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 나의 문학(4)
김 재 황
드디어 삼성 그룹의 농업전문직 입사시험이 시작되었다. 1차 시험과 2차 시험을 거치는 동안, 수많은 응시생들이 탈락되고 그 중 수십 명이 남게 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중에 나도 끼이게 되었으니, 정말 나로서는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마지막 3차 시험이 남아 있었다. 이 시험에서는 단 명만이 뽑히게 되기 때문에 십중팔구는 떨어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그만큼 중요하기에, 이 마지막 시험은 이병철 회장님께서 직접 주관하신다고 했다. 나는, 지레 겁을 먹고 3차 시험은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거기에 도달할 때까지 애쓴 일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은근히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속마음으로 ‘이왕 떨어질 바에야 회장의 얼굴이나 한번 똑똑히 보자’라는 배짱을 부렸다. 3차 시험일이 돌아오고, 내가 호명되었다. 나는 뚜벅뚜벅 걸어가서 시험관들 앞에 앉았다. 그 중앙에 회장님이 앉아 있었고 그 옆자리에 홍진기 중앙일보 사장님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양옆으로 몇 명의 중역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 중 누군가가 농업기술에 대한 몇 가지를 물었다. 내 대답이 끝나자, 이번에는 불쑥 회장님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공무원은 입으로만 일을 한다는데, 손으로 일을 잘할 수 있겠습니까?”
그 물음에 나는 나도 모르게 왈칵 열이 올라서 조금 큰 소리로 대답했다.
“회장님께서는 농민들이 그렇게 우매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직접 눈으로 결과를 보고 확신이 들기 전에는, 농민들은 따라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많은 전시포를 설치하여 직접 우리의 손으로 많은 작물들을 가꾸고 있습니다.”
내 말을 듣고, 회장님 옆에서 홍진기 사장님이 빙긋이 웃었다. 다른 시험관들의 몇 가지 질문이 더 있었고 시험은 무사히 끝났다.
회장님에게 그렇게 대들다시피 했으므로, 나는 불합격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발표 날에도 직장에서 근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집에서 연락이 왔다. 최종합격자 단 몇 사람의 명단에 내 이름이 들어 있다고 했다. 참으로 의외였다. 귀를 의심했다. 그 순간, 그렇듯 무례하기 짝이 없는 나를 선택하신, 회장님이 보통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존경심이 생겼다. 그래서 두 눈을 질끈 감고 직장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1971년, 나는 중앙일보사의 농업직 3급 사원으로 발령받았다. 그리고 나는 용인자연공원 개발 팀의 한 요원으로 과수분야의 기획을 담당하였는데, 이병철 회장님은 특별히 나를 자주 찾으셨다. 어느 날, 그분이 나에게 말했다.
“언양 공장에 가 보았나?”
언양 공장이란, 언양에 있는 삼성NEC를 가리키는 말이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되는 내가 그 곳에 갈 일이 있을까 마는, 그분은 그렇게 나에게 물었다.
“아직 못 가 보았습니다.”
내 대답에 이병철 회장님은 당장에 내일이라도 다녀오라고 하셨다. 그 다음 날, 현장에 도착하여, 그 곳 공장 직원의 안내를 받았다. 그 공장부지가 자그마치 수십만 평이나 되었다. 물론, 공장 건물이 세워진 외에 대부분이 유휴지였다. 그분이 왜 나에게 그 땅을 둘러보라고 하셨는지,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서울로 돌아오면서 여러 대안을 내 나름으로 구상했다.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회장실에서 연락이 왔다. 이병철 회장님은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물었다.
“어떻던가?”
생각해 두었던 대로, 그 곳에 밤나무 단지를 조성했으면 좋겠다고, 나는 대안을 제시했다. 그분은 무릎을 쳤다. 그렇게 되어, 일사천리로 밤나무 단지는 조성되기에 이르렀다. 바로 그 현장이 신불산 자락이었으니, 내가 그 산과 인연을 맺게 된 동기가 그러했다.
외로움에 떼밀려서 산자락을 밟고 서면
개비자 순한 잎들 마주보며 깨어 있고
명상의 녹차 향기가 폐부 깊이 스며든다.
반짝이며 흘러내린 석간수에 마음 씻고
먼 하늘 바라보면 출렁이는 물결 소리
적막을 깔고 앉아서 산의 옷깃 잡아 본다.
산 위는 나무 없이 억새 숲만 둘린 분지
자유를 얻은 염소 홀로 사는 세상인데
이따금 하얀 신선이 빈 몸으로 찾아온다.
