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아니 '멍쯔' 이야기

4. 작은 나무로도 다락처럼 높일 수 있다(글: 녹시 김 재 황)

시조시인 2022. 3. 31. 07:51

4. 작은 나무로도 다락처럼 높일 수 있다



 기원전 343년, 젊은이 ‘가’(軻)는 30살이 되었습니다. 공자가 말한, 스스로 일어설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추(鄒)나라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나도 이제부터는 그를 ‘맹 선생님’, 즉 ‘맹자’(孟子)라고 불러야 하겠습니다. 중국에서는 ‘맹자’를 ‘멍쯔’(meng zi)라고 한답니다. 맹자에게도 어른이 되고 나서의 이름이 있었겠지요? 어느 기록을 살펴보니, ‘자거’(子車)라고 불렀다는군요. 
 맹자의 여러 제자 중에는 옥려자(屋廬子)라는 임(任)나라 사람이 있었습니다. ‘임나라’는 ‘추(鄒)나라’처럼 아주 작은 나라인데, 추나라 바로 곁에 붙어 있었습니다. 앞에서 말 한 바가 있듯이, 임씨 성의 사람이 제후였으므로 그리 부르지만, ‘설(薛) 나라’라고도 부릅니다. 이는, 그 나라가 산동의 ‘설성’(薛城)에 있었기 때문이고 전국시대 초에는 제(齊)나라에 병합되었답니다. 
 아무튼 옥려자가 임 나라에 있을 때, 그 나라의 한 사람이 찾아와서 옥려자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예를 지키는 것과 음식을 먹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합니까?”
 “그야 예가 중요하지요.”
 “여인을 얻는 것과 예를 지키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합니까?”
 “물론, 예가 중요하지요.”
 그 말을 듣고, 그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금 음식 앞에서 예를 지키면 먹지 못해 굶게 되고 음식 앞에서 예를 지키지 않으면 먹을 것을 얻어서 굶지 않게 되는 데도, 반드시 예를 차려야 합니까? 그리고 여섯 가지 예를 갖추어서 맞으려면 아내를 얻지 못하게 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내를 얻게 되는 데도, 반드시 예를 지켜야 합니까?”

 [任人有問屋廬子曰 ‘禮與食孰重?’ 曰 ‘禮重’ ‘色與禮孰重?’ 曰 ‘禮重’ 曰 ‘以禮食, 則飢而死, 不以禮食, 則得食, 必以禮乎? 親迎, 則不得妻, 不親迎, 則得妻, 必親迎乎?’(임인유문옥려자왈 ‘예여식숙중?’ 왈 ‘예중’ ‘색여례숙중?’ 왈 ‘예중’ 왈 ‘이례식, 즉기이사, 불이례식, 즉득식, 필이례호? 친영, 즉부득처, 불친영, 즉득처, 필친영호?’) 12-1] 

