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아니 '멍쯔' 이야기

10. 바람이 위에서 불면 풀은 반드시 쓰러진다(글: 녹시 김 재 황)

시조시인 2022. 4. 2. 07:35

10. 바람이 위에서 불면 풀은 반드시 쓰러진다



 맹자가 추(鄒) 나라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등(滕) 나라 임금인 정공(定公)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세자가 자신의 사부인 ‘연우’(然友)에게 말했습니다. 이 세자가. 바로 ‘문공’(文公)입니다. 이 세자는 맹자가 송(宋)나라에 있을 때 만난 적이 있습니다.
 “지난번에 맹자가 송 나라에서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라는 말을 나에게 해준 적이 있었는데, 그 말이 내 맘속에서 끝내 잊히지 않습니다. 이제 불행하게도 큰 변고를 당했으니, 나는 선생님께 부탁하여 맹자께 물어본 뒤에 일을 치르고 싶습니다.”
 연우는 즉시 추(鄒) 나라로 와서 맹자에게 물었습니다. 맹자가 대답했습니다.
 “참 잘하시는 일입니다. 부모의 상은 본래 자식이 스스로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증자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부모 살아 계실 때는 예로써 섬기고 돌아가신 후에는 예로써 장사와 제사를 지내면, 가히 효라고 할 수 있다.’ 제후들의 예법을 내가 아직 배우지는 못했지만, 일찍이 이런 말을 들은 적은 있습니다.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는 3년 동안 상을 치르는데, 삼베로 만든 거친 상복(齊衰 자최, 굵은 생베로 짓되, 아래 가를 좁게 접어 꿰맨 상복)을 입고 된 죽을 먹어야 했답니다. 이것은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하(夏) 나라와 은(殷, 사실은 商나라) 나라와 주(周) 나라의 3대가 모두 함께 지켰답니다.” 

 [‘不亦善乎. 親喪固所自盡也. 曾子曰 ‘生, 事之以禮. 死, 葬之以禮. 祭之以禮 可謂孝矣.’ 諸侯之禮 吾未之學也. 雖然, 吾嘗聞之 三年之喪 齊䟽之服 飦粥之食 自天子達於庶人 三代共之‘(불역선호. 친상고소자진야. 증자왈 ‘생, 사지이례. 사, 장지이례. 제지이례 가위효의.’ 제후지례 오미지학야. 수연, 오상문지 삼년지상 자소지복 전죽지식 자천자달어서인 삼대공지‘) 5-2] 

 연우(然友)가 돌아가서 그대로 아뢰자, 문공(文公)은 삼년상을 치르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종실의 어른(父兄)들과 조정의 백관(百官)들이 모두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며 말했습니다.
 “우리와 한 집안(본문에는 ‘종국’宗國으로 되어 있음. ‘종국’은 ‘종가의 나라.’ 즉, 노나라의 선조는 ‘주공’周公이고 주공의 아우인 ‘숙수’叔繡가 등나라의 군주로 봉해졌기 때문에 노나라를 종국이라 함)인 노(魯)나라의 옛 임금들도 3년상을 치르지 않았고, 우리나라의 옛 임금들도 삼년상을 치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대(문공의 대)에 와서 지금까지의 예를 어긴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또 기록에도 ‘상례와 제례는 선조를 따른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문공이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삼년상을 치르려고 하는 까닭은 가르침을 받은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문공이 연우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예전에는 학문을 하지 않고, 말 달리기와 칼 쓰기만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종실의 어른들과 조정의 백관들이 나를 부족하게 여기고, 큰일을 끝까지 잘 치러 내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있습니다. 선생께선 나 대신에 맹자에게 물어보아 주십시오.”
 연우가 다시 추(鄒) 나라로 가서 맹자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맹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데에서 방법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공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임금이 돌아가시면 세자는 나라의 정사를 총재(지금의 총리)에게 맡긴다. 죽을 마시며 초췌하게 검게 된 얼굴로 상주 자리에 나아가서 곡한다. 그러면 백관이나 유사들도 슬퍼하지 않을 수 없으니, 세자가 솔선했기 때문이다. 윗사람이 좋아하는 게 있으면, 아랫사람은 반드시 그보다 더 좋아하게 마련이다. 군자의 덕행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행은 풀이다. 풀은 바람이 그 위에 불어오면 반드시 쓰러진다.’ 결국 큰일을 치르느냐 못 치르느냐는, 세자에게 달렸습니다.”

