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아니 '멍쯔' 이야기

12. 모든 사람에게 그 마음이 미치게 한다(글: 녹시 김 재 황)

시조시인 2022. 4. 2. 19:43

12. 모든 사람에게 그 마음이 미치게 한다



 위(魏) 나라 혜왕(惠王)이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는 생각을 하고 있자, 맹자는 안타까운 마음을 지니게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맹자는 제자인 공손추(公孫丑)에게 말했습니다.
 “양 나라(梁, 또는 위魏 나라) 혜왕은 어질지 못한 임금이다. 어진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마음으로써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그 마음이 미치게 한다. 그러나 어질지 않은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대하는 마음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에게까지 그 마음이 미치게 한다.”

 [不仁哉 梁惠王也. 仁者, 以其所愛 及其所不愛. 不仁者, 以其所不愛 及其所愛.(불인재 양혜왕야. 인자, 이기소애 급기소불애. 불인자, 이기소불애 급기소애.) 14-1]

 공손추가 물었습니다.
 “그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맹자는 다시 말했습니다.
 “양 나라 혜왕은 땅 때문에 자기 백성들이 썩어 문드러지도록 전쟁하다가 크게 패했고, 다시 싸우려고 하였으나 이기지 못할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제들까지 싸움터로 내몰았다가 죽게 했다. 이런 일을 일러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대하는 마음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에게까지 그 마음이 미치게 한다.’라고 말한다.”

 [梁惠王 以土地之故 麋爛其民而戰之 大敗. 將復之 恐不能勝故 驅其所愛子弟以殉之 是之謂以其所不愛 及其所愛也.(양혜왕 이토지지고 미란기민이전지 대패. 장부지 공불능승고 구기소애자제이순지 시지위이기소불애 급기소애야.) 14-1]

