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아니 '멍쯔' 이야기

9. 나는 남의 말을 모두 알아들을 수 있다(글: 녹시 김 재 황)

시조시인 2022. 4. 1. 18:39

9. 나는 남의 말을 모두 알아들을 수 있다



 맹자가 송(宋)나라에 있을 때였습니다. 맹자는 ‘구천’(句踐)이라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록에는, 이 사람을 ‘송구천’(宋句踐)이라고 했지요. 이는, ‘송나라의 구천’이라는 말인지, 아니면 ‘성(姓)이 송씨(宋氏)인 구천’이라는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유세(遊說)하기를 좋아하지요? 내가 당신에게 유세하는 도리를 일러주겠소. 남이 알아주어도 *태연(泰然, 본문에는 효효‘囂囂.‘ 이는, 자득하고 욕기가 없는 모양. 효’囂‘는 ’욕심이 없는 모양‘ ’공허한 모양‘ ’근심하는 모양‘ 등을 나타냄)해야 하고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태연해야 한다오.”
 “어떻게 해야 태연해질 수 있습니까?”
 “덕(德)을 높이고 의(義)를 즐거워하면 태연해질 수가 있소. 그러므로 선비는 곤궁에 빠져도 의를 잃지 않고 곤궁에 빠지지 않아도 도(道)에서 벗어나지 않는다오. 곤궁해져도 의를 잃지 않기 때문에 선비는 자기 자신을 지킬 수가 있고 곤궁에 빠지지 않아도 ‘도’에서 벗어나지 않으니까 백성들이 실망하지 않는 거라오. 옛사람들은, 뜻을 얻어서 나라를 다스리게 되면 백성들에게 은혜와 덕택을 더해 주었고, 뜻을 얻지 못하면 몸을 닦아서 세상에 이름을 나타내었소. 곤궁해지면 자기 몸이라도 착하게 간직했고, 곤궁해지지 않고 잘되면 천하 사람들과 함께 착함을 실천하는 거라오.”

 [孟子謂宋句踐曰 ‘子好遊乎? 吾語子遊. 人知之, 亦囂囂. 人不知, 亦囂囂.’ 曰 ‘何如斯可以囂囂矣?’ 曰 ‘尊德樂義則可以囂囂矣. 故士窮不失義 達不離道. 窮不失義故 士得己焉 達不離道故 民不失望焉. 古之人 得志 澤加於民 不得志 修身見於世 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맹자위송구천왈 ‘자호유호? 오어자유. 인지지, 역효효. 인부지, 역효효.’ 왈 ‘하여사가이효효의?’ 왈 ‘존덕락의즉가이효효의. 고사궁불실의 달불리도. 궁불실의고 사득기언 달불리도고 민불실망언. 고지인 득지 택가어민 부득지 수신현어세 궁즉독선기신 달즉겸선천하) 13-9] 

