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나의 인생, 나의 문학(5)

시조시인 2010. 8. 18. 19:01

                                    나의 인생, 나의 문학(5)

                                                           김 재 황

 

 

 

1986, 나는 온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관악산 자락에 작은 집을 마련했다. 동네의 이름은 봉천 11동이었으나 지금은 인헌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낙성대(落星垈)가 있다. 낙성대는 고려의 명장인 강감찬(姜邯瓚)이 출생한 곳이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3대인 정종 3(948)에 하늘에서 문창성(文昌星)이 이곳으로 떨어지며 강감찬 장군이 태어났다고 한다. 강감찬의 어릴 적 이름은 은천’(殷川)이고, 본은 지금의 시흥인 금주’(衿州)라고 한다. 그리고 인헌’(仁憲)은 임금이 내린 시호(諡號)이다. 그래서 우리 동네에 인헌중학교와 인헌고등학교가 있다.

 

시인이 되려는 꿈 차마 버릴 수 없기에

십년이나 살던 섬을 훌훌 털고 떠나자니

가슴속 차는 시름이 파도처럼 철썩거리데.

 

하필 이 자리인가 넓고 넓은 세상에서

천릿길이 서운해도 아내는 봇짐을 풀며

무겁게 남쪽을 막는 관악산을 바라보았지.

 

멀리 친구를 두고 온 아이들의 손을 잡고

문창성 떨어진 곳, 탑을 찾아 올라가니

고려의 파란 하늘에 서귀포가 출렁거리데.

-졸시 낙성대에서전문

 

1987, 나는 신춘문예만을 고집하지 않기로 하고 한국문인협회에서 발행하는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모집에 응모하였다. 그래서 작품 서울의 밤이 당선되었다. 그 당시의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은 소설가 김동리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8월이었다. 그러면 이제부터 여기에 나의 시조문학 입문기를 요약해 보려고 한다.

 

그러니까 그 때가 1977년으로 기억된다. ‘시조랍시고 몇 편을 끼적거려 보았는데 어디에 내놓기가 여간 쑥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 때 샘터라는 잡지에 시조 독자란이 개설되어 있었다. 나는 까치놀이란 시조작품을 아내의 이름으로 투고하였다. 그런데 그게 그 해 3월호에 실리게 되었다.

 

몸으로 종을 울려 맺고 풀던 그 참사랑

한 줌 잔영이 남아 은비늘로 박혀 들면

하늘귀 바다에 열고 회심곡을 듣는 자리.

졸시 까치놀전문

 

그 작품의 평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나라 설화(說話)와 한()을 묶어서 서로 매듭짓고 있는 솜씨가 뛰어나다 이쯤의 솜씨라면 기성시단에 발을 들여놔도 손색이 없겠다. 그러나 솜씨만 믿고 시를 날려 쓴 짐작이 들어 서운하다.(李根培)

나는 비로소 용기를 얻었다. 더욱 노력하면 되겠다고 여겼다. 시조공부를 본격적으로 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 해도 저물어 가고 신춘문예의 계절이 왔다. 나도 예외 없이 그 병이 들었다. 나는 만용을 부렸다. 제대로 익지도 않을 작품을 가지고 대한불교신문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해오라기란 작품이 최종심에 올랐다.

 

낮이면 숲에 올라 수잠 속에 들다가도

회회청 먹인 길에 정을 쪼는 여문 부리

여울로 회향해 오는 물색 짙은 넋이여.

-졸시 해오라기첫수

 

심사평은 대략으로 이러했다.

