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에 나오는 역사적 사람들
*증자(기원전 505~기원전 436년)
공자의 제자이고 맹자의 둘째 스승입니다. 성씨는 ‘증’(曾)이고 어릴 적 이름은 ‘삼’(參)이지요. 남무성(南武城) 사람으로 어른이 되고 나서의 이름은 ‘자여’(子輿)이고, 공자보다 46살이 아래입니다. 증삼이 공자의 제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인 ‘증석’(曾晳)도 공자의 제자였습니다. 증석의 이름은 ‘점’(蒧)입니다. 공자가 살아 있을 때, 증삼은 아직 어렸습니다. 그 때문인지, 공자는 그를 ‘아둔한’ 인간이라고 가볍게 보았습니다. 그러나 증삼은 배움에 박차를 가해서 ‘하루에 세 가지로 나를 바라본다.’(삼성오신 三省吾身)라는 유명한 말을 남길 정도로 덕을 쌓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효’에 있어서는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자사(기원전 491~기원전 429년)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이지요. 성씨는 ‘공’(孔)이며 어릴 적 이름은 ‘급’(伋)입니다. 어른이 되고 나서의 이름이 ‘자사’(子思)입니다. 공자의 손자이고, 공자의 아들인 ‘백어’(伯魚)의 아들입니다. 백어의 어릴 적 이름은 ‘리’(鯉)입니다. 자사는 맹자의 세 번째 스승이지요. 산동성 곡부 사람입니다. 일찍이 증자의 제자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어느 기록에 보면, 공자가 61세 때에 자사가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사가 12살 정도가 되었을 때에 이미 공자는 세상을 떠났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증자는 자사보다 14살 정도가 더 많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서(四書) 중의 하나인 ‘중용’(中庸)은 대부분 자사가 저술하였다고 알려져 있지요.
*백리해(기원전 724~기원전 624년)
진(秦)나라 목공(穆公)을 도와서 서방의 패업을 이루게 한 이름난 신하입니다. 우(虞)나라 사람으로 초나라에 끌려가서 양치기를 했으나, 진나라 목공이 다섯 장의 양피로 그를 사서 중용했다고 하여 ‘오고대부’(五羖大夫)라고 불렀답니다. 이는 ‘사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백리’(百里)는 성씨이고 ‘해’(奚)는 이름입니다. 백리해는 가난 속에서도 책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부인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답니다. 어느 날, 그 부인은 씨암탉을 잡아서 푸짐한 상을 차려놓은 후에 그 길로 집을 나가 버렸다고 전합니다.
*관중(? ~ 기원전 645년)
‘관경중’(管敬仲)이라고도 하며 춘추시대 초기의 정치가입니다. 어릴 때의 이름은 ‘이오’(夷吾)이고 어른이 되고 나서는 ‘중’(仲)이라고 불렀습니다. 성씨가 ‘관’(管)이었지요.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영상현(穎上縣) 사람입니다. 관중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출신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비참한 수단에 호소하지 않고 여러 임금들을 복종시킬 수 있었던 것’은 관중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공자는 말했습니다.
*순우곤(기원전 약 386년~기원전 310년)
제(齊)나라 위왕(威王) 때의 객경(客卿)이었습니다. 그는 ‘큰 새가 오래 날지도 울지도 않았지만 한 번 울면 천하를 놀라게 한다.’라는 일명경인(一鳴警人)의 이야기를 왕에게 조언하기도 했습니다. 사기에 따르면, 그는 초(楚)나라 대군이 제(齊)나라를 공격해 오자 사신으로 조(趙)나라에 가서 이해관계로 설득함으로써 10만 정병을 끌어내었고, 이에 초나라는 싸우지도 못하고 물러갔다고 합니다. ‘순우’(淳于)는 성씨이고 ‘곤’(髡)은 이름입니다. 맹자의 제자라는 말도 있으나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아주 말을 잘하였으며, 그에 따라 ‘변사’(辯士)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마천(기원전 145년~ 기원전 약 86년)
한(漢)나라 태사령(太史令) ‘사마담’(司馬談)의 아들이지요. ‘사마’(司馬)는 성씨이고 아버지는 ‘담’(談), 아들은 ‘천’(遷)이 이름입니다. 사마천은 젊어서 여러 지역을 여행한 뒤에 조정의 관리가 되었고, 기원전 111년에는 중국 남서부 지방의 원정에 참여했다고도 합니다. 기원전 108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태사령이 되었습니다. 태사령은, 천문관측이나 달력의 개편 및 국가 대사의 조정의례 기록 등을 맡는 직책이었다는군요. 그러나 ‘이릉’(李陵) 장군을 변호하다가 한나라 무제의 뜻을 거스르게 됨으로써 궁형(宮刑, 거세를 당하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 후, 그 큰 굴욕을 참고 모든 힘을 기울여서 방대한 ‘사기’(史記)의 집필을 완성하였습니다.
