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선비는 인과 의의 뜻을 높이는 사람이다
기원전 328년, 맹자는 45살이 되었습니다. 맹자는 제(齊)나라에서 빈사(賓師)의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빈사’란 ‘높은 사람으로부터 손님으로 대우받음’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높은 사람’이란 누구일까요? 그야, 제나라의 임금인 ‘위왕’(威王)이었지요.
이 당시에 ‘공손연’(公孫衍)과 ‘장의’(張儀), 그리고 장의의 동문인 ‘소진’(蘇秦) 등이 합종연횡설(合從連橫說)을 유행시키고 있었습니다. 합종연횡이란, ‘외교적 술수를 통해 정치의 위기를 타개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합종’(合從)이란 ‘약한 여러 세력이 연합하여 강한 세력에 대항하며 정치적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이르지요. 그리고 ‘연횡’(連橫)이란, ‘약한 세력이 강한 세력과 독자적인 거래를 틂으로써 살아남기 위한 길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식의 정치를, 맹자는 반대하였습니다.
어느 날, ‘경춘’(景春)이란 사람이 맹자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도 ‘합종연횡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를 줄여서 그냥 ‘종횡가’(縱橫家)라고도 불렀답니다.
“공손연(公孫衍)과 장의(張儀)야말로 진정한 대장부(大丈夫)가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한 번 노하면 제후들이 두려워하고 편안히 들어앉아 있으면 천하가 잠잠해집니다.”
그 말을 듣고, 맹자가 말했습니다.
“그런 일로야 어찌 대장부라고 할 수 있겠소. 당신은 예를 배우지 않았소? 사내가 *관례(冠禮)를 올리면 아버지가 사람의 도(道)를 일러줍니다. 그리고 여자가 시집갈 때는 어머니가 딸에게 시집살이의 도(道)를 가르쳐 주는데, 대문까지 나가 보내면서 ‘시집에 가서 반드시 공경하고 조심하여 남편의 뜻을 어기지 말라.’라고 훈계합니다. 그러니, 순종을 올바른 도리로 삼는 것은 아낙네들이나 따르는 도리지요. 참다운 대장부는 천하의 넓은 집에 살며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큰 도(道)를 행합니다. 그래서 뜻을 얻으면 백성들과 함께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道)를 행하여 부귀도 그 마음을 유혹하지 못하고 빈천도 그의 지조를 바꾸지 못하며 위세와 무력으로도 결코 그 마음을 굽히지 못합니다. 이를 일러서 대장부(大丈夫)라고 말합니다.”
[景春曰 ‘公孫衍張儀, 豈不誠大丈夫哉? 一怒而諸侯懼, 安居而天下熄.’ 孟子曰 ‘是焉得爲大丈夫乎? 子未學禮乎? 丈夫之冠也, 父命之. 女子之嫁也, 母命之. 往送之門, 戒之曰 <往之女家, 必敬必戒 無違夫子.> 以順爲正者, 妾婦之道也. 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 得志與民由之, 不得志獨行其道. 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佌之謂大丈夫.’(경춘왈 ‘공손연장의, 기불성대장부재? 일노이제후구, 안거이천하식.’ 맹자왈 ‘시언득위대장부호? 자미학례호? 장부지관야, 부명지. 여자지가야, 모명지. 왕송지문, 계지왈 <왕지여가, 필경필계 무위부자.> 이순위정자, 첩부지도야. 거천하지광거, 입천하지정위, 행천하지대도, 득지여민유지, 부득지독행기도. 부귀불능음, 빈천불능이, 위무불능굴, 차지위대장부.’) 6-2]
앞의 ‘장부지관야’(丈夫之冠也)에서 ‘관’은 ‘관례’(冠禮)를 이릅니다. 남자는 20세가 되면 ‘관례’를 치르지요. 그리고 ‘부명지’(父命之)는, 사관례(士冠禮)에 따라 아버지가 관례를 치르는 아들에게 일러주는 말입니다. 즉, ‘기여유지순이성덕’(棄汝幼志順爾成德)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너의 어린 마음을 버리고 너의 이룩된 덕에 따르라.’라는 뜻입니다. 또, ‘거천하지광거’(居天下之廣居)에서 ‘광거’는, ‘넓은 주거’라는 말이지만, 여기에서는 ‘어짊’(仁)을 나타냅니다. ‘어짊’에 처해 있으면 하늘과 땅에 부끄럽지 않고 여러 사람에게도 사랑받게 되므로 이보다 더 넓고 편안한 집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가 하면, ‘입천하지정위’(立天下之正位)에서 ‘정위’는, ‘바른 위치’라는 말인데, 여기에서는 ‘예’(禮)를 가리킨답니다. 예에 따라서 일을 행하면 언제나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곧고 바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행천하지대도’(行天下之大道)에서 ‘대도’는, ‘사람이 가야 할 큰길’을 말하지만, 여기에서는 ‘옳음’(義)을 가리킨답니다. 이는, 사람이 실제로 가야 할 ‘바른길’로 ‘옳음’을 행하는 게 바로 ‘큰길’이기 때문이랍니다.