 이러한 마음은 이미 맹자의 가슴에 굳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를 알게 하는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전하여지고 있습니다. 제자 공손추(公孫丑)가 스승인 맹자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제나라의 재상 자리에 앉으시어 도(道)를 행할 수 있게 되신다면, 비록 이로 말미암아 제나라가 패자나 왕자가 되더라도 이상할 게 없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선생님의 마음이 흔들리실까요? 그렇지 않으실까요?”
 “아니다. 나는 마흔 살이 되면서부터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시다면 선생님께선 ‘맹분’이라는 사람보다도 더 용감하십니다.”
 ‘맹분’(孟賁)이라는 사람은, ‘위(衛)나라 사람이었는데, 물속을 갈 때에는 교룡(蛟龍 몸이 뱀과 같이 생긴 용)이 있어도 피하지 않았고, 들을 갈 때는 외뿔소나 범이 있어도 피하지 않았다,’라고 합니다. 아주 용감한 사람이었지요. 그뿐만 아니라, 힘이 아주 세어서 소의 뿔을 잡아 뽑았다고도 합니다. 그와 쌍벽을 이루는 ‘하육(夏育)이라는 용사’와 함께, ‘분육지용’(賁育之勇)이라고 불렸답니다. 맹자가 공손추에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보다도 먼저, ‘고자’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고자’(告子)라는 사람은 전에 맹자와 만나서 말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불해’(不害)라고 부르기도 하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공손추가 맹자에게 물었습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데에도 무슨 방법이 있습니까.”
 “있고말고. ‘북궁유’(北宮黝)가 용기를 기를 때에는 살갗을 찔러도 꿈쩍 안 했고 눈을 찔러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에게 털 하나라도 뽑히면 사람이 많이 모인 장터에서 남한테 매를 맞는 것처럼 치욕으로 여겼고, 헐렁한 옷을 입은 천인에게도 모욕당하지 아니하였다. 또한, 1만 승(萬乘, 1만 채의 ‘전쟁 수레’)을 지닌 임금에게도 모욕받지 않았다. ‘1만 승의 임금을 찔러 죽인 것’을 보고도 ‘누추한 옷 입은 사내를 죽이는 것’처럼 여겼으며, 두려워하는 제후가 한 사람도 없었다. 또 자기에게 욕하는 소리가 들리면 반드시 욕으로 대꾸하였다. 그런가 하면, ‘맹시사’(孟施舍)라는 사람은 용기를 기르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기지 못할 때라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조금도 두려움 없이 나섭니다. 적의 강함과 약함을 헤아려서 적이 약할 때 나서고 승산을 따진 뒤에야 맞아서 싸운다면, 이는 *삼군(三軍 전체의 군대. 1군은 어림잡아서 1만2천5백 명. 천자는 6군을 거느리고 큰 제후국 임금은 3군을 거느렸으며 작은 제후국 임금은 2군 또는 1군을 거느렸다고 함)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짓입니다. 저인들 어찌 번번이 이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두려워하지 않을 뿐입니다.’라고,”

 [公孫丑問曰 ‘夫子加齊之卿相, 得行道焉, 雖由此覇王不異矣. 如此則動心, 否乎?’ 孟子曰 ‘否, 我四十不動心.’ 曰 ‘若是, 則夫子過孟賁遠矣!’ 曰 ‘是不難, 告子先我不動心.’ 曰 ‘不動心, 有道乎?’ 曰 ‘有, 北宮黝之養勇也 不膚撓 不目逃 思以一毫 挫於人 若撻之於市朝 不受於褐寬博 亦不受於萬乘之君 視刺萬乘之君 若刺褐夫, 無嚴諸侯, 惡聲至, 必反之. 孟施舍之所養勇也, 曰 <視不勝 猶勝也. 量敵而後進 慮勝而後會 是畏三軍者也. 舍豈能爲必勝哉? 能無懼而已矣>.’(공손추문왈 ‘부자가제지경상, 득행도언, 수유차패왕불이의. 여차즉동심, 부호?’ 맹자왈 ‘부, 아사십부동심.’ 왈 ‘약시, 즉부자과맹분원의!’ 왈 ‘시불난, 고자선아부동심.’ 왈 ‘부동심, 유도호?’ 왈 ‘유, 북궁유지양용야 불부요 불목도 사이일호 좌어인 약달지어시조 불수어갈관박 역불수어만승지군 시자만승지군 약자갈부, 무엄제후, 악성지, 필반지. 맹시사지소양용야, 왈 <시불승 유승야. 양적이후진 여승이후회 시외삼군자야. 사기능위필승재? 능무구이이의>’) 3-2]

 또 어느 날인가, 공손추가 묻고 맹자가 대답하였습니다.
 “감히 여쭈어보겠습니다. 선생님의 마음 흔들리지 않음(夫子之不動心)과 고자의 마음 흔들리지 않음(告子之不動心)이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습니다.”
 “고자는 이렇게 말했다. ‘남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할 때에 억지로 그 뜻을 알려고 하지 말고, 마음속으로 납득 되지 않더라도 기(氣)의 도움을 구하지 마라.’ 그런데 ‘마음속으로 납득 되지 않더라도 기의 도움을 구하지 마라.’라는 말은 옳지만, ‘남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할 때 억지로 그 뜻을 알려고 하지 마라,’라는 말은 옳지 않다. 대체로 의지는 기(氣)의 통수자요, 기(氣)는 몸을 채워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지가 움직이면 기도 그 뒤를 따라간다. 그렇기에, ‘자기의 의지를 간직해서 기를 자극하지 마라.’라고 한다.”

