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아니 '멍쯔' 이야기

3. 걸음쇠와 곱자를 가지고 배우며 가르친다(글: 녹시 김 재 황)

시조시인 2022. 3. 30. 18:15

3. 걸음쇠와 곱자를 가지고 배우며 가르친다



 소년 ‘가’(軻)도 어느덧 19살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엿한 젊은이가 되었지요. 홀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었으니, 이미 그 전에 결혼을 했을 거라고 여겨집니다. 그 아내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고, 성씨는 ‘유씨’(由氏)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는 ‘전씨’(田氏)라고 되어 있기도 하지요. 
 그런데 젊은이 ‘가’의 아내인 ‘유씨’는 몸가짐이 늘 단정하지는 않았나 봅니다. 이는, 아마도 젊은이 ‘가’가 너무 완고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눈에 그리 비쳤는지도 모르는 일이었지요. 젊은이 ‘가’가 20살이 되었을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젊은이 ‘가’가 방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의 부인이 방안에서 웃옷을 벗고 있었습니다. 젊은이 ‘가’는 이를 불쾌하게 여기고 밖으로 나와서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지 않았답니다. 그러니 그 부인이 화가 났겠지요. 그래서 시어머니 앞으로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내실의 일에 대하여는 부부의 도리를 따지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방안에 혼자 있으면서 그 예를 갖추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그가 보고 화를 내며 불쾌하게 여기는 것은 저를 손님으로 대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도리는 손님의 방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니, 저를 저의 부모 계신 곳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참으로 똑 떨어지는 말입니다. 시어머니인 ‘장씨’(仉氏)도 무어라고 할 말이 없었겠지요. ‘장씨’가 아들 ‘가’를 불러서 말했습니다.
 “예에 따르면, 문의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누가 그 안에 있는가를 묻는 것은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이다. 또 마루에 올라갈 때 인기척을 내는 것은 안에 있는 사람에게 누군가가 집으로 왔음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방에 들어갈 때 눈길을 반드시 아래로 하는 것은 남의 허물을 보게 될까 조심해서이다. 지금 네가 예를 잘 살피지 못하고, 오히려 남에게 예를 갖추지 않았다고 책망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이냐?”
 젊은이 ‘가’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는 즉시 부인 ‘유씨’에게로 가서 자기의 잘못을 말하고 친정으로 떠나지 않도록 했답니다. 

 [孟子旣娶, 將入私室, 其婦袒而在內, 孟子不悅, 遂去不入. 婦辭孟母而求去, 曰 ‘妾聞夫婦之道, 私室不與焉, 今者妾竊墮在室, 而夫子見妾, 勃然不悅, 是客妾也, 婦人之義, 蓋不客宿, 請歸父母.’ 於是孟母召孟子而謂之曰 ‘夫禮, 將入門, 問執存, 所以致敬也. 將上堂, 聲必揚, 所以戒人也. 將入戶, 視必下, 恐見人過也. 今子不察於禮, 而責禮於人, 不亦遠乎!’ 孟子謝, 遂留其婦.(맹자기취, 장입사실, 기부단이재내, 맹자불열, 수거불입. 부사맹모이구거, 왈 ‘첩문부부지도, 사실불여언, 금자첩절타재실, 이부자견첩, 발연불열, 시객첩야, 부인지의, 개불객숙, 청귀부모.’ 어시맹모소맹자이위지왈 ‘부례, 장입문, 문집존, 소이치경야. 장상당, 성필양, 소이계인야. 장입호, 시필하, 공견인과야. 금자불찰어례, 이책례어인, 불역원호!’ 맹자사, 수류기부.) 유향 열녀전에서]

