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아니 '멍쯔' 이야기

8. 하루 햇볕 쬐고 열흘 얼린다(글: 녹시 김 재 황)

시조시인 2022. 4. 1. 12:29

8. 하루 햇볕 쬐고 열흘 얼린다



 기원전 327년, 맹자는 46살이 되었습니다. 제(齊)나라의 임금은 ‘위왕’(威王)이었는데, 제나라에 기근(饑饉)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제자 ‘진진’(陳臻)이 맹자에게 말했습니다.
 “제나라 사람들이 다들 ‘선생님께서 다시 임금님에게 권하여 당읍(棠邑)의 창고에 있는 곡식을 풀어서 구제해 주도록 하시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 또 해서는 안 되겠지요?” 
 맹자가 말했습니다.
 “그들은 나보고 ‘풍부’(馮婦)라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진(晋)나라에 ‘풍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맨손으로 범을 잘 때려잡았다. 나중에 그는 좋은 선비가 되었다. 어느 날, 그가 들에 나갔다. 그때, 여러 사람이 범을 쫓다가 범이 벼랑을 등지고 버티자 아무도 감히 가까이 가지 못했다. 그러다가 마침 ‘풍부’를 보고는, 달려가서 그를 맞아 왔다. ‘풍부’는 팔을 걷어붙이고 수레에서 내렸다. 사람들이 모두 기뻐했다. 그러나 선비들은 그를 비웃었다.”

 [晋人有馮婦者 善搏虎 卒爲善士 則之野 有衆逐虎 虎負嵎 莫之敢攖 望見馮婦 趨而迎之 馮婦攘臂下車 衆皆悅之 其爲士者笑之(진인유풍부자 선박호 졸위선사 즉지야 유중축호 호부우 막지감영 망견풍부 추이영지 풍부양비하거 중개열지 기위사자소지) 14-23]

 어느 날, 맹자가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제(齊)나라 임금이 지혜롭지 못하다고 이상하게 여기지 마라. 비록 세상에서 가장 잘 자라는 식물이라고 하더라도 겨우 하루 동안 햇볕을 쬐어 주고 열흘씩이나 추운 곳에 둔다면 잘 자라지 못할 것은 뻔하다. 내가 왕을 만나보는 기회는 드물고 물러나면 그를 얼게 하는 자가 뒤따르니, 내가 싹을 틔워 준들 어찌하겠는가? 가령 바둑의 수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긴 하나 온 마음과 온 힘을 기울이지 않으면 배울 수가 없다. ‘혁추’(奕秋)라는 사람은 온 나라 안에서 바둑을 가장 잘 두는 사람이다. ‘혁추’를 시켜서 두 사람에게 바둑 두는 법을 가르치라고 했는데, 한 사람은 마음을 오로지 바둑 배우는 데만 쏟아서 ‘혁추’가 가르치는 말만을 들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듣기는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선 ‘기러기가 날아오면 활을 당겨서 주살을 메어 쏘아야지’라는 생각이나 하고 있다면 비록 함께 배울지라도 같지 않을 터이다. 그의 지혜가 같지 않기 때문이겠는가? 그렇지는 않다.”

 [孟子曰 ‘無或乎王之不知也! 雖有天下易生之物也, 一日暴之十日寒之, 未有能生者也. 吾見亦罕矣 吾退而寒之者至矣. 吾如有萌焉何哉! 今夫奕之爲數, 小數也, 不專心致志則不得也. 奕秋, 通國之善奕者也 使奕秋誨二人奕. 其一人專心致志, 惟奕秋之爲聽. 一人雖聽之, 一心以爲有鴻鵠將至, 思援弓繳而射之, 雖與之俱學, 弗若之矣. 爲是其智弗若與? 曰非然也’(맹자왈 ’무혹호왕지부지야! 수유천하이생지물야 일일폭지십일한지 미유능생자야. 오현역한의 오퇴이한지자지의 오여유맹언하재! 금부혁지위수, 소수야, 부전심치지즉부득야. 혁추, 통국지선혁자야 사혁추회이인혁 기일인전심치지 유혁추지위청 일인수청지 일심이위유홍곡장지 사원궁작이석지 수여지구학 불약지의 위시기지불약여? 왈비연야‘) 11-9]