사람들은 맹자를 가리켜서 이상주의자(理想主義者)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얽히고설킨 다스림의 세계에서 ‘한 다스림이 어떤 판단을 내리느냐’는, 마지막에 가서 그 따르는 무리뿐만 아니라 백성의 행동 기준을 마련해 주는 매우 귀중한 일이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시급한 현실 문제라고 하더라도 도(道)와 덕(德)의 잣대를 판단기준에서 물리쳐서 치워내면 안 된다는 게, 바로 맹자의 생각이었지요.
그런 어느 날이었습니다. 제(齊)나라 임금의 아들인 ‘점’(墊)이 맹자에게 물었습니다.
“선비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입니까?”
맹자가 말했습니다.
“뜻을 높입니다.”
그러자, ‘점’은 다시 물었습니다.
“뜻을 높인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맹자는 ‘점’에게 차근차근 일러주었습니다.
“인(仁)과 의(義)를 말합니다. 죄 없는 사람을 하나만 죽여도 ‘인’이 아니며, 자기의 것이 아닌데도 가지면 ‘의’가 아닙니다. 몸을 어디에다 둘 것인가 하면 ‘인’이 바로 그것이고, 길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인’에 몸을 두고 ‘의’를 따라가면, 대인(大人)이 할 일은 모두 갖추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王子墊問曰 ‘士何事?’ 孟子曰 ‘尙志.’ 曰 ‘何謂尙志?’ 曰 ‘仁義而已矣. 殺一無罪, 非仁也. 非其有而取之, 非義也. 居惡在, 仁是也. 路惡在, 義是也. 居仁由義, 大人之事備矣.’(왕자점문왈 ‘사하사?’ 맹자왈 ‘상지.’ 왈 ‘하위상지?’ 왈 ‘인의이이의. 살일무죄, 비인야. 비기유이취지, 비의야. 거오재, 인시야. 노오재, 의시야. 거인유의, 대인지사비의.’) 13-33]
앞의 말에서 무엇보다 ‘대인’(大人)이란 말에 주목하게 됩니다. 과연, 어떤 사람을 ‘대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풀이를 더 듣고 싶지 않습니까?
그에 대하여, 맹자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몸에 대해서 어느 부분이나 모두 골고루 아낀다. 몸 전체를 골고루 아끼기 때문에 몸 전체를 골고루 키운다. 1척 1촌의 살갗도 아끼지 않는 곳이 없기에 1척 1촌의 살갗 모두가 키워지지 않는 곳이 없다. 자기 몸을 잘 키웠느냐 못 키웠느냐를 따지는 데에 어찌 다른 방법이 있겠느냐? 바로 자기 몸으로 따져 보면 된다. 몸의 부분 가운데에서도 귀중한 부분과 미천한 부분이 있고, 또한 큰 부분과 작은 부분이 있다. 작은 부분 때문에 큰 부분을 해치면 안 되고 미천한 부분 때문에 귀중한 부분을 해쳐서도 안 된다. 작은 부분만을 키우는 자는 ‘소인’이 되고 큰 부분만을 키우는 자는 ‘대인’이 된다. 여기에 한 정원사가 있다. 그런데 오동나무나 가래나무는 버리고 가시 많은 멧대추나무만 키운다면 무능한 정원사라는 말을 듣게 된다. 만약에 손가락 하나만을 기르고 어깨나 등을 잊어버리고 있다면, 그는 병든 이리처럼 뒤돌아볼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대체로 음식만을 생각하는 사람을 누구나 천하게 본다. 이는 그가 작은 것만을 키우느라고 큰 것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먹고 마시는 사람일지라도 큰 것을 잊지 않는다면, 그의 입과 배가 어찌 한 구석의 살 노릇만을 하는 존재이겠느냐?”
