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 나의 문학(1)
김 재 황
1942년 8월, 나는 옛 고구려 영토인 만주 땅의 봉천에서 태어났다. 지금 그 곳의 지명은 바로 심양(瀋陽, Shenyang)이다. 물론, 내가 4살 되던 해에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음으로써 부모님의 손을 잡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 다음해, 나는 집안 사정에 의하여 할머니를 따라 고향인 파주의 큰아버지 댁으로 내려가서 살게 되었다. 내 본적지는 파주의 임진면 임진리인데, 그 당시 고향에는 임진강에서 좀 떨어진 ‘야동’(野洞)이라는 마을에 큰아버지 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바람은 울먹이며 강가에서 서성대고
겉늙은 갈대꽃이 넋이 나가 흔들려도
포성에 멍든 역사는 침묵 속을 떠간다.
서러운 빗줄기를 한데 모아 섞던 강물
말 잃은 얼굴들은 바닥으로 잠기는데
세월은 등 푸른 꿈을 연어처럼 키운다.
감도는 굽이마다 기다란 목줄이 죄어
내닫는 물길로는 풀지 못할 한이기에
나루터 빈 배 한 척만 그 가슴이 썩는다.
-졸시 ‘임진강에서’ 전문
생각해 보면, 그 마을은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마을 앞에는 제법 넓은 냇물이 맑게 흐르고 있었으며, 마을 뒤로는 숲이 우거진 동산이 아담하게 엎드려 있었다. 사촌형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이 두 곳이 나의 놀이터였다. 그 당시에 임진강은 물이 반이요 물고기가 반이라고 했다. 이 냇물이 그 임진강과 이어져 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물고기들이 살고 있었겠는가. 물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굵다란 붕어들은 말할 것도 없고 메기와 배가사리와 쏘가리를 비롯해서 심지어는 뱀장어까지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여름철에는 텀벙 그 물속으로 들어가서 그 물고기들과 마음껏 어울려 놀았다.
그런가 하면, 동산에는 철 따라 갖가지 꽃들이 지천으로 피었다. 그 중에서도 나는 특히 나리꽃 종류들을 좋아했다. 여기에서 참나리가 방긋 웃는가 하면 저기에서는 솔나리가 수줍은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말나리도 있었고 하늘나리도 있었으며 중나리와 땅나리도 결코 빠지지 않았다. 어린 나는 이 꽃들을 찾아다니느라고 하루 종일 동산을 떠날 줄 몰랐다. 마침내 해가 뉘엿뉘엿 지고, 저녁밥을 먹으라고 부르시는 할머니 목소리가 들린 다음에야 마지못해 동산을 내려갈 정도였다.
아, 그러고 보면 내 귀를 즐겁게 해준 매미의 노랫소리도 결코 잊을 수 없다. 아마도 매미의 노래만큼 아름다운 자연의 음악은 없을 성싶다. 매미들은 종류마다 독특한 개성을 지녔다. 그래서 그 노랫소리만 들으면 금방 어느 종류의 매미인지를 알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말매미는 ‘쐐쐐’하고 노래한다. 얼마나 그 목소리가 우렁찬지, 한 떼가 몰려와서 합창할 때에는 귀청이 떨어져 나가는 듯싶다. 참으로 귀가 따갑다. 그런가 하면, 참매미는 ‘민민’하고 노래한다. 그 노랫소리가 한결 부드럽다. 이는, 은근한 멋을 지녔다. 또한, 털매미는 ‘씽씽씽’하고 노래하며, 유지매미는 ‘찌찌’하고 노래를 부른다.
아무래도 가장 멋지게 노래하는 매미는, ‘쓰름매미’라고 말할 수 있다. 쓰름매미의 노래를 보통 ‘쓰르람쓰르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그 노랫소리를 ‘이이씨용 이이씨용 …찌르르’라고 듣거나, 혹은 ‘찌이용 찌이용 찌이용 …찌찌찌’라고 한다거나 ‘이이창 이이창 이이이창…찌르르르’라고 표현한다. 하기야, 듣는 사람에 따라 노랫소리가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동산에는 꽃들도 많았으나 그에 못지않게 새들도 많았다. 그 새들도 노래를 아주 잘한다. 모두 알다시피 목소리가 가장 아름다운 새는 꾀꼬리이겠지만, 나는 그 새보다도 어치의 노랫소리를 더욱 좋아했다. 어치는 까마귀과에 딸린 새이다. 즉, 참새목 까마귀과의 조류로, 비둘기보다는 그 몸집이 조금 작다. 지금도 비교적 쉽게 만날 수 있는 새이다. 어치는 참나무 열매를 좋아하고 사시사철 숲속의 나무 위에 살며, 땅 위로는 잘 내려오지 않는다.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뛸 때는 양쪽 다리를 모은다. 그리고 날 때는 날개를 천천히 퍼덕여서 날아오른 뒤에 파도 모양을 그리며 날아간다. 경계할 때는 맹렬하면서도 가늘게 ‘쀼우 쀼우’하고 휘파람 소리를 낸다. 옛 문헌을 보면, 어치는 곧잘 ‘사랑해요’라든가 ‘아빠’라고 말하기도 한단다. 그런 새를 어찌 내가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한 번은, 많은 비가 내린 다음날이었다. 나는 동산의 무너져 내린 절개지에서 어린 물총새 두 마리를 발견하고 그들을 데려다가 기른 적이 있었다. 다행이 그 녀석들은, 내가 잡아다가 주는 올챙이나 개구리 등의 먹이를 잘 받아먹었다. 그리고 날개가 다 자라서 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냇가로 가서 훨훨 멀리 날려 보내 주었다.