 앞의 ‘일일폭지십일한지’(一日暴之十日寒之)에서 ‘폭’은 ‘따뜻한 햇볕을 쬐어 주는 것’을 말하고 ‘한’은 ‘춥게 만드는 것’을 이릅니다. 다시 말해서 ‘폭’의 본뜻은 ‘쌀을 햇볕에 쬐기 위해 두 손으로 내민다.’이고, ‘한’의 본뜻은 ‘사방이 터진 집 안에 얼음이 얼고 찬바람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심이위유홍곡장지’(一心以爲有鴻鵠將至)에서 ‘홍’은 큰 강의 위를 나는 큰 물새로서 ‘큰기러기’나 ‘크다’ 등의 뜻을 지니고 ‘곡’은 ‘고니나 따오기’ 또는 ‘희다’ ‘넓다’ 등의 뜻을 지닙니다. 그렇기에 여기의 ‘홍곡’은, ‘기러기나 고니’를 꼭 짚어서 말하는 게 아니라, 그저 ‘그러한 새’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는, 소인이 임금 곁에 있으면서 제나라 왕을 그릇된 길로 이끌고 제나라 왕 역시 온 마음과 온 힘을 기울여서 배우려고 하지 않음을 풍자한 글입니다. ‘하루 햇볕 쬐고 열흘 얼린다.’라는 맹자의 말이 참으로 멋집니다. 맹자는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물고기도 내가 먹고 싶고 곰의 발바닥도 내가 먹고 싶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먹을 수 없다면, 물고기를 포기하고 곰의 발바닥을 먹겠다. 그와 마찬가지로, 삶도 내가 바라고 의(義)도 내가 바란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얻을 수 없다면, 나는 삶을 버리고 의를 잡겠다. 삶도 물론 내가 바라는 것이지만 삶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기에 그 삶을 구차하게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죽음 역시 내가 싫어하는 것이지만, 죽음보다 더 심하게 싫어하는 것이 있기에 근심과 재난이 와도 피하지 않는 수도 있다. 만약에 사람들이 바라는 것 가운데 삶보다 더한 것이 없게 만든다면, 그 소중한 삶을 얻기 위해 무슨 짓인들 못 하겠느냐? 또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 가운데 죽음보다 더한 것이 없게 만든다면, 그 근심과 재난을 피하기 위해 무슨 짓인들 못 하겠느냐? 그렇기에 삶을 위한 것이라도 하지 않는 일이 있고, 피할 수 있는 근심과 재난이라도 피하지 않는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원하는 것이 삶보다 간절한 것이 있고, 싫어하는 것이 죽음보다 더한 것이 있다. 오직 현명한 사람만이 이런 마음을 지닌 게 아니라, 사람이라면 모두 지니고 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만이 그런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을 뿐이다. 밥 한 그릇(대나무그릇)과 국 한 그릇(나무그릇)을 얻으면 살고 얻지 못하면 죽는 경우에라도, ‘옜다!’하고 차듯이 주면 길 가던 사람도 받아먹지 않는다. 게다가 발로 차서 준다면, 거지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종의 녹봉을 준다면 예의를 가리지 않고 받으려고 한다. 만종의 녹이 나에게 얼마나 보탬이 되겠느냐? 집을 멋지게 꾸미기 위해서인가? 아내와 첩을 거느리기 위해서인가? 그것도 아니면 내가 아는 가난뱅이들이 내게 와서 얻어가게 하기 위해서인가? 먼저는 자신을 위해 죽어도 받지 않다가 이제는 집을 멋지게 꾸미기 위해 그것을 받고, 먼저는 자신을 위해 죽어도 받지 않다가 이제는 처첩을 거느리기 위해 받았으며, 먼저는 자신을 위해 죽어도 받지 않다가 이제는 자기가 아는 궁핍한 사람이 자기한테서 얻어가게 하려고 그것을 받는다. 이러한 짓까지도 역시 그만둘 수 없었던가? 이를 일러 본심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孟子曰 ‘魚, 我所欲也. 熊掌, 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 生亦我所欲, 所欲有甚於生者, 故不爲苟得也. 死亦我所惡, 所惡有甚於死者, 故患有所不辟也. 如使人之所欲, 莫甚於生, 則凡可以得生者, 何不用也? 使人之所惡, 莫甚於死者, 則凡可以辟患者, 何不爲也? 由是則生而有不用也, 由是則可以辟患而有不爲也, 是故所欲有甚於生者, 所惡有甚於死者, 非獨賢者有是心也, 人皆有之賢者能勿喪耳. 一簞食, 一豆羹, 得之則生, 弗得則死, 嘑爾而與之, 行道之人弗受, 蹴爾而與之 乞人不屑也. 萬鍾則不辨禮義而受之, 萬鍾於我何加焉? 爲宮室之美, 妻妾之奉, 所識窮乏者得我與? 鄕爲身死而不受, 今爲宮室之美爲之, 鄕爲身死而不受, 今爲妻妾之奉爲之, 鄕爲身死而不受, 今爲所識窮乏者得我而爲之, 是亦不可以已乎? 此之謂失其本心.’(맹자왈 ‘어, 아소욕야. 웅장, 역아소욕야. 이자불가득겸, 사어이취웅장자야. 생역아소욕야. 의역아소욕야, 이자불가득겸, 사생이취의자야. 생역아소욕, 소욕유심어생자, 고불위구득야. 사역아소오, 소오유심어사자, 고환유소불피야. 여사인지소욕, 막심어생, 즉범가이득생자, 하불용야? 사인지소오, 막심어사자, 즉범가이피환자, 하불위야? 유시즉생이유불용야, 유시즉가이피환이유불위야, 시고소욕유심어생자, 소오유심어사자, 비독현자유시심야, 인개유지현자능물상이. 일단사, 일두갱, 득지즉생, 불득즉사, 호이이여지, 행도지인불수, 축이이여지 걸인불설야. 만종즉불변례의이수지, 만종어아하가언? 위궁실지미, 처첩지봉, 소식궁핍자득아여? 향위신사이불수, 금위궁실지미위지, 향위신사이불수, 금위처첩지봉위지, 향위신사이불수, 금위소식궁핍자득아이위지, 시역불가이이호? 차지위실기본심.’) 11-10]  
 