 [‘然, 不可以他求者也. 孔子曰 <君薨 聽於冢宰. 歠粥 面深墨 卽位而哭 百官有司莫敢不哀 先之也. 上有好者 下必有甚焉者矣. 君子之德 風也. 小人之德 草也. 草尙之風必偃.> 是在世子.’(연, 불가이타구자야. 공자왈 <군훙 청어총재. 철죽 면심묵 즉위이곡 백관유사막감불애 선지야. 상유호자 하필유심언자의. 군자지덕 풍야. 소인지덕 초야. 초상지풍필언> 시재세자) 5-2] 

 연우가 돌아와서 다시 전하자, 세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소. 이는 참으로 나에게 달려 있소.”
 그리고는 5달 동안이나 여막(廬幕)에 거처하면서 명령이나 교지를 입 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천자가 죽으면 7달, 제후가 죽으면 5달, 대부가 죽으면 3달, 그리고 선비가 죽으면 1달 동안 시체를 빈소에 모셨답니다. 그리고 그 기한이 지난 뒤에야 산릉에 정식으로 매장했지요. 
 그러자, 조금 전까지 반대하던 조정의 백관이나 집안사람들까지도 ‘세자가 예법을 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장례를 치르게 되었을 때, 사방에서 사람들이 와서 보았습니다. 세자(文公)의 얼굴빛이 슬프고 곡소리가 애통한 것을 보고는, 조상하던 사람들이 그의 효성에 매우 큰 감동을 하였습니다. 

 [然友反命, 世子曰 ‘然, 是誠在我.’ 五月居廬, 未有命戒. 百官族人, 可謂曰知, 及至葬, 四方來觀之, 顔色之戚, 哭泣之哀, 弔者大悅.(연우반명, 세자왈 ‘연, 시성재아.’ 오월거려, 미유명계. 백관족인, 가위왈지, 급지장, 사방내관지, 안색지척, 곡읍지애, 조자대열.) 5-2]

 기원전 324년, 50살이 다 된 맹자는 등(滕) 나라로 갔습니다. 등 나라로 간 다음, 맹자는 여러 제자를 거느리고 별궁(上宮 상궁, 등나라왕의 별궁)에 묵었습니다. 마침 숙소 ‘지게문 위’(牖上 유상)에 ‘삼던 신’(業屨 업구)이 놓여 있었지요. 그런데 별궁 지기가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하자, 그 숙소의 어떤 사람이 맹자에게 말했습니다.
 “어찌 이런 짓을 합니까? 따라온 사람이 숨겼지요?”
 “당신은 그 사람들이 신을 훔치러 온 줄 아시오?”
 그 사람이 말을 잘못한 일을 깨닫고 다음과 같이 변명하였습니다.
 “설마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그러나 선생님께서 글을 가르치시면서, 싫다고 떠나는 사람을 못 가게 붙들지 않으셨고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을 안 가르치겠다고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오기만 하면 받아들이셨을 뿐이겠지요.”

 [孟子之滕, 館於上宮, 有業屨於牖上, 館人求之弗得. 或問之曰 ‘若是乎, 從者之廋也?’ 曰 ‘子以是爲竊屨來與?’ 曰 ‘殆非也.’ ‘夫子之設科也, 往者不追, 來者不拒, 苟以是心至, 斯受之而已矣.’(맹자지등, 관어상궁, 유업구어유상, 관인구지불득. 혹문지왈 ‘약시호, 종자지수야?’ 왈 ‘자이시위절구래여?’ 왈 ‘태비야.’ ‘부자지설과야, 왕자불추, 내자불거, 구이시심지, 사수지이이의.’) 14-30]
 