 그 당시, 제(齊) 나라에서는 위왕(威王)이 죽고 선왕(宣王)이 임금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제나라 위왕(威王)의 작은아들이며 선왕(宣王)의 동생인 ‘전영’(田嬰)은, 제(齊) 나라 선왕(宣王)과 위(魏) 나라 혜왕(惠王)이 ‘견’(甄)이라는 곳에서 회맹(會盟, 산짐승을 잡아서 하늘에 제사지내고, 그 피를 서로 나누어 빨며 단결을 맹세하는 일)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전영’(田嬰)의 막내아들이 바로 그 유명한 ‘맹산군’(孟嘗君)이랍니다.
 맹산군의 이름은 ‘문’(文)이고 성씨는 ‘전’(田)입니다. 문의 아버지 ‘전영’(田嬰)은 제(齊) 나라 위왕(威王)의 첩(妾)에게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제(齊)나라 선왕(宣王)의 배다른 동생(庶弟)이기도 합니다. 일직이 ‘전영’은 공을 많이 세웠습니다. 그래서 선왕의 뒤를 이은 민왕(湣王) 때에는 ‘설’(薛)이란 땅을 하사받고 ‘설’의 제후(諸侯)가 되었습니다.
 ‘문’(田文)은 ‘전영’(田嬰)의 많은 자식 중 천한 첩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그는 5월 5일에 태어났는데, 전영은 ‘5월에 태어난 자식은 그 키가 지게문 높이로 자라면 부모를 해한다.’라고 말하며 내다 버리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자식을 버리지 않고 몰래 길렀습니다. ‘문’(文)이 자란 뒤에, 그 어머니가 형제들을 통해서 아들 ‘문’(文)을 아버지 ‘전영’(田嬰)에게 뵈었습니다. 전영은 그 첩(문의 어머니)에게 화내며 물었습니다.
 “내가 너더러 저 애를 버리도록 하였는데 감히 기른 까닭은 무엇이냐?”
 ‘문’(文)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습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 운명을 하늘에서 받는 것입니까? 아니면 지게문에서 받는 것입니까?”
 아버지 전영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문’이 다시 말했습니다.
 “반드시 그 명(命)을 하늘에서 받는다면 무엇 때문에 걱정하십니까. 그리고 반드시 그 명을 지게문에서 받는다면 그 지게문을 높이면 될 뿐입니다. 누가 그만큼이나 자라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전영이 말했습니다.
 “얘야, 그만해라. 더 말하지 않아도 네 뜻을 알겠다.”
 그 후, 한가한 때를 골라서 ‘문’(文)이 아버지 ‘전영’(田嬰)에게 말했습니다.
 “군(君)께서 정권을 잡으시고 재상이 되시어서 지금까지 세 임금을 섬겼습니다. 그 동안 제(齊) 나라는 그 영토를 넓히지 못했지만, 군의 ‘사사로운 집’(私家)에는 호화로움을 더하여 후실의 첩까지도 비단옷을 입고 다닙니다. 그렇건만 주위에 현명한 선비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이렇게 가다간 국가의 재물이 바닥날 판인데, 이런 죄를 짓고 군께선 몸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마침내 ‘전영’(田嬰)은 ‘문’(文)을 신임하여 집안일을 맡기고 점잖은 손님들을 접대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영’이 세상을 떠나자, ‘문’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설’(薛) 땅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문’(文)을 ‘맹상군’(孟嘗君)이라고 불렀습니다. 
 맹상군은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같이 어울리며 지내기를 좋아하였습니다. 그가 빈객(賓客)들을 신분 차별 없이 잘 대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그의 집에는 빈객들이 날로 늘어나서 어느새 수천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맹상군이 빈객들과 밥을 먹으려고 할 때에 어떤 사람이 불빛을 가리는 바람에 갑자기 방 안이 어두워졌습니다. 이 때, 한 빈객이 크게 말했습니다.
 “손님의 밥보다 주인의 밥이 더 좋다.”
 그리고 그는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맹상군이 자기 밥그릇을 들고 빈객에게로 가서 똑같은 음식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손님은 너무나 부끄러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선비들이 맹상군에게로 더욱 많이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맹상군은 손님들을 가리지 않고 모두 잘 대우했습니다. 그래서 손님들마다 스스로 ‘맹상군은 나와 친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진(秦) 나라 소왕(昭王)이 ‘맹상군이 현명하다.’라는 소문을 듣고, 먼저 ‘경양군’(涇陽君)을 제(齊) 나라에 인질로 보낸 뒤에 맹상군을 보자고 요구했습니다.(史記에 ‘秦昭王聞其賢 乃先使涇陽君爲質於齊 以求見孟嘗君’) 그 때문에 맹상군이 장차 서쪽의 진(秦) 나라로 가려고 하자, 빈객들이 1백 번씩이나 가지 말라고 하였으나 맹상군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 ‘손님을 주인에게 알리고 데려오는 사람’(謁者 알자)이 들어와서 아뢰었습니다. 
“어떤 손님이 귀신의 일로 말씀드릴 게 있다고 합니다.”