選者에게 돌아온 가벼운 篇數의 작품을 놓고 무거운 마음으로 散調’(이태원), ‘’(李玉仁), ‘해오라기’(김재황), ‘因緣’(이봉학), ‘무궁화’(李江心) 5편을 골라잡았다. 5편 중에서 李江心은 아무래도 좀 처진다는 점에서, 김재황은 좀 말때움질을 면치 못했다는 점에서 제외되었다.(鄭椀永)

부끄럽고 또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도 있었으나, 그 동안 기울인 내 노력에 비하면 최종심에 오른 것만도 과분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결심이 실행으로 옮겨지기는 쉽지 않았다. 나는 농장을 꾸밀 생각이어서 동분서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에 제주도 서귀포를 가게 되었고, 그 곳에 조그만 귤밭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새로 농장을 일군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어서, 몇 년 동안을 나는 몹시 바쁘게 살았다. 조금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자, 나는 다시 시조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82년이 저물 무렵, 몇 편의 작품을 추려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숲의 그 아침이 최종심에 올랐다. 그 심사평은 다음과 같았다.

최종심에 올라온 작품은 金鍾燮겨울 동양화’, 박연신의 눈이 내리면’, 이강룡의 ’, 김재황의 숲의 그 아침’, 정공량의 心想’, 이종철의 가을斷想’, 許旻과 김수림의 해바라기등이었는데 金鍾燮겨울 동양화를 당선작으로 가렸다. 중략이강룡, 김수림, 김재황, 허민의 작품도 각각 특징들이 있었다. 전반적으로 작품들이 향상되어 있었음은 기쁜 현상이라고 보겠다. 또 순전한 서정만이 아니라, 시대성과 생활상을 바닥에 깐 고도한 정감화에 힘써 주었으면 한다. (李泰極)

많이 상심하였던지, 그 후로 또 공백이 있었다. 사는 게 그만큼 힘들었기도 했다. 그런데 1984년이 저물어 가자, 또 신춘문예의 병이 도졌다. 그 동안에 모아 두었던 몇 작품들을 손질해서 이번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그런데 그 중 동학사에서라는 작품이 최종심에 들었다.

 

어둠도 낮과 같은 믿음의 하늘이라

침묵은 문을 열어 저승까지 환한 달빛

관세음 고운 눈길이 미소 한 점 남깁니다.

졸시 동학사에서둘째 수

 

그 심사평은 또 이러하였다.

응모된 작품들은 字數律을 거의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가락을 휘어잡아 자유롭게 요리하기에는 미진했고, 가락에 질질 끌려 다니는 인상이었다. 중략당선을 다툰 작품으로는 뱃사공 분도의 엽서’, ‘작은 사랑의 노래’, ‘귀향’, ‘동학사에서’, ‘을 노래한 三曲’, ‘강가에서’, ‘全琫準의 적이 골인 一步 전에서 뒤졌다. (朴在森, 李根培)

참으로 그만둘 수도 없고, 더 이상 계속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나는 약해지려고 하는 마음을 다독였다. 나는 작품 한 편을 정서하여 중앙일보 독자 시조란담당자 앞으로 보냈다. 그 작품이 게재된 것은 19877월이었다.

 

뜨거웁게 앓는 소요, 물굽일 갈앉힌 심연

태초에 닫힌 침묵, 풀빛으로 우린 고요

청산도 명상을 풀고 빈 가슴을 내보인다.

―― 졸시 녹차를 따라 놓고전문

 

다행히 좋은 평을 받았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차를 마신 듯 쇄락한 정서를 노래한 작품이다. 뜨거운 열기로 일렁이는 감정의 물굽이를 깊고 고요하게 가라앉힌 경지에서 마주한 靑山과 하나로 융화한 모습, 그 깊은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金濟鉉)

그 시점에서 나는 신춘문예만을 고집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월간지를 골라서 신인작품상에 응모하기로 마음먹었다. 드디어 시조를 공부한 지 10년이 되는 1987, 월간문학으로 투고하여 8월에 신인작품상을 받았다.