 [告子曰 ‘不得於言 勿求於心 不得於心 勿求於氣’. 不得於心 勿求於氣 可. 不得於言 勿求於心 不可. 夫志 氣之帥也, 氣 體之充也. 夫志至焉 氣次焉. 故曰 持其志 無暴其氣(고자왈 ‘부득어언 물구어심 부득어심 물구어기’. 부득어심 물구어기 가. 부득어언 물구어심 불가. 부지 기지수야, 기 체지충야. 부지지언 기차언. 고왈 지기지 무포기기) 3-2]

 “‘의지가 움직이면 기(氣)가 그 뒤를 따라간다.’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또 ‘자기의 의지를 간직해서 기(氣)를 자극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의지가 한 곳으로 모이면 기를 움직이고, 기가 한곳으로 모이면 의지를 움직인다. 사람이 넘어지든가 달리든가 하는 것은 기(氣)가 그렇게 하는 것이지만, 그게 도리어 그 마음도 움직이게 된다.”

 [‘旣曰 <志至焉, 氣次焉.> 又曰 <持其志, 無暴其氣者.> 何也?’ 曰 ‘志壹則動氣 氣壹則動志也 今夫蹶者趨者 是氣也而反動其心’(‘기왈 <지지언, 기차언.> 우왈 <지기지, 무포기기자.> 하야?’ 왈 ‘지일즉동기, 기일즉동지야 금부궐자추자 시기야이반동기심’) 3-2]

 “감히 여쭙겠습니다. 선생님께선 어떠한 것을 잘하십니까?”
 “나는 남의 말을 모두 알아들을 수가 있고, 나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잘 기른다.”
 “무엇을 ‘호연지기’라고 합니까?”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호연지기’의 기(氣)는 지극히 크고도 강해서 바르게 길러서 해치지만 않는다면 천지 사이에 가득 찰 수도 있다. 또는 그 기(氣)는 의(義)와 도(道)를 동반한다. 그렇지 않으면 허탈해진다. 호연지기는 ‘의’가 모여서 된 것이지, 의가 밖에서 몰려와서 갖게 되는 것이 아니다. 행동하는 것이 마음에 통쾌하지 않으면 허탈해진다. 그래서 나는, ‘고자는 의를 안 적이 없다.’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의(義)를 밖에서 온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호연지기를 기르기에 힘써야 한다. 하지만 손꼽아 기다리지 말고, 그렇다고 마음에 잊어서도 안 되며, 무리하게 조장(助長)해서도 안 된다. 송(宋)나라 사람이 했던 것처럼 하지 마라. 송나라 사람이 싹이 자라지 않는다고 안타까운 마음이 든 나머지, 빨리 키우려고 싹을 뽑아 주었다. 매우 지친 몸으로 집으로 돌아온 후에, 그는 식구들에게 ‘오늘은 피곤하구나! 싹이 빨리 자라도록 내가 도와주고 오느라고!’라고 말하자, 아들이 달려가서 보았다. 싹은 모두 말라 버렸다. 천하에 싹이 자라도록 도와주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도와주는 일이 무익하다고 여기고 내버려 두는 자는 김도 매지 않는다. 무리하게 잘 되게 하려는 자는 모를 뽑아내니, 이런 짓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해치는 짓이다.”
 “남의 말을 모두 알아듣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편파적인 말에서는 한쪽이 가리어진 것을 알고, 과장된 말에서는 그 사람이 무엇에 빠져 있는지를 알며, 사악한 말에서는 도리에 벗어난 것을 알고, 핑계 대는 말을 들으면 그가 궁지에 몰려 있음을 안다. 그러한 말을 하는 마음이 다스리는 자에게 생기면 그 다스림에 해를 끼치고, 이런 마음이 다스림에 나타나면 모든 일에 해를 끼친다.” 