 이 말에는 묘한 여운이 있습니다. 이 사람 말끝에 ‘그러니 별별 사람이 다 오는 게 아니겠습니까?’라는 뜻이 담겨 있는 성싶습니다.
 그 후, 문공(文公)이 나라 다스리는 법을 맹자에게 물었습니다. 맹자가 대답했지요.
 “백성들의 농사를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옛날의 현명한 임금은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받아내는 데에도 일정한 제한을 두었습니다. 즉, 하(夏) 나라 때는 한 사람에게 땅 50무(畝 ‘묘’라고도 함)를 주어서 농사짓게 하고 ‘공법’(貢法)을 실시하였습니다. 은(殷)나라 때에는 한 사람에게 땅 70무(畝)를 주어서 농사짓게 하고 ‘조법’(助法)을 실시하였습니다. 주(周)나라 때에는 한 사람에게 땅 100무(畝)를 주어 농사짓게 하고 ‘철법’(徹法)을 실시하였습니다. 이런 3가지 세금이 모두 사실상으로 모든 수확 가운데 10분의 1을 내게 하였지요. ‘철’(徹)이란 ‘통하여 평균한다.’라는 뜻이고 ‘조’(助)란 ‘힘을 빌린다.’라는 뜻입니다.” 
 위에서 말한, ‘공법’(貢法)은 ‘여러 해 동안 그곳의 산출량을 내어서 그 10분지 1에 해당하는 수확량을 해마다 거두어들인 세법’입니다. 말하자면, 한 장정에게 준 50무(畝)의 밭에서 몇 년 동안 생산되는 곡식의 양을 평균하여 그 10분지 1을 세금으로 받아들이는 제도입니다. 즉, 5무(畝)의 산출량을 세금으로 바쳤지요. ‘조법’(助法)이란 ‘정전제’(井田制)로서 여덟 집이 함께 공전(公田)을 경작하여 그 수입을 여덟 집의 조세로 받아들이고 사전에는 따로 조세를 부과하지 않는 제도이지요. 다시 말해서 6백30무(畝)의 밭을 아홉 칸으로 나누어서 각각 70무(畝)의 ‘사전’(私田, 각 농부가 농사짓는 논밭)을 소유하고, 가운데 있는 ‘공전’(公田)은 여덟 명이 힘을 합하여 농작물을 가꾸었습니다. 즉, 그 수확물을 공동의 세금으로 바쳤습니다. 그리고 ‘철법’(徹法)은 주(周)나라 때의 조세제도입니다. 농사를 한꺼번에 지어서 수확할 때 두둑을 계산하여 10분의 1을 조세로 받아가는 제도입니다. 공법이나 조법이나 철법 등은 명칭은 다르지만, 그 조세는 모두 수확의 10분의 1이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철법’(徹法)은 ‘한꺼번에 하여 평균한다.’라는 뜻으로 한꺼번에 농사를 지어서 그 수확물을 평균하여 10분의 1을 징수해 간다는 말이고, ‘조법’(助法)은 ‘여러 사람의 손을 빌린다.’라는 뜻으로 여덟 집의 힘을 빌려서 공전을 경작한다는 말입니다. 맹자는 농지를 다스리는 법으로는 ‘조법’(助法)이 가장 좋고 ‘공법’(公法)이 가장 나쁘다고 말했습니다. 
 맹자는 말을 이었습니다.
 “그다음에는 ‘상’(庠) ‘서’(序) ‘학’(學) ‘교’(校) 등의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백성들을 가르치십시오. ‘상’(庠)이란 ‘기른다.’라는 뜻으로 연로자를 봉양하는 것이고, ‘교’(校)란 ‘가르친다.’라는 뜻으로 백성들을 바로 가르치는 것이며, ‘서’(序)란 ‘활 쏜다.’라는 뜻으로 사례(射禮)를 배워서 재능을 기르는 것입니다. 하(夏) 나라 때에는 ‘교’(校)라고 하였으며, 은(殷) 나라 때에는 ‘서’(序)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周) 나라 때에는 ‘상’(庠)이라고 하여, 호칭은 각기 다르나 모두 지방에 있는 ‘향학’(鄕學)입니다. 국도(國都)에 있는 것은 ‘학’(學)이라고 하여 하(夏) 나라와 은(殷) 나라와 주(周) 나라에 걸쳐서 같은 칭호를 썼습니다. 이러한 ‘향학’이나 ‘국학’은 모두 ‘군신’ ‘부자’ ‘부부’ ‘형제’ ‘붕우’의 관계인 인륜을 밝게 가르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인륜이 위에서 밝아지면 아래 백성들도 친하게 됩니다.”