-졸시 ‘신불산에서’ 전문
나는 밤나무 조성사업의 책임자가 되어 현장으로 내려갔다. 4명의 직원이 나를 따라왔다. 일은 그리 고되지는 않았으나, 농번기 때에 일군을 구하는 게 무엇보다 어려웠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구덩이 파기’ 작업은 도금으로 일을 주어도 상관이 없지만, ‘나무 심기’ 작업은 일당으로 일을 주며 꼼꼼하게 진두지휘를 해야만 했다. 계획한 대로 일정에 맞추어서 일을 진행하여 마침내 우리는 잡초만 우거져 있던 황무지를 밤나무 단지로 바꾸어 놓았다. 회장님께서도 와 보시고 매우 흡족해하셨다.
“이 밭은 김군 것이다.”
이 날, 나는 온 세상이 모두 내 것인 양 마음이 둥싯거렸다. 그러나 조성하기보다는 관리하는 게 훨씬 어려웠다. 그 후에 나는 대구의 제일농장의 책임까지 맡으면서 일인삼역으로 격무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래도 대구의 제일농장에서 많은 나무의 묘목을 길러 냈다는 데에 의의를 두고 싶다.
그러나 나는 시(詩)를 포기할 수 없었다. 회사에서 중책을 맡을수록 내 시간을 얻기가 그만큼 어려워졌다. 작더라도 내 농장에서 자유롭게 일하며 시를 쓰고 싶었다. 1973년 8월, 나는 그때에 결혼을 몇 달 앞두고 있었으나 끝내는 사표를 내고 말았다. 그 일로, 바느질을 하시고 계시던 장모님이 어찌나 놀라셨던지 바늘에 무릎을 찔리셨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래도 결혼식을 올렸고, 나는 농장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1978년, 나는 제주도에 볼 일이 있어서 갔다가 전격적으로 서귀포에 자그마한 귤밭을 구입하게 되었다. 한라산 남쪽 동홍동 지역에 미악산이라는 조그만 산이 있다. 이 산 아래로 쭉 내려오면 중산간 도로와 만나게 되는 지점에 동홍동 부락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부락 근처에 내 농장이 있었다. 명명하기를, 내 이름의 끝자를 풀어서 ‘일광농장’이라고 붙였다.
내가 가꾼 귤나무 품종을 대강 소개하자면, 조생온주로는 ‘궁천’ ‘흥진’ ‘삼보조생’ ‘송산조생’ 등이었고, 보통온주로는 ‘임온주’ ‘남강20호’ ‘청도’ ‘실버힐’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나는 이 귤밭에 잡감포를 마련한 다음, ‘네이블’을 비롯하여 ‘레몬’ ‘금감자’ ‘금귤’(낑깡) ‘팔삭’ ‘일향하’ ‘병귤’ ‘병감’ ‘개량지각’ ‘하귤’(나쓰) 등의 여러 품종들을 심어놓고 어린아이 다루듯 애지중지하였다.
자리가 좁은 나무는 바람 딛고 일어선다.
가지를 불쑥 내밀며 불거진 작은 외침
나뉘는 빛의 아픔이 잎새 끝에 덜어진다.
돌담 넘는 물보라가 서슬을 세우며 가고
구름이 내려앉으면 가슴을 뒤덮는 강물
파랗게 위엄을 일으켜 숲이 숲을 이끈다.
하늘을 밟고 올라 쿵쿵 가슴 뛰는 소리
일제히 초록 깃발 펼쳐 보인 귤밭이여
인동에 뿌리가 아픈 속울음이 젖어든다.
-졸시 ‘서귀포 귤밭1’ 전문
또, 서귀포동에 마련한 집의 정원에는 비파나무 한 그루와 겹동백나무 한 그루와 꽃치자나무 한 그루 및 종려 한 포기를 사다가 심었다. 그들 모두를 나란히 정원에 심어 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겹동백나무와 꽃치자나무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꽃치자나무는 크고 흰 꽃봉오리를 가지 끝에 달았다. 우리 내외는 가슴이 부푼 상태로 꽃이 필 때를 기다렸다. 그런데 꽃이 막 피려고 할 때, 장마가 들기 시작했다. 정원에서 비를 맞으며 웃고 있는 꽃치자나무를 보며 우리는 무척이나 애를 태웠다.
