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나의 인생, 나의 문학(3)

시조시인 2010. 4. 13. 22:19

                                               나의 인생, 나의 문학(3)

                                                                       김 재 황


 1965년 2월, 나는 고려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제는 하루 빨리 병역의무를 완수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무런 통지가 없었다. 나는 서울병무청으로 달려갔다. 담당자는 서류를 뒤적이더니 내가 기피자로 되어 있다고 말했다. 나는, 입대연기원서를 제출하였는데 무슨 기피자란 말이냐고 항의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입대연기원서는 한 번만 제출하면 되는 게 아니라, 매년 제출해야 된다고 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그 담당자에게 고개를 숙이고, 어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해에 다시 신체검사를 받고 다음해에 징집 통지서를 받은 후에 입대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1년을 허송세월로 보낼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한가하게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또, 군대를 다녀오지 않고는 취직은 생각하지도 못하였기 때문에 더욱 난처하였다. 고민을 거듭하고 있자니, 누군가가 나에게 귀띔을 해주었다.

 “나라를 위하여 군대를 가겠다는데 그것을 누가 말리겠는가? 징집 당일에 현지로 가서 자원입대를 해보게.”

 6월이었는데, 마침 며칠 후에 인천에서 징집이 있다는 말이 들렸다. 나는 무작정 인천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징집 장교로 보이는 육군대위 한 사람을 붙들고 내 사정 이야기를 했다. 그는 내 처지가 딱해 보였던지, 따라오라고 하더니 신상기록카드 한 장을 주며 그 내용을 빠짐없이 기록하라고 했다. 그는 내가 내미는 나의 카드를 받아서 여러 신상기록카드 사이에 끼워 넣었다. 이렇게 나는 간신히 훈련소로 향하게 되었다.

 나는 마침내 제1훈련소 29연대에 소속되었고 그날부터 피나는 훈련이 시작되었다. 아침 6시에 기상하여 저녁 10시에 취침하는 규칙적인 생활 속에서 총검술이며 각개전투며 사격술 등 기초 훈련을 쌓아 갔다. 푹푹 찌는 날씨에 우비를 접어서 엉덩이 쪽에 찬 채로, 그 무거운 M1소총을 어깨에 메고 날마다 행진을 거듭했다. 그럴 때마다 얼굴이 검게 타서 눈만 반짝거리는 교관이 힘차게 외쳤다.

 “행진 간에 군가를 부른다. 군가는 진짜 사나이. 군가 시작 하나 둘 셋 넷.”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진 전우야

 산봉우리에 해 뜨고 해가 질 때에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꿈을 꾸었다.


 우리는 발을 맞추며 씩씩하게 군가를 불렀다. 힘들고 고된 훈련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자랑스럽기도 했다. 이제 나도 ‘진짜 사나이’가 되었다는 자부심이 생겼다. 군대에서는 한 사람이 잘못을 했더라도 단체기합을 받게 된다. 그러니까 자연히, 자기의 잘못으로 동료까지 고생을 시키게 되므로 무척이나 행동에 조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나보다도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이게 바로 동지애이다.

 신병훈련소에서의 생활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며 날짜가 거듭될수록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조금 더 지나자, 덜 익은 듯싶은 밥맛도 꿀맛이었고 소태처럼 쓰기만 하던 시래기 국의 맛도 구수하기만 했다. 어찌 반찬을 투정하랴. 그저 밥 한 그릇에 국 한 그릇이면 모두들 마파람에 게눈을 감추듯 비워 버렸다. 먹성이 그래서가 아니라 입맛이 그러하였다.


 힘차게 하나둘셋넷 큰 소리로 다져 간다.

 발맞춤이 땅 구르면 입맞춤은 하늘 닿고

 소매로 땀냄새 흩는 무등병의 구보 행렬.


 몇 분의 휴식을 아껴 화랑담배 입에 물면

 눌러 쓴 철모의 끈에 둥근 꿈도 대롱거려

 고향 녘 환한 낮달은 눈웃음을 짓고 뜬다.


 황산벌에 퍼져 가는 총검술의 기합 소리

 무르팍이 깨진 만큼 높이 서는 간성이여

 이 밤도 차가운 별빛은 이마에서 빛난다.

