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스승님들은 길이 같은 분들이다
기원전 359년, 소년 ‘가’(軻)의 나이는 15살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인 배움의 길로 들어섰다고 합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배웠을까요? 사마천의 ‘사기열전’에 의하면 ‘자사의 제자에게 학업을 닦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사(子思)에게 직접 배우지는 않았지요. 하지만 여러 기록을 읽어 보면, 그는 공자(孔子)-증자(曾子)-자사(子思)로 이어지는 계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내가 직접 공자의 제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나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스스로 그분을 잘 받들고 배우겠다.”
[予未得爲孔子徒也 予私淑諸人也 (여미득위공자도야 여사숙저인야) 맹자8-22]
소년 ‘가’(軻)가 어른이 되었을 때 스스로 한 말입니다. 여기에서 ‘사숙저인’은, ‘직접 가르침은 받지 않았으나 공자의 도를 전해들은 사람에게서 공자의 도를 얻어들음으로써 자신을 닦았다.’라는 뜻입니다. 물론, ‘공자의 도를 얻어들은 사람’은, 증자도 아니고 자사도 아닙니다. 그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겠지요. 그러면 증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증자’(曾子)는 ‘증 선생님’이라는 뜻입니다. 무성 사람으로, 어른이 되고 나서의 이름은 ‘자여’(子輿)였으며, 어렸을 때의 이름은 ‘증삼’(曾參)입니다.
‘증삼’의 아버지도 공자의 제자였습니다. ‘증석’(曾晳)이라고 하였는데, 어릴 적의 이름은 ‘점’(蒧)이었습니다. 그 ‘증석’과 ‘증삼’의 이야기가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실려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증삼’이 참외밭을 매다가 잠간 실수하여 참외 포기의 뿌리를 캐어 버렸습니다. 그걸 보고, ‘증석’이 화가 나서 큰 막대기로 ‘증삼’의 등을 마구 때리니, ‘증삼’은 땅에 엎어져서 사람이 오가는 줄도 모르고 오랫동안 까무러쳤다가 다시 깨어났습니다. 그러나 ‘증삼’은 얼굴에 웃는 빛을 띠고 ‘증석’ 앞으로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까 제가 아버님께 죄를 졌을 때, 아버님께서 너무 힘을 들여서 저를 훈계하셨으니 혹 병환이나 나시지 않으셨습니까?”
말을 마친 다음, ‘증삼’은 자기 방으로 물러나서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는, 아버지인 ‘증석’으로 하여금 거문고 소리를 듣고 자기의 몸이 아무렇지도 않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답니다.
공자는 이 소문을 듣고, 노여워하며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삼’(曾參)이 온다고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마라.”
그러나 ‘증삼’은 죄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사람을 시켜서 공자에게 뵙기를 청했습니다. 공자는 여러 제자를 모아놓고 다시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듣지 못했느냐? 옛날 ‘고수’(瞽叟)의 아들이 ‘순’(舜)이었다는 것을. ‘순’이 그 아버지 ‘고수’를 섬길 때, ‘고수’가 심부름을 시키고자 할 적에는 그 곁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순’을 잡아서 죽이려고 할 때는 아무리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다. 또, 매를 맞을 때도 작은 매로 때리면 그대로 맞고 있다가 큰 매로 때리려고 하면 도망쳐 버렸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고수’는 아무리 악했어도 아비가 아니라는 죄까지는 범하지 않았고, ‘순’도 지극한 효도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증삼’은 그 아비를 섬기는 데에 몸을 내버려서 맘대로 때리도록 버려둠으로써 죽기에 이르러도 피하지 않았으니, 만약에 자기가 죽었다면 그 아비는 불의에 빠지게 되었을 게 아니냐? 그러니 그 불효함이 이보다 더 큰 게 어디 있겠느냐? 너희들은 천자의 백성이 아니냐? 천자의 백성을 죽이게 되면 그 죄가 과연 어떠하겠느냐?”