 앞의 ‘만종즉불변례의이수지’(萬鍾則不辨禮義而受之)에서 ‘만종’은 ‘만종의 녹봉’을 말합니다. 맹자가 살았던 당시에는 곡식으로 녹봉을 주었겠지요. 그렇다면 ‘만종’은 그 양이 얼마나 되는 곡식이었을까요? 그 당시에 1종(種)은, 6곡(斛, 휘) 4두(斗, 말)였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만종’이라면, ‘가장 많은 녹봉’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여겨집니다. ‘만’(萬)이라는 글자를 ‘크다’ 또는 ‘다수’로 풀이하는 게 좋겠지요. 물론, 1년에 한 번 받는 녹봉입니다.
 이는, 작은 이익에는 의(義)을 지키다가도 큰 이익에는 눈이 어두워져서 ‘의’(義)를 지키지 못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사람들의 이익과 욕심의 급소를 찌른 아주 유명한 글입니다. 다시 맹자는 입을 열었습니다.
 “무명지 손가락이 구부러진 채로 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아프지도 않고 일에 지장이 있지도 않지만, 만약에 그 손가락을 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진(秦) 나라와 초(楚) 나라처럼 먼 길이라도 멀다 않고 찾아갈 거다. 자기 손가락이 남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손가락이 남과 같지 않은 것은 싫어할 줄 알면서도, 자기 마음이 남과 같지 않은 것은 싫어할 줄 모른다. 이를 가리켜서 ‘유’(類)를 모른다고 한다.”

 [今有無名之指 屈而不信 非疾痛害事也 如有能信之者 則不遠秦楚之路 爲指之不若人也. 指不若人則知惡之 心不若人則不知惡 此之謂不知類也.(금유무명지지 굴이불신 비질통해사야 여유능신지자 즉불원진초지로 위지지불약인야. 지불약인즉지오지 심불약인즉부지오 차지위부지류야.) 11-12]