[孟子曰 ‘人之於身也, 兼所愛. 兼所愛, 則兼所養也. 無尺寸之膚不愛焉, 則無尺寸之膚不養也. 所以考其善不善者, 豈有他哉? 於己取之而已矣. 體有貴賤, 有小大. 無以小害大, 無以賤害貴. 養其小者爲小人, 養其大者爲大人. 今有場師, 舍其梧檟, 養其樲棘, 則爲賤場師焉. 養其一指, 而失其肩背而不知也, 則爲狼疾人也. 飮食之人, 則人賤之矣, 爲其養小而失大也. 飮食之人無有失也, 則口腹豈適爲尺寸之膚哉?(맹자왈 인지어신야, 겸소애. 겸소애, 즉겸소양야. 무척촌지부불애언, 즉무척촌지부불양야. 소이고기선불선자, 기유타재? 어기취지이이의. 체유귀천, 유소대. 무이소해대, 무이천해귀. 양기소자위소인, 양기대자위대인. 금유장사, 사기오가, 양기이극, 즉위천장사언. 양기일지, 이실기견배이부지야, 즉위랑질인야. 음식지인, 즉인천지의, 위기양소이실대야. 음식지인무유실야, 즉구복기적위척촌지부재?’) 11-14]
앞의 글 중 ‘낭질인’(狼疾人)은, ‘병든 이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리는 특히 뒤를 잘 돌아보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병이 들면 뒤를 돌아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낭질인’이란, ‘고개를 뒤로 돌리지 못하는 병에 걸린 사람’을 나타낸답니다.
어쨌든 이제 ‘대인’과 ‘소인’에 대하여 어렴풋이 그 느낌이 잡히겠지요? 그러나 그 뜻을 완전히 알기에는 아직도 멀었습니다. 다른 이야기 하나를 더 소개하지요. 언제인가, 맹자의 제자인 공도자(公都子)가 맹자에게 물었습니다.
“모두 같은 사람인데 어떤 사람은 ‘대인’이 되고 어떤 사람은 ‘소인’이 됩니다. 그 까닭은 무엇 때문입니까?”
맹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기의 큰 몸인 ‘마음’을 따르면 ‘대인’이 되고, 자기의 작은 몸인 ‘몸뚱이’를 따르면 ‘소인’이 된다.”
공도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모두 같은 사람인데, 어떤 사람은 큰 몸을 따르고 어떤 사람은 작은 몸을 따른다니, 그렇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맹자는 다시 말했습니다.
“귀나 눈 같은 몸의 기관은 생각하는 일이 없기에 물건에 대한 욕심에 금방 가리어진다. 밖의 소리나 색깔 등이 귀와 눈에 들어오면, 생각하는 힘이 없는 귀와 눈은 거기 이끌리게 되고 만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기관은 귀와 눈과는 달라서 생각하는 일을 한다. 생각하면 사리를 깨닫게 된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으면 사리를 깨닫지 못하여 마음에 이는 여러 욕심에 이끌리게 마련이다. 이 두 가지를 하늘이 우리에게 주었다. 먼저 큰 몸을 앞세워야 작은 몸이 그 자리를 빼앗을 수 없다. 그렇게 될 수 있는 사람이 ‘대인’일 뿐, ‘대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른 사람은 아니다.”
