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아니 '멍쯔' 이야기

5. 네게서 나온 것이 네게로 돌아간다(글: 녹시 김 재 황)

시조시인 2022. 3. 31. 12:33

5. 네게서 나온 것이 네게로 돌아간다



 기원전 333년, 맹자는 40살이 되었습니다. 그해에 모사(謀士, 임금을 도와서 꾀를 내는 사람)인 ‘공손연’(公孫衍)이라는 사람이 진(秦)나라에서 ‘대량조’(大良造)에 임명되어 위(魏)나라로 쳐들어갔습니다. ‘대량조’는 ‘가장 높은 무관 벼슬’이랍니다. 먼저, ‘상앙’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 진(秦)나라의 임금은 ‘혜문왕’(惠文王)이었지요. 임금의 자리에 오른 지 5년이 되는 해였다고 합니다. 
 그다음 해에 맹자는 처음으로 추(鄒)나라의 임금인 ‘목공’(穆公)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추나라와 노(魯)나라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추나라가 그 싸움에 졌습니다. 그래서 목공이 맹자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싸움에 나간 내 신하 중에 죽은 사람이 33명인데, 싸움에 병사로 함께 나간 백성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 백성들을 죽이자니 이루 다 죽일 수 없고, 죽이지 않으려니 윗사람의 죽음을 뻔히 보고 구하지 않은 죄를 그냥 둘 수가 없습니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맹자가 대답하였습니다.
 “곡식이 적게 나고 굶주린 해에, 임금의 백성들 가운데 늙은이와 어린이들은 구렁텅이에 굴러 들어가서 죽고 장정들은 흩어져서 동서남북으로 가 버린 사람이 수천 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임금님의 곡식 창고와 재물 창고는 가득 차 있었어도 신하들이 임금님께 아뢰지 않았습니다. 이는 윗사람이 게을러서 아랫사람을 해친 겁니다. 증자께서도 ‘경계하라. 경계하라. 네게서 나온 것이 네게로 돌아간다.’라고 하셨습니다. 백성들이 지금에 와서 자기네가 당한 것을 되갚은 것이니, 임금님께서는 원망하지 마십시오. 임금님께서 어진 정치를 베푸시면 그 백성들도 윗사람을 가까이하고 그렇게 되면 그 윗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게 될 겁니다.

 [鄒與魯鬨, 穆公問曰 ‘吾有司死者 三十三人 而民莫之死也 誅之則不可勝誅 不誅則疾視其長上之死而不救 如之何則可也?’ 孟子對曰 ‘凶年饑歲 君之民 老弱轉乎溝壑 壯者散而之四方者 幾千人矣 而君之倉廩實 府庫充 有司莫以告 是上慢而殘下也. 曾子曰 <戒之戒之, 出乎爾者反乎爾者也> 夫民今而後得反之也 君無尤焉. 君行仁政 斯民親其上死其長矣’.(추여노홍, 목공문왈 ‘오유사사자 삼십삼인 이민막지사야 주지즉불가승주 부주즉질시기장상지사이불구 여지하즉가야?’ 맹자대왈 ‘흉년기세 군지민 노약전호구학 장자산이지사방자 기천인의 이군지창름실 부고충 유사막이고 시상만이잔하야. 증자왈 <계지 계지, 출호이자반호이자야> 부민금이후득반지야 군무우언. 군행인정 사민친기상사기장의.’) 2-12]