 여기에서 ‘친영’(親迎)은 ‘결혼 당일에 신랑이 신부를 맞으러 가는 의식’을 이릅니다. 결혼에는 ‘납채’(納采) ‘문명’(問名) ‘납길’(納吉) ‘납징’(納徵) ‘고기’(告期) ‘친영’(親迎) 등의 육례가 있습니다. 물론, 예물이 필요합니다. 
 참으로 그 사람의 말은 정곡(正鵠)을 찔렀습니다. 이에 옥려자는 말문이 막혔습니다. 그래서 그다음 날, 쪼르르 추(鄒)나라로 달려와서 맹자에게 그 일을 말했습니다. 제자의 말을 듣고 나서 맹자는 한 마디로 잘라 말했습니다.
 “그 대답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
 그야말로 시원합니다. 제자인 옥려자는 귀를 가까이 기울이고 숨을 죽였습니다. 맹자는 천천히 입을 열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 밑을 헤아리지 않고 그 끝만 가지런히 한다면, 사방 한 치 되는 나무로도 다락처럼 높일 수 있다. 쇠붙이가 깃털보다 무겁다고 하는 것은, 허리띠의 고리쇠 하나와 수레에 가득 실은 깃털을 비교해서 한 말이겠는가. 아무리 깃털이라고 해도 수레에 가득 실은 무게면, 혁대 쇠고리 하나의 무게보다 훨씬 무거울 게 당연하다. ‘먹는 것 중에서 중요한 것’과 ‘예를 지키는 것 중에서 가벼운 것’을 골라서 비교한다면, 어찌 먹는 쪽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겠느냐? 또, ‘여인을 얻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아내를 얻는 것과 ‘예를 행하는 것 중에서 비교적 가벼운’ 여섯 가지 예를 골라서 비교한다면, 어찌 여인 쪽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겠느냐?”
 맹자의 대답은 대를 쪼개는 듯했습니다. 옥려자는 대번에 두 귀가 뻥 뚫리고 두 눈이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맹자는 다시 힘주어서 말했습니다.
 “그러니 임나라 사람에게 가서 이렇게 묻게. ‘만약에 자기 형의 팔을 비틀어서 빼앗아 먹는다면 먹을 수가 있고 그렇지 못하면 얻어먹을 수 없는 경우에도 자기 형의 팔을 비트는 짓을 하겠는가? 또, 동쪽 이웃집 담을 넘어가서 그 집의 처녀를 끌어오면 아내를 얻게 되고 그렇지 못하면 아내를 못 얻게 되는 경우도 담을 넘어가서 처녀를 끌어오겠는가?’라고.”

 [屋廬子不能對, 明日之鄒, 以告孟子. 孟子曰 ‘於答是也, 何有? 不揣其本, 而齊其末, 方寸之木, 可使高於岑樓. 金重於羽者, 豈謂一鉤金與一輿羽之謂哉? 取食之重者, 與禮之輕者而比之, 奚翅食重? 取色之重者, 與禮之輕者而比之 奚翅色重? 往應之曰 ’紾兄之臂而奪之食, 則得食, 不紾, 則不得食, 則將紾之乎? 踰東家牆而摟其處子, 則得妻, 不摟, 則不得妻, 則將摟之乎?(옥려자불능대, 명일지추, 이고맹자. 맹자왈 ‘어답시야, 하유? 불췌기본, 이제기말, 방촌지목, 가사고어잠루. 금중어우자, 기위일구금여일여우지위재? 취식지중자, 여례지경자이비지, 해시식중? 취색지중자, 여례지경자이비지 해시색중? 왕응지왈 ’진형지비이탈지식, 즉득식, 부진, 즉부득식, 즉장진지호? 유동가장이루기처자, 즉득처, 불루, 즉부득처, 즉장루지호?) 12-1]

위에서 ‘어답시야, 하유?’(於答是也, 何有)는 ‘이에 답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불췌기본’(不揣其本)의 ‘췌’는 ‘헤아리다’ ‘추측하다’ ‘재다’ ‘측량하다’ ‘시험하다’ 등의 뜻을 나타내고 ‘본’은 ‘밑쪽’이나 ‘아래쪽’을 가리킵니다. 또, ‘방촌지목’(方寸之木)은 ‘사방 한 치의 작은 나무’를 이르지요. 그런가 하면 ‘구금’(鉤金)은 ‘쇠로 만든 혁대 고리’를 말하고 ‘여우’(輿羽)는 ‘수레에 가득 실은 새털’을 말합니다.