                     -졸시 ‘신병훈련소에서’


 그런데 나에게는 남다른 괴로움이 있었다. 원래 선천적으로 뜀뛰기에 대한 소질이 없어서 연병장을 한 바퀴 돌고 선착순으로 집합하라는 단체기합에서는 언제나 꼴찌를 했다. 그래서 몸이 재빠른 동료는 한 바퀴만 돌고 느긋하게 쉬고 있을 때도 나는 연병장을 계속 뛰어야만 했다. 더욱 걱정스러운 일은, 훈련을 끝내고 특과 학교로 가게 되는데, 나는 부여받은 번호가 050이었으므로 거의 확실히 헌병학교로 가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그리 걱정하던 일이 현실로 다가왔다. 훈련이 모두 끝나고 나서 나는 헌병학교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헌병학교로 가니, 가는 곳마다 ‘3보 이상 구보’라는 구호가 써 있었다. 나는 떨지 않을 수 없었다. 헌병학교에서는 새벽에 기상하면 십리나 되는 개울까지 뛰어가서 세수를 하고 와야 했다. 너무 힘이 들어서 도중에 엎어질 지경이었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참으며 뛰고 뛰었다.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낙오병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 그렇게 견디다 보니까, 차츰 요령도 생기고 조금씩 나아지기도 하였다. 사나이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나는 이 학교에서 정신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몸으로 배웠다. 그 당시에 육군헌병학교로 해병대 헌병대원들이 위탁교육을 왔는데 그들의 숫자는 겨우 열 명 내외였다. 그들 또한 우리와 같은 우리나라 젊은이들임에 틀림없건만, 패기가 어찌나 당당한지 그들의 이십 배가 넘는 숫자의 육군 훈련병들이 기를 펼 수가 없었다. 단지 해병대라는 그들의 자부심이 그들을 그토록 용감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 헌병학교에서 교육을 마칠 때에 교육 성적이 아주 훌륭한 훈련병은 원하는 곳으로 배치시켜 준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열심히 훈련에 임했다. 그리고 학과 시험에 대비하여 남몰래 화장실에서 공부도 했다. 2달 동안의 피나는 노력 끝에 나는 몇 손가락에 꼽히는 아주 좋은 결과를 거두었다. 그 말이 정말이어서 중대장이 카드 한 장을 내밀며 배속 받고 싶은 곳을 적어서 제출하라고 했다. 나는 망설일 필요도 없이 ‘국방부’라고 큼직하게 썼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나는 국방부로 배속을 받았다.

 국방부로 와서는 처음에 국방부장관실 앞에서 보초를 섰다. 그리고 얼마 지난 후에는 국방부에 속한 건설본부 정문 보초의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제대 말년에는 국방대학원으로 파견근무를 나갔는데, 전부터 알고 지냈던 배태인 시인을 그 곳에서 만났다.

 1967년 12월, 나는 병장으로 제대했다. 그리고 곧바로 취직시험 준비를 해야만 했다. 때마침 경기도농촌진흥원에서 4급 을류 농촌지도직 공무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나는 매일 아침이면 중앙도서관으로 가서 문이 닫힐 때까지 시험공부에 매달렸다. 그리고 시험을 쳐서 당당하게 합격하였다. 그리고 몇 달 후, 나는 포천군농촌지도소로 발령을 받았다. 그토록 가고자 했던 시골로 가게 되어서 나는 무척이나 기뻤다. 자청하여 오지인 창수면으로 근무지를 배당받고는, 녹색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농부들을 만났다. 도시 사람들과는 달리, 농촌 사람들은 인심이 후했다. 녹색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나를 볼 때마다 그들은 반갑게 인사했다. 그리고 밭에서 곁두리라도 먹을 때에는, 나에게 ‘선생님, 좀 쉬었다가 가세요.’라고 불러 놓고는 막걸리를 한 사발씩 따라주곤 했다. 그 당시에 내가 맡은 지역은 창수면을 비롯하여 청산면이었는데 청산면은 어찌나 깊은 산골이었는지 자전거도 못 타고 걸어서 출장을 다녔다. 하지만, 그 반면에 아름다운 자연을 만나는 즐거움도 컸다. 일부러 사람들이 잘 안 다니는 산골짜기를 걸으며 갖가지 야생화를 만났다. 정말이지, 도라지와 나리들이 널려 있었다. 이따금 귀한 버섯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포천은 잣나무가 많은 고장이다. 내가 하숙을 하던 집 근처에는 건강한 잣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잎 냄새 맡으려고 가파른 산길 오르면

 끈끈이 묻은 얼룩 닦아 내고 있는 얼굴

 싱싱한 그대 가지를 쓰다듬고 싶었다.


 굽히지 못하는 뜻 멀리 찔러 일깨우며

 하늘로 향한 마음 그저 환히 비워 내는

 꼿꼿한 그대 줄기를 안아 보고 싶었다.