 위의 ‘추여노홍’(鄒與魯鬨)에서 ‘홍’의 본뜻은 ‘싸우는 소리’를 이른답니다. 여기에서는 ‘전쟁’의 뜻으로 쓰였습니다. 그리고 ‘오유사사자’(吾有司死者)에서 ‘유사’의 본뜻은 ‘직책을 맡은 관원’을 말한답니다. 여기에서는 ‘관원으로서 전투에 지휘관으로 나간 장교’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목공(穆公)은 자기의 잘못은 생각하지도 않고 목숨을 내걸고 싸우지 않은 백성들만 처벌하려고 했지요. 왜 백성들이 목숨을 내걸고 싸우지 않았을까요? 그야, 평소에 임금과 관리들이 자기 배만 불렸기 때문이겠지요. 반드시 그런 일이 있었을 겁니다. 맹자의 말을 들은 목공은, 크게 깨우쳤던 모양입니다. 사람이 확 달라졌지요. ‘가의신서’(賈誼新書)라는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추나라 목공이 오리와 기러기를 길렀는데, 반드시 쭉정이를 모이로 쓰고 그 알맹이인 쌀과 벼(米粟)는 쓰지 않았습니다. 만일에 쭉정이가 없으면 창고의 벼와 쌀 2석 분량(二石分)을 꺼내어서 민간의 쭉정이 1석 분량과 바꾸어서 모이로 썼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신하들이 임금에게 물었습니다.
 “어찌 손해 가는 일을 하십니까?”
 그 물음에 목공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지 않다. 쌀과 벼는 백성들의 좋은 식량인데 새나 짐승에게 줄 수가 있겠는가? 창고의 식량은 줄었어도 백성들에게 옮겨졌을 뿐으로 나라의 식량은 줄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추(鄒)나라의 정치는 매우 혼란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맹자는 그가 사는 나라인 추나라에서는 자기의 정치적 포부를 펼칠 수 없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곧 추나라를 떠났다고 합니다.
 기원전 331년, 맹자가 42살 때였지요. 맹자는 제(齊)나라의 ‘평륙’(平陸)이라는 읍 지방에 어머니와 함께 머무르고 있었답니다. 그 당시의 제나라 임금은 위왕(威王, 재위는 기원전 356년~320년)이었지요.
 하루는, 맹자가 평륙을 다스리는 대부(大夫) ‘공거심’(孔距心)이라는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부하 중에 창을 든 병사가 하루에 3번이나 대오에서 벗어난다면, 그 사람을 쫓아내겠습니까? 아니면 그대로 두겠습니까?” 
 거심이 대답했습니다.
 “세 번씩이나 벗어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겠습니다.”
 맹자는 다시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도 대오에서 벗어난 잘못이 큽니다. 곡식이 적게 나거나 굶주림이 심하게 되자, 당신의 백성 가운데 늙은이와 약한 사람들은 도랑이나 골짜기에 굴러떨어져서 죽었습니다. 젊은이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으니, 그 수가 수천 명이나 됩니다.”
 거심이 대답했지요.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 말을 듣고, 맹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습니다.
 “지금 여기 남의 소나 양을 맡아서 기르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 사람은 우선 소나 양을 키우기 위하여 목장과 목초를 마련하려고 하겠지요. 그런데 만일에 목장과 목초를 구하다가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하면, 그 소나 양을 그 주인에게 돌려보내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우두커니 선 채로 그 소나 양이 죽는 꼴을 보고만 있겠습니까?”
 그러자, 거심은 머리를 숙이며 힘없이 말했습니다.
 “그것은 저의 죄입니다.”

 [孟子之平陸, 謂其大夫曰 ‘子之持戟之士 一日而三失伍 則去之 否乎?’ 曰 ‘不待三’ ‘然則子之失伍也亦多矣. 凶年饑歲, 子之民, 老羸轉於溝壑, 壯者散而之四方者, 幾千人矣.’ 曰 ‘此非距心之所得爲也.’ 曰 ‘今有受人之牛羊 而爲之牧之者 則必爲之求牧與芻矣 求牧與芻而不得 則反諸其人乎? 抑亦立而視其死與?’ 曰 ‘此則距心之罪也’(맹자지평륙, 위기대부왈 ‘자지지극지사, 일일이삼실오, 즉거지, 부호?’ 왈 ‘부대삼’ ‘연즉자지실오야역다의. 흉년기세, 자지민, 노리전어구학, 장자산이지사방자, 기천인의.’ 왈 ‘차비거심지소득위야.’ 왈 ‘금유수인지우양 이위지목지자 즉필위지구목여추의 구목여추이부득 즉반저기인호? 억역립이시기사여?’ 왈 ‘차즉거심지죄야.’) 4-4]

 위의 ‘지극지사’(持戟之士)에서 ‘극’은 ‘끝이 둘로 갈라진 창’을 이릅니다. 그래서 ‘지극지사’란, ‘그러한 창을 잡고 관아의 수비와 읍재의 호위를 맡은 병사’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목여추’(牧與芻)에서 ‘목’의 본뜻은 ‘손에 채찍을 들고 소를 때리며 모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에서는 ‘목장’을 나타냈지요. 또, ‘추’는 ‘꼴’ ‘말린 풀’ ‘마소의 먹이’ 등을 가리킵니다. 지금 쓰이는 말로는 ‘목초’입니다.
 이 일을 맹자는 가슴속에 간직해 두었다가, 먼 후일에 선왕(宣王, 재위는 기원전 319년~기원전 301년)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금님 밑에서 고을을 다스리는 사람 가운데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다섯 명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죄를 아는 사람은 오직 공거심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맹자는, 그와의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선왕은 말했습니다.
 “그것은 모두 과인의 죄입니다.”