 여기에서 말하는 ‘유’(類)는 ‘가볍고 무거움의 차등’을 가리킵니다. 이런 말들을 남기고 맹자는 제(齊)나라를 떠나서 송(宋)나라로 갔습니다. 
 송나라에는 ‘혜시’(惠施)라는 말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위나라(魏 양‘梁’나라라고 부르기도 함)의 한 재상이 죽자, 그는 그 자리를 얻으려고 급히 큰 강(河水)을 건너다가 너무 급히 서두르는 바람에 그만 그 강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뱃사공이 그를 구해 놓고 물었습니다.
 “그대는 어디를 가려다가 이런 일을 당하였소?”
 이에, 혜시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위나라에 지금 재상 자리가 비어 있소. 내가 가서 재상이 되려 하오.”
 그러자 뱃사공이 이렇게 비꼬았습니다.
 “그대는 이 배의 좁은 공간도 적당한 상태로 움직이도록 조절하지 못하여 물에 빠졌소. 내가 없었더라면 죽고 말았을 거요. 무슨 능력으로 위나라 재상이 된단 말이오.”
 그러자 혜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의 말처럼 이 작은 배 안에서의 일은 내가 그대만 못하오. 그러나 나라를 편안히 하고 사직을 온전히 하는 일에 대해서는, 그대는 나에게 비교하면 어둡고 몽매하기가 마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개와 같소!”
 이는, 유향(劉向)이 모아 놓은 글인 ‘설원’(說苑)에 들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 뒤(위왕이 세상을 떠나고 혜왕이 왕의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는 혜왕(惠王)을 섬김으로써 재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왕을 위해 법전을 편찬했고 혜왕의 깊은 신임을 받았답니다. 
 송(宋)나라로 맹자가 가니, 송나라 대부인 ‘대영지’(戴盈之)가 맹자에게 말했습니다. 
 “*십일조(什一租, 수확의 10분의 1을 조세로 바치는 것)를 실시하고 ‘관문과 시장’(關市)에서의 세금을 철폐해야겠지만, 올해에 당장 실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선 올해에는 조금 가볍게 했다가 내년에 가서 폐지하면 어떻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맹자가 말했습니다.
 “지금 어떤 사람이 날마다 이웃집의 닭을 훔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그에게 ‘그런 짓은 군자의 도가 아니다.’라고 하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오. ‘그렇다면 도둑질하는 양을 줄여서 한 달에 한 마리만 훔치다가, 내년이 되면 그만두겠다.’라고요. 만약에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당장에 그만둘 일이지, 어째서 내년까지 기다리려고 합니까?”

 [戴盈之曰 ‘什一, 去關市之征, 今玆未能. 請輕之, 以待來年然後已, 何如?’ 孟子曰 ‘今有人 日攘其隣之鷄者 或告之曰是非君子之道 曰請損之 月攘一鷄 以來年然後已. 如知其非義 斯速已矣 何待來年?’ (대영지왈 ‘십일, 거관시지정, 금자미능. 청경지, 이대래년연후이, 하여?’ 맹자왈 ‘금유인 일양기린지계자 혹고지왈시비군자지도 왈청손지 월양일계 이래년연후이. 여지기비의 사속이의 하대래년?’) 6-8]

 송(宋)나라에서 제자 만장(萬章)이 맹자에게 물었습니다.
 “송나라는 작은 나라입니다. 지금 왕도 정치를 하려고 하지만, 제(齊)나라나 초(楚)나라가 미워하여 우리를 치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맹자가 말했습니다.
 “(송나라가) 왕도 정치를 펴지 않아서 그런 것이지, 참으로 왕도 정치를 편다면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목을 길게 쳐들고 바라보면서 그를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겠지, 제나라나 초나라가 비록 크다지만, 무엇이 두렵겠느냐?”

 [不行王政云爾 苟行王政 四海之內 皆擧首而望之 欲以爲君 齊楚雖大 何畏焉(불행왕정운이 구행왕정 사해지내 개거수이망지 욕이위군 제초수대 하외언) 6-5]

 기원전 326년, 맹자가 47살이었을 때입니다. 등(滕)나라 세자(그 후에는 文公)가 초(楚)나라로 가다가, 맹자가 송(宋)나라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송나라로 달려와서 맹자를 만났습니다. 맹자는 사람의 본성이 착하다고 말하면서 말끝마다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을 칭찬하였지요. 세자가 초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맹자를 만났습니다. 그때, 맹자가 말했습니다. 
 “세자께서는 내 말을 의심하십니까? 도(道)라는 것은 착함을 실행하는 일 하나뿐입니다. 제나라의 용사 ‘성간’(成覵)은 제(齊)나라 ‘경공’(景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도 사내대장부이고 나도 사내대장부이니, 내가 어찌 그 사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안연’(顔淵)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순(舜) 임금은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착함을 실행하는 사람이라면 순임금처럼 될 수 있다.’ 증자(曾子)의 제자인 ‘공명의’(公明儀)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왕(文王)은 나의 스승이라고 말했으니, 주공(周公)이 어찌 나를 속이랴!’ 지금 등(滕) 나라가 작다고 하지만, 넓은 곳과 좁은 곳을 평균 내면 사방이 거의 50리는 됩니다. 그만하면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습니다.”