[公都子問曰 ‘鈞是人也, 或爲大人, 或爲小人, 何也?’ 孟子曰 ‘從其大體爲大人, 從其小體爲小人.’ 曰 ‘鈞是人也, 或從其大體, 或從其小體, 何也?’ 曰 ‘耳目之官不思, 而蔽於物. 物交物, 則引之而已矣. 心之官則思, 思則得之, 不思則不得也. 此天之所與我者, 先立乎其大者, 則其小者不能奪也. 此爲大人而已矣.’(공도자문왈 ‘균시인야, 혹위대인, 혹위소인, 하야?’ 맹자왈 ‘종기대체위대인, 종기소체위소인.’ 왈 ‘균시인야, 혹종기대체, 혹종기소체, 하야?’ 왈 ‘이목지관불사, 이폐어물. 물교물, 즉인지이이의. 심지관즉사, 사즉득지, 불사즉불득야. 차천지소여아자, 선립호기대자, 즉기소자불능탈야. 차위대인이이의.’) 11-15]
이제는 ‘대인’과 소인‘의 뜻이 조금은 머리에 그려집니까? 이러면 여기에서 이 이야기는 접기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느 하루는, 제(齊)나라 사람인 ‘광장’(匡章)이 맹자에게 말했습니다. 어느 기록에는 ‘광장’이 맹자의 제자라고 씌어 있으나 그렇지는 않은 듯싶습니다.
“진중자(陳仲子)야말로 어찌 참으로 깨끗한 선비가 아니겠습니까? ‘오릉’(於陵 지명)이라는 곳에 살면서 사흘이나 먹지를 못하여 귀도 들리지 않았고 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우물가에 자두나무가 서 있었고 그 밑에 굼벵이가 반 이상이나 파먹은 열매가 있었습니다. 그는 기어가서 그 열매를 입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이나 삼킨 후에야 귀가 들리게 되고 눈도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맹자가 말했습니다.
“나도 제나라 선비들 가운데 진중자를 엄지손가락(巨擘 거벽)으로 꼽고 있소. 그렇긴 하지만 어찌 청렴하다고 할 수 있겠소. 중자의 절개와 지조를 모자람이 없게 채우려면 지렁이가 된 후에야 가능합니다. 지렁이는 위로는 마른 흙을 먹고 아래로는 흐린 물을 마십니다. 중자가 거처하는 곳은 ‘백이’(伯夷)가 지은 집입니까? ‘백이’는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사람’입니다. 아니면 ‘도척’(盜跖)이 지은 집입니까? ‘도척’은 ‘예로부터 욕심 많은 도적으로 일러 오는 사람’입니다. 그가 먹는 곡식은 ‘백이’가 뿌리고 가꾸었습니까? 아니면 ‘도척’이 뿌리고 가꾸었습니까? 그것을 알 수 없군요.”
그러자, 진중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거야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그는 몸소 신을 삼고 아내는 길쌈을 해서 바꾸어 먹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맹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중자는 제(齊)나라에서 대대로 벼슬살이하는 집안의 사람입니다. 형인 ‘진대’(陳戴)가 ‘합’(蓋)이라는 고을에서 받는 녹(祿)이 *만종(萬鍾)이나 됩니다. 그런데 진중자는 형의 녹이 의롭지 않은 녹이라고 해서 먹지 않으며 형의 집이 의롭지 않은 집이라고 살지 않았소. 그래서 형을 피하고 어머니를 떠나서 ‘오릉’에 살았던 게요. 그 얼마 후에 형의 집에 돌아오자, 그의 형에게 산 거위를 선사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어째서 이 꽥꽥거리는 놈을 선물로 삼을까?’라고 말했다오. 그 뒤에 그의 어머니가 그 거위를 잡아서 그에게 먹게 했지요. 그 형이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서 그에게 ‘바로 그게 꽥꽥 소리 지르던 그 거위이다.’라고 말하자, 그는 밖으로 나가서 먹은 것을 토해 버렸소. 그 일이 있고부터 그는 어머니가 주면 먹지 않고 아내가 주면 먹으며 형의 집에서는 살지 않고 오릉에서는 살았으니, 그러고서야 어찌 청렴한 절조를 지킨다고 할 수 있겠소? 중자 같은 이는 지렁이가 된 후에라야 그의 절조를 끝까지 지킬 수가 있겠지요.”
