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되짚어 본, 내 삶과 문학의 발자취
김 재 황
(1)
1942년 8월, 나는 옛 고구려 영토인 만주 땅의 봉천에서 태어났다. 지금 그 곳의 지명은 바로 심양(瀋陽, Shenyang)이다. 물론, 내가 4살 되던 해에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음으로써 부모님의 손을 잡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 다음해, 나는 집안 사정에 의하여 할머니를 따라 고향인 파주의 큰아버지 댁으로 내려가서 살게 되었다. 내 본적지는 파주의 임진면 임진리인데, 그 당시 고향에는 임진강에서 좀 떨어진 ‘야동’(野洞)이라는 마을에 큰아버지 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생각해 보면, 그 마을은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마을 앞에는 제법 넓은 냇물이 맑게 흐르고 있었으며, 마을 뒤로는 숲이 우거진 동산이 아담하게 엎드려 있었다. 사촌형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이 두 곳이 나의 놀이터였다. 그 당시에 임진강은 물이 반이요 물고기가 반이라고 했다. 이 냇물이 임진강과 이어져 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물고기들이 살고 있었겠는가. 물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굵다란 붕어들은 말할 것도 없고 메기와 배가사리와 쏘가리를 비롯해서 심지어는 뱀장어까지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여름철에는 텀벙 그 물속으로 들어가서 그 물고기들과 마음껏 어울려 놀았다.
그런가 하면, 동산에는 철 따라 갖가지 꽃들이 지천으로 피었다. 그 중에서도 나는 특히 나리꽃 종류들을 좋아했다. 여기에서 참나리가 방긋 웃는가 하면 저기에서는 솔나리가 수줍은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말나리도 있었고 하늘나리도 있었으며 중나리와 땅나리도 결코 빠지지 않았다. 어린 나는 이 꽃들을 찾아다니느라고 하루 종일 동산을 떠날 줄 몰랐다. 마침내 해가 뉘엿뉘엿 지고, 저녁밥을 먹으라고 부르시는 할머니 목소리가 들린 다음에야 마지못해 동산을 내려갈 정도였다.
아, 그러고 보면 내 귀를 즐겁게 해준 매미의 노랫소리도 결코 잊을 수 없다. 아마도 매미의 노래만큼 아름다운 자연의 음악은 없을 성싶다. 매미들은 종류마다 독특한 개성을 지녔다. 그래서 그 노랫소리만 들으면 금방 어느 종류의 매미인지를 알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말매미는 ‘쐐쐐’하고 노래한다. 얼마나 목소리가 우렁찬지, 한 떼가 몰려와서 합창할 때에는 귀청이 떨어져 나가는 성싶다. 참으로 귀가 따갑다. 그런가 하면, 참매미는 ‘민민’하고 노래한다. 그 노랫소리가 한결 부드럽다. 이는, 은근한 멋을 지녔다. 또한, 털매미는 ‘씽씽씽’하고 노래하며, 유지매미는 ‘찌찌’하고 노래를 부른다.
아무래도 가장 멋지게 노래하는 매미는, ‘쓰름매미’라고 말할 수 있다. 쓰름매미의 노래를 보통 ‘쓰르람쓰르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그 노랫소리를 ‘이이씨용 이이씨용 …찌르르’라고 듣거나, 혹은 ‘찌이용 찌이용 찌이용 …찌찌찌’라고 한다거나 ‘이이창 이이창 이이이창…찌르르르’라고 표현한다. 하기야, 듣는 사람에 따라 노랫소리가 다른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동산에는 꽃들이 많았으나 그에 못지않게 새들도 많았다. 그 새들도 노래를 아주 잘한다. 모두 알다시피 목소리가 가장 아름다운 새는 꾀꼬리이겠지만, 나는 그 새보다도 어치의 노랫소리를 더욱 좋아했다. 어치는 까마귀과에 딸린 새이다. 즉, 참새목 까마귀과의 조류로, 비둘기보다는 그 몸집이 조금 작다. 지금도 비교적 쉽게 만날 수 있는 새이다. 어치는 참나무 열매를 좋아하고 사시사철 숲속의 나무 위에 살며, 땅 위로는 잘 내려오지 않는다.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뛸 때는 양쪽 다리를 모은다. 그리고 날 때는 날개를 천천히 퍼덕여서 날아오른 뒤에 파도 모양을 그리며 날아간다. 경계할 때는 맹렬하면서도 가늘게 ‘쀼우 쀼우’하고 휘파람 소리를 낸다. 옛 문헌을 보면, 어치는 곧잘 ‘사랑해요’라든가 ‘아빠’라고 말하기도 한단다. 그런 새를 어찌 내가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한 번은, 많은 비가 내린 다음날이었다. 나는 동산의 무너져 내린 절개지에서 어린 물총새 두 마리를 발견하고 그들을 데려다가 기른 적이 있었다. 다행이 그 녀석들은, 내가 잡아다가 주는 올챙이나 개구리 등의 먹이를 잘 받아먹었다. 그리고 날개가 다 자라서 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냇가로 나가서 훨훨 멀리 날려 보내 주었다. 날아가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환하다.
어쩌다가 냇가에서 종다리 둥지를 발견하는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그 둥지 근처에 표시를 해 놓고 이따금 살금살금 찾아가서 그 속의 알들을 구경하곤 했다. 그러다가 알들이 깨면 근처에서 새끼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새 때문에 눈물을 흘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나보다 두 살 위인 사촌형이 뒷동산에서 때까치 새끼 한 마리를 주워 왔다. 참으로 그 녀석은 먹성이 좋았다. 손가락을 입 근처에 갖다 대어도 입을 크게 벌렸다. 나는 그 모습이 안쓰러웠기에 들녘으로 나가서 메뚜기와 방아깨비 등을 잡아다가 열심히 먹여 길렀다. 그런데 하루는 동네의 한 형이, 피우던 담배꽁초를 그 녀석의 벌린 입속에 쏙 넣어 버렸다. 말릴 틈도 없었다. 그 녀석은 먹이인 줄 알고 한입에 꿀꺽 삼켜 버렸다. 그로 인해, 그 녀석은 그만 목숨을 잃었다.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발버둥을 치며 한나절을 족히 울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찐하다.
그 당시에도 나는 나무들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냇가의 미루나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동네 앞의 큰 느티나무를 비롯해서 동산의 떡갈나무와 신갈나무 등을 모두 좋아했다. 그렇다고 키 큰 나무들만 좋아한 게 아니라, 키가 작은 나무들도 좋아했다. 이를테면 ‘개암나무’나 ‘노린재나무’ 등과 같은 떨기나무 옆에 누워서 하늘을 보면 흰 구름이 달콤한 솜사탕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느 하루는 동산에서 실컷 놀고 왔는데, 이상하게 몸이 근질근질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보였더니 아주 깜짝 놀라셨다.
“아니, 너 옻이 올랐구나!”
시골에 마땅한 약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할머니는 닭을 잡아서 그 삶은 물을 내 몸에 발라 주셨다. 처음에는 이게 웬 닭고기냐 하고 맛있게 먹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닭고기에 질려 버리고 말았다. 나는 꽤 오래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로 고생을 했다. 사촌형들도 닭 냄새가 난다고 나를 모두 피하였다. 그래도 나는 동산으로 가서 놀았다.
이렇듯 시골에 살며 온갖 풀과 나무 및 물고기와 새들을 벗하여 놀았던 일들이 지금도 내 가슴에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아마도 그 때에 산과 들의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놀았던 일들이 내 감성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리라고 본다. 그래서 나는 녹색시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여긴다.
그리고 몇 년 후,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할머니와 함께 부모님이 계시는 서울로 돌아왔다.
1949년, 나는 초등학교 학생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 삶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은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정확히 말하면 ‘국민학교’였지만, 나는 지금의 ‘초등학교’란 말을 더 좋아한다. 내가 처음으로 입학한 학교는 서울의 창신초등학교였다. 그 얼마 후에 종암초등학교로 전학했고, 2학년이 되던 해에 6.25전쟁을 만났다. 알다시피, 그날이 바로 1950년 6월 25일이었다.
부모님은 먼저 피난을 떠나시고, 나는 할머니와 집에 남았다가 고향으로 다시 가서 머물게 되었다. 그 때에도 혼자 산으로 올라가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다. 그 곳에 이미 인민군이 들어와 있었는데, 붉은 완장을 두른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모아 놓고 ‘김일성 장군’이라는 노래를 가르쳤다. 그러나 그 후에 수복이 되고 1.4후퇴 때는 나도 할머니와 무작정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여기 저기 수소문 끝에 제주도에서 부모님을 만났고, 제주시 제남초등학교 3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다. 나는 그 때에 처음으로 한라산을 보았다. 그 웅장한 모습에 입이 딱 벌어졌다.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좋았다. 한라산 자락에는 고구마 밭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그 후, 서울로 돌아오면서 잠깐씩 머물게 된 고장에서 학교를 다녔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다음, 그 동안 다녔던 초등학교를 모두 꼽아 보니 자그마치 8군데나 되었다.
그러니까, 1953년 7월 27일에 휴전이 이루어짐으로써 나는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으며, 서울의 흑석동에 자리 잡고 있는 은로초등학교로 전학하게 되었다. 5학년이 모두 끝나고 나서 막 6학년이 시작되려고 하는 때였으며, 1955년이 되던 해의 봄에 은로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렇듯 순탄하지 못한 초등학교 시절이었으나, 지금도 그 당시의 일들이 문득문득 눈앞에 떠오르곤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서울의 창신초등학교를 입학한 시절이다. 우리 집으로 가는 길가에 조그만 냇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먼저 그곳으로 달려가곤 했다. 왜냐하면, 그 냇물에 커다란 가재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놈을 또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어서도 그놈만 생각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개울로 달려가 보았으나 모두 허사였다. 하지만 나는 낙심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마침내 내 꿈은 이루어졌다.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냇물에서 멋지게 기어가고 있는 그놈을 보았다. 그리곤 얼마 후에 나는 종암동으로 이사를 갔다.