 베풀고 사는 일이 즐거움인 믿음이여

 높직이 마련해 둔 은록색의 꿈 송이들

 빛나는 그대 머리에 입맞추고 싶었다.

                       -졸시 ‘잣나무’ 전문


 그런데 본소에서 연락이 왔다. 작물계로 돌아와서 전작 및 토양과 비료의 일을 담당하라고 했다. 지소에 비하면 본소의 생활은 무척이나 무미건조했다. 많은 업무 때문에 고달프기도 했지만, 자연과 만나는 즐거움을 제대로 누릴 수 없었다. 그러니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술꾼들은 대폿집으로 몰려갔다. 그 곳의 대폿집에서는 안주가 두부뿐이었다. 그래서 두부를 간장에 찍어 먹으며 막걸리를 마셨다. 그리고 술기가 돌면, 두부를 넣고 김치찌개를 끓였다. 그 맛이 또 일미여서 막걸리는 더욱 쉽게 술술 잘도 넘어갔다.

 계장급의 한 선배는 나이도 지긋했는데, 이렇듯 매일 저녁마다 술을 마시니 생활비가 빠듯할 수밖에. 그래서 아주머니의 불평이 컸다. 그분의 소원은 남편이 다만 술을 끊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런데 하루는 저녁에 몇 사람이 모여서 술을 먹다가 갑자기 그 선배가 쓰러져 버렸다. 그 선배의 집으로 급히 연락하여 아주머니가 달려왔다. 벌써 얼굴이 하얗게 겁에 질려 있었다. 그분은 울면서 말했다.

 “아, 모두 내 잘못이어요. 내 잘못이어요.”

 그 내용인 즉, 그 아주머니는 남편이 술 끊기를 바라고 바라다가 ‘술 끊는 약’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분은 그 약을 구해다가 그날 저녁에 고깃국을 끓인 후에 넣고 남편에게 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은 이게 웬 고깃국이냐고 하면서 한 그릇을 말끔히 비웠다. 그리고는 동료들이 있는 술집으로 찾아왔다. 그렇게 ‘술 끊는 약’을 먹고 막걸리를 마셔댔으니 어찌 부작용이 없었겠는가. 의사가 달려오고 어찌어찌해서 그 선배가 눈을 번쩍 뜨게 되었다. 그리고 왜 자신이 쓰러지게 되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나를 죽이려고 그런 짓을 했느냐?”

 그 음성이 아직도 내 귀에 들리는 성싶다. 술을 먹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무료한 직장 생활을 누가 이해해 줄 건가. 그에게 발전이라고는 없다. ‘만년 계장’이 전부이다. 희망이 없는 삶이야말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생각했다. ‘어디를 가든지 일은 비슷하다. 자기의 삶은 자기가 개척하는 것!’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안주하지 말아야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농촌진흥청에서 축산특기지도사 교육이 있었다. 모두 기피했으나, 나는 자청하여 그 교육을 가서 받았다.

 포천에서 한 2년 근무하고 났을 때, 의정부로 발령이 났다. 그 곳에서는 서울이 가까웠기에 전보다 자주 부모님을 찾아뵐 수 있었다. 그런 편리함이 있었던 반면에, 의정부지도소에는 지도사가 그리 많지 않았고 그들이 거의 전부 기혼자였기 때문에 숙직을 내가 자주 맡아야 했다. 숙직을 할 때, 작품을 써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숙직 또한 근무이니, 작품이 창작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다시 깊은 산골로 들어가서 일하기를 바랐다.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자연과 함께하는 일이 즐거움이었기에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는 지방으로 갈 수 있었으면 했다. 그런 생활이라면 멋진 시를 창작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또한 가졌다.

 주말이면 서울을 다녀왔는데, 어머니는 장남인 나를 곁에 두고자 하셨다. 내가 왜 어머니 마음을 몰랐겠는가. 하루는 집에 갔더니, ‘입사원서를 제출했다.’라시며 어머니가 입사시험원서 접수증 한 장을 내미셨다. 그 당시, 삼성 그룹에서는 ‘용인자연농원’의 개발 사업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 사업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농업전문가들이 필요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으나, 이왕 그리된 일이라면 시험이나 쳐 보자고 마음먹었다. 들리는 말에는 지원자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했다. 뽑는 인원수는 겨우 열 명 정도라는데,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라는 거였다. 아마도 나는 ‘도전’이라는 데에 목표를 두었지 않았나 싶다. 아니,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 기회에 삼성 그룹 회장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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