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와 문주란
김 재 황
밤이 깊었습니다. 집밖에는 어둠을 때리는 바다의 물결 소리가 요란했습니다. 제주도는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리는 고장이어서, 한여름 동안을 질금질금 하늘이 샙니다. 비가 오면 바람이 곁들여 불고, 물결마저 어울려 철썩철썩 춤을 벌입니다.
“내일도 가셔야 돼요?”
아이가 할머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아무렴, 부지런히 소라와 전복을 따서 네 옷이며 신발을 사 주어야지.”
할머니는 함박꽃 같은 미소를 머금고서 손자를 향해 말했습니다. 하지만 꼬마는 시큰둥했습니다. 모두가 다 싫었습니다. 구수한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를 가장 좋아했으니까요.
“이 세상에서 할머니가 제일 좋아요.”
“그 응석에 이 할미가 넘어가겠니? 내일 새벽에 일어나려면 오늘은 일찍 자야지.”
할머니와 손자는 나란히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두 사람이 잠든 오두막집 위로 하얀 달빛이 시름없이 쏟아졌습니다.
제주도 동쪽에 자리한 하도리. 그 앞바다에 떠 있는 토끼섬을 바라보고, 조는 듯한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열 서너 채의 오두막집들. 그 맨 아래쪽에 할머니와 손자가 단둘이 사는 집이 앉아 있습니다.
할머니는 느지감치 아들 하나를 두어, 며느리까지 얻었습니다. 그랬는데, 손자를 낳은 지 서너 달이나 되었을까, 남편과 아들이 함께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다가 거센 바람과 물결을 만나서 모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삼 년이 지난 후에는 며느리마저 폐를 앓다가 끝내는 아들한테로 떠나 버렸습니다.
하는 수 없이, 할머니는 어린 손자를 맡아서 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젊었을 적부터 바다를 삶터로 살아온 해녀입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물질을 나가기가 힘에 겹지만, 손자와 먹고 살아가기 위해서 그 일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어느새 날이 밝았습니다. 할머니는 일찌감치 일어나서 무명으로 지은 물옷, 물 속을 들여다보기 위한 왕눈, 물고기를 잡는 데 쓰는 속살, 전복을 따는 데 쓰는 빗창, 미역을 따기 위한 낫, 물에 띄워 놓고 쉬기 위한 태왁, 그리고 소라와 미역을 넣는 망시리 등을 챙겨 놓고는 손자를 깨웠습니다.
“얼른 얼굴 닦고 밥 먹어야지.”
어린 손자는 늘 할머니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리고는 할머니가 물질을 끝내고 돌아올 때까지, 홀로 바닷가 모래밭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조개 껍데기를 주우며 놀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심심하면 토끼섬 가까이로 가서 게랑 말미잘을 구경도 하고, 때로는 썰물이 되면 토기섬으로 건너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할머니가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시간이 차츰 빨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철없는 손자는 할머니가 빨리 오니까 그저 좋기만 했지요.
그 날은 더욱 이르게 할머니가 물질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잡은 게 많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그 중에서 팔 것을 골라 팔고, 남은 것으로는 맛있게 저녁 찬거리를 만들었습니다.
길고 긴 여름 낮이 또 기울어서 하도리 마을에 땅거미가 드리워졌습니다. 그 밤에도 꼬마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할머니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습니다. 할머니는 그날따라 아무런 이야기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이제 너무 늙고 몸도 힘이 없어져서, 얼마 오래지 않은 날에 하늘나라로 떠나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좋은 곳으로 떠나는 일이야 기쁘지만, 외톨이로 남겨질 손자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내가 없더라도 혼자 살 수 있겠니?”
할머니가 손자의 얼굴을 보며 슬며시 물어 보았습니다.
“할머니와 오래오래 함께 살 건데요, 뭐.”
어린 손자는 아무 걱정도 없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 길게 산다든?”
“그럼요, 아주 오래 사실 거예요.”
그러나 할머니는 그 날 밤에 잠이 든 다음에 다시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힘을 모아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할머니의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손자는 할머니가 다시 못 올 곳으로 떠난 일을 믿지 않았습니다. 불현듯 할머니가 망시리를 메고 집으로 오는 모습이 떠오르자, 꼬마는 곧장 바닷가로 달려나갔습니다.
“할머니이― .”
손자의 외침 소리가 바다 위로 퍼져 갔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기척이 없었습니다. 다만, 토끼섬 위에 하얗게 핀 문주란 꽃이 할머니의 흰 머리칼처럼 바람에 흩날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