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기가 바로 어린이가 살 만한 곳이다.
아주 먼 옛날, 중국의 추(鄒 또는 騶)나라 땅에 ‘가’(軻)라고 부르는 어린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가’라는 이름은 ‘바퀴의 굴대’라는 뜻입니다. ‘추나라’는 아주 작은 나라였다고 합니다. 아주 쉽게 말해서 ‘노나라의 추 땅’이라고 보아도 될 성싶은 나라였지요. 기록에 따르면, 추나라가 춘추시대에는 ‘주씨’(邾氏) 나라였다가 ‘가’ 어린이가 살고 있던 무렵에는 홀로 서서 ‘추나라’라고 했으며, 그 후에 노(魯)나라에 *합병(合倂)되었다는 말도 있고 초(楚)나라에 합병되었다고도 전합니다. 그래서 어린이 ‘가’는 어른이 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공자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백여 년이다. 성인이 살던 세대와 그렇게 멀지 않고, 성인이 살던 곳과 이렇게 가깝다. 그런데도 공자의 도를 직접 본 사람이 없으니, 또한 이후에도 듣고서 알 사람이 없을 것 같구나.”
[由孔子而來 至於今 百有餘歲 去聖人之世 若此其未遠也 近聖人之居 若此其甚也 然而無有乎爾 則亦無有乎爾 (유공자이래 지어금 백유여세 거성인지세 약차기미원야 근성인지거 약차기심야 연이무유호이 즉역무유호이) 14-38]
물론, 여기에서 ‘성인’은 공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가깝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공자가 살던 노나라와 자기가 사는 추나라가 가깝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무유호이 즉역무유호이’(無有乎爾 則亦無有乎爾)는, ‘지금 공자의 도를 알고 따르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니, 앞으로도 공자의 도를 따를 사람이 없을 것 같다.’라는 강한 의구심을 나타낸 말입니다.
어린이 ‘가’는 아마도 또랑또랑한 어린이였을 겁니다. 눈이 초롱초롱하였겠지요. 그래서 무엇이든지 한 번 보면 절대로 잊지 않았답니다.
처음에 어린이 ‘가’의 집은 공동묘지에 가깝게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어린이 ‘가’는, 상여꾼들의 손 한 번 들고 발 한 번 옮기는 일까지 아주 세세히 살피었다가, 그들의 흉내를 내어 죽음을 슬퍼하여 발을 구르고 널을 묻는 시늉을 하며 놀았습니다.
어린이 ‘가’의 어머니는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여기는 자식을 기를 만한 곳이 못 되는구나.’
그래서 부리나케 보따리를 싸서 다른 곳으로 집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사리 자리를 잡은 곳은 장터가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그러자 어린이 ‘가’는 장사꾼들이 흥정하는 모습을 유심히 살피었다가 그들의 흉내를 내었습니다. 즉, 거세게 머리를 흔들며 안 된다고 했다가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구슬리는 시늉을 하며 놀았습니다.
그러니 어린이 ‘가’의 어머니는 다시 한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도 역시 자식을 기를 만한 곳이 못 되는구나.’
그래서 부랴부랴 다시 보따리를 싸고는 다시 먼 곳으로 집을 옮겼습니다.
자, 이번에는 세 번째의 이사입니다. 그러니 어린이 ‘가’의 어머니는 요모조모를 아주 꼼꼼하게 따졌을 겁니다. 이번에 옮긴 집 가까이에는 학교가 있었습니다.
‘학교’라고 했으나, 그 원문에는 ‘학궁’(學宮)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학궁’은 아마도 ‘성균관’을 이르는 말이었을 듯싶습니다. 그래서 어린이 ‘가’는 그곳의 학생들이 배우는 여러 가지 모습을 세세히 살피어 두었다가 ‘조두’(俎豆)를 설치하고 ‘읍양’(揖讓)하는 놀이를 즐겼다고 합니다.
‘조두’(俎豆)는 ‘제사를 지낼 때 쓰는 그릇’을 이릅니다. 그냥 ‘제기’라고도 하지요. ‘조두’에서 ‘조’는 고대에서 고기를 썰 때 쓰는 ‘도마’인데 나무로 만들었으며 그 모양은 ‘직사각형’이었답니다. 그리고 ‘두’는 ‘식기’인데, ‘나무로 만든 것’과 ‘구리로 만든 것’과 ‘도자기로 만든 것’이 있었다는군요. 이렇듯 3가지가 있었고, 그 모양은 둥근 꼴이었답니다.