어쩌다가 냇가에서 종다리 둥지를 발견하는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그 둥지 근처에 표시를 해 놓고 이따금 살금살금 찾아가서 그 속의 알들을 구경하곤 했다. 그러다가 그 알들이 깨면 그 근처에서 그 새끼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새 때문에 눈물을 흘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나보다 두 살 위인 사촌형이 뒷동산에서 때까치 새끼 한 마리를 주워 왔다. 참으로 그 녀석은 먹성이 좋았다. 손가락을 입 근처에 갖다 대어도 입을 크게 벌렸다. 나는 그 모습이 안쓰러웠기에 들녘으로 나가서 메뚜기와 방아깨비 등을 잡아다가 열심히 먹였다. 그런데 하루는 동네의 한 형이, 피우던 담배꽁초를 그 녀석의 입에 넣어 버렸다. 말릴 틈도 없었다. 그 녀석은 먹이인 줄 알고 한입에 꿀꺽 삼켜 버렸다. 그로 인해, 그 녀석은 그만 목숨을 잃었다.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발버둥을 치며 한나절을 족히 울었다.
그 당시에도 나는 나무들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냇가의 미루나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동네 앞의 큰 느티나무를 비롯해서 동산의 떡갈나무와 신갈나무 등을 모두 좋아했다. 그렇다고 키 큰 나무들만 좋아한 게 아니라, 키가 작은 나무들도 좋아했다. 이를테면 ‘개암나무’나 ‘노린재나무’ 등과 같은 떨기나무 옆에 누워서 하늘을 보면 흰 구름이 달콤한 솜사탕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느 하루는 동산에서 실컷 놀고 왔는데, 이상하게 몸이 근질근질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보였더니 깜짝 놀라셨다.
“아니, 너 옻이 올랐구나!”
시골에 마땅한 약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할머니는 닭을 잡아서 그 삶은 물을 내 몸에 발라 주셨다. 처음에는 이게 웬 닭고기냐 하고 맛있게 먹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닭고기에 질려 버리고 말았다. 나는 꽤 오래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로 고생을 했다. 사촌형들도 닭 냄새가 난다고 나를 모두 피하였다. 그래도 나는 동산으로 가서 놀았다.
이렇듯 시골에 살며 온갖 풀과 나무 및 물고기와 새들을 벗하여 놀았던 일들이 지금도 내 가슴에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아마도 그 때에 산과 들의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놀았던 일들이 내 감성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리라고 본다. 그래서 나는 녹색시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여긴다.
그 몇 년 후,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할머니와 함께 부모님이 계시는 서울로 돌아왔다.
1949년, 나는 초등학교 학생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 삶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은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정확히 말하면 ‘국민학교’였지만, 나는 지금의 ‘초등학교’란 말을 더 좋아한다. 내가 처음으로 입학한 학교는 서울의 창신초등학교였다. 그 얼마 후에 종암초등학교로 전학했고, 2학년이 되던 해에 6.25전쟁을 만났다. 그날이 바로 1950년 6월 25일이었다.
부모님은 먼저 피난을 떠나시고, 나는 할머니와 집에 남았다가 고향으로 가서 머물게 되었다. 그 때에도 혼자 산으로 올라가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1.4후퇴 때는 나도 할머니와 무작정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수소문 끝에 제주도에서 부모님을 만났고, 제주시 제남초등학교 3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다. 나는 그 때에 처음으로 한라산을 보았다. 그 웅장한 모습에 입이 딱 벌어졌다.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좋았다.
태초에 첫 울음을 불덩이로 토해 내고
신비한 손을 뻗어 세상 문을 열던 자리
그 숨결 아직 머물러 물빛 저리 시리다.