[匡章曰 ‘陳仲子, 豈不誠廉士哉? 居於陵. 三日不食, 耳無聞, 目無見也. 井上有李, 螬食實者過半矣, 匍匐往將食之, 三咽然後耳有聞, 目有見.’ 孟子曰 ‘於齊國之士, 吾必以仲子爲巨擘焉. 雖然, 仲子惡能廉? 充仲子之操 則蚓而後可者也. 夫蚓上食槁壤 下飮黃泉. 仲子所居之室, 伯夷之所築與? 抑亦盜跖之所築與? 所食之粟, 伯夷之所樹與? 抑亦盜跖之所樹與 是未可知也.’ 曰 ‘是何傷哉? 彼身織屨. 妻辟纑, 以易之也.’ 曰 ‘仲子, 齊之世家也. 兄戴, 篕祿萬鐘. 以兄之祿, 爲不義之祿而不食也, 以兄之室, 爲不義之室而不居也, 辟兄離母, 處於於陵. 他日歸, 則有饋其兄生鵝者 己頻顣曰<惡用是鶂鶂者爲哉?> 他日其母殺是鵝也 與之食之 其兄自外至. 曰 <是鶂鶂之肉也> 出而哇之. 以母則不食, 以妻則食之, 以兄之室則弗居, 以於陵則居之, 是尙爲能充其類也乎? 若仲子者, 蚓而後充其操者也.(광장왈 ‘진중자, 기불성렴사재? 거어릉. 삼일불식, 이무문, 목무견야. 정상유리, 조식실자과반의, 포복왕장식지, 삼연연후이유문, 목유견.’ 맹자왈 ‘어제국지사, 오필이중자위거벽언. 수연, 중자오능렴? 충중자지조, 즉인이후가자야. 부인상식고양, 하음황천. 중자소거지실, 백이지소축여? 억역도척지소축여? 소식지속, 백이지소수여? 억역도척지소수여 시미가지야.’ 왈 ‘시하상재? 피신직구. 처벽로, 이역지야.’ 왈 ‘중자, 제지세가야. 형대, 합록만종. 이형지록, 위불의지록이불식야, 이형지실, 위불의지실이불거야, 피형리모, 처어어릉. 타일귀, 즉유궤기형생아자, 기빈축왈 <오용시얼얼자위재?>타일기모살시아야, 여지식지. 기형자외지, 왈 <시얼얼지육아? 출이와지. 이모즉불식, 이처즉식지, 이형지실즉불거, 이어릉즉거지, 시상위능충기류야호? 약중자자, 인이후충기조자야.) 6-10]
내가 45살 되던 해는 1985년이었습니다. 서귀포에서 귤밭 농장을 가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농장을 운영한다는 일이 전혀 쉽지 않았습니다. 한쪽에 김을 매고 돌아서면, 다른 쪽에서 또 풀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벌레가 생기면 빨리 농약을 치고, 비가 내리고 나면 또 서둘러서 농약을 쳐야 했습니다. 한여름에 쨍쨍 내리쬐는 햇볕 아래에서 우비를 입고 농약을 치는, 그 어려움을 농민 아니면 누가 알겠습니까?
또, 가물면 귤밭도 마르기 시작합니다. 나무들이 시들고 잎사귀가 떨어집니다. 그 모양을 보는 가슴은 더욱 바삭바삭 탑니다. 그러니 물차를 동원해서라도 물을 뿌려 주어야 합니다.
그리 어려운 중에서도 나는 시를 썼습니다. 그래서 1985년도에는 동아일보에 응모한 시조 작품 ‘동학사에서’가 최종심에 들었습니다.
골짜기 가린 숲에 머문 새는 잠이 들고
꿈결에 뒤척이면 솔 냄새가 이는 바람
천수경 외는 소리가 홀로 밤을 새깁니다.
어둠을 밝혀 가는 믿음이 곧 하늘이라
구름은 문을 열어 저승까지 환한 달빛
관세음 고운 눈길이 미소 한 점 남깁니다.
그림자 끌던 탑이 물소리에 묻혀들면
버려서 얻은 뜻은 산 마음을 닮아 가고
숙모전 서러운 뜰도 넓은 품에 안깁니다.
-졸시 ‘동학사에서’
나는 세례를 받은 크리스천이지만 절을 아주 좋아합니다. 절뿐만 아니라, 스님들도 아주 좋아합니다. 그들도 바로 나의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가한 날이면 절을 자주 찾곤 합니다. 그렇기에 동학사도 몇 번 들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 작품의 초고를 썼고, 제주도 서귀포에서 여러 번을 퇴고하였습니다.
물론, 위의 작품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투고한 작품 그 내용이 아닙니다. 그 후에 몇 번의 퇴고를 거친 작품입니다. 작품을 퇴고하면서 다시 몇 번이나 동학사를 방문했습니다. 이제는 동학사가 환히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글: 김 재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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