피난 때에 제주도의 제주시를 비롯하여 부산과 양산 및 마산, 그리고 장승포 등지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장승포초등학교를 다닐 때의 기억이 새롭다. 5학년이 막 되었을 때, 학교에서 점심으로 내주는 ‘끓인 우유죽’을 맛있게 먹었던 일이 생각난다. 그리고 여름에 작은 섬으로 피서를 갔으며, 그 곳에서 끔찍스럽게도 나는 큰 구렁이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던 일도 있다.
그렇다고 내가 뱀을 우습게 생각했느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뱀을 제일 무서워했다. 내가 제일 만만하게 여긴 동물은 개구리였다. 그날, 나는 그 섬에서 큰 개구리 한 마리를 발견했다. 그래서 그놈을 잡겠다고 부리나케 쫓아갔다. 그놈은 팔짝팔짝 잘도 뛰었고, 나도 질세라 부지런히 뒤를 따랐다. 그런데 그놈이 멀리 뛰어서 풀숲에 숨었다.
나는 ‘옳다구나.’하고 그 풀숲을 향하여 몸을 날렸다. 그런데 손에 뭉클한 게 잡혔다. ‘네가 뛰어 봤자 벼룩’이라고 여기며 손을 들어올렸다. 앗, 이게 무엇인가? 손에 잡힌 건, 큰 구렁이였다. ‘에구머니!’ 나는 기급을 하여 펄쩍펄쩍 뛰었다. 심심하면 만만한 개구리를 잡아서 괴롭혔으니, 그 벌을 그렇게 받았으리라. 그 후로는 개구리를 괴롭히지 않았다. 나는 장승포초등학교에서 우등상을 받았다.
내가 졸업한 은로초등학교도 잊을 수 없다. 화가인 담임선생님을 좋아해서 나는 그림을 열심히 그렸다. 그 덕분에, 내가 내 손을 보고 연필로 그린, 소위 ‘데생’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 후로 나는 화가가 되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때는 틈만 나면 한강으로 나가서 벌거벗고 수영을 하곤 했다. 제주도에 살았을 적에 이미 ‘헤엄치기’는 배워 놓았으므로 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수영이라고 하니까, 아무렇게나 물에 뜨는 정도였을 거라고 여기면 곤란하다. 아주 잘 다듬어진 ‘평영’이었다. 그래서 한때는 수영선수가 되고자 했다. 그 꿈을 밀고 나갔더라면, 세계 올림픽은 몰라도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 정도는 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보곤 한다.
그러나 나는 늘 글쓰기에서 가장 많은 칭찬을 받았다. 은로초등학교 재학시절, 담임선생님은 학급 아이들에게 아주 잘 쓴 글이라고 하시며 내 일기를 읽어 주시기도 하였다. 나는 그저 쑥스럽기만 해서 얼굴을 깊숙이 파묻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이야 말로, 가장 아름답고 귀하다. 순수하기도 하려니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더욱이 여러 곳으로 전학을 거듭하였던 그 어려움이 어쩌면 내 문학의 단단한 기초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2)
1955년, 나는 은로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선린중학교로 진학하였다. 이는, 순전히 어머니의 강권에 의한 일이었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무엇보다 돈이 필요하고, 돈을 만지는 은행에 취직하려면 반드시 상업학교로 가야 한다고 하셨다. 그 때만 하여도 중학교를 선택하여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다. 그 당시에 나는 흑석동에서 살았는데, 선린중학교는 그리 거리가 멀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시험을 치르고 입학해 보니, 후회가 컸다. 주판이며 부기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그 다음해인가, 우리 가족은 서울중고등학교 옆의 종로구 신문로2가로 이사를 했다. 그 서울중고등학교 자리가 지금의 경희궁지이다. 그 때부터 중학교에 전차를 타고 다녔다.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어느 날, 우리 집의 조그만 꽃밭 옆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옆집에 사는 내 또래의 여학생이 다가와서 불쑥 물었다.
“너 무슨 책 읽니?”
나는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가슴이 어찌나 뛰는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마도 얼굴이 발갛게 되었을 게다. 이런, 이런, 바보라니! 그 여학생은 재미있다는 듯 야릇한 미소를 머금으며 돌아서서 걸어갔다. 그 후부터 나는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늘 눈앞에서 그 여학생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잠도 이룰 수 없었다. 차마 그녀에게 말을 건넬 용기는 없었지만, 그 대신으로 그녀가 읽고 감동을 받을 만한 편지를 써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월 시집 한 권을 구해다가 밤이 새도록 읽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고 나서 그 시를 흉내 내어 몇 줄의 편지를 썼다. 그런데 그 편지를 어떻게 전한단 말인가? 나는 몇 날을 망설인 끝에 그녀의 손에 그 편지를 쥐어 주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을 쳤다. 답장이 올까? 이젠 어떻게 하지? 더욱 마음을 졸였다. 아! 그런데 며칠 후에 그녀가 답장을 주었다.
‘네 시 좋더라.’
짧은 글이었지만, 나는 온 세상을 얻은 듯이 기뻤다. 이렇게 나는 시로써 첫사랑을 얻었다. 그 후에 그녀와 함께 나들이를 한 적도 있었는데, 나는 그녀에게 그 시는 그녀만을 위해서 쓴 작품이니 절대로 남에게 보여 주어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나 거듭 말했다. 여러 사람이 알게 되면, 소월 시의 모작임이 금방 들통 나게 될 것 같아서였다. 다행히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여하튼 그 일로 해서 시와 한 발짝 더 가까워지는 계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에게만 빠져 있지는 않았다. 내 주위에는 좋은 친구들이 많았다. 여름이면 그들과 함께 한강 백사장으로 가서 놀았다. 특히 한강 상류인 팔당은 그 당시에 손꼽히는 유원지였다. 잠수하여 강바닥을 손으로 훑으면 조개가 한 움큼씩 잡히곤 했다. 겨울에도 우리는 한강으로 달려갔다. 두껍게 얼은 빙판 위에서 썰매도 타고 팽이도 돌렸다. 얼음 구멍을 뚫고 그 앞에 앉아서 고기를 낚은 친구도 있었다. 그 때의 그 그리운 친구들을, 지금은 낡은 사진첩에서나 만날 수 있다.
나는 서울보다는 시골이 좋았다. 그러니 상업학교가 적성에 맞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중학교를 졸업한 1958년에는, 시골의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려고 서울사범고등학교에 입학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1차 필기시험에는 합격했으나, 2차 실기시험은 자신이 없어서 포기했다. 다행이 사범학교가 특차였기에, 나는 배재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많은 문학작품을 탐독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심훈의 ‘상록수’에 심취하여 여러 번을 거듭 읽었다. 그리고 크게 감동하여 그러한 삶을 살고자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우리는 은평구 불광동으로 이사했다. 그 곳에서는 구파발이 그리 멀지 않았고, 구파발을 통해 북한산을 오르곤 했다. 그해 겨울방학 때였던 듯싶은데, 친구 몇이 북한산을 올랐다가 길을 잃었다. 모두들 기진맥진하여 산속을 헤매고 다니다가 날이 저물었다. 그 추운 겨울에 먹은 것이라곤 건빵 몇 개가 전부였다. 특히 내가 탈진하여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산길을 내려왔다. 그런데 천우신조였다. 정말 천만다행으로 캄캄한 밤에 한 초가집을 발견하고 문을 두드리니 할머니 한 분이 나오셔서 ‘이 아이들이 웬일이야.’라고 하시며 방으로 안내한 다음에 숭늉을 김이 무럭무럭 나게 끓여다가 한 그릇씩 나누어 주셨다. 아, 구수한 그 냄새와 맛을 어찌 잊겠는가. 며칠이 지나서 그 할머니에게 고마움을 답하려고 찾아갔으나 도통 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그리고 4월이 밝았다. 어느새 중순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4.19날! 나는 학교의 교실 책상 앞에 앉아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밖에서는 양정고등학교의 학생들이 몰려와서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담임선생님께서 문을 가로막고 계셨다. 그렇더라도 창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렸어야 하는 건데, 지금 생각해도 우리는 비겁했다. 물론, 선생님은 제자들이 다칠 것만을 염려하셨으리라. 그로 인해, 항상 나는 4.19라는 말만 나오면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자, 나는 대학 진학에 ‘국문학과’와 ‘농학과’를 놓고 고심하였다. 시골의 조용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글을 쓰기에는 ‘국문학과’가 더없이 좋을 것 같았고, 또 한편으로는 시골에서 과수원을 경영하며 시를 쓰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여러 날을 끙끙거리며 지내다가, 자연에게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농학과’가 좋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1961년, 나는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농학과에 입학하였다. 농학과에는 배재고등학교 친구 4명이 입학시험을 치렀고, 그 절반인 2명이 합격하였다. 그런데 농학과 신입생 중에 이성선 형이 있었다. 그러니 이성선 형과 나는, 같은 대학 같은 과의 동기동창이다. 더군다나 이성선 형도 문학(詩)을 꿈꾸고 있었으므로 우리 둘은 금방 가까워졌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의 내 이름은 ‘만웅’(滿雄)이었으나, 졸업하면서 집안 항렬자에 따라 ‘재황’(載晃)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성선 형은 중학교 때까지는 그 이름이 ‘진우’(珍雨)였다고 한다. 그렇게 우리는 아명(兒名)까지 똑같이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성선 형과 함께 하였던 학창 시절은 그리 길지 못했다. 1962년 5월, 그는 훌쩍 학보병으로 입대해 버리고 말았다. 나는 학교에 남아서 고대 교수이신 조지훈 시인을 스승으로 삼고 쓸쓸함을 시로 달랬다. 참으로 멋진 스승이셨다. 작품도 더없이 향기롭거니와, 모습도 영락없는 선비셨다. 아니, 그보다도 그 인품이 학처럼 고고하셨다.