‘증삼’은 이 말을 전해 듣고, 공자께 나아가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제 죄가 과연 큽니다.”
이렇듯 ‘증삼’은 공자의 눈에 들지 않은 제자였던 듯싶습니다. 그렇더라도 그는 ‘증자’라는 호칭에 걸맞게 언제부터인가 여러 사람에게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비자’(韓非子)의 ‘외저설좌상’(外儲說左上) 편에는 이런 고사가 전합니다.
‘증삼’의 처가 시장에 가는데 아들이 따라오면서 칭얼거렸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돌아가거라. 돌아와서 너를 위해 돼지를 잡아 주겠다.”
처가 시장에서 돌아오자, ‘증삼’이 돼지를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처가 놀라서 그를 말리며 말했습니다.
“다만 어린아이와 장난했을 뿐인데 정말로 돼지를 잡는단 말이오?”
그 말을 듣고 ‘증자’가 말했습니다.
“어린아이와 장난하면 안 되오. 어린아이는 아는 게 없소. 부모를 의지하여 배우므로 부모의 가르침을 듣소. 만일에 자식을 속인다면 이는 자식에게 속임을 가르치게 되오. 어머니가 자식을 속이면 자식이 어머니를 믿지 않게 되오.”
말을 마치고, ‘증삼’은 돼지를 잡았습니다.
그날 저녁, ‘증삼’의 아들은 푸짐하게 돼지고기 반찬이 놓인 밥상 앞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부모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가슴에 부모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크게 자리를 잡았을지, 나는 상상이 가고도 남습니다. 이 증삼, 즉 증자의 아들 이름은 ‘증원’(曾元)입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증삼이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노(魯)나라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지요. 노나라 임금이 이 소문을 듣고 증삼에게 한 고을을 떼어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증삼은 그것을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답니다. 이때, 사람들이 누구나 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가 원한 것이 아니고 노나라 임금이 자기 마음에서 주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굳이 사양하는가?”
이렇듯 사람들이 증삼에게 받기를 권유하자, 증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듣자니 남의 것을 받는 자는 항상 남을 두려워하게 마련이고, 남에게 물건을 주는 자는 항상 남에게 교만하게 되기 마련이라고 한다. 임금이 나에게 땅을 주기만 하고 교만을 부리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나로서야 어찌 두려운 마음이 없겠는가?”
이 소문을 듣고, 공자가 말했습니다.
“삼의 말은 족히 그 절개를 완전히 하였구나.”
이는, ‘공자가어’ 중의 ‘재액’(在厄) 편에 들어 있는 기록입니다.
자사(子思)는 어렸을 때의 이름이 ‘급’(伋)입니다. 어른으로 장성하고 나서 얻은 이름이 ‘자사’이지요. 공자의 아들인, ‘리’(鯉)의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공자의 손자입니다. 자사는 공자가 61살 때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공자가 세상을 떠날 때 자사는 13살 정도가 되었겠지요. 그래서 자사는 증삼을 스승으로 삼았을 터입니다. 증삼과 자사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증삼’이 노나라 ‘무성’(武城, 노나라의 읍명)이라는 곳에 거처할 때입니다. 어느 때, 월(越)나라에서 그곳으로 쳐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증삼’에게 말했습니다.
“침략군이 도착하였는데, 어찌 도망가지 않습니까?”
이에 ‘증삼’이 말했습니다.
“내 집에 사람을 보내어서 섶과 나무(薪木)를 훼손하거나 상하지 않도록 해라.”
그렇게 말하고 나서 ‘증삼’은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적군이 물러가자, 돌아오기에 앞서서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내 집의 담장과 지붕(牆屋)을 수리해 놓아라. 내가 장차 돌아가겠다.”