어느 날, 맹자는 여러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순(舜)임금은 밭에서 일하다가 기용되었고, ‘부열’(傅說)이라는 사람은 성벽 쌓는 일을 하다가 은(殷)나라 고종(高宗)에게 발견되어 재상이 되었으며 ‘교격’(膠鬲)이라는 사람은 생선과 소금을 팔다가 문왕(文王)에게 발견됨으로써 등용되었다. 그런가 하면, ‘관중’(管仲)은 노(魯)나라의 감옥에 갇혀 있다가 제(齊)나라 환공(桓公)의 눈에 띄어서 재상이 되었고, 손숙오(孫叔敖)는 바닷가에 살았는데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그를 만나서 영윤(令尹)을 삼았으며 백리해(百里奚)는 장터에 묻혀 살고 있다가 진(秦)나라 목공(穆公)에게 발견되어 재상이 되었다.”
 맹자는 말을 잠시 끊었다가 다시 말했습니다.
 “이러한 예로 보아서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커다란 임무를 내리려고 하면 먼저 그들의 마음과 뜻을 괴롭히고 그들의 힘줄과 뼈까지도 힘들게 만든다. 그들의 몸도 굶주리게 하고 헐벗게 하며, 하는 일마다 어긋나게 만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돋우어 일으키고 능력을 키워서 강한 인내력으로 큰 임무를 맡게 만든다. 사람들은 대체로 잘못을 저지른 뒤에야 고칠 줄 안다. 마음이 막히고 생각이 빗나간 뒤에야 주먹을 불끈 쥔다. 그리고 괴로움이 얼굴빛에 나타나고 소리 내어 말을 해야만 알아차린다.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안으로 법도를 지켜서 나라를 올바로 이끌어나가는 세가(世家)와 훌륭한 정치를 하도록 임금을 보필하는 현사(賢士)가 없게 되고 밖으로 적대하는 나라와 외부에서 가해 오는 근심거리가 없게 되면, 그런 나라는 열 가운데 여덟이나 아홉은 망하게 된다. 이러한 일로 미루어보건대 사람이 괴로움 속에서도 살고 즐거움 속에서도 죽는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故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所以動心忍性, 曾益其所不能. 人恒過, 然後能改. 困於心, 衡於慮, 而後作. 徵於色, 發於聲, 而後喩. 入則無法家拂士, 出則無敵國外患者, 國恒亡. 然後知生於憂患, 而死於安樂也.(고천장강대임어시인야, 필선고기심지, 노기근골, 아기체부, 공핍기신, 행불란기소위, 소이동심인성, 증익기소불능. 인항과, 연후능개. 곤어심, 횡어려, 이후작. 징어색, 발어성, 이후유. 입즉무법가불사, 출즉무적국외환자, 국항망. 연후지생어우환, 이사어안락야.) 12-15] 

 여기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거론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모두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간략하게나마 그들을 여기에 소개해 보겠습니다. ‘부열’이라는 사람은, 은나라 ‘무정’(武丁), 즉 고종에게 기용되어 재상이 된 현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교격’이라는 사람은, 주씨(紂氏) 왕을 피해서 생선과 소금을 팔고 있다가 문왕에게 발견된 현자랍니다. 그런가 하면, ‘관이오’(管夷吾)는 ‘관중’이라는 사람입니다. 제(齊)나라 환공(桓公)의 형인 ‘공자규’(公子糾)를 받들었지요. 노(魯)나라에 있으면서 환공과 한때 싸웠는데, 패하여 노나라 옥관에 의해 제나라로 압송되었다가 친구인 ‘포숙’(鮑叔)의 추천으로 환공을 섬기게 됨으로써 후에 재상 자리에 올랐습니다. 또, ‘손숙오’는 초나라 장왕을 섬겨서 영윤이라는 자리에 오른 현자(賢者)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백리해’라고 하는 사람은 우(虞)나라 사람으로 진(秦)나라 목공을 섬긴 현자인데 흔히 *‘오고대부’(五羖大夫,)라고 부릅니다.

 어느 날인가 ‘백규’(白圭)라는 사람이 맹자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의 성씨는 ‘백씨’(白氏)이고 어릴 적의 이름은 ‘단’(丹)이랍니다. ‘규’는 어른이 되고 나서의 이름이지요.
 “나는 세율을 소득의 20분지 1로 하려고 생각하는데, 어떻습니까?”
 “당신이 쓰려는 방법은 북쪽 오랑캐의 방법이오. 1만 호의 사람들이 사는 나라에서 단 한 사람만이 도자기를 굽는다면 되겠소?”
 “그야 안 되지요. 도자기가 쓰기에 모자랄 겁니다.”
 “북쪽 오랑캐의 땅에는 오곡이 되지 않고 단지 기장(黍)만이 자라므로 세금을 많이 받을 수가 없소. 그뿐만 아니라, 성곽이나 궁실 및 종묘나 제사 등의 예가 행하여지지 않고 다른 나라의 임금을 위한 폐백(幣帛)이나 잔치도 없으며 여러 신하와 선비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20분지 1로 하여도 충분하오. 그러나 중국에 살면서 인륜을 버리고 군자를 무시한다면 어떻게 되겠소? 도자기 굽는 사람이 적어도 나랏일을 해나갈 수가 없거늘 하물며 군자(君子)가 없을 수 있겠소? 요(堯)임금이나 순(舜)임금의 세법보다 가볍게 받으려는 것은 큰 오랑캐에 작은 오랑캐라고 할 수 있고, 요임금이나 순임금의 방법보다 더 받으려는 것은 ‘하(夏)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걸(桀) 임금’과 같은 폭군으로서 큰걸 임금(大桀)에 대한 작은걸 임금(小桀)이라고 할 수 있소.”