 [滕文公爲世子, 將之楚, 過宋而見孟子. 孟子道性善, 言必稱堯舜. 世子自楚反, 復見孟子. 孟子曰 ‘世子疑吾言乎? 夫道, 一而已矣. 成覵謂齊景公曰 <彼, 丈夫也, 我, 丈夫也, 吾何畏彼哉?> 顔淵曰 <舜何人也? 予何人也? 有爲者亦若是.’ 公明儀曰 ‘文王我師也, 周公豈欺我哉?> 今滕, 絶長補短, 將五十里也, 猶可以爲善國.’(등문공위세자, 장지초, 과송이견맹자. 맹자도성선, 언필칭요순. 세자자초반, 부견맹자. 맹자왈 ‘세자의오언호? 부도, 일이이의. 성간위제경공왈 <피, 장부야, 아, 장부야, 오하외피재?> 안연왈 <순하인야? 여하인야? 유위자역약시.’ 공명의왈 ‘문왕아사야, 주공기기아재?> 금등, 절장보단, 장오십리야, 유가이위선국.’) 5-1]

 ‘춘추좌전’(春秋左傳)에는 등(滕)나라와 설(薛)나라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지요.
 노(魯)나라 은공(隱公) 11년(기원전 712년) 봄에, 등나라 군주와 설 나라 군주가 노나라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서로 윗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다투었답니다. 그러자 노나라 군주인 은공이 ‘우보’(羽父, 공자 휘 ‘翬’)를 시켜서 다른 성씨인 설 나라 군주에게 같은 성씨인 등나라 군주에게 윗자리를 양보하도록 했답니다. 즉, 노나라 은공은 ‘희씨’(姬氏) 성이고 설나라 군주는 ‘임씨’(任氏) 성입니다. 그리고 등 나라 군주도 ‘희씨’(姬氏) 성이랍니다. 그러므로 노나라 은공과 등나라 군주는 ‘같은 성’(同姓)이고 설 나라 군주만 ‘다른 성’(異姓)이지요. 아, 설 나라를 임 나라라고도 한다는 건, 알고 있지요? 물론, 설 나라 임금이 허락했습니다. 
 
 내가 46세가 되었을 때였습니다. 1986년이었지요. 아무래도 문학의 꿈을 이루려고 한다면 서울로 올라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내에게 우울증이 생겼습니다. 아내는 서울 태생으로 먼 곳으로 나간 적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게다가 섬이라는 곳에 갇혀 지내니 어찌 답답증이 생기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대충 서귀포의 일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문학에 매달렸습니다. 그리하여 그다음 해(1987년)에는, 한국문인협회에서 발행하는 ‘월간문학’의 신인작품상 당선으로 문단에 등단하게 되었습니다. 당선작품은 시조 ‘서울의 밤’이었습니다. 비로소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나의 길’이 정해졌습니다. 이제는 앞만 보고 걸어가면 됩니다.

 언제든지 내 앞길은 눈이 하얗게 내린 길
 발걸음 내딛으면 ‘뽀드득’ 소리가 난다
 새롭게 하루를 걸으며 곱게 찍은 내 인발.

 바라보고 가는 길이 꽤 길고 험하다 해도
 땅바닥 힘껏 딛고 앞으로 나가야 할 것
 내 길의 외로운 발자국 선명히 남겨야 할 것!

 혹시 누가 내 뒷길을 이담에 살필지 몰라
 바르게 걸어왔나 가끔 뒤를 돌아본다
 가다가 쓰러질지라도 눈보라가 날릴지라도---.
                      -졸시 ‘행보’ 전문

 무엇보다도, 길을 잘 걸어가려면 좋은 벗을 사귀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우선으로 ‘나무 친구’들을 많이 사귀기로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내가 자주 찾은 나무 친구들을 소개하자면, 서울 인사동 근처의 조계사 경내에 있는 ‘회화나무’를 비롯하여 옛 창덕여고 교정에 있는 ‘백송’ 등을 꼽을 수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신문로 쪽으로 가다가 보면 새문안교회가 있는데, 그 입구 쪽에 있던 ‘느릅나무’도 자주 찾아보곤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얼마 후에 그 나무를 그곳 사람들이 베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무 친구들과는 마음으로 많은 교감을 나눌 수가 있습니다. 참으로 과묵하고 믿음이 가는 친구들입니다. 내가 외로울 때 찾아가면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를 반겨 맞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마운 친구들인가요? 지금도 그 친구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글: 김 재 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