집의 수리가 모두 끝나자, ‘증삼’은 무성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일에 대해 여론이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주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을 공경하였거늘, 적이 이르자 먼저 도망가고 적이 물러가자 돌아오니 옳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와 비슷한 경우에, ‘자사’는 그 행동이 사뭇 달랐습니다. ‘자사’가 위(衛)나라에 머물 때입니다. 그 어느 날에 제(齊)나라로부터 도둑 떼가 그곳으로 쳐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자사’에게 말했습니다.
“도둑 떼가 몰려오니 도망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자사’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도망가다니! 말도 안 된다. 내가 만일에 떠나 버린다면 임금께서는 이 땅을 누구와 더불어 지키실 수 있겠는가?”
[曾子居武城, 有越寇. 或曰 ‘寇至, 盍去諸?’ 曰 ‘無寓人於我室, 毁傷其薪木’ 寇退, 則曰 ‘修我牆屋, 我將反’ 寇退, 曾子反, 左右曰 ‘待先生, 如此其忠且敬也, 寇至則先去以爲民望, 寇退則反, 殆於不可’ <중략> 子思居於衛, 有齊寇. 或曰 ‘寇至, 盍去諸?’ 子思曰 ‘如伋去, 君誰與守?’(증자거무성, 유월구. 혹왈 ‘구지, 합거저?’ 왈 ‘무우인어아실, 훼상기신목’ 구퇴, 즉왈 ‘수아장옥, 아장반’ 구퇴, 증자반, 좌우왈 ‘대선생, 여차기충차경야, 구지즉선거이위민망, 구퇴즉반, 태어불가.’ 자사거어위, 유제구. 혹왈 ‘구지, 합거저?’ 자사왈 ‘여급거, 군수여수?’) 맹자 8-31]
위에서 ‘이위민망’(以爲民望)은, ‘백성들이 본받아서 그렇게 하고 싶게 하는 것’을 이릅니다. 그리고 ‘태어불가’(殆於不可)는, ‘아마도 마땅하지 않은 것 같다.’라는 말입니다. ‘태어’는 ‘~에 가깝다.’라는 뜻이지요. 원문 중에서 생략된 부분은, ‘심유행왈 시비여소지야. 석심유유부추지화, 종선생자칠십인, 미유여언’(沈猶行曰 是非汝所知也. 昔沈猶有負芻之禍, 從先生者七十人, 未有與焉)입니다. 이는, ‘증자의 문인인 심유행이 말하기를, 그것은 너희들은 모른다. 전에 심유 씨의 집에 부추라는 자가 환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때 증자께서는 70인과 함께 그 집에 계셨는데, 함께 피하시고 한 사람도 그 환란에 참여하지 않았다.’라고 풀이됩니다. 여기에서 ‘부추’(負芻)는 ‘사람 이름’이라고도 하고 ‘나뭇군을 가장한 도적 떼’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미유여언’(未有與焉)은 ‘참여한 사람이 없음’을 이릅니다.
이 일들에 대하여, 소년 ‘가’(軻)는 어른이 된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증자와 자사는 길이 같았다. 증자의 경우는 스승이고 부형이라는 처지에 있었으며, 자사의 경우는 신하이고 낮은 신분에 있었다. 만일에 증자와 자사의 처지가 바뀌었다면 두 사람은 역시 서로 그렇게 행동했을 터이다.”