 이에 맹상군은 ‘들라 하라’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들어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오는 길에 *치수(淄水, 제 나라 서울인 임치로 흐르는 강 이름) 가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흙으로 된 인형’(土耦人)이 바야흐로 ‘나무로 된 인형’(木梗人)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나무 인형’이 ‘흙 인형’에게 ‘너는 원래 흙이었다. 그 흙을 가져다가 인형을 만들었다. 그러니 큰 비가 오고 물이 넘쳐서 밀려들게 되면 너는 어쩔 수 없이 허물어지고 말게 된다.’(子先, 土也, 持子以爲耦人, 遇天大雨, 水潦並至, 子必沮壞 자선, 토야, 지자이위우인, 우천대우, 수료병지, 자필저괴-설원 276)라고 하자, 그 ‘흙 인형’이 대꾸하기를 ‘그래. 나는 흙으로 되었으니 허물어지고 나서 나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면 그뿐이다. 그러나 너는 원래 동쪽 뜰의 복숭아나무였다. 그 나무를 조각하여 네 모습을 만들었다. 그런데 큰 비가 내리고 물이 넘쳐서 밀려들면 너는 그 어딘지도 모르고 둥둥 떠서 정처 없이 다니게 되고 만다.’(我沮乃反吾眞耳, 今子, 東園之桃也, 刻子以爲梗, 遇天大雨, 水潦並至, 必浮子, 泛泛乎不知所止 아저내반오진이, 금자, 동원지도야, 각자이위경, 우천대우, 수료병지, 필부자, 범범호부지소지) 라고 하더군요. 지금 진(秦) 나라는 사방이 막힌 나라인데다 범이나 이리 같은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군께서 그런 나라로 가려고 하시니, 만약에 돌아오지 못하신다면 군께서는 ‘나무 인형’과 같은 신세가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에 맹상군은 머뭇거리다가 물러서서는 더 이상 대답하지 못했답니다. 그리고는 감히 서쪽 진(秦) 나라로 향하지 못했지요. 그런데 이 ‘귀신의 일’을 말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사마천의 ‘사기’에는 ‘소대’(蘇代)라는 사람이라고 씌어 있고, 유향이 편집한 ‘전국책’에는 ‘소진’(蘇秦)이라는 사람으로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제(齊) 나라 민왕(湣王) 25년, 다시 진(秦) 나라로부터 맹상군을 보내 달라는 요구가 있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제나라 민왕은 맹상군을 진나라 소왕(昭王)에게로 보내었습니다. 소왕은 맹상군을 만나보고는 즉시 그를 진 나라 재상으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말했지요.
 “맹상군은 현명하지만, 그는 제(齊) 나라의 일족(一族)입니다. 그가 진(秦) 나라 재상이 되더라도 반드시 제(齊) 나라를 먼저 위하고 진(秦) 나라를 뒷전으로 돌릴 터이니, 진(秦) 나라로서는 위태로운 일입니다.”
 이 말을 듣고, 소왕은 맹상군을 마음대로 나다니지 못하게 한 후에 죽이려고 했습니다. 맹상군은 ‘소왕이 총애하는 여인’에게 청을 넣어서 풀려나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 여인이 말했습니다.
 “나는 맹상군이 가진 ‘흰여우 갖옷’(狐白裘 호백구)을 얻고 싶다.”
 이 옷은 값이 천금이나 되고 천하에 귀하디귀한 물건이었지요. 그런데 그 옷은 맹상군이 진(秦) 나라에 와서 이미 소왕에게 바친 뒤였습니다. 다른 흰여우 갖옷은 없었습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따라온 사람 중 가장 끝자리에 ‘개의 흉내를 내며 도둑질 잘하는 자’가 앉아 있다가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제가 그 ‘흰여우 갖옷’을 가져오겠습니다.”
 그날 밤, 그는 진 나라 창고로 몰래 들어가서 소왕에게 바친 그 ‘흰여우 갖옷’을 훔쳐서 갖고 돌아왔습니다. 맹상군은 그 옷을 ‘소왕이 총애하는 여인’에게 바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여인이 소왕의 마음을 움직이게 함으로써 비로소 맹상군은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몸이 자유롭게 되자, 그는 자기를 따라온 사람들과 함께 즉시 말을 달려서 도망을 쳤습니다.
 한편, 소왕은 뒤늦게 맹상군에게 속은 것을 알고 병사들을 보내어서 그를 잡아 오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맹상군는 ‘함곡관’(函谷關)이라는 곳까지 도망쳤지만, 함곡관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그곳의 법에는 닭이 울어야 나그네들을 내보내게 되어 있었답니다. 이미 뒤에서는 추격하여 오는 말발굽 소리가 요란히 들리는 듯싶었습니다. 마음이 급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일행 중 ‘평소에 닭 울음소리를 잘 흉내 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교묘하게 닭 울음소리를 내니, 근처에 있던 닭들이 따라서 요란하게 울기 시작했습니다. 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닭 울음소리를 듣고 ‘함곡관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맹상군과 그 일행은 무사히 함곡관을 빠져나오게 되었습니다. 한 식경이나 지난 후에 추격하는 병사들이 함곡관에 다다랐지만, 이미 그들이 빠져나간 뒤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 맹상군이 ‘개의 흉내를 잘 내는 좀도둑과 닭 울음소리를 잘 내는 사람’을 빈객으로 맞이하였을 때, 다른 빈객들은 쑥덕거리며 그들과 같은 자리에 앉기도 꺼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진 나라에서 맹상군이 위태로움에 빠지게 되자, 그 두 사람이 나서서 그를 구하였습니다. 비로소 다른 빈객들은 맹상군을 다시 보며 깊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두 사람으로 하여 ‘계명구도’(鷄鳴狗盜)라는 ‘고사성어’가 생겼습니다. ‘계명구도’란, ‘비굴한 꾀를 써서 남을 속이는 천박한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제(齊) 나라로 돌아온 맹상군은 재상이 되었습니다. 