 [白圭曰 ‘吾欲二十而取一, 何如?’ 孟子曰 ‘子之道, 貉道也. 萬室之國, 一人陶, 則可乎?’ 曰 ‘不可, 器不足用也.’ 曰 ‘夫貉, 五穀不生, 惟黍生之. 無城郭宮室宗廟祭祀之禮, 無諸侯幣帛饔飱, 無百官有司, 故二十取一而足也. 今居中國, 去人倫, 無君子, 如之何其可也? 陶以寡, 且不可以爲國, 況無君子乎? 欲輕之於堯舜之道者, 大貉小貉也. 欲重之於堯舜之道者, 大桀小桀也.’(백규왈 ‘오욕이십이취일, 하여?’ 맹자왈 ‘자지도, 맥도야. 만실지국, 일인도, 즉가호?’ 왈 ‘불가, 기부족용야.’ 왈 ‘부맥, 오곡불생, 유서생지. 무성곽궁실종묘제사지례, 무제후폐백옹손, 무백관유사, 고이십취일이족야. 금거중국, 거인륜, 무군자, 여지하기가야? 도이과, 차불가이위국, 황무군자호? 욕경지어요순지도자, 대맥소맥야. 욕중지어요순지도자, 대걸소걸야.’) 12-10]

 그리고 또 어느 때, 백규가 맹자에게 말했습니다.
 “저의 물을 다스리는 솜씨가 우임금보다 낫습니다.”(丹之治水也 愈於禹, 단지치수야 유어우)
 그 말을 듣고 맹자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말이 지나치오. 우(禹)임금은 물을 다스리면서 제 길로 순조롭게 흘러가도록 했소. 그래서 우임금은 사방의 바다를 골짜기로 삼고 그곳으로 흘러가게 하였소, 지금 당신은 이웃 나라를 골짜기로 삼고 그곳으로 흘러가게 하고 있소. 물이 거슬러 흐르는 것을 ‘강수’(洚水)라고 하는데, ‘강수’란 ‘홍수’(洪水)를 이르오. 이는 어진 사람들이 싫어하는 짓이니, 당신이 잘못한 거요.”

 [白圭曰 ‘丹之治水也, 愈於禹.’ 孟子曰 ‘子過矣. 禹之治水, 水之道也. 是故禹以四海爲壑. 今吾子以隣國爲壑. 水逆行, 謂之洚水. 洚水者, 洪水也. 仁人之所惡也, 吾子過矣.’(백규왈 ‘단지치수야, 유어우.’ 맹자왈 ‘자과의. 우지치수, 수지도야. 시고우이사해위학. 금오자이린국위학. 수역행, 위지강수. 강수자, 홍수야. 인인지소오야, 오자과의.’) 12-11] 