[曾子子思 同道 曾子 師也 父兄也. 子思 臣也 微也. 曾子子思 易地則皆然(증자자사 동도 증자 사야 부형야. 자사 신야 미야. 증자자사 역지즉개연) 맹자 8-31]
이렇듯 두 사람을 감싸는 이유는, 그가 이 두 사람을 마음의 스승으로 모셨기 때문이지요. ‘자사’(子思)에 대한 이야기는 그 외의 몇 군데에 더 나타나 있습니다.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 노(魯)나라 임금 ‘목공’(繆公)이 자사를 아끼는 마음에서 자주 사람을 보내어서 안부를 묻고, 또 ‘찐 고기’(鼎肉)를 보내 주었다. 그러나 자사는 목공이 자기에게 그렇게 자주 안부를 묻고 ‘찐 고기’를 보내 주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마침내는 고기를 가지고 온 사람에게 손짓하여 대문 밖으로 내보내고 북쪽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두 번 큰절을 한 다음에 임금이 보내 준 것을 받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야 비로소 임금께서 나를 개나 말 다루듯이 기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사가 이렇게 임금이 보내 준 것을 거절한 후부터는 임금(繆公 목공)이 심부름꾼을 시켜서 음식을 보내 주는 일이 없어졌다. 현명한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그를 등용하여 쓰지 못하고 또 올바른 방법으로 그를 부양하지 못한다면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
[繆公之於子思也, 亟問, 亟餽鼎肉, 子思不悅, 於卒也, 標使者出諸大門之外, 北面稽首再拜而不受, 曰 ‘今而後知君之犬馬畜伋’ 蓋自是臺無餽也. 悅賢不能擧, 又不能養也, 可謂悅賢乎?(목공지어자사야, 기문, 기궤정육, 자사불열, 어졸야, 표사자출저대문지외, 북면계수재배이불수, 왈 ‘금이후지군지견마축급’ 개자시대무궤야. 열현불능거, 우불능양야, 가위열현호?) 10-6]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노(魯)나라 목공(繆公)이 자주 자사를 만났는데 ‘옛날 천승(千乘)의 임금이 선비를 벗으로 사귀었다는데 어떻습니까?’라고 했다. 자사가 그 말을 좋아하지 않고 ‘옛사람이 섬긴다고 말했을지언정 어찌 벗으로 사귄다고 말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니 자사가 좋아하지 않은 것은, ‘지위로 하면 당신은 임금이고 나는 신하인데 어찌 감히 임금과 벗이 되겠습니까? 덕으로 하면 당신이 나를 섬겨야 할 터인데 어찌 나하고 벗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는 게 아니겠느냐?”
[繆公亟見於子思曰 “古千乘之國以友士, 何如?” 子思不悅曰 “古之人有言曰 ‘事之云乎?’ 豈曰 ‘友之云乎?’” 子思之不悅也, 豈不曰 “以位, 則子君也, 我臣也, 何敢與君友也. 以德, 則子事我者也, 奚可以與我友?”(목공기견어자사왈 “고천승지국이우사, 하여?” 자사불열왈 “고지인유언왈 ‘사지운호?’ 기왈 ‘우지운호?’” 자사지불열야, 기불왈 “이위, 즉자군야, 아신야, 하감여군우야. 이덕, 즉자사아자야, 해가이여아우?”) 10-7]
나는 15살 때에는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에 살았습니다. 그리고 17살이 되면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이때에만 해도 철부지였다고 생각됩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서울 서대문구 불광동으로 이사 갔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약간 철이 들었지요.
눈을 감고 있노라면 세거리가 나타나고
그 한 갈 걸어가면 바로 불광동 80번지
대문 앞 우물가에는 보랏빛 꿈 피었다네.
겨우 이웃들만 알던 우체국 뒷집 맏아들
덩굴줄기 오르면서 어린 마음 키웠는데
집 마당 한가운데로 둥근 향기 고였다네.
문화주택 꽉 들어찬 동네 골목 넓게 쓸면
남의 일도 내 일처럼 서로 밝게 등을 켜고
은은히 귓전 적시던 은광교회 그 종소리.
-졸시 ‘등나무 그늘에 앉아서’
그 당시에는 교회에도 열심히 나갔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하여 고려대학교로 진학하게 되었고, 교회에서 시행하는 공민학교의 선생 노릇도 했습니다. 물론, 문학의 꿈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막연하게나마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문학에 대한 꿈을 조금씩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 당시에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신, 조지훈 시인을 스승으로 삼고서 많이 배우고 많은 문학 서적들도 독파했습니다.(글: 김 재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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