한 번은 시험 감독으로 들어오셨는데, 신문 한 장을 들고 오셔서 시험이 끝날 때까지 창밖을 향한 채로 읽고 계셨다. 그러한 믿음에 감동하였는지, 시험을 치르는 학생 모두가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조용하였다.
내가 대학을 입학하고 나서 얼마 안 되었을 때, 박정희 소장이 5.16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때문에 대학가는 매우 소란스러웠다. 연일 데모가 계속되었고, 나도 뜨거운 가슴으로 참가하였다. 그 매운 최루탄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몇 대학의 학생들이 모여서 최루탄문학회를 만들었다. 나도 이 문학회의 멤버였고, 우리는 어느 공터의 한 귀퉁이를 빌려서 시화전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어느 날, 한 친구가 나에게 와서 ‘네 이름도 정보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더라.’라고 말했다. 나는 각오하고 더욱 마음을 단단히 다졌다.
나는 형제가 많다. 그래서 기회를 잡았을 때에 어떻게 해서든지 학업을 끝마쳐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정식으로 병역의무를 위한 입대는 2학년 때에 가게 되어 있었는데, 나는 병무청에 입대연기신청서를 제출하고 계속하여 학교를 다녔다. ROTC를 지원할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매력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 더군다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는 게 사실이라면 받아주지도 않을 게 명약관화한 일이어서 그대로 눌러앉았다.
고려대학교의 분위기는 나의 구미에 맞았다. 나는, 아니 우리는 공부보다도 멋보다도 젊음을 구가했다. 그 당시에, 50원이 생기면 ‘서울대학교 학생은 책을 사고 연세대학교 학생은 구두를 닦고 고려대학교 학생은 막걸리를 마신다.’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 말이 사실이어서 나는 대학교 시절에 막걸리를 많이 마셨다. 아, 그때는 대학생들도 교복을 입었다. 고려대학교에도 짙은 남빛의 교복이 있었고, 마치 중공군 모자처럼 생긴 교모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주로 군복을 검게 물들여 입었다. 그게 행동하기에 편했다. 그래도 그 작업복 가슴에, ‘호랑이 모습이 새겨져 있는 고대 배지’를 달고 밖으로 나서면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나는 불광동에서 안암동까지 버스를 갈아타며 학교를 다녔다. 그때의 만원 버스가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으나, 그게 얼마나 사람의 진을 빼었는지는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을 알지 못한다. 어느 날인가, 그 만원 버스가 고려대학교 정문 앞에 정차했을 때에 한 소매치기가 붙잡혔다. 대담하다고 할까? 아니면 무모하다고 할까? 학생 차림이었는데, 학생들의 손에 이끌려서 밖으로 나왔다. 그 다음의 일은 상상에 맡긴다.
그때, 무엇보다도 우리의 피를 끓게 만들었던 게, 바로 고연전이다. 내 기억으로 고려대와 연세대는 농구와 럭비와 아이스하키와 축구 및 야구 경기를 해마다 열었다. 그 모든 경기가 막상막하의 영원한 라이벌이었다. 그렇게 고연전이 팽팽하게 열리는 날에는 고려대학교의 교호가 서울 하늘에 메아리쳤다.
‘입실렌티체이홉 카시코시코시코, 칼마시케시케시, 고려대학. 칼마시케시케시, 고려대학.’
아마도 일반 사람들은 이 교호의 뜻을 잘 모를 성싶다. 이 교호 안에는, 세계적으로 사회비판 의식이 강했던 학자들의 이름이 들어 있다. 다시 말해서 입실렌티, 체이홉, 카시코시 코시코, 칼 마르크스 등이다. 그리고 ‘케시케시’는 ‘살아서 숨 쉬고 있다.’라는 뜻으로, 나는 이해하고 있다. 어디 그뿐이었겠는가. 고연전이 열릴 때마다 ‘이겨도 당당히 싸워서만 이긴다. 맹호는 굶주려도 풀을 먹지 않나니’라는, 고려대학교 응원가를 목이 터져라 불렀다. 이 응원가를 작사한 분이 바로 조지훈 시인이시다. 그리고 이 응원가 중의 ‘맹수는 굶주려도 풀을 먹지 않는다.’라는 구절은, 지금까지도 내 인생의 길잡이가 되고 있다. 이게 선비의 정신이고 시인의 정신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 정신을 아직도 지주로 삼고 산다.
그렇다고 술만 마시지는 않았다. 고려대학교에는 훌륭한 도서관이 있다. 나는 그 도서관에서 많은 책들을 정독했다. 문학작품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곁들여서 역사책이라든가 철학에 관한 책들도 읽었다. 그리고 습작이었으나 많은 작품을 쓰기도 했다. 그 결과로 1963년 9월 14일, 나의 시 한 편이 고대신문에 실렸다. 그 작품의 제목은 ‘가을 二題’였다.
나의 벗, 이성선 형은 1964년에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하였다.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그러나 배우는 과정이 달랐으므로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복학한 지 얼마 안 되는 4월 4일, 그도 고대신문에 시 한 편을 발표했다. 그 작품의 제목은 ‘꽃’이었다. 아주 훌륭하였다. 그의 작품을 나는 여러 번 읽었다. 이미 우리 두 사람은 진로가 문학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3)
1965년 2월, 나는 고려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제는 하루 빨리 병역의무를 완수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무런 통지가 없었다. 나는 서울병무청으로 달려갔다. 담당자는 서류를 뒤적이더니 내가 기피자로 되어 있다고 말했다. 나는, 입대연기원서를 제출하였는데 무슨 기피자란 말이냐고 항의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입대연기원서는 한 번만 제출하면 되는 게 아니라, 매년 제출해야 된다고 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그 담당자에게 고개를 숙이고, 어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해에 다시 신체검사를 받고 다음해에 징집 통지서를 받은 후에 입대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1년을 허송세월로 보낼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한가하게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또, 군대를 다녀오지 않고는 취직은 생각하지도 못할 일이였기 때문에 더욱 난처하였다. 고민을 거듭하고 있자니, 누군가가 나에게 귀띔을 해주었다.
“나라를 지키려고 군대를 가겠다는데 그것을 누가 말리겠는가? 징집 당일에 현지로 가서 자원입대를 해보게.”
6월이었는데, 마침 며칠 후에 인천에서 징집이 있다는 말이 들렸다. 나는 무작정 인천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징집 장교로 보이는 육군대위 한 사람을 붙들고 내 사정 이야기를 했다. 그는 내 처지가 딱해 보였던지, 따라오라고 하더니 신상기록카드 한 장을 주며 그 내용을 빠짐없이 기록하라고 했다. 그는 내가 내미는 나의 카드를 받아서 여러 신상기록카드 사이에 끼워 넣었다. 이렇게 나는 간신히 훈련소로 향하게 되었다.
나는 마침내 제1훈련소 29연대로 가게 되었고 그날부터 피나는 훈련이 시작되었다. 아침 6시에 기상하여 저녁 10시에 취침하는 규칙적인 생활 속에서 총검술이며 각개전투며 사격술 등 기초 훈련을 쌓아 갔다. 푹푹 찌는 날씨에 우비를 접어서 엉덩이 한쪽에 찬 채로, 그 무거운 M1소총을 어깨에 메고 날마다 행진을 거듭했다. 그럴 때마다 얼굴이 검게 타서 눈만 반짝거리는 교관이 힘차게 외쳤다.
“행진 간에 군가를 부른다. 군가는 진짜 사나이. 군가 시작 하나 둘 셋 넷.”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진 전우야
산봉우리에 해 뜨고 해가 질 때에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꿈을 꾸었다.
우리는 발을 맞추며 씩씩하게 군가를 불렀다. 힘들고 고된 훈련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자랑스럽기도 했다. 이제 나도 ‘진짜 사나이’가 되었다는 자부심이 생겼다. 군대에서는 한 사람이 잘못을 했더라도 단체기합을 받게 된다. 그러니까 자연히, 자기의 잘못으로 동료까지 고생을 시키게 되므로 무척이나 행동에 조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나보다도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이게 바로 동지애이다. 공동생활은 여기에서부터 싹 튼다.
신병훈련소에서의 생활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며 날짜가 거듭될수록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조금 더 지나자, 덜 익은 듯싶은 밥맛도 꿀맛이었고 소태처럼 쓰기만 하던 시래기 국의 맛도 구수하기만 했다. 어찌 반찬을 투정하랴. 그저 밥 한 그릇에 국 한 그릇이면 모두들 마파람에 게눈을 감추듯 비워 버렸다. 먹성이 그래서가 아니라 입맛이 그러하였다.