 맹상군처럼, 좋은 벗들이 많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는 여러 문우와 함께 ‘상황문학’이라는 ‘문학 동인회’를 만들었습니다. 2000년도 초의 일인데, 2003년에 첫 동인지 ‘상황문학’ 창간호를 펴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2011년까지) 모두 8권의 동인지를 펴내었습니다.
 일명 ‘상황문학문인회’가 문인들의 ‘좋은 모임’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연간지 ‘상황문학’뿐만 아니라, ‘상황문학 문학기행’을 해마다 다녔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첫 문학기행은 2004년에 이루어졌습니다. 행선지는 ‘화진포’였습니다.

 바다에 섬이 없으면 멋도 엇지 않겠냐며
 손대면 도망칠 듯 살짝 떠 있는 금구도
 꽃다운 전설 하나는 감춰 두고 있겠구나.

 진정 뜨거운 삶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등 휘게 달려와서 쓰러지는 파도 소리
 해변을 홀로 거닐며 지난날을 돌아본다.

 옆구리가 시린 분은 이 바다로 오시구려.
 가슴을 서로 맞대고 길게 눈감은 수평선
 그렇게 그 마음 비우면 먼 사랑도 온다오.
                     -졸시 ‘화진포에서’

 상황문학 문학기행은 2011년 12월 현재까지 모두 13차례나 실시되었습니다. 돌아보건대, 2004년의 ‘화진포’ 문학기행을 시작으로 2차는 ‘속초의 영랑호 지역’, 3차는 ‘내구 팔공산 지역’, 4차는 ‘만해 마을’, 5차는 ‘곤지암 하얀집’에서 멋지게 행해졌습니다. 게다가 놀랍게도 2차부터 5차까지는 모두 2005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6차는 ‘이천 소리울’, 7차는 ‘군산 열도의 선유도 지역’에서 실시되었습니다. 이 2번의 문학기행은 2006년에 있었습니다. 이어서 2007년에는 8차 문학기행이 ‘삼천포’에서 있었고, 2008년에는 9차 문학기행이 ‘부산 및 창원의 불모산 일대’에서 있었으며, 2009년에 10차 문학기행이 ‘고창과 부안 지역’에서 있었습니다. 또, 2010년에는 ‘서해의 문갑도’에서 제11차 문학기행이 실시되었고 2011년 5월에는 ‘남해 창선도’에서 제12차 문학기행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남해 창선도’는 연육교로 이어져 있어서 ‘섬 아닌 섬’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우리나라 천연기념물인 ‘창선면 왕후박나무’를 만나는 기쁨도 얻었습니다. 그리고 9월에는 포천의 주말농장으로 제13차 상황문학 문학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좋은 벗들과 함께 떠나는 문학기행은, 먼 길도 가깝게 만들곤 합니다. 게다가 마음도 가벼워지고 몸도 건강해지며 작품까지 얻을 수 있으니, 이는 그야말로 ‘불역열호’(不亦說乎,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요 ‘불역락호’(不亦樂乎, 어찌 즐겁지 아니하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글: 김 재 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