*송경(기원전 ?~ 기원전 309년)
‘송견’(宋鈃) 또는 ‘송영자’(宋榮子)라고도 불립니다. 직하에서 유학했으며, ‘송자’(宋子) 18편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한서’(漢書)나 ‘예문지’(藝文志)엔 소설가로 분류하면서 ‘황로’(黃老)의 설을 가진 도가(道家)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순자’(荀子)나 ‘비십이자’(非十二子) 등엔 ‘묵적’(墨翟)과 나란히 쓰며 묵가로 확정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장자’나 ‘천하’ 등에서 ‘윤문자’(尹文子)와 나란히 쓰며 명가(名家)로 분류한 사례를 따르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맹자는 이익을 앞세우는 학파로 묵가(墨家)를 지목하였지요. 그러므로 맹자의 견해를 따르면, 송경(宋牼)은 묵가로 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유향(기원전 77년~ 기원전 6년)
중국 한(漢)나라 왕조의 종실로서 어른이 되고 나서의 이름은 ‘자정’(子政)이고, 본래의 이름은 ‘갱생’(更生)이었답니다. 유향이 편찬한 ‘열녀전’(列女傳)에 맹자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열녀전은 중국 최초의 여성 전기집이지요. 역사적 여성 106명을 열전(列傳) 형식으로 저술하였습니다. 고대 문헌에 기록된 여성들을 뽑아서 7주제로 분류하고 주제별로 15명 내외를 배치하여 열녀전 7권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유향(劉向)의 아들은 그 이름이 ‘흠’(歆)입니다.
*백규(기원전 370년~ 기원전 300년)
성씨는 ‘백’(白)이고 어릴 적 이름은 ‘단’(丹)이랍니다. ‘규’(圭)는 어른이 되어서의 이름이지요. 주(周)나라 사람이랍니다. 위(魏)나라 문후(文侯) 때에 그는 시세의 변화에 따른 물가변동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풍년이 드는 해와 흉년이 드는 해를 잘 관찰했습니다. 그래서 풍년이 드는 해에는 작물을 구입했다가 흉년이 드는 해에 팔았습니다. 이처럼 사고 파니 해마다 재산이 2배로 늘어났습니다. 돈을 불리려고 곡식을 구입할 때는 싼 값으로 사들이고 좋은 종자를 비싸게 사들여서 수확을 늘렸습니다. 의복을 검소하게 입고 하인들과 동고동락했답니다.
*소진(? ~기원전 317년)과 장의(? ~ 기원전 309년)
두 사람 모두 중국 춘추전국시대 정치가들입니다. 젊어서 제(齊)나라 ‘귀곡자’(鬼谷子)에게 배웠답니다. 말을 아주 잘하는 유세객(遊說客)들이었지요. 소진(蘇秦)은 서쪽 진(秦)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여섯 나라의 합종책(合從策)을 성공시킴으로써 세로로 나란히 결속하여 연합전선을 지휘하며 여섯 나라의 재상을 겸하였습니다. 그러나 장의(張儀)는 진(秦)나라로 간 다음에 여섯 나라를 돌아다니며 진나라와 각기 가로로 동맹을 맺는 연횡책(連橫策)을 성공시켰습니다. 소진의 합종책이 깨지고 나서 소진은 자객에게 피살되었습니다. 장의는 진나라 재상이 되었으나, 나중에 위(魏)나라로 도피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도 죽었지요. 두 사람 모두 이름은 남겼지만 끝이 좋지 않았습니다.
*양자(기원전 440년 ~ 기원전 360년 또는 기원전475년 ~ 기원전 221년)
‘양자거’(楊子居) 또는 ‘양생’(楊生)이라고도 합니다. 위(魏)나라 사람이지요. 어릴 적의 이름은 ‘주’(朱, 붉은 빛)입니다. 물론, 성씨는 ‘양씨’이지요. 중국 역사를 통하여 철저한 개인주의자이며 쾌락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는, “털 한 올은 살갗보다 아주 작고 살갗은 팔다리 하나보다 아주 작다. 그러나 많은 털을 모으면 살갗보다 중요하고 많은 살갗을 더하면 팔다리만큼 중요하다. 털 한 올은 본래 몸의 만분지 일 중의 하나인데, 어찌 가볍게 여길 것인가?”라고 잘라 말했지요. 들리는 말에 따르면, 노자(老子)의 제자라고도 합니다. 패(沛)라는 도시에서 노자를 만나서 도가사상을 배웠답니다.