그런데 나에게는 남다른 괴로움이 하나 있었다. 원래 선천적으로 뜀뛰기에 대한 소질이 없어서 연병장을 한 바퀴 돌고 선착순으로 집합하라는 단체기합에서는 언제나 꼴찌를 했다. 그래서 몸이 재빠른 동료는 한 바퀴만 돌고 느긋하게 쉬고 있을 때도, 나는 연병장을 계속 뛰어야만 했다. 더욱 걱정스러운 일은, 훈련을 끝내고 특과 학교로 가게 되는데, 나는 부여받은 번호가 050이었으므로 거의 확실히 헌병학교로 가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그리 걱정하던 일이 현실로 다가왔다. 훈련이 모두 끝나고 나서 나는 헌병학교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헌병학교로 가니, 가는 곳마다 ‘3보 이상 구보’라는 구호가 씌어져 있었다. 나는 떨지 않을 수 없었다. 헌병학교에서는 새벽에 기상하면 십리나 되는 개울까지 뛰어가서 세수를 하고 와야 했다. 너무 힘이 들어서 도중에 엎어질 지경이었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참으며 뛰고 뛰었다.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낙오병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 그렇게 견디다 보니까, 차츰 요령도 생기고 조금씩 나아지기도 하였다. 사나이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나는 이 특과학교에서 정신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몸으로 배웠다. 그 당시에 육군헌병학교로 해병대 헌병대원들이 위탁교육을 왔는데 그들의 숫자는 겨우 열 명 내외였다. 그들 또한 우리와 같은 우리나라 젊은이들임에 틀림없건만, 패기가 어찌나 당당한지, 그들의 이십 배가 넘는 숫자의 육군 훈련병들이 기를 펼 수가 없었다. 단지 해병대라는 그들의 자부심이 그들을 그토록 용감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 헌병학교에서 교육을 마칠 때에 ‘교육 성적이 아주 훌륭한 훈련병’은 원하는 곳으로 배속시켜 준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열심히 훈련에 임했다. 그리고 학과 시험에 대비하여 남몰래 화장실에서 공부도 했다. 2달 동안의 피나는 노력 끝에 나는 몇 손가락에 꼽히는 아주 좋은 결과를 거두었다. 그 말이 정말이어서 중대장이 카드 한 장을 내밀며 ‘가서 복무하고 싶은 곳’을 적어서 제출하라고 했다. 나는 망설일 필요도 없이 ‘국방부’라고 큼직하게 썼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나는 국방부로 배속을 받았다.
국방부로 와서는 처음에 국방부장관실 앞에서 보초를 섰다. 그리고 얼마 지난 후에는 국방부에 속한 건설본부 정문 보초의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제대 말년에는 국방대학원으로 파견근무를 나갔는데, 전부터 알고 지냈던 배태인 시인을 그 곳에서 만났다.
1967년 12월, 나는 병장으로 제대했다. 그리고 곧바로 취직시험 준비를 해야만 했다. 때마침 경기도농촌진흥원에서 4급 을류 농촌지도직 공무원을 공개모집하고 있었다. 나는 매일 아침이면 중앙도서관으로 달려가서 문이 닫힐 때까지 시험공부에 매달렸다. 그리고 시험을 쳐서 당당하게 합격하였다. 그리고 몇 달 후, 나는 포천군농촌지도소로 발령을 받았다. 그토록 가고자 했던 시골로 가게 되어서 나는 무척이나 기뻤다. 자청하여 오지인 창수면으로 근무지를 배당받고는, 지급된 녹색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농부들을 만났다. 도시 사람들과는 달리, 농촌 사람들은 인심이 후했다. 녹색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나를 볼 때마다, 그들은 반갑게 인사했다. 그리고 밭에서 곁두리라도 먹을 때에는, 나에게 ‘선생님, 좀 쉬었다가 가세요.’라고 불러 놓고는 막걸리를 한 사발씩 따라주곤 했다. 그 당시에 내가 맡은 지역은 창수면을 비롯하여 청산면이었는데 청산면은 어찌나 깊은 산골이었는지 자전거도 못 타고 걸어서 출장을 다녔다. 하지만, 그 반면에 아름다운 자연을 만나는 즐거움도 컸다. 일부러 사람들이 잘 안 다니는 산골짜기를 걸으며 갖가지 야생화를 만났다. 정말이지, 도라지와 나리들이 널려 있었다. 이따금 귀한 버섯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포천은 잣나무가 많은 고장이다. 내가 하숙을 하던 집 근처에는 건강한 잣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그 풋풋한 향기라니! 나는 행복하였다.
그런데 본소에서 연락이 왔다. 작물계로 돌아와서 전작 및 토양과 비료의 일을 담당하라고 했다. 지소에 비하면 본소의 생활은 무척이나 무미건조했다. 많은 업무 때문에 고달프기도 했지만, 자연과 만나는 즐거움을 제대로 누릴 수 없었다. 그러니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술꾼들은 대폿집으로 몰려갔다. 아니, 술꾼이 아니더라도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그 곳의 대폿집에서는 안주가 두부뿐이었다. 그래서 두부를 간장에 찍어 먹으며 막걸리를 마셨다. 그리고 술기가 돌면, 두부를 넣고 김치찌개를 끓였다. 그 맛이 또 일미여서 막걸리는 더욱 쉽게 술술 잘도 넘어갔다.
계장급의 한 선배는 나이도 지긋했는데, 이렇듯 매일 저녁마다 술을 마시니 생활비가 빠듯할 수밖에. 그래서 선배의 부인은 불평이 컸다. 그분의 소원은 남편이 다만 술을 끊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런데 어느 저녁에는 몇 사람이 모여서 술을 먹다가 갑자기 그 선배가 쓰러져 버렸다. 선배의 집으로 급히 연락하여 아주머니가 달려왔다. 벌써 얼굴이 하얗게 겁에 질려 있었다. 그분은 울면서 말했다.
“아, 모두 내 잘못이어요. 내 잘못이어요.”
그 내용인 즉, 그 아주머니는 남편이 술 끊기를 바라고 바라다가 ‘술 끊는 약’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분은 그 약을 구해다가 그날 저녁에 고깃국을 끓인 후에 넣고 남편에게 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은 이게 웬 고깃국이냐고 하면서 한 그릇을 말끔히 비웠다. 그리고는 동료들이 있는 술집으로 찾아왔다. 그렇게 ‘술 끊는 약’을 먹고 막걸리를 마셔댔으니 어찌 부작용이 없었겠는가. 의사가 달려오고 어찌어찌해서 그 선배가 눈을 번쩍 뜨게 되었다. 그리고 왜 자신이 쓰러지게 되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나를 죽이려고 그런 짓을 했느냐?”
그 음성이 아직도 내 귀에 들리는 성싶다. 술을 먹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무료한 직장 생활을 누가 이해해 줄 건가. 그에게 발전이라고는 없다. ‘만년 계장’이 전부이다. 희망이 없는 삶이야말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생각했다. ‘어디를 가든지 일은 비슷하다. 자기의 삶은 자기가 개척하는 것!’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한 자리에 안주하지 말아야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농촌진흥청에서 축산특기지도사 교육이 있었다. 모든 동료들이 가기를 기피했으나, 나는 자청하여 그 교육을 농촌진흥청으로 가서 받았다.
포천에서 한 2년 근무하고 났을 때, 의정부로 발령이 났다. 그 곳에서는 서울이 가까웠기에 전보다 자주 부모님을 찾아뵐 수 있었다. 그런 편리함이 있었던 반면에, 의정부지도소에는 지도사가 그리 많지 않았고 그들이 거의 전부 기혼자였기 때문에 숙직을 내가 자주 맡아야 했다. 숙직을 할 때, 작품을 써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숙직 또한 근무이니, 좋은 작품이 창작되기가 어려웠다. 그저 마음만 바쁜 상태였다.
그래서 다시 깊은 산골로 들어가서 일하기를 바랐다.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자연과 함께하는 일이 즐거움이었기에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는 지방으로 갈 수 있었으면 했다. 그런 생활이라면 멋진 시를 창작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또한 가졌다.
주말이면 서울을 다녀왔는데, 어머니는 장남인 나를 곁에 두고자 하셨다. 내가 왜 어머니 마음을 몰랐겠는가. 하루는 집에 갔더니, ‘입사원서를 제출했다.’라시며 어머니가 입사시험원서 접수증 한 장을 내미셨다. 그 당시, 삼성 그룹에서는 ‘용인자연농원’의 개발 사업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 사업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농업전문가들이 필요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으나, 이왕 그리된 일이라면 시험이나 쳐 보자고 마음먹었다. 들리는 말에는 지원자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했다. 뽑는 인원수는 겨우 몇 명 정도라는데,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라는 거였다. 아마도 나는 ‘도전’이라는 데에 목표를 두었지 않았나 싶다. 아니,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 기회에 삼성 그룹 회장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4)
드디어 삼성 그룹의 농업전문직 입사시험이 시작되었다. 1차 시험과 2차 시험을 거치는 동안, 수많은 응시생들이 탈락되고 그 중 수십 명이 남게 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중에 나도 끼이게 되었으니, 정말 나로서는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마지막 3차 시험이 남아 있었다. 이 시험에서는 고작 몇 명만이 뽑히게 되기 때문에 십중팔구는 떨어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모두가 불안하였다.
그만큼 중요하기에, 이 마지막 시험은 이병철 회장님께서 직접 주관한다고 했다. 나는, 지레 겁을 먹고 3차 시험은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거기에 도달할 때까지 애쓴 일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은근히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속마음으로 ‘이왕 떨어질 바에야 회장의 얼굴이나 한번 똑똑히 보자.’라는 배짱을 부렸다. 3차 시험일이 돌아오고, 내가 호명되었다. 나는 뚜벅뚜벅 걸어가서 시험관들 앞에 앉았다. 중앙에 이병철 회장님이 앉아 있었고 옆자리에는 홍진기 중앙일보 사장님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양옆으로 몇 명의 중역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 중 누군가가 농업기술에 대한 몇 가지를 물었다. 내 대답이 끝나자, 이번에는 불쑥 회장님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공무원은 입으로만 일을 한다는데, 손으로 일을 잘할 수 있겠습니까?”
그 물음에 나는 나도 모르게 왈칵 열이 올라서 조금 큰 소리로 대답했다.
“회장님께서는 농민들이 그렇게 우매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직접 눈으로 결과를 보고 확신이 들기 전에는, 농민들은 따라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많은 전시포를 설치하여 직접 우리의 손으로 많은 작물들을 가꾸고 있습니다.”
