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녹색 세상] 편
소래포구에서
김 재 황
잊어야 할 일들이 세상엔 너무 많은데
네 활개 넓게 펴고 개펄은 누워 있다가
다시금 물길을 열며 저를 보라 반짝인다.
배가 닿던 자리마다 쓸린 아픔 남아 있고
그 바람 안고 서니 나도 또한 옛 나룻배
갈매기 서러운 울음만 갑판 위에 쏟아진다.
바삐 살았던 날들은 모진 숨결로 머물러
허물어진 제방 아래 푸른 깃발 꽂아 놓고
갈대밭 우거지는 꿈을 하늘 높이 날린다.
마음껏 뛰어노는 저 망둥이 닮고 싶어
바다에서 온 비린내 가득 맨몸에 바르면
주름진 내 육십 성상도 펄떡펄떡 벌을 친다.
(2002년)
(시작 노트)
내가 소래포구를 찾은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 이름이 정감이 가기 때문이었다. 손짓하여 나를 부르는 듯한 어감의 ‘소래포구’. 그러나 나는 소래포구에 당도하여 한동안 개펄만 바라보았다. 썰물 진 그 개펄 속에서 내 의식의 망둥이 한 마리가 마냥 뒹굴었다.
소래포구(蘇來浦口)는 바다에서 좁게 패이어서 들어온 형태를 하고 있다. 이곳의 위치는 인천시 남동구 논현동으로, 수도권의 유명한 젓갈 판매지이다.
소래포구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30년도 후반의 일이다. 일제는 당시에 이 지역에서 많이 생산되고 있던 천일염(天日鹽)을 빼앗아 가기 위해 수인선 철도를 건설하였는데, 그때 철도건설과 소금 제조에 필요한 인부들을 태워 나르기 위해 소래포구에 나룻배 한 척을 상주시켰다. 그로 말미암아 차츰 많은 사람이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그 후, 6.25 전쟁이 끝나고 나서, 피란민 중 배의 제작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빈 개펄 한 귀퉁이에서 목선을 한 척 두 척 만들게 되었고, 그에 따라 젓갈이나 새우 또는 꽃게 등의 해산물을 파는 노점상들도 다시 모여들게 되었다.
사실, 소래포구는 아늑한 분위기를 지녔다. 그 때문에, 연인들도 많이 여기를 찾는다. 새벽에 떠났다가 저물 무렵에 돌아오는 어선의 모습도 정감을 준다. 이 포구를 드나드는 어선은 15톤 미만의 작은 배들이다. 승봉도․장봉도․굴업도 등의 서해 연안 해역으로 나가서 꽃게나 왕새우 등을 잡아 온다. (200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