 [‘敢問夫子惡乎長?’ 曰 ‘我知言, 我善養吾浩然之氣.’ ‘敢問何謂浩然之氣?’ 曰 ‘難言也, 其爲氣也 至大至剛 以直養而無害, 則塞于天地之間, 其爲氣也, 配義與道, 無是餒也. 是集義所生者 非義襲而取之也 行有不慊於心, 則餒矣. 我故曰 <告子未嘗知義.> 以其外之也. 必有事焉而勿正, 心勿忘, 勿助長也. 無若宋人然, 宋人有閔其苗之不長而揠之者, 芒芒然歸, 謂其人曰 <今日病矣! 予助苗長矣!> 其子趨而往視之, 苗則稿矣. 天下之不助苗長者寡矣. 以爲無益而舍之者, 不耘苗者也. 助之長者, 揠苗者也. 非徒無益, 而又害之.’ ‘何謂知言?’ 曰 ‘詖辭 知其所蔽, 淫辭 知其所陷, 邪辭 知其所離, 遁辭 知其所窮. 生於其心 害於其政 發於其政 害於其事’(‘감문부자오호장?’ 왈 ‘아지언, 아선양오호연지기.’ ‘감문하위호연지기?’ 왈 ‘난언야, 기위기야, 지대기강, 이직양이무해, 즉색우천지지간. 기위기야, 배의여도, 무시뇌야. 시집의소생자, 비의습이취지야. 행유불경어심, 즉뇌의. 아고왈 <고자미상지의.> 이기외지야. 필유사언이물정, 심물망, 물조장야. 무약송인연. 송인유민기묘지부장이알지자, 망망연귀, 위기인왈 <금일병의! 여조묘장의!> 기자추이왕시지, 묘즉고의. 천하지부조묘장자과의. 이위무익이사지자, 불운묘자야. 조지장자, 알묘자야. 비도무익, 이우해지.’ ‘하위지언?’ 왈 ‘피사, 지기소폐, 읍사, 지기소함. 사사, 지기소리. 둔사, 지기소궁. 생어기심, 해어기정. 발어기정, 해어기사.’) 3-2]

 두 사람의 대화는 더 길게 이어지지만, 여기에서 끊기로 하겠습니다.
 기원전 325년, 맹자 나이 48살이 되었을 때 맹자는 송(宋) 나라를 떠나서 설 나라(薛)를 잠시 들렀다가 추(鄒) 나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송나라 임금인 ‘언’(偃)은, 겉으로 말로만 인정을 앞세우고, 내면으로는 폭군이었던 모양입니다. 관문을 트고 세금을 낮추라는 맹자의 제안을 송 나라 임금이 모두 거절하자, 맹자는 *비분강개(悲憤慷慨)했지요. 그러나 송(宋) 나라에서 돌아올 때는 전별금(餞別金)을 좀 받고, 설(薛) 나라에 잠시 들렀을 때는 무기 살 돈을 받았던 듯싶습니다. 실제로 맹자는 여러 제자를 거느리고 다녔는데,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맹자는 큰 곤경에 처하게 됨으로써 굶어죽을 뻔했다고도 합니다. 
 맹자의 제자인 진진(陳臻)이 물었습니다.
 “전날 제(齊) 나라에서 그 왕이 황금 100일(鎰)을 보내왔을 때는 선생님께서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송(宋) 나라에서 황금 70일(鎰)을 보내왔을 때는 선생님이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설(薛) 나라에서 황금 50일(鎰)을 보내온 것도 받으셨습니다. 지난날에 제 나라에서 받지 않으셨던 처사가 옳다면 이번에 받으신 처사가 잘못되었고, 이번에 받으신 처사가 옳다면 지난날에 받지 않으셨던 처사가 잘못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어느 한쪽만을 택하셨어야 했습니다.”

 [陳臻問曰 ‘前日於齊, 王餽兼金一百而不受. 於宋, 餽七十鎰而受. 於薛, 餽五十鎰而受. 前日之不受, 是則今日之受非也. 今日之受, 是則前日之不受非也. 夫子必居一於此矣’(진진문왈 ‘전일어제, 왕궤겸금일백이불수. 어송, 궤칠십일이수. 어설, 궤오십일이수. 전일지불수, 시즉금일지수비야. 금일지수, 시즉전일지불수비야. 부자필거일어차의’) 4-3]
 