 이 이야기는 유향의 ‘열녀전’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한시외전’(韓詩外傳)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기원전 352년, 젊은이 ‘구’가 젊은 혈기로 스승에게 배운 유가의 예법에 한창 마음을 기울여 쏟고 있던 20세가 막 넘었을 무렵, 그가 밖에서 들어와 보니 아내가 방의 침대에 거만하게 걸터앉아서 남편을 빤히 치켜보았습니다. 그는 어머니에게 아내가 무례하여 이혼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어머니가 아들인 ‘구’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알았느냐?”
 “제가 직접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무례한 것이지 며느리가 무례한 것이 아니다. 예법에 뭐라 하더냐? 장차 대문에 들어오려면 안에 누가 있나 물어야 하고, 마루에 올라서려면 반드시 먼저 소리를 내어 알리며, 방안으로 들어서려면 시선을 반드시 아래로 두어야 한다. 이는, 아직 준비가 안 된 사람을 가려주는 것이다. 오늘 너는 여인네의 사사로운 곳으로 가면서 방에 들어설 때 소리를 내지도 않았고 걸터앉은 모습으로 사람을 쳐다보게 했으니 이는 너의 무례이다. 며느리의 무례가 아니다.”
 자, 어떻습니까? 이렇듯 고전은 같은 내용이라도 보는 시각에 따라 그 각도가 조금씩 달라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제대로 배우고 알려고 한다면 그 정확한 척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지요. 젊은이 ‘가’는 그 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옛날에 활쏘기의 이름난 궁수인 ‘예’라는 사람이 남에게 ‘활 쏘는 방법’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활을 충분히 당겨서 쏘려고 하는 상태가 되도록 하였고, 배우는 사람도 또한 그리하였다. 큰 건축에 관해 일하는 목수가 남에게 목수 일을 가르쳐 줄 때는 반드시 걸음쇠와 곱자를 가지고 가르쳤고, 그에게 배우는 사람 역시 반드시 걸음쇠와 곱자를 가지고 배웠다.”

 [羿之敎人射 必志於彀 學者 亦必志於彀. 大匠誨人 必以規矩 學者 亦必以規矩(예지교인사 필지어구 학자 역필지어구. 대장회인 필이규구 학자 역필이규구) 맹자11-20] 