 [設爲庠序學校 以敎之 庠者 養也, 校者 敎也, 序者 射也. 夏曰校 殷曰序 周曰庠. 學則三代共之 皆所以明人倫也. 人倫 明於上 小民 親於下(설위상서학교 이교지 상자 양야, 교자 교야, 서자 사야. 하왈교 은왈서 주왈상. 학즉삼대공지 개소이명인륜야. 인륜 명어상 소민 친어하) 5-3]
 
 맹자의 말을 듣고 그 얼마 후에, 등(滕) 나라 문공(文公)은 ‘필전’(畢戰)이라는 신하를 맹자에게 보내어서 정전법(井田法)에 관하여 묻도록 했습니다. 맹자가 대답했습니다.
 “그대의 임금이 장차 어진 다스림을 펴려고 그대를 선택하여 보냈으니, 그대는 아무쪼록 힘써서 정전법을 배우십시오. 어진 다스림이란 반드시 농경지의 경계를 바르게 잡아 놓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경계가 정확하지 못하면 정전의 분할이 고르지 못하고, 그렇게 되면 수확되는 곡식과 지급되는 녹봉도 공평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폭군이나 탐관오리들은 반드시 농경지의 경계를 얼버무렸습니다. 일단 경계가 정확해지면, 농경지를 나눠 주고 봉록을 제정하는 일쯤은 가만히 앉은 채로도 정할 수 있습니다. 지금 등(滕) 나라의 땅은 좁지만, 그 안에도 역시 군자가 있고 농부가 있어야 합니다. 군자가 없으면 농부들을 다스릴 수가 없고, 농부가 없으면 군자를 먹여 살리지 못합니다. 바라건대 교외에서는 9분의 1을 세금으로 내는 ‘조법’(助法)을 쓰시고, 근교에서는 10분의 1을 내는 ‘철법’(徹法)을 쓰셔서 스스로 세금을 내도록 하십시오. ‘경’(卿, 경대부) 이하의 관리에게는 반드시 ‘규전’(圭田, 제사를 올릴 곡식을 키우는 농토)을 소유하게 하되, 규전의 넓이는 50무(畝)로 하십시오. ‘여부’(餘夫, 자제 가운데 16세가 되고 아직 아내를 얻지 않은 사람)에게는 25무(畝)의 땅을 주십시오. 이렇게 되면 백성들이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거나 집을 이사하더라도, 자기가 살던 고향을 떠나지 않게 됩니다. 같은 향리(鄕里, 한 향에는 1만2천5백 호가 산다.)에서 ‘정전’(井田)을 함께 지으면 들고 나는 데에 서로 벗이 되고 지키는 데도 힘을 합하게 되며 병이 나도 서로 부축해 주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백성들이 친근하고 화목해집니다. 사방이 각 1리가 되는 땅을 1정(井)으로 치니, 1정(井)은 900무(畝, 27000평)입니다. 그 한복판이 ‘공전’(公田)입니다. 8가구가 저마다 ‘사전’(私田) 100무(畝, 3000평)를 소유하며, 이들이 공동으로 ‘공전’(公田, 100무)을 가꿉니다. ‘공전’의 일부터 마치고 나서야 ‘사전’을 경작하는데 위와 아래를 구별하기 위함입니다. 이상이 ‘정전제’(井田制)의 대략입니다. 이러한 제도로 백성을 잘살게 하는 것은 임금과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使畢戰問井地, 孟子曰 ‘子之君, 將行仁政, 選擇而使子, 子必勉之. 夫仁政必自經界始. 經界不正, 井地不均, 穀祿不平. 是故暴君汙吏, 必慢其經界. 經界旣正, 分田制祿, 可坐而定也. 夫滕, 壤地褊小, 將爲君子焉, 將爲野人焉. 無君子莫治野人, 無野人莫養君子. 請野九一而助, 國中什一使自賦. 卿以下必有圭田, 圭田五十畝. 餘夫二十五畝. 死徙無出鄕, 鄕田同井, 出入相友, 守望相助, 疾病相扶持, 則百姓親睦. 方里而井, 井九百畝, 其中爲公田, 八家皆私百畝, 同養公田, 公事畢然後, 敢治私事, 所以別野人也. 此其大略也, 若夫潤澤之, 則在君與子矣.’(사필전문정지, 맹자왈 ‘자지군, 장행인정, 선택이사자, 자필면지. 부인정필자경계시. 경계부정, 정지불균, 곡록불평. 시고폭군오리, 필만기경계. 경계기정, 분전제록, 가좌이정야. 부등, 양지편소, 장위군자언, 장위야인언. 무군자막치야인, 무야인막양군자. 청야구일이조, 국중십일사자부. 경이하필유규전, 규전오십무. 여부이십오무. 사사무출향, 향전동정, 출입상우, 수망상조, 질병상부지, 즉백성친목. 방리이정, 정구백무, 기중위공전, 팔가개사백무, 동양공전, 공사필연후, 감치사사, 소이별야인야. 차기대략야, 약부윤택지, 즉재군여자의.’) 5-3]