내 말을 듣고, 회장님 옆에서 홍진기 사장님이 빙긋이 웃었다. 몇 가지 질문이 더 있었고 시험은 무사히 끝났다.
회장님에게 그렇게 대들다시피 했으므로, 나는 불합격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발표 날에도 직장에서 근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집에서 연락이 왔다. 최종합격자 단 몇 사람의 명단에 내 이름이 들어 있다고 했다. 참으로 의외였다. 귀를 의심했다. 그 순간, 그렇듯 무례하기 짝이 없는 나를 선택하신, 회장님이 보통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존경심이 생겼다. 그래서 두 눈을 질끈 감고 직장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어쩌면 이게 나의 큰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1971년, 나는 중앙일보사의 농업직 3급 사원으로 발령받았다. 그리고 나는 용인자연공원 개발팀의 한 요원으로 과수분야의 기획을 담당하였는데, 이병철 회장님은 특별히 나를 ‘김군’이라고 부르며 자주 찾았다. 어느 날, 그분이 나에게 말했다.
“언양 공장에 가 보았나?”
언양 공장이란, 언양에 있는 삼성NEC를 가리키는 말이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되는 내가 그 곳에 갈 일이 있을까 마는, 그분은 그렇게 나에게 물었다.
“아직 못 가 보았습니다.”
내 대답에 이병철 회장님은 당장에 내일이라도 다녀오라고 하였다. 그 다음 날, 현장에 도착하여, 그 곳 공장 직원의 안내를 받았다. 그 공장부지가 자그마치 수십만 평이나 되었다. 물론, 공장 건물이 세워진 외에 대부분이 유휴지였다. 그분이 왜 나에게 그 땅을 둘러보라고 하였는지,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서울로 돌아오며 차 안에서 여러 대안을 내 나름으로 구상했다.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회장실에서 연락이 왔다. 이병철 회장님은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물었다.
“어떻던가?”
생각해 두었던 대로, 그 곳에 밤나무 단지를 조성했으면 좋겠다고, 나는 대안을 제시했다. 그분은 무릎을 쳤다. 그렇게 되어서 일사천리로 밤나무 단지는 조성되기에 이르렀다. 바로 그 현장이 언양의 신불산 자락이었으니, 내가 그 산과 인연을 맺게 된 동기가 이러했다.
나는 밤나무 조성사업의 책임자가 되어 현장으로 내려갔다. 4명의 직원이 나를 따라왔다. 일은 그리 고되지는 않았으나, 농번기 때에 일군을 구하는 게 무엇보다 어려웠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구덩이 파기’ 작업은 도급으로 일을 주어도 상관이 없지만, ‘나무 심기’ 작업은 일당으로 일을 주며 꼼꼼하게 진두지휘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둘 다 문제가 있었다. 도급으로 일을 시키면 너무 일을 서둘러 하여 병이 날까 걱정이고, 일당으로 일을 주면 너무 게으르게 하여 발에 뿌리가 날까 걱정이었다. 그러나 열심히 계획한 대로 일정에 맞추어서 일을 진행하여 마침내 우리는 잡초만 우거져 있던 황무지를 밤나무 단지로 바꾸어 놓았다. 회장님께서도 와 보시고 매우 흡족해하였다.
“이 밭은 김군 것이다.”
이 날, 나는 온 세상이 모두 내 것인 양 마음이 둥싯거렸다. 그러나 조성하기보다는 관리하는 게 훨씬 어려웠다. 그 후에 나는 대구 제일농장의 책임까지 맡으면서 일인삼역으로 격무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래도 대구에 있는 제일농장에서 많은 나무의 묘목을 길러 냈다는 데에 의의를 두고 싶다.
하지만 나는 시(詩)를 포기할 수 없었다. 회사에서 중책을 맡게 되면 될수록 내 시간을 얻기가 그만큼 어려워졌다. 작더라도 내 농장에서 자유롭게 일하며 시를 쓰고 싶었다. 1973년 8월, 나는 그때에 결혼을 몇 달 앞두고 있었으나 끝내는 사표를 내고 말았다. 그 일로, 바느질을 하시고 계시던 장모님이 어찌나 놀라셨던지 바늘에 무릎을 찔리셨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래도 뻔뻔스럽게 결혼식을 올렸고, 나는 농장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1978년, 나는 제주도에 볼 일이 있어서 갔다가 전격적으로 서귀포에 자그마한 귤밭을 구입하게 되었다. 한라산 남쪽 동홍동 지역에 미악산이라는 조그만 산이 있다. 이 산 아래로 쭉 내려오면 중산간 도로와 만나게 되는 지점에 동홍동 부락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부락 근처에 내 농장이 있었다. 명명하기를, 내 이름의 끝 글자를 풀어서 ‘일광농장’이라고 했다.
내가 가꾼 귤나무 품종들을 대강 소개하자면, 조생온주로는 ‘궁천’ ‘흥진’ ‘삼보조생’ ‘송산조생’ 등이었고, 보통온주로는 ‘임온주’ ‘남강20호’ ‘청도’ ‘실버힐’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특별히 나는 이 귤밭에 잡감포를 마련한 다음, ‘네이블’을 비롯하여 ‘레몬’ ‘금감자’ ‘금귤’(낑깡) ‘팔삭’ ‘일향하’ ‘병귤’ ‘병감’ ‘개량지각’ ‘하귤’(나쓰) 등의 여러 잡감 품종들을 심어 놓고 어린아이 다루듯 애지중지하였다.
또, 서귀포동에 마련한 집의 정원에는 비파나무 한 그루와 겹동백나무 한 그루와 꽃치자나무 한 그루 및 종려 한 포기를 농원에서 사다가 심었다. 그들 모두를 나란히 안뜰의 작은 정원에 심어 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겹동백나무와 꽃치자나무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특히 꽃치자나무는 크고 흰 꽃봉오리를 가지 끝에 달았다. 우리 내외는 가슴이 잔뜩 부푼 상태로 꽃이 필 때를 기다렸다. 그런데 꽃이 막 피려고 할 때, 장마가 들기 시작했다. 정원에서 비를 맞으며 웃고 있는 꽃치자나무를 보며 우리는 무척이나 애를 태웠다. 아직도 그 모양이 눈에 선하다.
이삼년이 지나자, 어느 틈에 비파나무는 쑥쑥 자라서 내 키보다도 더 커졌다. 비료는 준 게 없고, 그저 떨어진 잎을 쓸어서 그 뿌리 위에 덮어 준 게 고작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농약을 뿌려 준 일도 한 번 없건만, 나무는 무럭무럭 아주 건강하게 잘 자랐다. 옮겨 심은 지 6년이 되었을까? 비파나무의 키가 훌쩍 더 커지고 가지도 벌어서 지붕 위를 기웃거리는 듯싶더니, 드디어 늦가을엔 복총상의 꽃차례로 누르스름한 꽃을 피웠다. 그리고 봄이 되자, 파란 열매가 달렸다. 이어서 초여름에는 금방울처럼 아름다운 노란 열매로 변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거리는 모습이, 꼭 우는 아이를 달래는 시늉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노랗게 익은 열매껍질을 손으로 벗기면 마치 수밀도 복숭아의 껍질처럼 얇게 잘 벗겨졌다. 맛은 살구 열매의 것과 비슷하여 새콤달콤하였다. 다만, 흠이라면 과육이 물러서 저장성이 약하고 씨가 크다는 것뿐이었다. 씨는 동백나무 씨처럼 생겼다. 이들 모두가 작품 창작의 멋진 소재가 되었다.
서귀포에서 일주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 세화(細花) 부근의 하도리 앞바다가 나온다. 그리고 그 곳에 북제주군 구좌읍 하도리 별방성(別防城) 터가 있다. 조선 중엽에 제주목사 장림(張琳)이 근해에 출현하는 왜구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축조한 성이다. 지금은 일부분만이 옛 모습대로 남아 있다. 이 하도리 해변에서 바라보면 손에 잡힐 듯이 가까운 거리에 토끼섬이 있다. 썰물 때에 물이 빠지면 걸어서 갈 수 있는 작은섬이다. 이 토끼섬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문주란(文珠蘭) 자생지로 잘 알려져 있다. 그 까닭으로 해서 일명 난도(蘭島)라고도 부른다. 나는 이 섬을 무척이나 사랑하여 그 곳 문주란의 동화를 한 편 창작하였는데, 지금은 그 작품이 전설로 굳어져서 널리 사랑을 받고 있다.
이 당시에 나는, 이성선 형이 이미 1970년에 ‘문화비평’을 통하여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즉시 이성선 형에게 편지를 띄웠다. 고맙게도 그는 곧 답장을 나에게 보내주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웅 형! 참 오래간 만에 귀하고 반가운 소식 들었네. 처음은 재황이라는 이름으로 와서 누군가 했더니, 만웅이 자네였구먼, 참 반갑네. 실은 가끔가끔 자네가 생각나곤 했다네.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네만, 그 때 대학 때 넷인가가 편지를 써 보내며 평을 실어 보냈던 일이 있었지. 자네와 백승돈 그리고 남영자(南英子), 또 나였지. 백승돈은 졸업 후 농산물검사소 시험에 합격하여 그 곳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남영자 씨는 얼마(몇 년) 전에 여성동아 장편 모집에 당선되어 근래에 여류(필명 남지심)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곳 낙산사에 자주 들르는 편이고 그 때마다 내게 연락을 주어 두 번인가 만나본 적도 있는데 중년부인이 되었네. 그 다음 궁금한 사람이 자네였지. 둘 소식은 알게 되었는데 자네는 통 오리무중이었거든. 가끔 대학 생활을 되돌아볼 때 편지로 시를 보여주고 평하고 하던 동인 아닌 동인 생활, 그 때가 자주 생각나고 또 그 사람들 모두가 그리웠지. 그 때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매우 중요한 일을 했다고 생각되네.’(1984년 2월 12일)
이 편지는 더 길게 이어지는데, 여기에서 생략하기로 한다. 이성선 형의 편지는, 풀어져 있던 내 마음을 다잡게 만들었다. 큰 자극이 되었다. 나는 더욱 창작에 몰두했다. 사실 나는 그 동안 제주도에서 문학의 꿈을 조금씩 피워 낼 수 있었다. 즉, 1978년에는 대한불교신문 신춘문예에 작품 ‘해오라기’가 최종심에 올랐고, 1983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작품 ‘숲의 그 아침’이 최종심에 올랐으며, 1985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작품 ‘동학사에서’가 최종심에 올랐다. 이제는 어떠한 결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안일한 마음으로는 세월만 낭비할 뿐이라고 여겼다. 이를테면, 배수진을 치지 않고는 밥도 죽도 되지 않을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무작정 제주도를 떠나기로 했다.