 위의 ‘필지어구’(必志於彀)에서 ‘지’는 ‘목적함’이나 ‘기필코 함’ 등의 뜻을 지니고 ‘구’는 ‘활시위를 한껏 잡아당기고서 쏘려고 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필이규구’(必以規矩)에서 ‘규’는 목수가 목공 일을 하는 데에 꼭 필요한 ‘컴퍼스’나 ‘걸음쇠’ 또는 ‘동그라미’나 ‘둥글다’ 등을 나타내고 ‘구’는 ‘곱자’나 ‘곡척’ 또는 ‘네모’ ‘모서리’ ‘법도’ ‘대지’ ‘새기다’ ‘가로와 세로’ 등을 가리킵니다.
 젊은이 ‘가’가 이렇듯 결혼도 하고 배움에 깊이 빠져 있을 시기에, 진(秦)나라에서 그야말로 끗발을 올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누구냐고요? ‘상앙’(商鞅)이라는 사람이었지요.
 상앙은 위(衛)나라 왕의 여러 첩들이 낳은 여러 공자 중의 한 사람으로 이름은 ‘앙’(鞅)이고 성씨는 ‘공손씨’(公孫氏)입니다. 그의 조상은 원래 ‘희성’(姬姓)이랍니다. 그는 진(秦)나라에서 큰 공을 세움으로써 ‘상군’(商君)이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상앙’이라고도 했답니다. 그러나 보통은 그가 위(衛)나라 사람이기에 ‘위앙’(衛鞅)이라고 불렀습니다.
 위앙은 젊었을 때 *형명(刑名, 형벌의 이름)을 좋아하였으며 위(衛)나라 재상인 ‘공숙좌’(公叔座)라는 사람을 섬겨서 작은 벼슬(中庶子)을 얻었습니다. 그 후, 공숙좌가 병에 걸렸지요. 그러자 위(魏)나라 혜왕(惠王)이 직접 병문안을 와서 공숙좌에게 말했습니다.
 “만약에 공숙의 병이 낫지 않는다면 앞으로 나라의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제가 데리고 있는 공손앙은 비록 나이는 어리나 재능이 뛰어납니다. 왕께서 그를 재상으로 삼으신 후에 나랏일을 한 번 맡겨 보십시오.”
 그러나 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왕이 가려고 일어나자, 공숙좌는 주위 사람들을 물리치고 왕에게 속삭였습니다.
 “왕께서 공손앙을 등용하지 않으시려거든 차라리 그를 죽이십시오. 그가 국경 밖으로 나간다면 이 나라가 위태로워집니다.”
 왕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습니다. 그러자, 공숙좌가 위앙을 불러서 말했습니다. 
 “조금 전에 왕께서 재상이 될 만한 사람을 찾기에 나는 그대를 추천하였소. 그러나 왕이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 같기에, 그대를 중용하지 않으려면 죽이라고 했소. 신하 된 나로서는 먼저 임금께 충성을 다한 뒤에, 신하를 돌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오. 이제 그대는 빨리 몸을 피하는 것이 좋겠소. 그렇지 않으면 붙잡혀서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될 거요.”
 위앙은 위(魏)나라에서 중용되지 못하자, 서둘러서 진(秦)나라로 떠났습니다. 마침 진나라의 임금 ‘효공’(孝公, 재위, 기원전 361~기원전 338)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천하의 훌륭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습니다. 위앙은, 효공이 아끼는 신하인 ‘경감’(景監)의 천거로 효공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위앙은 효공에게 나라 다스리는 이치에 관해 장황하게 설명했지요. 그러나 효공은 이따금 졸면서 그의 말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별로 마음에 와닿는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군요. 위앙이 물러가자, 효공은 경감을 불러서 꾸짖었습니다.
 “그대가 천거한 위앙이라는 자는 현실에 맞지 않는 이야기만 늘어놓더군. 도대체 그런 자가 어디에 쓸모가 있단 말이오?”
 경감이 돌아와서 위앙을 책망하였지요. 그러자 위앙은 태연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왕에게 이야기한 것은 제왕의 길이었는데, 왕께서는 그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5일 뒤에, 다시 위앙이 효공을 만나서 이야기했습니다. 효공은 전보다는 약간 귀를 기울이긴 했으나, 역시 썩 내키지는 않는 눈치였지요. 위앙이 물러가자, 효공은 또 경감을 불러서 꾸짖었습니다. 보나 마나, 경감은 또다시 위앙을 책망했겠지요. 그 후에 또 위앙의 간절한 부탁으로 경감은 위앙이 효공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효공은 위앙의 이야기를 듣고는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그러나 당장에 그를 쓰지는 않았습니다. 정말로 위앙은 끈질긴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또 조르니, 경감은 네 번째로 효공을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효공은 위앙의 이야기에 감복하여 저절로 무릎이 위앙 앞으로 다가서고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효공이 묻고 위앙이 대답하기를 여러 날 동안 계속되었으나, 효공은 전혀 싫증을 내지 않았답니다. 마침내 위앙이 물러나오자, 경감이 기다리고 있다가 달려와서 물었습니다.
 “그대는 대체 무엇으로 임금 마음을 기쁘게 하였는가?”
 “제가 그동안 임금께 태평성대를 베푸는 제왕의 도와 왕도(王道)에 관해 설명했더니 좋기는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오랜 기간이 걸리므로 기다리기 어렵다고 난감해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부국강병으로 천하의 패권을 잡는 패도(覇道)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더니 매우 기뻐하시더군요,”