그 평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결국 최종심에 오른 세 작품 군산항 저물 무렵’, ‘채석장에서’, ‘서울의 밤을 놓고 겨루었는데 군산항 저물 무렵은 좀더 이미지를 몽글리고 대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서 다음 기회로 돌렸다. 다시 서울의 밤채석장에서는 각기 개성이 달라서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서울의 밤은 평범하고 다루기 힘든 소재를 소화하여 개성을 가지고 서정의 새 경지를 열어 주었으며 전 작품이 고르다는 데 있었고, ‘채석장에서는 그가 이끄는 이미지가 폭절은 생활정감과 상황이 개성에서 나온 듯한 넉넉한 안정감을 주고 있다는 것을 꼽았다. 말하자면 시조단에 내어놓아도 자기 몫을 훌륭히 개척할 수 있다는 데 의견이 모아져 당선작으로 같이 밀기로 했다. (金濟鉉, 李相範)

 

서 있기만 하던 숲이 흔들리고 있다

지붕을 타고 내려 모퉁이로 기는 바람

불을 켠 포장마차가 밤거리를 흐른다.

 

한 순간을 잊어 보는 시름은 아직 남아서

뒤밟는 검은 영혼 그림자를 떨치려고

한 잔 술 취기를 입으면 앞서 가는 가로수.

 

갈라진 건물 틈새 절어 있는 주름진 때

달빛이 그늘을 일궈 밤벌레를 들춰내면

개구리 하얀 울음이 숯불 위를 걸어간다.

 

아득한 심연으로 수초 같은 혼이 잠긴

명멸하는 불빛들이 비늘처럼 박히는데

비비는 어둠의 소리 쓸려 오는 갈대 소리.

 

정해 둔 수심도 없고 열어 논 물길도 없다

드리운 꿈을 입질해 낚이는 허무를 따는

거리의 주정꾼 하나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 졸시 서울의 밤전문

 

이로써 수많은 밤을 밝히고 작품을 쓰면서도 , 마음 한 편으로는 불확실한 진로에 방황하던 고통의 날은 끝났다. 이제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가야 할 길을 정했으니, 앞만 보고 가면 그뿐이다. 그게 나에게는 더 없는 행복이다.

19886, 드디어 나는 작품 2, 아침숲 이야기를 월간문학을 통해서 발표하였다. 이 중의 아침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최종심에 들었던 숲의 그 아침을 다시 손을 보아서 개작한 작품이다. 그 두 작품에 대한 평이 현대문학에 실렸다.

이 달에 관심을 끌게 한 것으로 김재황의 시조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아침숲 이야기등 고른 수준의 2편을 월간문학에 선보였다.

 

산새를 울음빛에/ 단풍이 젖어 있다/ 멀리 기지개 켜면/

달려가는 산메아리/ 간밤에 산마루 너머/ 잦아들던 風樂이더니.

이슬로 방울지는/ 성좌를 가늠 보면/ 놓고 간 고운 音聲/

빛살 되어 내려앉고/ 그 은혜 잎새 사이로 /하늘 열고 내민 얼굴.

―― 아침’ 12

 

그리고 같은 셋째 수에서는, 문 열린 골짝마다 물소리 스미는 母土라든지, 고뇌 또한 山果의 맛으로 비유한 것과 연륜 깊이 묻힌 적막을 일궈 하나의 불붙는 갈채로 승화시킨 점은 신인의 차원을 넘어선 산뜻한 감칠맛이 그대로 살아 있는 시조다운 맛을 느끼게 했다. 그저 평범한 소재로 제 맛을 내는 수완을 발휘한 것은 이 시인의 저력을 암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 점에서 자연에 대한 서정성을 군더더기 없이 교감시켜 응축해 낸 통찰력은 시조의 그릇에다 우리 본래의 토착적인 감각을 효과적으로 도입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김재황이 같은 지면에 발표한 숲 이야기역시 매끄러운 여력이 나타나고 있다. 자연의 공간 속에 비친 자아의 눈을 통하여 시름과 통증을 삭이려는 인간의 고뇌와 숲의 연계성을 표출함으로써 일단은 성공을 거둔 것이다.(李殷邦)―』

어쨌든 이렇게 나는 시조단의 말석을 얻게 되었으니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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