일이 잘되려는지, 복덕방에 내놓은 집이 금방 팔렸다. 집을 산 사람이 빨리 비워주기를 원해서 귤밭은 그대로 남겨 둔 채로 서울로 향했다. 어쩔 수 없이 서귀포를 떠나오면서 나는 몇 번이나 귤밭을 돌아보았다. 걸음이 무거웠다. 사람의 애착이란 이처럼 끊기가 어려운가. 지금도 이따금 그 귤나무들이 잘 자라고 있는지 문득문득 궁금해진다. 그리고 몇 년 후에는 귤밭도 팔렸다. 아직도 그 귤밭이 눈에 밟힌다.
(5)
1986년, 나는 온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관악산 자락에 조그마한 집을 마련했다. 동네의 이름은 봉천 11동이었으나 지금은 인헌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낙성대(落星垈)가 있다. 낙성대는 고려의 명장인 강감찬(姜邯瓚)이 출생한 곳이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3대인 정종 3년(948년)에 하늘에서 문창성(文昌星)이 이곳으로 떨어지며 강감찬 장군이 태어났다고 한다. 강감찬의 어릴 적 이름은 ‘은천’(殷川)이고, 본은 지금의 시흥인 ‘금주’(衿州)라고 한다. 그리고 ‘인헌’(仁憲)은 임금이 내린 시호(諡號)이다. 그래서 우리 동네에 인헌중학교와 인헌고등학교가 있다.
1987년, 나는 신춘문예만을 고집하지 않기로 하고 한국문인협회에서 발행하는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모집에 응모하였다. 그래서 시조작품 ‘서울의 밤’이 당선되었다. 그 당시의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은 소설가 김동리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8월이었다. 그러면 이제부터 여기에 나의 시조문학 입문기를 요약해 보려고 한다.
『그러니까 그 때가 1977년으로 기억된다. ‘시조’랍시고 몇 편을 끼적거려 보았는데 어디에 내놓기가 여간 쑥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 때 ‘샘터’라는 잡지에 ‘시조 독자란’이 개설되어 있었다. 나는 ‘까치놀’이란 시조작품을 아내의 이름으로 투고하였다. 그런데 그게 그 해 3월호에 실리게 되었다.
몸으로 종을 울려 맺고 풀던 그 참사랑
한 줌 잔영이 남아 은비늘로 박혀 들면
하늘귀 바다에 열고 회심곡을 듣는 자리.
― 졸시 ‘까치놀’ 전문
그 작품의 평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나라 설화(說話)와 한(恨)을 묶어서 서로 매듭짓고 있는 솜씨가 뛰어나다 이쯤의 솜씨라면 기성시단에 발을 들여놔도 손색이 없겠다. 그러나 솜씨만 믿고 시를 날려 쓴 짐작이 들어 서운하다.(李根培)―
나는 비로소 용기를 얻었다. 더욱 노력하면 되겠다고 여겼다. 시조공부를 본격적으로 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 해도 저물어 가고 ‘신춘문예’의 계절이 왔다. 나도 예외 없이 그 병이 들었다. 나는 만용을 부렸다. 제대로 익지도 않을 작품을 가지고 대한불교신문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해오라기’란 작품이 최종심에 올랐다.
낮이면 숲에 올라 수잠 속에 들다가도
회회청 먹인 길에 정을 쪼는 여문 부리
여울로 회향해 오는 물색 짙은 넋이여.
-졸시 ‘해오라기’ 첫수
심사평은 대략으로 이러했다.
―選者에게 돌아온 가벼운 篇數의 작품을 놓고 무거운 마음으로 ‘散調’(이태원), ‘蓮’(李玉仁), ‘해오라기’(김재황), ‘因緣’(이봉학), ‘무궁화’(李江心) 5편을 골라잡았다. 5편 중에서 李江心은 아무래도 좀 처진다는 점에서, 김재황은 좀 말때움질을 면치 못했다는 점에서 제외되었다.(鄭椀永)―
부끄럽고 또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도 있었으나, 그 동안 기울인 내 노력에 비하면 최종심에 오른 것만도 과분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결심이 실행으로 옮겨지기는 쉽지 않았다. 나는 농장을 꾸밀 생각이어서 동분서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에 제주도 서귀포를 가게 되었고, 그 곳에 조그만 귤밭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새로 농장을 일군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어서, 몇 년 동안을 나는 몹시 바쁘게 살았다. 조금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자, 나는 다시 ‘시조’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82년이 저물 무렵, 몇 편의 작품을 추려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숲의 그 아침’이 최종심에 올랐다. 그 심사평은 다음과 같았다.
―최종심에 올라온 작품은 金鍾燮의 ‘겨울 동양화’, 박연신의 ‘눈이 내리면’, 이강룡의 ‘脈’, 김재황의 ‘숲의 그 아침’, 정공량의 ‘心想’, 이종철의 ‘가을斷想’, 許旻과 김수림의 ‘山해바라기’ 등이었는데 金鍾燮의 ‘겨울 동양화’를 당선작으로 가렸다. ―중략― 이강룡, 김수림, 김재황, 허민의 작품도 각각 특징들이 있었다. 전반적으로 작품들이 향상되어 있었음은 기쁜 현상이라고 보겠다. 또 순전한 서정만이 아니라, 시대성과 생활상을 바닥에 깐 고도한 정감화에 힘써 주었으면 한다. (李泰極)―
많이 상심하였던지, 그 후로 또 공백이 있었다. 사는 게 그만큼 힘들었기도 했다. 그런데 1984년이 저물어 가자, 또 신춘문예의 병이 도졌다. 그 동안에 모아 두었던 몇 작품들을 손질해서 이번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그런데 그 중 ‘동학사에서’라는 작품이 최종심에 들었다.
어둠도 낮과 같은 믿음의 하늘이라
침묵은 문을 열어 저승까지 환한 달빛
관세음 고운 눈길이 미소 한 점 남깁니다.
―졸시 ‘동학사에서’ 둘째 수
그 심사평은 또 이러하였다.
―응모된 작품들은 字數律을 거의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가락을 휘어잡아 자유롭게 요리하기에는 미진했고, 가락에 질질 끌려 다니는 인상이었다. ―중략― 당선을 다툰 작품으로는 ‘뱃사공 분도의 엽서’, ‘작은 사랑의 노래’, ‘귀향’, ‘동학사에서’, ‘鶴을 노래한 三曲’, ‘강가에서’, ‘全琫準의 적’이 골인 一步 전에서 뒤졌다. (朴在森, 李根培)―
참으로 그만둘 수도 없고, 더 이상 계속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나는 약해지려고 하는 마음을 다독였다. 나는 작품 한 편을 정서하여 중앙일보 ‘독자 시조란’ 담당자 앞으로 보냈다. 그 작품이 게재된 것은 1987년 7월이었다.
뜨거웁게 앓는 소요, 물굽일 갈앉힌 심연
태초에 닫힌 침묵, 풀빛으로 우린 고요
청산도 명상을 풀고 빈 가슴을 내보인다.
― 졸시 ‘녹차를 따라 놓고’ 전문
다행히 좋은 평을 받았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차를 마신 듯 쇄락한 정서를 노래한 작품이다. 뜨거운 열기로 일렁이는 감정의 물굽이를 깊고 고요하게 가라앉힌 경지에서 마주한 靑山과 하나로 융화한 모습, 그 깊은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金濟鉉)―
그 시점에서 나는 ‘신춘문예’만을 고집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월간지를 골라서 신인작품상에 응모하기로 마음먹었다. 드디어 시조를 공부한 지 10년이 되는 1987년, 월간문학으로 투고하여 8월에 신인작품상을 받았다.
그 평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결국 최종심에 오른 세 작품 ‘군산항 저물 무렵’, ‘채석장에서’, ‘서울의 밤’을 놓고 겨루었는데 ‘군산항 저물 무렵’은 좀더 이미지를 몽글리고 대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서 다음 기회로 돌렸다. 다시 ‘서울의 밤’과 ‘채석장에서’는 각기 개성이 달라서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서울의 밤’은 평범하고 다루기 힘든 소재를 소화하여 개성을 가지고 서정의 새 경지를 열어 주었으며 전 작품이 고르다는 데 있었고, ‘채석장에서’는 그가 이끄는 이미지가 폭절은 생활정감과 상황이 개성에서 나온 듯한 넉넉한 안정감을 주고 있다는 것을 꼽았다. 말하자면 시조단에 내어놓아도 자기 몫을 훌륭히 개척할 수 있다는 데 의견이 모아져 당선작으로 같이 밀기로 했다. (金濟鉉, 李相範)―
서 있기만 하던 숲이 흔들리고 있다
지붕을 타고 내려 모퉁이로 기는 바람
불을 켠 포장마차가 밤거리를 흐른다.
한 순간을 잊어 보는 시름은 아직 남아서
뒤밟는 검은 영혼 그림자를 떨치려고
한 잔 술 취기를 입으면 앞서 가는 가로수.
