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님과 동자꽃
김 재 황
칼바람에 살문의 종이가 바르르 떨었습니다. 초저녁에 지핀 불은 이미 꺼진 지 오래 되었고, 방안으로 찬 느낌이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잠자리에서 노스님은 돌아누우며 동자에게 나직이 물었습니다.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지?”
동자는 짐짓 자는 체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며칠째 굶고 있기는 노스님도 마찬가지이니까요. 하지만 노스님은 동자가 잠들지 않았으면서도 잠든 척하는 걸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내일은 마을로 내려가 봐야겠다.”
밖에서는 더욱 세찬 바람이 부는 듯, 낡은 문짝이 쉬지 않고 덜거덕거렸습니다. 삼불사. 절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암자라는 편이 더욱 어울리는 곳. 집이라고는 다만 한 채뿐입니다. 말하자면 대웅전, 별전, 요사 등이 한 집 안에 있는 아주 작은 절입니다. 게다가 설악산 북쪽의 깊은 산골에 자리잡았고, 절로 오르는 길마저 매우 험하기 때문에, 이 절을 찾는 사람이라야 일년을 통해서 기껏 몇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이 절에는 노스님이 혼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노스님은 주지의 일뿐만 아니라, 행자의 일까지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큰 외로움 속에서도 노스님이 이 절을 떠나지 못하는 까닭은 아마도 산의 아름다움 때문일 겁니다. 맑은 날이면 금강산의 비로봉이 가물가물 바라보이고, 멀리 산 아래로는 손에 잡힐 듯이 화진포가 내려다보입니다. 다만, 겨울에는 모진 눈보라가 잦아서 어려움을 심하게 겪습니다. 눈이 좀 많이 내리기라도 하면 길이 끊기므로 눈이 녹을 때까지 꼼짝 못하고 절에 갇혀 지내야만 합니다.
그런데 지난해 가을, 이 절로 한 아주머니가 찾아와서 자기의 딱한 일을 하소연하고는 여섯 살배기 아들을 노스님에게 맡기고 떠나 버렸습니다.
노스님은 언제나 아주 조금씩 밥을 들고, 더군다나 깨달음을 얻으려고 눈감고 앉으면 열흘이고 보름이고 물 외에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습니다. 하지만 꼬마가 온 다음부터는, 어린 그를 위해서라도 먹거리가 늘 마련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노스님은 전보다 자주 쌀을 마련하려고 마을로 내려가곤 했습니다.
다음날이 밝았습니다. 흐린 하늘을 바라보며, 노스님은 일찍 절을 떠나서 어둡기 전에 반드시 돌아와야 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입성을 갖춘 후에 낡은 바랑을 메고는 절을 나서며 동자에게 말했습니다.
“빨리 돌아올 터이니, 기다리고 있거라.”
동자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노스님을 향해 두 손을 공손히 한데 모으고 머리를 숙였습니다.
노스님은 부리나케 가파른 산길을 내려와서 마을에 닿았습니다. 어느새 짧은 겨울 해는 머리 위에 떴습니다. 노스님은 이 집 저 집을 찾아 다녔습니다. 마음 착한 동네 사람들은 하다못해 한 줌의 보리쌀이라도 스님에게 드렸습니다.
바랑이 조금씩 무거워졌습니다. 이제 한두 집만 더 들르고는 절로 돌아가려고 하였을 때입니다. 갑자기, 흐렸던 하늘에서 눈이 몇 송이씩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점점 큰 눈송이로 변하여서 아주 짧은 동안에 온 땅을 하얗게 덮어 버렸습니다.
노스님이 서둘러서 발걸음을 재촉하였지만, 때가 이미 늦었습니다. 절로 향하는 길이 모두 막혀 버렸습니다. 이제는 그저 빨리 눈이 녹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몇 날 며칠을 기다렸는지, 마침내 눈이 조금씩 녹기 시작했습니다. 노스님은 간신히 길을 찾아서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절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멀찌감치 절이 보였습니다. 노스님은 더욱 힘을 내어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아, 동자가 길목에 앉아 있었습니다. 노스님이 반가운 마음으로 달려갔으나, 동자는 이미 숨을 거둔 채, 몸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좀더 일찍 내가 왔어야 했는데…….’
노스님은 싸늘한 동자의 몸을 붙들고 말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동자의 얼굴은 빙긋이 웃고 있었습니다. 그의 넋은, 언제나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는 곳으로 즐겁게 떠났을 테니 그렇겠지요.
노스님은 양지바른 자리를 골라서 동자의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마을에서 올라오는 길이 잘 보이는 언덕입니다.
어느덧 봄이 왔다가 가고 여름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노스님은 우거진 풀숲을 헤치고 동자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때마침 무덤 가에는 동자의 해맑은 얼굴을 닮은 동자꽃이 피어서 마을 쪽을 바라다보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