‘읍양진퇴’(揖讓進退)에서 ‘읍양’은 ‘읍하는 동작과 사양하는 동작’을 말합니다. 특히 ‘읍하는 동작’은 ‘오른손은 밑에 두고 왼손은 위에 둡니다. 맞잡은 두 손을 얼굴 앞으로 들고 허리를 앞으로 공손히 구부렸다 펴면서 내리는’ 동작입니다. 그리고 ‘진퇴’는 ‘나아가고 물러나는 의식’을 이릅니다. 그러므로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는 ‘예를 갖추어서 인사하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시늉하며 놀았다는 뜻입니다. 비로소 어린이 ‘가’의 어머니는 마음을 놓았겠지요.
‘여기가 참으로 자식을 두고 기를 만한 곳이다.’
그래서 그곳에 아주 자리를 잡았답니다. 이 이야기는, ‘삼천지교’(三遷之敎) 또는 ‘자모삼천’(慈母三遷)으로 널리 알려졌지요. 이는, 전한 말의 학자인 유향(劉向)에 의해 편술된 ‘열녀전’(列女傳)에 씌어 있습니다.
[其舍近墓 孟子之少也 嬉遊爲墓間之事 踊躍築埋. 孟母曰̂ ‘此非吾所以居子也’ 乃去舍市傍 其嬉戱爲賈人賣之事. 孟母又曰 ‘此非吾所以居處子也’ 復徙舍學宮之傍. 其嬉遊乃設俎豆揖讓進退. 孟母曰 ‘此眞可以居吾子矣’ 遂居之(기사근묘 맹자지소야 희유위묘간지사 용약축매. 맹모왈̂ ‘차비오소이거자야’ 내거사시방 기희희위고인매지사. 맹모우왈 ‘차비오소이거처자야’ 복사사학궁지방. 기희유내설조두읍양진퇴. 맹모왈 ‘차진가이거오자의’ 수거지) 유향 ‘열녀전’에서]
기원전 372년, 어린이 ‘가’는 추나라에서 태어났습니다. 오늘날의 산동성 추현(鄒縣) 땅이 그곳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노나라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 이름은 ‘맹격’(孟激)이라고 한답니다. ‘맹격’은 어렸을 때의 이름이고 어른이 되고 나서는 ‘공의’(公宜)라고 불렀다는군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들리는 말에 그렇다고 합니다. 그 선조들이 대대로 노(魯)나라에서 살았지요. ‘맹격’은 노나라의 공족(公族)인 ‘맹손씨’(孟孫氏)의 후손이랍니다. 노나라에서 ‘맹손씨’라고 하면 아주 유명합니다.
노(魯)나라 환공(桓公,14대째 임금)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 중 ‘경보’(慶父)라는 사람이 ‘맹손씨’의 조상입니다. 물론, ‘경보’는 환공의 첩에게서 태어난 아들이었기 때문에 임금의 자리를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그의 아우이며 *적자(嫡子)인 ‘동’(同)이 임금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장공’(莊公)이지요. 기록에 따르면 ‘경보’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답니다. 그의 불륜과 야심에서 노나라가 어지러워졌다고 합니다.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경보’는 자살을 하게 됩니다. 그때는 ‘장공’의 아들인 ‘희공’(僖公)이 왕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노나라 희공은 ‘경보’의 아들 ‘공손오’(公孫敖)로 하여금 ‘경보’의 뒤를 잇게 하고 그 성씨를 ‘맹손씨’로 고쳐서 성읍의 녹을 받게 하였습니다. 또, ‘경보’의 두 동생들도 죽게 됨으로써 각각 ‘계손씨’(季孫氏)와 ‘숙손씨’(叔孫氏)로 성씨가 바뀌었습니다. 이들이 대대로 노나라의 실권자가 되었습니다.
아무튼 그 후에 긴 세월이 흐르고 ‘맹손씨’의 한 집안이 추나라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그중의 한 사람이 어린이 ‘가’의 아버지인 ‘맹격’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린이 ‘가’의 어머니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고 ‘성씨’만 그저 ‘장씨’(仉氏)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는 ‘이씨’(李氏)라고 씌어 있기도 합니다.