갈라진 건물 틈새 절어 있는 주름진 때
달빛이 그늘을 일궈 밤벌레를 들춰내면
개구리 하얀 울음이 숯불 위를 걸어간다.
아득한 심연으로 수초 같은 혼이 잠긴
명멸하는 불빛들이 비늘처럼 박히는데
비비는 어둠의 소리 쓸려 오는 갈대 소리.
정해 둔 수심도 없고 열어 논 물길도 없다
드리운 꿈을 입질해 낚이는 허무를 따는
거리의 주정꾼 하나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 졸시 ‘서울의 밤’ 전문
이로써 수많은 밤을 밝히고 작품을 쓰면서도, 마음 한 편으로는 불확실한 진로에 방황하던 고통의 날은 끝났다. 이제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가야 할 길을 정했으니, 앞만 보고 가면 그뿐이다. 그게 나에게는 더 없는 행복이다.
1988년 6월, 드디어 나는 작품 2편, 즉 ‘숲 · 아침’과 ‘숲 이야기’를 월간문학을 통해서 발표하였다. 이 중의 ‘숲 · 아침’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최종심에 들었던 ‘숲의 그 아침’을 다시 손을 보아서 개작한 작품이다. 그 두 작품에 대한 평이 ‘현대문학’에 실렸다.
―이 달에 관심을 끌게 한 것으로 김재황의 시조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숲 ·아침’과 ‘숲 이야기’ 등 고른 수준의 2편을 ‘월간문학’에 선보였다.
산새를 울음빛에/ 단풍이 젖어 있다/ 멀리 기지개 켜면/
달려가는 산메아리/ 간밤에 산마루 너머/ 잦아들던 風樂이더니.
이슬로 방울지는/ 성좌를 가늠 보면/ 놓고 간 고운 音聲/
빛살 되어 내려앉고/ 그 은혜 잎새 사이로 /하늘 열고 내민 얼굴.
― ‘숲․아침’ 1․2 수
그리고 같은 셋째 수에서는, 문 열린 골짝마다 물소리 스미는 母土라든지, 고뇌 또한 山果의 맛으로 비유한 것과 연륜 깊이 묻힌 적막을 일궈 하나의 불붙는 갈채로 승화시킨 점은 신인의 차원을 넘어선 산뜻한 감칠맛이 그대로 살아 있는 시조다운 맛을 느끼게 했다. 그저 평범한 소재로 제 맛을 내는 수완을 발휘한 것은 이 시인의 저력을 암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 점에서 자연에 대한 서정성을 군더더기 없이 교감시켜 응축해 낸 통찰력은 시조의 그릇에다 우리 본래의 토착적인 감각을 효과적으로 도입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김재황이 같은 지면에 발표한 ‘숲 이야기’ 역시 매끄러운 여력이 나타나고 있다. 자연의 공간 속에 비친 자아의 눈을 통하여 시름과 통증을 삭이려는 인간의 고뇌와 숲의 연계성을 표출함으로써 일단은 성공을 거둔 것이다.(李殷邦)―』
어쨌든 이렇게 나는 시조단의 말석을 얻게 되었으니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6)
1987년, 월간문학 신인작품상에 시조 ‘서울의 밤’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한 후에, 서울 시내의 나무들인 조계사 경내의 ‘회화나무’와 옛 창덕여고 교정의 ‘백송’ 등과 뜨거운 우정을 나누기 시작했다. 어차피 문학은 많은 경험의 바탕 위에서 색깔 있는 꽃을 피워 낼 수밖에 없다. 그럴 바에는 경험에 충실하게 다가가는 게 옳다고, 나는 여겼다. 어차피 문인이 된 바에는, 많은 글을 써서 독자와의 약속을 지키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1989년, 나의 첫 시집 ‘거울속의 천사’가 도서출판 ‘반디’에서 출간되었다. 시인답게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려는 의도를 담았다. 이어서, 제주도에서 만난, 나무 이야기를 주로 기록한 산문집 ‘비 속에서 꽃피는 꽃치자나무’를 펴냈다.
1990년 4월 20일, 들꽃들을 노래한 첫 녹색시집 '바보여뀌'도 도서출판 ‘반디’에서 태어났다. 이 시집에는 '앵초'와 '별꽃' 등, 모두 104종의 들꽃들을 노래한 시가 들어 있다. 시집 제목으로 사용된 '바보여뀌'는, 매운 맛을 지닌 보통의 여뀌와는 달리, 아무런 맛도 지니지 않은 싱거운 여뀌이다. 바로 이 들꽃은 바보 같았던 내 젊은 시절을 되새기게 해준다.
‘바보여뀌'가 출간되고 나서, '주간조선'에서는 이 시집을 국내 첫 ‘풀꽃 소재 시집’으로 소개하였다. 나는 보람을 느꼈으며, 앞으로 더욱 노력하여 이 길을 힘차게 걸어가리라고 다짐하였다. 그 다음에는 '나무'를 택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운문보다 산문으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시’(詩)가 빠지면 안 되겠기에 한두 편씩을 곁들였다. 모두 77종의 나무 이야기가 들어 있어서, 그 제목을 '시와 만나는 77종 나무 이야기'라고 정했다. 1991년 4월, 이 녹색 산문집이 도서출판 '외길사'에서 출간되었다.
그런데 이 책이 출간되고 나서, KBS 제1텔레비전 방송국으로부터 4월 5일 식목일 밤의 '보도본부 24시'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생방송이었다. 이는 난생처음의 텔레비전 방송 출연이었다. 그런가 하면, 1991년 4월 19일자 일간지 '스포츠 서울'의 '저자와의 대화' 난(欄)을 통해서 '시와 만나는 77종 나무 이야기'가 소개되었고, 또 4월 20일자 중앙일보의 '이런 사람' 난(이경철 기자)을 통하여 '나무 詩人'으로 소개되는 영광을 얻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불교방송 '음악의 마을'에 초대되어 이상벽 씨와 대담을 갖기도 했다.
이 책 '시와 만나는 77종 나무 이야기'는 1992년 12월 14일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로부터 '1992년 청소년을 위한 우리들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또 하나. 1991년에 특기할 사항은, 나의 첫 시조집인 ‘내 숨결 네 가슴 스밀 때’가 도서출판 ‘외길사’에서 출간되었다는 사실이다.
여름으로 들어서는, 1991년 6월에 주간신문인 '녹색신문'이 창간되었다. 나는 그 신문에 10년 동안이나 들꽃에 관한 이야기를 연재했다. 그리고 '월간 에세이'와의 인연도 맺게 되어서 6회에 걸친 '한국의 민초' 이야기도 발표하였다. 또한, 녹색신문사에서 한국녹색시인회가 창립되었는데, 내가 회장을 맡았다.
1992년으로 접어들면서, 나는 아주 뜻 깊은 체험을 하게 되었다. 1월 25일 'DMZ 및 인접지역 생태계 학술조사위원회'가 발족되면서, 내가 그 위원회의 '문학반장'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함께 참가한 사람은 조류학자 원병오 교수, 식물학자인 이영로 박사, 곤충학자인 신유항 교수, 포유류학자인 윤명희 교수, 그리고 어류학자인 박기철 박사 등이었다. 생태조사 현장에는 박기철 박사를 대신해서 김익수 교수가 주로 참석했다.
나는 자연생태조사를 목적으로, 1992년 3월 28일과 29일 이틀 동안 '철원 월정리와 대마리 지역'을, 1992년 4월 25일부터 27일까지 사흘 동안 '건봉산과 향로봉 지역'을, 1992년 5월 29일부터 31일까지 사흘 동안 '대암산과 두타연 및 가칠봉 지역'을, 1992년 6월 26일부터 28일까지 사흘 동안 '파평산과 임진강 및 사미천 지역'을, 1992년 7월 22일부터 24일까지 사흘 동안 '강화의 석모도와 대송도 및 주문도 지역'을, 그리고 1992년 9월19일 하루 동안 '교동도 지역'을 돌아보았다.
특히 철원의 습지라든가 건봉산의 고진동 계곡, 대암산의 고층습원, 양구 북대골 내린천 상류의 두타연, 연천군 백학면 갈현리 일대의 사미천, 그리고 강화 지역의 무인도 등은 자연이 잘 살아 있어서 학술적으로도 아주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 해 ‘월간 에세이’로부터 '민통선 탐방기'를 6회에 걸쳐서 집필해 달라는 원고청탁이 있었다. 그래서 6개월 동안, 내가 찍은 사진과 함께 그 기행문이 성황리에 연재되었다.
1992년에 빼놓을 수 없는 일이 또 하나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월간잡지 '행복이 가득한 집'에서 12회 연재로 나무 이야기에 대한 원고 청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시조 한 수씩을 곁들여서 '구상나무' '붓순나무' '후피향나무' '녹나무' '다정큼나무' '노각나무' '음나무' '층층나무' '말채나무' '때죽나무' '쥐똥나무' ‘생강나무’의 이야기를 써서 발표했다. 또한, 사보 '금성 테크노피아'에 아포리즘 '나무에게서 배운다'를 6회로 나누어서 실었다.
더욱이 1992년 3월 22일 '주간여성'에서 '금주에 만난 작가' 난(우계숙 기자)으로 나를 취재하여 정감 있는 글과 사진을 크게 실어 주었다.
1993년 1월10일, 나는 시집 ‘민통선이여, 그 살아있는 자연이여’를 도서출판 '백상'에서 펴냈다. 책이 나오자, 곧 주간조선에서 ‘이 사람의 집념’ 난으로 책의 내용을 아름답게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독서신문에는 이 책의 서평이 실렸다. 이 책이 소개되고 나서, 1월 25일은 극동방송 '밤이 깊은 동산에서'에 출연하여 홍순관 씨와 대화를 나누었으며, 2월 21일에는 MBC 라디오의 '두고 온 산하'에 출연하여 차인태 씨와 대담하였다. 또 SBS 서울방송 라디오 '녹색시대'에서 나와의 대담을 취재하여 방송하기도 했다.