 얼마 후, 효공은 위앙을 중용했습니다. 위앙이 법을 엄정하고 가혹하게 고치려고 하자, 효공은 여론을 두려워하여 망설이며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위앙이 다시 설득했습니다.
 “의심하면서 시행하면 이름을 낼 수 없고, 의심하면서 일하면 공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남보다 뛰어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세상의 비난을 받게 마련이고, 혼자 아는 지혜를 지닌 사람은 반드시 백성에게 경멸받게 마련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일의 보람에 대해 어둡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일이 시작되기도 전에 미리 압니다. 백성들과 일을 계획할 수는 없지만 일의 보람을 함께 즐길 수는 있습니다. 지극한 덕을 의논하는 사람은 세속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고, 큰 공을 이루는 사람은 많은 무리와 꾀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성인은, 참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 옛 법만 법으로 따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실로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으면 그 예전의 예에 따르지 않습니다.”
 효공은 위앙의 말에 감복했습니다. 마침내 효공은 위앙에게 ‘좌서장’(左庶長)이라는 높은 벼슬을 내리고 법을 변경하였습니다. 그런데 위앙이 변경한 법은 너무 가혹했습니다. 한 집이 잘못하면 나머지 열 집이 똑같이 벌을 받는 연좌제를 적용했습니다. 또한 죄지은 사람을 알고서도 고발하지 않으면 허리를 자르는 벌을 주었습니다. 그러니 시행이 문제였지요. 그래서 법을 잘 따르는 사람에게는 상금을 주고 어기는 사람에게는 엄한 벌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10년이 지나자, 백성들은 법에 만족스러워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진(秦)나라도 부강해졌습니다. 위앙은 이러한 공으로 ‘대량조’(大良造)라는 높은 벼슬을 얻었습니다.
 그 당시, 위(魏)나라가 제(齊)나라에 크게 패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위앙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위(魏)나라를 손쉽게 정벌했습니다. 그 공으로 위앙은 ‘상군’(商君) 또는 ‘상앙’(商鞅)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또 10년이 흘렀을 때, 효공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위앙을 모함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도망가다가 자기가 만든 법에 걸려서 그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내가 19살 때에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20살이 되는 1961년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했지요. 그러니 이 시기에 결혼은 감히 생각하지도 못할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대학의 동급생 중에는 이미 결혼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모든 친구가 신기하게 여겨서 많은 놀림을 받았습니다.
 결혼에는 한 가정을 책임진다는 뜻이 담겨 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오고 직장에 취직해야 비로소 그 책임을 맡을 수 있었지요. 그러니 그 어려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24살이 되던 1965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그리고 제대하고 공무원이 되었는데, 어느새 나이가 30살이 훌쩍 넘었습니다. 겨우 32살에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문학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였기에, 늘 아내를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언제나 그 걸음은 흘러서 가는 춤사위
 무성한 월계수를 가슴 안에 세워 두고
 하늘은 너무 푸르네, 안개 가득 머금었다.

 밤길이 멀었는데 벌써 달은 기우는가.
 문풍지 울음 뱉는, 결이 삭은 툇마루에
 그 숨결 부서져 내린 서릿발이 한 사발.

 출렁인 서러움은, 물빛 시린 그 미소는
 기러기 지친 날개 휘어져 걸린 고달픔
 그래도 그대 얼굴은 내 꿈마다 밝게 뜬다.
                          -졸시 ‘아내’ 

 지금도 아내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있습니다. 그 어두운 마음을 달래 보려는 뜻이 아닐까요? 작품을 쓴답시고 언제나 서재에 박혀 있으니 어찌 마음이 어둡지 않았겠습니까. 맹자 부인이 한 말이 문득 떠오릅니다. “여자의 도리는 손님의 방에 머무르지 않는 일입니다.” 나야말로 아내에겐 손님과 같은 존재였을 게 분명합니다. 그래도 잘 참고 여기까지 동행해 주었으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라고 나는 여깁니다. 나는 아내를 무척이나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 말을 아내에게 직접 하지는 못했습니다. 느낌으로 알고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글: 김 재 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