‘맹격’은 추나라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슬기와 재능을 널리 열고 집안을 빛내기 위하여 추나라에 처와 갓 태어난 아들을 남겨 둔 채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유학 간 나라는 송(宋)나라였지요. 그러나 다른 나라로 가서 자리를 잡는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요? 그로부터 3년 뒤에 ‘장씨’는, 자기 남편인 ‘맹격’이 송나라에서 객사(客死)했다는 청천벽력(靑天霹靂)과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어린이 ‘가’의 나이는 겨우 세 살이었지요. 그 어린 나이에 불쌍하게도 아버지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새파란 나이에 남편을 잃게 되었지요. 이를 일러 ‘청상과부’(靑孀寡婦)라고 말합니다. 이제 ‘장씨’에게는 어린 아들 ‘가’가 그 삶의 전부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아들의 가르침에 그토록 온 힘을 쏟게 되었을 게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나서 ‘가’ 어린이가 열서너 살의 소년이 되었을 때, 그는 제(齊)나라로 공부하러 갔다가 돌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가 집으로 들어섰을 때, 그의 어머니 ‘장씨’는 베틀 앞에 앉아서 베를 짜고 있었지요. ‘장씨’가 놀라서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배움은 어디까지 이르렀느냐?”
어머니의 물음에 아들 ‘가’는 힘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그저 그렇습니다.”
‘장씨’는 아들의 대답을 듣자, 그만 온몸의 힘이 쏙 빠져 버렸습니다. 그 아들 하나만을 위해 온 정성을 다하고 있건만, 아들은 그걸 조금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겠지요. 그러나 ‘장씨’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깨우쳐 주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장씨’는 칼을 집어서 짜고 있던 베를 잘라 버렸습니다. 소년 ‘가’는 얼굴이 새파래졌습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어머니에게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어머니 ‘장씨’는,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네가 배움을 도중에 그만둔 것은 내가 짜던 이 베를 모두 마치지 못하고 끊어 버리는 것과 같다. 무릇 군자는, 배워서 바른 이름을 세우고, 물어서 앎을 넓혀야 한다. 그렇게 하면 머물러 있음에 편안하고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해로움을 멀리할 수 있다. 이제 공부를 그만두게 되면, 머슴 신세를 면하지 못하게 되고 재난에서 떠날 수가 없다. 베 짜는 일을 그만둔다면 어떻게 식구들의 옷을 해 입히고 오래도록 식량이 떨어지지 않게 하겠느냐? 여자가 생업을 그만두고 남자가 베풂 일을 게을리하게 되면, 도둑이 되든가 아니면 남의 밑에서 시키는 대로 꾸벅꾸벅 일하는 수밖에 없게 된다.”
[孟子之少也 旣學而歸 孟母方績. 問曰 ‘學何所至矣?’ 孟子曰 ‘自若也’ 孟母以刀斷其織. 孟子懼而問其故, 孟母曰 ‘子之廢學, 若吾斷斯織也. 夫君子學以立名, 問則廣知, 是以居則安寧, 動則遠害. 今而廢之, 是不免於侍役, 而無以離於禍患也. 何以異於織績而食, 中道廢而不爲, 寧能衣其夫子, 而長不乏糧食哉? 女則廢其所食, 男則墮於脩德, 不爲竊盜, 則爲虜役矣’(̂맹자지소야 기학이귀 맹모방적. 문왈 ‘학하소지의?’ 맹자왈 ‘자약야’ 맹모이도단기직. 맹자구이문기고, 맹모왈 ‘자지폐학, 약오단사직야. 부군자학이립명, 문즉광지, 시이거즉안영, 동즉원해. 금이폐지, 시부면어시역, 이무이리어화환야. 하이리어직적이식, 중도폐이불위, 영능의기부자, 이장부핍량식재? 여즉폐기소식, 남즉타어수덕, 부위절도, 즉위노역의’) 유향 열녀전에서]
이를 가리켜서 ‘단기지계’(斷機之戒) 또는 ‘단직지교’(斷織之敎)라고 합니다. 이 또한 유향의 ‘열녀전’에 담기어 있습니다. 소년 ‘가’는 곧바로 다시 공부하러 길을 떠났을 테지요. 아마도 이번에는 제(齊)나라가 아니라 노(魯)나라로 떠났을 거라고 여겨집니다. 아니, 어쩌면 제나라로 다시 갔는지도 모르겠네요. 그 시기는 바로 아주 혼란스러운 전국시대였습니다.