1993년에도 특기할 사항이 있다. '시와 만나는 77종 나무 이야기'와 쌍을 이루는 산문집인 '시와 만나는 100종 들꽃 이야기'를 펴낸 일이다. 이로써 나무 이야기뿐만 아니라, 들꽃 이야기도 독자들에게 선보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5월 3일자 문화일보에, 그리고 5월 8일자 일간 '스포츠 서울'에 소개되었다. 이 책으로 해서, 나는 여성잡지 '퀸'으로부터 '들꽃 시인'이라는 또 하나의 애칭을 얻게 되었고, 잡지 '새농민'에서는 '사람과 사람들' 난을 통해서 '농부 시인'으로 불러 주었다. 아마도 이는, 내가 제주도 서귀포에서 귤밭을 자영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 모두가 나에게는 과분한 일들이었다.
이번에는 나무의 시조 작품만을 모아서 시집을 상재하고자 했다. 그래서 1994년 6월, 나는 100종 나무의 작품이 담긴 시조집 ‘그대가 사는 숲’을 도서출판 '경원'을 통해서 펴냈다.
1995년이 되었다. 이 해에는 우리나라 국립공원 20군데에 대하여 각각 장시조를 창작한 일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나는 이 작품들을 계간 문예지 '시와 산문'과 국립공원 관리공단의 홍보지를 통해서 발표하였다. 게다가 8월에는 중학교 1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에 기행문 '민통선 지역 탐방기'가 수록되었다. 나는 큰 보람을 느꼈다.
1997년 1월에 시집 '못생긴 모과'를 ‘시와 산문사’를 통하여 펴냈고, 3월에는 종교문화신문사에서 '자연 에세이'의 청탁이 있었다. 격주간 신문인데, 한 번은 '식물 이야기'를 쓰고, 그 다음에는 '동물 이야기'를 썼다.
1998년 4월, 도서출판 서민사에서 산문집 '들꽃과 시인'을 펴냈다. 이 책에서는 모두 25명의 시인과 25종의 들꽃을 소개하였다. 다시 말해서 어느 시인이 어느 들꽃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지, 한 시인과 한 들꽃을 연결 지어 놓았다. 시인의 출생에서부터 가족과 성장과정 그리고 작품에 이르기까지, 어느 들꽃과 어느 시인이 어디가 어떻게 닮았는지를 밝혔다. 그리고 이어서 10월에는, 단수시조와 산문이 실린 '꽃은 예뻐서 슬프다'를 역시 '서민사'에서 펴냈다. 이 책은 '화초편'과 '화목편'의 2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각기 75종의 화초와 화목에 대한 단시조와 전설이 담기어 있다. 이어 서민사에서 시집 ‘치자꽃 너를 만나러 간다’를 펴냈다. 그뿐만 아니라, 5월에는 도서출판 서민사에서 민통선 지역 생태조사에 대한 시와 기행문을 어린이용으로 쉽게 풀어서 한데 묶은, '민통선 지역 탐방기'를 펴내었다. 그해 12월, 이 책은 환경부로부터 ‘1998년도 우수환경도서’에 선정되었다.
2001년에는, 시조집 '콩제비꽃 그 숨결이'를 도서출판 서민사에서 펴냈다. 이는, 그 동안에 잡지 등에 발표한 시조 작품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또한, 이 해에는 목(木)시집 '바람을 지휘한다'(신지성사)를 상재했다. 이 해에 특히 감동스러운 일도 있었는데, 평소에 내가 존경하는 이성교 시인께서 나에게 ‘푸른 시인’(조선문단)과 ‘녹색 시인’(한국문학회)이란 2작품을 선물했다.
그러나 이 해에 나는 큰 슬픔도 맛보았다. 나의 벗 이성선 시인이 훌쩍 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5월 4일에 그는 타계하였는데, 3일이 지난 다음에야 나는 그 소식에 접하고 멍하니 몇 날 며칠을 하늘만 바라보며 지냈다. 그러다가 그의 시집을 싸들고 관악산으로 올라가서 읽고 또 읽었다.
또 2002년에 들어와서는 4월에 새로운 시도가 있었다. 즉, 도서출판 컴픽스가 제작하고, 주식회사 컴픽스의 후원으로, 나의 시조와 산문집이 수록되어 있는 '국립공원기행' 및 녹색을 띠는 작품들만 모은 시조선집 ‘내 사랑 녹색세상’이 출간된 일이다. 이는 시인과 기업, 그 징검다리가 된 출판사 3자 합동의 '녹색 문집' 출간이라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이 해에 딸과 아들로부터 CD로 제작된 나의 회갑기념문집 ‘날개’를 증정 받았다.
그리고 2003년에는, 목(木)시집 다음으로 초(草)시집 ‘잡으면 못 놓는다’를 문예촌을 통하여 펴냈다. 그리고 주식회사 ‘컴픽스’에서 후원하고 도서출판 ‘컴픽스’에서 제작한 감성언어집 ‘나무’가 ‘국립공원기행’과 ‘내 사랑 녹색세상’에 이어서 3번째 비매품으로 출간되었다.
2004년에는 어린이들에게로 눈을 돌릴 기회가 있었다. 그래서 그 결과로 동시조집 ‘넙치와 가자미’를 문예촌에서 펴냈다. 그리고 주식회사 ‘컴픽스’의 협찬으로 도서출판 컴픽스에서 4번째 녹색문집인, 산문집 ‘그 삶이 신비롭다’가 출간되었다.
2005년이 되었다. 5월에 평론집 ‘들에는 꽃, 내 가슴에는 詩’가 주식회사 컴픽스의 후원으로 도서출판 ‘컴픽스’에서 출간되었다. 또한, 이 해에는 내 인생에 있어서 정말로 즐겁고 멋진 일이 생겼다. 즉, 윤성호 시인과 이완주 수필가와 나, 이렇게 세 사람이 매년마다 새로운 작품 몇 편씩을 함께 묶어서 문집을 내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제호를 ‘셋이서 걷다’라고 정했는데, 그 첫 문집이 도서출판 ‘반디’에서 출간되었다. 그러고 보니 또 하나의 아주 기쁜 일이 있었다. 8월 10일, 너무나 영광스럽게도 나는 세계한민족문학상 대상을 수상하였다. 나에게도 이런 일이 있다니! 참으로 꿈만 같은 일이었다. 수상 기념으로 나는 기쁘게, 시조집 ‘묵혀 놓은 가을엽서’를 펴내었다.
2006년, 약속대로 3인 사화집 ‘셋이서 걷다’ 제2집을 도서출판 반디를 통하여 펴냈다. 그리고 주식회사 컴픽스의 후원으로 도서출판 컴픽스에서 6번째 녹색문집인 시선집 ‘너는 어찌 나에게로 와서’가 출간되었다. 이 해에는 월간문학에 ‘시조 월평’을 3개월에 걸쳐서 집필하였다.
2007년이 되자, 무엇보다 먼저, 3인 사화집 ‘셋이서 걷다’ 제3집을 펴냈다. 그리고 이 해에는 인도의 ‘싯다르타’와 중국의 ‘콩쯔’(공자)에 대한 고전에 심취하여 두문불출하였다. 얼마나 재미가 있었는지, 밥 먹는 일조차 잊기 일쑤였다.
2008년, 전에 집필해 놓은, 인물전기인 ‘봉쥬르, 나폴레옹’을 도서출판 컴픽스에서 펴냈다. 이어서 그 동안 공부한 내용을 정리하여 ‘숫시인 싯다르타’라는 제호로 산문집을 도서출판 상정에서 펴냈다. 그리고 이 해에도 잊지 않고 3인 사화집 ‘셋이서 걷다’ 제4집을 펴냈다.
2009년에는 3인 사화집 ‘셋이서 걷다’ 제5집을 서둘러서 펴냈다. 나는 그 첫머리에 이성선 형을 회고하는 글을 담았다.
‘눈시울이 젖는다. 겨우 환갑을 넘기고 그는 떠났는데, 벌써 나는 칠순을 코앞에 두게 되었다. 그가 이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까지 우리 세 사람, 다시 말해서 그와 윤성호 시인과 나는 서울대 입구의 작은 찻집에서 이따금 만났다. 그 때 나누었던 대화들이 지금도 귀에 파랗게 살아 있다. 이성선 형과 이완주 수필가는 이미 수십 년 전에 농촌진흥청에서 귀한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다시 시조집 ‘서호납줄갱이를 찾아서’를 도서출판 상정에서 펴내었고, 9월에는 그 동안 공자에 대하여 공부한 모든 자료를 정리하여 ‘씬쿠러, 콩쯔’(수고하셨습니다, 공자님)란 제목으로 도서출판 상정에서 산문집을 펴냈다.
2010년이 되었다. 10월에, 나무 이야기와 시를 곁들인 산문집 ‘노자, 그리고 나무 찾기’를 도서출판 상정에서 펴내었다.
이제 칠순이 되는 2011년, 나는 그 동안 우리나라를 다니며 현장에서 얻은 시조들만을 모아 엮어서, 전국여행시조작품집 ‘양구에서 서귀포까지’를 이렇듯 펴내게 되었다. 특별이 내세우기를 ‘칠순기념시조집’이다. 이로써 내 작품집은 모두 30종이 되었다. 지난해에는 어찌하다 보니 ‘셋이서 걷다’를 펴내지 못하였는데, 이번의 전국여행시조집과 함께 ‘셋이서 걷다’ 제6집을 펴내었다. 이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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