 [他日見於王曰 ‘王之爲都者 臣知五人焉 知其罪者 惟孔距心.’ 爲王誦之. 王曰 ‘此則寡人之罪也’(타일현어왕왈 ‘왕지위도자, 신지오인언, 지기죄자, 유공거심.’ 위왕송지. 왕왈 ‘차즉과인지죄야.’) 4-4] 

 여기에서 ‘과인’(寡人)이란, ‘임금이 자기를 낮추어서 하는 말’입니다. 
 그 당시 제(齊)나라 사회는 어떠하였을까요? 그 한 단면을 엿보게 하는 이야기가 있기에 여기에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나라 사람 가운데 한 아내와 한 첩을 거느리고 한집에 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 되는 사람은, 밖에 나가면 반드시 술과 고기를 실컷 먹은 뒤에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 아내가 ‘누구와 함께 먹고 마셨느냐.’라고 물으면 ‘모두가 귀한 사람이고 부자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내가 첩에게 말했습니다.
 “주인이 밖에 나가면 언제나 술과 고기를 실컷 먹은 뒤에 돌아오곤 하여 함께 마신 사람을 물어보면 모두 부자고 귀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여태껏 이름난 사람이 찾아온 적이 없으니 내 주인이 가는 곳을 몰래 살펴보려고 하네.”

 [良人出 則必饜酒肉而後反 問其與飮食者 盡富貴也 而未嘗有顯者來 吾將瞯良人之所之也.(양인출 즉필염주육이후반 문기여음식자 진부귀야 이미상유현자래 오장간량인지소지야) 8-33]

 그리고는 그 아내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남편이 가는 곳을 멀찌감치 쫓아갔습니다. 남편은 온 성안을 돌아다녔지만, 함께 서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동쪽 성 밖의 무덤 사이에서 제사 지내고 있는 사람한테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먹고 남긴 것을 구걸하여 먹었습니다. 그리고 양이 덜 차면 다시 돌아보고는 다른 곳으로 찾아가서 얻어먹었습니다. 이게 바로 그가 실컷 먹고 돌아오는 방법이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집으로 돌아와서 그 첩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인은 우러러보고 평생을 살 사람인데, 인제 보니 그런 꼴일세.”

 [良人者 所仰望而終身也 今若此(양인자 소앙망이종신야 금약차) 8-33]

 그리고는 그 아내는 첩과 함께 마당 한가운데 서서 서로 가슴을 맞대고 울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그것도 모르고 으스대며 집으로 돌아와서 아내와 첩에게 뽐내었지요.
  군자의 눈으로 볼 때 세상 사람들이 부귀와 이권을 찾아다니는 방법치고, 그들의 아내와 첩들이 부끄러워하지 않거나 울지 않을 경우는 거의 없답니다.
 이 이야기도 ‘맹자’(孟子)라는 책 속에 씌어 있는 글이니, 아마도 맹자가 제자들에게 들려준 이야기인 듯싶습니다. 그래서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써라.’라는 속담도 생겼나 봅니다.
           
 사실, 맹자(軻)가 제(齊)나라로 온 것은 자기의 뜻을 펴 보려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얼굴에 근심스러워하는 기색이 있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물었습니다.
 “네 얼굴을 보니 근심이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냐?”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런 후였지요. 어느 날인가 맹자의 어머니가 쉬고 있다가, 기둥을 안고 탄식하는 맹자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에게 물었습니다.
 “전에 네 얼굴에 근심이 있는 것 같았는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지금 또 기둥을 안고 탄식하는 까닭은 무엇이냐?” 
 “제가 듣기로 ‘군자는 제 능력에 맞는 자리에는 나아가서 벼슬을 하지만 구차하게 분수에 넘치는 지위나 상을 얻으려고 하지 않으며, 세상에 드러나는 영광이나 높은 녹봉을 탐내지 않는다. 제후가 들으려고 하지 않으면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고, 그 의견을 듣고서도 그 의견을 써주지 않으면 그 조정에서 벼슬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지금 제나라에 도(道)가 행하여지지 않아서 떠나기를 원하지만, 어머니께서 연로하신 게 걱정입니다.” 
 “무릇 부인의 예는 하루 다섯 번의 먹을거리를 잘 만들고, 술이나 장 담그는 일을 하며, 시부모를 봉양하고 또 옷을 짓는 일을 할 뿐이다. 다만, 집 안에서의 일을 열심히 할 뿐, 집 밖의 일에 마음 쓰지 않는다. 이는 부인이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이 없으며, *삼종의 도(三從之道)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어려서는 부모를 따르고 시집을 가서는 남편을 따르며, 남편이 죽은 후에는 자식을 따르는 게 예이다. 지금 너는 어른이고 또 나는 늙었다. 너는 너의 뜻대로 실행하여라. 나는 나의 예대로 실행하겠다.”