*묵자(기원전 480년~ 기원전 390년)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철학자입니다. 송(宋)나라 출신이라고 합니다. 이름이 ‘적’(翟)입니다. 초기 전국시대에 제자백가 중 묵가(墨家)의 대표적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중심적 사상은 ‘겸애’(兼愛,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함)이었지요. 그의 사상은 여러 나라에 쓰였으나, 진나라가 권력을 잡으면서 선호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농성(籠城, 성문을 굳게 닫고 성을 지킴)의 달인’이어서 초나라의 공격을 아홉 번이나 막아 내었습니다. 굳게 지킨다는 뜻의 ‘묵적지수’(墨翟之守)가 여기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리고 또,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를 폈답니다.
*상앙(기원전 390년 ~ 기원전 338년)
전국시대에 힘 있는 일곱 나라 중의 한 나라인 위(衛)나라 사람입니다. 즉, 위나라 여러 서얼 공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성씨는 ‘공손씨’(公孫氏)이고 이름이 ‘앙’(鞅)이었지요. 그의 조상은 원래 ‘희’(姬, 계집) 씨였다고 합니다. 그는 위나라를 떠나서 진(秦)나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진나라 군주인 ‘효공’(孝公)을 도와서 법을 고침으로써 나라가 튼튼해지기를 꾀했습니다. 마침내 그 이룸이 인정되어 왕이 ‘상’(商)이라는 땅의 15읍을 식읍(食邑, 나라에서 공신에게 내리어 그 세금을 개인이 받아서 쓰게 한 고을)으로 내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앙’(商鞅) 또는 ‘상군’(商君)이라고 불렀답니다.
*맹상군( ? ~ 기원전 279년)
성씨는 ‘전’(田)이고 이름은 ‘문’(文)입니다. 그리고 ‘맹상군’(孟嘗君)은 시호(諡號, 그가 죽은 후에 그의 공덕을 칭송하여 높여서 부르는 이름)이지요. ‘제(齊)나라 위왕(威王)의 막내아들이며 선왕(宣王)의 이복동생’인 정곽군(靖郭君) ‘전영’(田嬰)의 아들입니다. 자그마치 식객 1,000명을 거느렸다고 합니다.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 초(楚)나라의 춘신군(春申君) 등과 함께 전국시대 말기의 이름난 ‘4군’(四君)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불리었습니다. 이 사람과 연관된 ‘계명구도’(鷄鳴狗盜)라는 고사가 있지요. ‘계명구도’란, ‘비굴한 꾀를 써서 남을 속이는 천박한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공손연(? ~ 기원전 307년)
중국 전국시대에 여러 국가를 세로와 가로로 합쳐서 일을 조직적으로 계획하려던 모사(謀士), 즉 남을 도와서 꾀를 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성씨는 ‘공손’(公孫)이고 이름은 ‘연’(衍)이지요. 그의 호(어릴 때의 이름이나 어른이 되고 나서의 이름 외에 붙이는 멋있는 이름)는 ‘서수’(犀首, 무소 머리)였답니다. 일설에 의하면 ‘서수’는 공손연이 위나라에서 받은 벼슬이름이라고도 하지요. 위(魏)나라 ‘음진’(陰晉, 지금의 섬서성 화음현)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진나라 공족 출신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는 장의와 같은 시기에 진(秦)나라로 건너왔고, 혜문왕(惠文王) 5년(기원전 333년)에 ‘대량조’(大良造)에 임명되어 위(魏)나라를 공격하였습니다.
*혜시(기원전 380년 ~ 기원전 300년)
송(宋)나라의 철학자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혜자’(惠子), 즉 ‘혜 선생님’이라고도 불렀지요. 중국 고대 철학의 한 유파인 ‘명가’(名家,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궤변을 일삼던 한 학파)의 대표자라고 합니다. 혜시(惠施)는 생전에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제자들과 함께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왕과 장관들에게 조언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위(魏)나라 혜왕(惠王)을 섬김으로써 재상이 되었고, 왕을 위해 법전(法典)을 편찬(編纂)하기도 했지요. 혜왕은 그를 깊이 믿었기에 한때는 왕의 자리를 그에게 물려줄 생각까지 했다고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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