***역사 알아보기
전국시대(戰國時代)란, 중국 역사에서 춘추시대(春秋時代) 다음의 기원전 403년부터 진(秦)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약 200년 동안의 과도기(過渡期)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중국 진(晋)나라의 대부인 ‘위’(魏) ‘조’(趙) ‘한’(韓)의 3씨가 진(晋)나라를 나누어서 제후가 된, ‘주(周)나라의 위열왕(威烈王)’ 23년부터 진(秦, 벼이름)나라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의 시대입니다. 연도로는, 기원전 403년~기원전 221년입니다. 이 시기에 ‘전국 7웅’(戰國七雄)이라는 일곱 나라가 세력을 다투었습니다. 이윽고 강력한 제후는 ‘왕’이라고 부르게 됨으로써 이때 소문과 사실이 다 같게 주(周, 두루)나라 왕조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봉건제도(封建制度)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제(齊)나라도 기존의 강씨(姜氏)를 대신하여 전씨(田氏)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나라들이 싸움을 벌이는 통에 세상이 어지러웠으나, 그 반면에 제자백가(諸子百家)와 같이 학문은 중흥을 이루었으며 토지의 사유제와 함께 농사의 발달 따위로 화폐(貨幣)가 유통되기도 하였습니다. ‘전국시대’의 ‘전국’(戰國)이라는 이름은 이 시기를 다룬 고대 역사서인 ‘전국책’(戰國策)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전국책’은 중국 전국시대의 유세가인 소진(蘇秦)과 장의(張儀) 등의 변설(辯說)이나 책략(策略)을 동주(東周)와 서주(西周) 및 진(秦)나라 등 12개국으로 나누어서 한데 묶어 놓은 책입니다. 이 책 또한 한(漢)나라 시대의 유향(劉向)이 편집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전국책은 유향이 쓴(西漢 成帝 때 劉向이 정리) 그 내용이 아닙니다. 그 후 흩어져 있던 문헌들을 송(宋, 이 송나라는 춘추시대의 송, 그리고 남북조 시대의 송 등과 구별하기 위하여 ‘조송’趙宋이라고 부릅니다. 960년~1279년)나라 때에 증공(曾鞏 1019년~1083년)이 모아서 복원했지요.
생각해 보면, 내가 태어난 시기도 매우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1942년 8월,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로 점령당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때에, 나는 옛 고구려 땅인 만주 지방의 ‘봉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은 심양(瀋陽, Shenyang)이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그 후, 일본이 패망함으로써 나는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어린 시절을 할머니와 함께 고향에서 보냈습니다. 나의 고향은 경기도 파주입니다. 자세히 말하면 임진강의 나루터 가까이 위치한 임진면 임진리입니다. 나는 이곳에서 나무들과 들꽃들과 새들과 물고기들과 어울려 놀았습니다.
물바람은 울먹이며 강가에서 서성대고
겉늙은 갈대꽃이 넋이 나가 흔들려도
포성에 멍든 역사는 침묵 속을 떠간다.
서러운 빗줄기를 한데 모아 섞던 강물
말 잃은 얼굴들은 바닥으로 잠기는데
세월은 등 푸른 꿈을 연어처럼 키운다.
짚으면 어지러운 굽이마다 목이 메고
내닫는 물길로는 풀지 못할 한이기에
나루터 빈배 한 척만 그 가슴이 썩는다.
-졸시 ‘임진강에서’
물론, 내가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을 때는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6.25전쟁이 벌어짐으로써 다시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춥고 배고픈 피난살이가 시작되었습니다. 부산으로 제주도로 서귀포로---, 그리고 장승포로 양산으로 마산으로---. 마침내 전쟁이 끝나서야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그때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습니다. 피난을 간 곳에서 다시 학교에 다니곤 했습니다. 그동안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를 꼽아 보니, 무려 여덟 군데나 되었습니다. 그러니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습니다.
나하고 비교하면, 맹자는 그래도 행복하였다고 여겨집니다. 좋은 환경을 만나기 위해 세 번씩이나 이사 다녔다니, 그게 바로 행복입니다.(글: 김 재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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