받아주지도 않을 게 명약관화한 일이어서 그대로 눌러앉았다.
고려대학교의 분위기는 나의 구미에 맞았다. 나는, 아니 우리는 공부보다도 멋보다도 젊음을 구가했다. 그 당시에, 50원이 생기면 ‘서울대학교 학생은 책을 사고 연세대학교 학생은 구두를 닦고 고려대학교 학생은 막걸리를 마신다.’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 말이 사실이어서 나는 대학교 시절에 막걸리를 많이 마셨다. 아, 그때는 대학생들도 교복을 입었다. 고려대학교에도 짙은 남빛의 교복이 있었고, 마치 중공군 모자처럼 생긴 교모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주로 군복을 검게 물들여 입었다. 그게 행동하기에 편했다. 그래도 그 작업복 가슴에, 호랑이 모습이 있는 고대 배지를 달고 밖으로 나서면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나는 불광동에서 안암동까지 버스를 갈아타며 학교를 다녔다. 그 만원 버스가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으나, 그게 얼마나 사람의 진을 빼었는지는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을 알지 못한다. 어느 날인가, 그 만원 버스가 고려대학교 정문 앞에 정차했을 때에 한 소매치기가 붙잡혔다. 대담하다고 할까? 아니면 무모하다고 할까? 학생 차림이었는데, 학생들의 손에 이끌려서 밖으로 나왔다. 그 다음의 일은 상상에 맡긴다.
그때, 무엇보다도 우리의 피를 끓게 만들었던 게, 바로 고연전이다. 내 기억으로 고려대와 연세대는 농구와 럭비와 아이스하키와 축구 및 야구 경기를 해마다 열었다. 그 모든 경기가 막상막하의 영원한 라이벌이었다. 그렇게 고연전이 팽팽하게 열리는 날에는 고려대학교의 교호가 서울 하늘에 메아리쳤다.
‘입실렌티체이홉 카시코시코시코, 칼마시케시케시, 고려대학. 칼마시케시케시, 고려대학.’
아마도 일반 사람들은 이 교호의 뜻을 잘 모를 성싶다. 이 교호 안에는, 세계적으로 사회비판 의식이 강했던 학자들의 이름이 들어 있다. 즉, 입실렌티, 체이홉, 카시코시 코시코, 칼 마르크스 등이다. 그리고 ‘케시케시’는 ‘살아서 숨 쉬고 있다.’라는 뜻으로, 나는 이해하고 있다. 어디 그뿐이었겠는가. 고연전이 열릴 때마다 ‘이겨도 당당히 싸워서만 이긴다. 맹호는 굶주려도 풀을 먹지 않나니’라는, 고려대학교 응원가를 목이 터져라 불렀다. 이 응원가를 작사한 분이 바로 조지훈 시인이시다. 그리고 이 응원가 중의 ‘맹수는 굶주려도 풀을 먹지 않는다.’라는 구절은, 지금까지도 내 인생의 길잡이가 되고 있다. 이게 선비의 정신이고 시인의 정신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다고 술만 마시지는 않았다. 고려대학교에는 훌륭한 도서관이 있다. 나는 그 도서관에서 많은 책들을 정독했다. 문학작품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곁들여서 역사책이라든가 철학에 관한 책들도 읽었다. 그리고 습작이었으나 많은 작품을 쓰기도 했다. 그 결과로 1963년 9월 14일, 나의 시 한 편이 고대신문에 실렸다. 그 작품의 제목은 ‘가을 二題’였다.
나의 벗, 이성선 형은 1964년에 군에서 제대하여 복학하였다. 복학한 지 얼마 안 되는 4월 4일, 그도 고대신문에 시 한 편을 발표했다. 그 작품의 제목은 ‘꽃’이었다. 이미 우리 두 사람은 진로가 문학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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