적막에 배가 부른 구상목이 팔 벌리면
흰 구름 갈 곳 몰라 산봉우릴 맴도는데
전설을 가슴에 안고 골짜기로 가는 바람.
안개가 잠이 깨어 산길을 모두 숨길 때
펼치고 선 산자락에 꿈이 쏟아지는 소리
큰 바다 멀리 밀치고 볼이 익는 열매여.
-졸시 ‘한라산에서’ 전문
그리고 그 후, 서울로 돌아오면서 잠깐씩 머물게 된 고장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서울로 돌아온 후, 그 동안 다녔던 초등학교를 꼽아 보니 자그마치 8군데나 되었다.
그러니까, 1953년 7월 27일에 휴전이 이루어짐으로써 나는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으며, 서울의 흑석동에 자리 잡고 있는 은로초등학교로 전학하게 되었다. 5학년이 모두 끝나고 나서 막 6학년이 시작되려고 하는 때였으며, 1955년이 되던 해의 봄에 은로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렇듯 순탄하지 못한 초등학교 시절이었으나, 지금도 그 당시의 일들이 문득문득 눈앞에 떠오르곤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서울의 창신초등학교를 입학한 시절이다. 우리 집으로 가는 길가에 조그만 냇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먼저 그곳으로 달려가곤 했다. 왜냐하면, 그 냇물에 커다란 가재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놈을 또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어서도 그놈만 생각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개울로 달려가 보았으나 모두 허사였다. 하지만 나는 낙심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마침내 그 꿈은 이루어졌다.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냇물에서 멋지게 기어가고 있는 그놈을 보았다. 그리곤 얼마 후에 나는 종암동으로 이사를 갔다.
피난 때에 제주도의 제주시를 비롯하여 부산과 양산 및 마산, 그리고 장승포 등지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장승포초등학교를 다닐 때의 기억이 새롭다. 5학년이 막 되었을 때, 학교에서 점심으로 내주는 ‘끓인 우유죽’을 맛있게 먹었던 일이 생각난다. 그리고 여름에 작은 섬으로 피서를 갔으며, 그 곳에서 끔찍스럽게도 나는 큰 구렁이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던 일도 있다.
그렇다고 내가 뱀을 우습게 생각했느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뱀을 제일 무서워했다. 내가 제일 만만하게 여긴 동물은 개구리였다. 그날, 나는 그 섬에서 큰 개구리 한 마리를 발견했다. 그래서 그놈을 잡겠다고 부리나케 쫓아갔다. 그놈은 팔짝팔짝 잘도 뛰었고, 나도 질세라 부지런히 뒤를 따랐다. 그런데 그놈이 멀리 뛰어서 풀숲에 숨었다.
나는 ‘옳다구나.’하고 그 풀숲을 향하여 몸을 날렸다. 그런데 손에 뭉클한 게 잡혔다. ‘네가 뛰어 봤자 벼룩’이라고 여기며 손을 들어올렸다. 앗, 이게 무엇인가? 손에 잡힌 건, 큰 구렁이였다. ‘에구머니!’ 나는 기급을 하여 펄쩍펄쩍 뛰었다. 심심하면 만만한 개구리를 잡아서 괴롭혔으니, 그 벌을 그렇게 받았으리라. 그 후로는 개구리를 괴롭히지 않았다.
내가 졸업한 은로초등학교도 잊을 수 없다. 화가인 담임선생님을 좋아해서 나는 그림을 열심히 그렸다. 그 덕분에, 내가 내 손을 보고 연필로 그린, 소위 ‘데생’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 후로 나는 화가가 되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때는 틈만 나면 한강으로 나가서 벌거벗고 수영을 하곤 했다. 제주도에 살았을 적에 이미 ‘헤엄치기’는 배워 놓았으므로 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수영이라고 하니까, 아무렇게나 물에 뜨는 정도였을 거라고 여기면 곤란하다. 아주 잘 다듬어진 ‘평영’이었다. 그래서 한때는 수영선수가 되고자 했다. 그 꿈을 밀고 나갔더라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곤 한다.
그러나 나는 늘 글쓰기에서 가장 많은 칭찬을 받았다. 담임선생님은 학급 아이들에게 아주 잘 쓴 글이라고 하시며 내 일기를 읽어 주시기도 하였다. 나는 그저 쑥스럽기만 해서 얼굴을 깊숙이 파묻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이야 말로 가장 아름답고 귀하다. 순수하기도 하려니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더욱이 여러 곳으로 전학을 거듭하였던 그 어려움이 어쩌면 내 문학의 단단한 기초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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