 여기에서 잠깐, 그 당시에 황금 1일(鎰)은 24냥쭝(兩重)이었답니다. 이는, 무게 단위로 말할 때입니다. 그러나 기본 의미로는 20냥(兩)이랍니다. ‘일’(鎰)이라는 글자가 ‘10냥의 뒤에다가 또 10냥을 더하다’라는 뜻이라고 하더군요. 1일(鎰)의 무게는 320그램인데, 그 당시의 군인 장교가 1년 동안 받는 봉급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황금은 지금처럼 가치가 높지 않았지요. 황금과 구리의 가치는, 황금 1이 구리 130에 해당했답니다. 그러므로 설(薛) 나라에서 무기를 장만하라고 준 황금이 얼마나 되는지, 모두 한번 계산해 보기 바랍니다.
 맹자가 대답했습니다.
 “양쪽이 모두 옳았다. 송(宋) 나라에 있을 때는 내가 먼 길을 떠나려고 했다. 길 떠날 사람에게는 반드시 전별금을 주는 법이다. 송나라 왕이 ‘전별금으로 드립니다.’라고 말까지 했으니, 내 어찌 받지 않겠느냐? 또 설(薛) 나라에 들렀을 때는 내가 신변을 경계하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설나라 왕이 ‘신변을 경계하신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 무기를 장만하시라고 드립니다.’라는 말까지 했으니, 내 어찌 받지 않겠느냐? 그러나 제(齊) 나라에서의 경우는 돈을 쓸 곳이 없으니, 쓸데없는데 주는 것(無處而餽之 무처이궤지)은 재물로 유혹하는 것이라(貨之 화지) 어찌 군자로서 유혹에 넘어가겠느냐?”

 [孟子曰 ‘皆是也. 當在宋也, 予將有遠行, 行者必以贐. 辭曰 <餽贐> 予何爲不受? 當在薛也, 予有戒心. 辭曰 <聞戒, 故爲兵餽之> 予何爲不受? 若於齊, 則未有處也, 無處而餽之, 是貨之也, 焉有君子而可以貨取乎?(맹자왈 ‘개시야. 당재송야, 여장유원행, 행자필이신. 사왈 <궤신> 여하위불수? 당재설야, 여유계심. 사왈 <문계, 고위병궤지> 여하위불수? 약어제, 즉미유처야, 무처이궤지, 시화지야, 언유군자이가이화취호?) 4-3]
 이는, 군자(君子)라면 함부로 돈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돈을 받고 어떤 경우에는 돈을 받지 않았으니, 제자인 진진으로서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을 게 당연한 노릇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이야기는 ‘명분이 서지 않을 때는 아무리 좋은 금품이라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임을 깨우쳐 준 말이지요.
 맹자가 훌륭한 선생님이었다는 사실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찍이 우리나라에도 그의 가르침이 전해졌습니다. 나는 70세가 되는 해에 문우들과 함께 삼천포의 노산공원을 들렀습니다. 그곳에는 ‘호연재’(浩然齋)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호연재’에서 ‘호연’은, 바로 맹자가 말한 그 ‘호연지기’(浩然之氣)에서 따왔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재’(齋)는 ‘공경한다.’거나 ‘깨끗하다.’거나 ‘공부하는 곳’ 등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다를 앞에 두고 산이 하나 솟았나니
 그 푸른 숲속에서 힘차게 글 읽는 소리
 가슴이 넓은 이라면 오늘 다시 듣겠네.

 하늘을 바라보아도 부끄럽지 않은 마음
 다만 그 하나만은 잃지 않고 살았는지
 나라를 아끼는 이여, 여기 와서 말하라.
                -졸시 ‘노산 호연재에서’

 노산 ‘호연재’는, 조선 영조 46년인 1770년에 건립되었고, 이 고장의 선비들이 모여서 실학사상과 학문을 논담하던 요람이자 대표적 학당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 중엽에 안타깝게도 그들에 의해 강제 철폐되었는데, 그로부터 80여 년이 지난 2005년 여름에 비로소 복원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러니 맹자는 결코 먼 곳의 사람이 아닙니다. 이렇듯 우리 곁에서 지금도 크게 숨을 쉬고 있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스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그 앞에서 긴 묵념을 올렸습니다.(글: 김 재 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