 여기에서 ‘백규’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야 하겠습니다. 
 백규는 주(周)나라 사람이라고 합니다. 위(魏)나라 문후(文侯) 때, 백규는 시세의 변화에 따른 물가 변동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풍년이 드는 해와 흉년이 드는 해를 잘 살폈습니다. 그래서 풍년이 드는 해에는 농작물을 사들였다가 흉년이 드는 해에 밖에 내다가 팔았습니다. 이처럼 사고파니 해마다 재산이 2배로 늘어났습니다.
 돈을 불리려고 농작물을 살 때는 싼값으로 사들이고 비싼 우량종자를 구해다가 수확을 늘렸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거친 음식을 먹고 술이나 차 등엔 입맛을 들이지 않았으며, 옷을 검소하게 입고 머슴들과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했습니다. 그러나 시세에 따라 행동해야 할 때는 마치 맹수나 새처럼 날래고 가벼웠습니다. 그는 자기 행동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일을 다스리는 이치는 ‘이윤’(伊尹)과 ‘여상’(呂尙)이 계책을 쓰듯이, ‘손자’(孫子)와 ‘오기’(吳起)가 병법을 부리듯이, ‘상앙’(商鞅)이 법을 시행하듯이 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임기응변의 조치를 할 지혜가 없거나 일을 결단할 만한 용기가 없거나 주고받을 만한 어짊이 없거나 지켜야 할 만한 지조도 없는 사람이라면, 비록 나에게 가르침을 청한다고 해도 가르쳐 줄 수가 없다.”
 대체로 천하의 재산 증식법을 논하는 자는, 백규를 원조로 칩니다. 백규는 자신의 고유한 재산 증식법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이 부자가 됨으로써 그것을 증명해 냈습니다.
 여기에서 ‘이윤’은 처음에 ‘유신씨’(有莘氏)의 들에 은거하다가 탕(湯)왕의 초빙 받고 폭군인 ‘걸 임금’을 쳐서 백성을 폭정에서 구해 준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상’은 ‘강태공’(姜太公)을 말하는데, 주(周)나라 건국에 공을 세우고 제나라의 시조가 된 사람이지요. 또, ‘손자’는 뛰어난 병법가로 이름은 ‘손무’(孫武)이고, ‘오기’도 병법가로 전국시대 위(衛)나라 사람인데 위(魏)나라 문후(文侯)가 그를 장군으로 삼았습니다. ‘상앙’에 대해서는 앞에서 긴 설명이 있었습니다. 

 30살이라면 공자가 말한 입(立)의 나이입니다. 이는 ‘홀로서기’를 한다는 뜻이겠지요. 그런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나는 이미 24세가 되는 1965년에 ‘홀로서기’를 했습니다. 그때 나는, 국민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려고 군대에 입대했기 때문입니다. 남자라면 당연히 군대를 다녀와야 합니다. 고된 훈련 속에서 단단한 자립심이 생겨납니다.

 발맞춤이 땅 구르니 입맞춤은 하늘 닿고
 옷소매로 땀을 흩는 무등병의 구보 행렬
 힘차게 하나둘셋넷 연병장을 다져 간다.

 몇 분의 휴식이라도 화랑담배 입에 물면
 눌러 쓴 철모의 끈에 땀방울은 흐르는데
 고향 녘 환한 낮달이 눈웃음을 짓고 뜬다. 

 황산벌에 퍼져 가는 총검술의 기합 소리
 무르팍이 깨진 만큼 높이 서는 간성이여
 이 밤도 젊음의 별빛은 이마에서 빛난다.
                  -졸시 ‘논산훈련소에서’

 논산훈련소에서 기초 교육을 모두 끝낸 후에는 특과 학교로 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헌병학교로 가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에 헌병학교는 대구 근방인 영천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곳으로 가서 2달 동안의 피나는 훈련 받았습니다. 다행히 졸업성적이 우수하였기에 내가 희망한 국방부에 배속되어 성실히 의무를 수행하였습니다. 그리고 1967년이 저물어 가는 26살 때 제대했습니다.
 군대에서 제대한 후에는 취직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그 시절에는 직장을 잡기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노력한 결과로 경기도농촌진흥원에서 실시한 4급 을류 농촌지도직 국가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였고, 내가 28살이 되던 1969년에는 포천군농촌지도소로 발령받았습니다. 나는 자청하여 오지인 창수면과 청산면의 일을 담당했습니다. 이때부터 집을 떠나서 독립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에는 삼성 그룹의 중앙일보사로 직장을 옮겼는데, 맡은 일이 많아서 지방을 떠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