 [孟子處齊, 而有憂色, 孟母見之曰 ‘子若有憂色 何也?’ 孟子曰 ‘不敏’ 異日閒居, 擁楹而歎, 孟母見之曰 ‘鄕見子有憂色 曰不也 今擁楹而歎 何也?’ 孟子對曰 ‘軻聞之 <君子稱身而就位 不爲苟得而受賞 不貪榮祿 諸侯不聽 則不達其上 聽而不用 則不踐其朝> 今道不用於齊, 願行而母老, 是以憂也.’ 孟母曰 ‘夫婦人之禮, 精五飯, 冪酒漿, 養舅姑, 縫衣裳而已矣. 故有閨內之脩, 而無境外之志. 以婦人無擅制之義, 而有三從之道也. 故年少則從乎父母 出嫁則從乎夫 夫死則從乎子 禮也. 今子成人也, 而我老矣. 子行乎子矣. 吾行乎吾禮.’(맹자처제, 이유우색, 맹모견지왈 ‘자약유우색 하야?’ 맹자왈 ‘불민’ 이일한거, 옹영이탄, 맹모견지왈 ‘향견자유우색 왈부야, 금옹영이탄 하야?’ 맹자대왈 ‘가문지 <군자칭신이취위 불위구득이수상 불탐영록 제후불청 즉불달기상 청이불용 즉불천기조> 금도불용어제, 원행이모노, 시이우야.’ 맹모왈 ‘부부인지례, 정오반, 멱주장, 양구고, 봉의상이이의. 고유규내지수, 이무경외지지, 이부인무천제지의, 이유삼종지도야. 고연소즉 종호부모 출가즉종호부 부사즉종호자 예야. 금자성인야, 이아노의. 자행호자의. 오행호오례.’) 유향의 열녀전에서] 

 이는, 맹자의 어머니 때에 벌써 ‘삼종의 도’가 행하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참으로 명쾌한 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40살이 되었을 때, 나는 제주도 서귀포에서 작은 귤밭을 가꾸고 있었습니다. 바로, 1981년의 일이었습니다. 격무에 시달리던 회사(삼성)의 일을 사직하고, 1978년에 어렵사리 조그만 귤밭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래서 가족을 이끌고 서귀포로 내려갔습니다. 시골에서 농장을 가꾸며 자유롭게 시를 공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그 귤밭에 여러 품종의 귤나무들을 모아놓고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이를테면 ‘레몬’이라든지 ‘네이블’이라든지 ‘팔삭’이라든지 ‘금감’이라든지 ‘하귤’ 이라든지---, 아무튼 30여 종을 수집하였습니다. 

 둘러친 돌담 가에 사투리는 맴을 돌고
 물결이 차고 나면 더욱 날을 세우는 잎
 무섭게 긴 소매 끌며 바람 소리 달려간다.

 살며시 품을 열면 흰 거품의 바다 냄새
 가지 끝 아린 삭신 긴 숨결로 싹이 트고
 여인의 둥근 마음을 켜로 두른 나이테여.

 뺨 시린 빗줄기가 나무들을 쓸고 가면
 웅크린 숲 그늘이 놀란 듯이 깨는 소리
 동박새 앉은 자리로 이른 봄이 오고 있다.
              -졸시 ‘서귀포 겨울 귤밭에서

 그리고 집의 정원에는 ‘꽃치자나무’와 ‘비파나무’와 ‘동백나무’ 등을 심어 놓고 정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천지연의 ‘담팔수’와 서귀포 시청 앞마당의 ‘먼나무’를 자주 만나러 다녔습니다. 그 외에도 서귀포에 사는 여러 나무가 모두 나의 친구였습니다. 
 물론, 문학의 꿈도 조금씩 이룰 수 있었습니다. 신문의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몇 번 최종심에 들기도 했습니다. 
 특히 제주도에 살 때 나의 벗 ‘이성선 형’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이미 1970년에 ‘문화비평’을 통하여 시인으로 등단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즉시 이성선 형에게 편지를 띄웠고, 그는 곧 답장을 나에게 보내주었습니다.(글: 김 재 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