그런가 하면, 이삼년이 지나자, 어느 틈에 비파나무는 쑥쑥 자라서 내 키보다도 더 커졌다. 비료는 준 게 없고 그저 떨어진 잎을 쓸어서 그 뿌리 위에 덮어 준 게 고작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농약을 뿌려준 적도 한 번 없건만 나무는 무럭무럭 아주 건강하게 잘 자랐다. 옮겨 심은 지 6년이 되었을까? 비파나무의 키가 훌쩍 더 커지고 가지도 벌어서 지붕 위를 기웃거리는 듯싶더니 드디어 늦가을엔 복총상의 꽃차례로 누르스름한 꽃을 피웠다. 그리고 봄이 되자, 파란 열매가 달렸다. 그리고 초여름에는 금방울처럼 아름다운 노란 열매로 변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거리는 모습이 꼭 우는 아이를 달래는 시늉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이 비파의 노랗게 익은 열매 껍질을 손으로 벗기면 마치 수밀도 복숭아의 껍질처럼 얇게 잘 벗겨진다. 맛은 살구 열매의 맛과 비슷하여 새콤달콤하다. 다만, 흠이라면 과육이 물러서 저장성이 약하고 씨가 크다는 것뿐이다. 씨는 동백나무 씨처럼 생겼다. 이들 모두가 작품 창작의 소재가 되었다.
서귀포에서 일주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 세화(細花) 부근의 하도리 앞바다가 나온다. 북제주군 구좌읍 하도리 별방성(別防城) 터가 있다. 조선 중엽에 제주목사 장림(張琳)이 근해에 출현하는 왜구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축조한 성이다. 지금은 일부분만이 옛 모습대로 남아 있다. 이 하도리 해변에서 바라보면 손에 잡힐 듯이 가까운 거리에 토끼섬이 있다. 썰물 때에 물이 빠지면 걸어서 갈 수 있는 작은섬이다. 이 토끼섬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문주란(文珠蘭) 자생지로 잘 알려져 있다. 그 까닭으로 해서 일명 난도(蘭島)라고도 부른다. 나는 이 섬을 무척이나 사랑하여 그 전설을 한 편 창작하였는데, 지금은 그 작품이 전설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당시에 나는 이성선 형이 이미 1970년에 ‘문화비평’을 통하여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즉시 이성선 형에게 편지를 띄웠다. 고맙게도 그는 곧 답장을 나에게 보내주었다. 그가 보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웅 형! 참 오래간 만에 귀하고 반가운 소식 들었네. 처음은 재항이라는 이름으로 와서 누군가 했더니, 만웅이 자네였구먼, 참 반갑네. 실은 가끔가끔 자네가 생각나곤 했다네.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네만, 그 때 대학 때 넷인가가 편지를 써 보내며 평을 실어 보냈던 일이 있었지. 자네와 백승돈 그리고 남영자(南英子), 또 나였지. 백승돈은 졸업 후 농산물검사소 시험에 합격하여 그 곳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남영자 씨는 얼마(몇 년) 전에 여성동아 장편 모집에 당선되어 근래에 여류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곳 낙산사에 자주 들르는 편이고, 그 때마다 내게 연락을 주어 두 번인가 만나본 적도 있는데 중년부인이 되었네. 그 다음 궁금한 사람이 자네였지. 둘 소식은 알게 되었는데 자네는 통 오리무중이었거든. 가끔 대학 생활을 되돌아볼 때 편지로 시를 보여주고 평하고 하던 동인 아닌 동인 생활, 그 때가 자주 생각나고 또 그 사람들 모두가 그리웠지. 그 때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매우 중요한 일을 했다고 생각되네.’
이 편지는 더 길게 이어지는데, 여기에서 생략하기로 한다. 이성선 형의 편지는 풀어져 있던 내 마음을 다잡게 만들었다. 큰 자극이 되었다. 나는 더욱 창작에 몰두했다. 그에 따라 제주도에서 문학의 꿈을 조금씩 발돋움할 수 있었다. 즉, 1978년에는 대한불교신문 신춘문예에 작품 ‘해오라기’가 최종심에 올랐고, 1983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작품 ‘숲의 그 아침’이 최종심에 올랐으며, 1985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작품 ‘동학사에서’가 최종심에 올랐다. 이제는 어떠한 결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안일한 마음으로는 세월만 낭비할 뿐이라고 여겼다. 이를테면, 배수진을 치지 않고는 밥도 죽도 되지 않을 절박한 상황이었다.
일이 잘 되려는지, 내놓은 집이 금방 팔렸다. 집을 산 사람이 빨리 비워주기를 원해서 귤밭은 그대로 남겨 둔 채로 서울로 향했다. 1986년, 나는 어쩔 수 없이 서귀포를 떠나오면서 몇 번이나 귤밭을 돌아보았다. 사람의 정이란 이처럼 끊기가 어려운가. 지금도 이따금 그 귤나무들이 잘 자라고 있는지 문득문득 생각난다. 햇수로 10년이란 세월을 그 곳에서 보냈으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그 몇 년 후에 귤밭도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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