 사방 1리(里)의 네모반듯한 땅을 가로와 세로로 정확하게 3등분하여 ‘우물 정’ 자로 나눈 땅이라고 할 때, 요즘의 미터법으로 그 넓이가 얼마쯤이나 될까요? 1리(里)는 약 300미터입니다. 그러므로 사방 300미터의 땅에다가 각기 한 변의 길이를 100미터로 3등분하면 한 가구당 3,000평, 즉 10,000평방미터의 땅으로 나누어집니다. 1가구가 분배받은 땅이 각 3,000평(100무)이니까, 8가구를 합하면 24,000평이 되고, 가운데의 공전은 ‘공동 우물과 작업장 및 망루 등 공공의 용도로 사용되는 부분’이 600평쯤이 되므로 3,000평에서 600평을 뺀 2,400평이 됩니다. 그래서 사전 24,000평에 대한 공전 2,400평이니, 세금은 10분지 1이 되겠지요. 그러면, 이제 ‘무’(畝)의 넓이를 알 수 있지요? 한 사람당 100무(畝)를 가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각 사전(私田)의 넓이가 3,000평입니다. 그렇습니다. 1무(畝)의 넓이는 30평이 됩니다. 미터법으로는 약 100제곱미터입니다. 원래는 ‘무’(畝)가 ‘밭의 이랑’을 가리키는 말이었답니다.
 
 50살이 되었을 때, 나는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지요. 나는, 49살이 되던 1989년에 첫 시집 ‘거울 속의 천사’를 펴내고, 50살이 되던 1990년에는 둘째 시집 ‘바보여뀌’를 펴내었습니다. 그리고 51살이 되던 1991년에야 첫 시조집 ‘내 숨결 네 가슴 스밀 때’를 내놓게 되었습니다.

 바르게 자란 생애, 토막 잘린 생활사여
 입술을 포개고도 상처마다 손을 짚어
 내 숨결 네 가슴 스밀 때 너는 크게 울었다.

 인고로 조인 마디, 구멍 뚫린 곧은뼈여
 달밤을 헤매고도 그대 모습 볼 수 없어
 긴 세월 먼 통증 눕혀서 곡을 슬피 풀어냈다.
                        -졸시 ‘피리’ 전문

 1991년, 첫 시조집과 함께, 나는 산문집 ‘시와 만나는 77종 나무 이야기’를 도서출판 ‘외길사’에서 펴내었습니다. 나는 그 동안 잡지사에서 원고청탁이 있을 때마다 ‘나무 이야기’를 발표하곤 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시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렇게 모인 ‘나무 이야기’가 77편이 되었습니다. 
 이 책이 출간되고 나서 나는, 방송국 출연도 했고, 신문에 크게 실리게 됨으로써 ‘나무 시인’으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불교방송 ‘음악의 마을’에 초대되어 이상벽 씨와 대담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92년 12월 14일, 이 책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실시하는 ‘1992년 청소년을 위한 우리들의 책’으로 선정되었습니다.(글: 김 재 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