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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편지의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대충’은 한자인 ‘대총’(大總)에서 나온 말입니다. ‘대총’은 ‘일의 중요한 부분만 대강 긁어모은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지금은 ‘어떤 일에 대하여 꼼꼼하고 완벽하게 정리하는 게 아니라, 대강만 추리는 정도’를 나타내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저는 매일 가난뱅이라는 놀림을 받고 있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용돈이 많은데 저는 없습니다. 그러니 용돈을 조금만 더 보내 주십시오. 저는 프랑스 아이들로부터 가난하다고 놀림을 당하는 게 괴롭습니다.’
우리는 흔히, 편지 끝에 ‘총총난필을 용서하십시오.’라고 써서 자신의 글씨를 겸손하게 이르는데, 프랑스에서는 어찌 하는지 모르겠군요. ‘총총난필’(悤悤亂筆)은 ‘바삐 써서 거칠 게 되어 있는 글씨’를 말합니다.
그 당시에는 편지가 유일한 통신수단이었을 겁니다. 아마 그 때에도 편지를 부치려면 우표가 필요했겠네요. 그러면,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우표를 사용하게 되었을까요?
문헌을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는, 우정총국의 개국과 함께 발행된 ‘문위우표’(文位郵票)라고 합니다. 액면 금액이 당시의 화폐단위인 ‘문’(文)으로 표시되어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발행일은 1884년 11월 18일이고, 인쇄처는 일본 대장성 인쇄국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후에 갑신정변 때문에 인쇄 업무가 잠시 중단되었다가 1895년에 미국에서 인쇄된 태극우표가 발행되었고, 1897년에는 태극우표에 ‘대한’(大韓) 등의 글자를 가쇄(假刷)한 가쇄우표가 발행되었으며, 1900년에서 1901년까지 오얏의 꽃과 태극이 도안된 이화소형우표가 발행되었습니다. ‘오얏’은 ‘자두’의 예스러운 말입니다. 이 꽃을 가리켜서 ‘이화’(李花)라고 합니다. 대한제국 때에 관리들이 쓰던 휘장을 ‘이화’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그리고 1884년부터 1905년까지 사이에 우리나라에서는 보통우표 54종과 기념우표 1종 등으로 모두 55종의 우표가 발행되었다고 하는군요.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우표가 통용되었지요. 또한, 8.15광복 후에는 일본에서 인쇄된 해방조선기념우표가 1946년 5월 1일에 처음으로 발행되었고, 같은 해에 광복1주년기념우표가 서울 정교사(精巧社)의 인쇄로 발행되었다고 합니다.
전화가 있었다면 편리하였을 터이지만, 아무래도 말하기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하는 데는 편지가 더 나을 듯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나폴레옹이 보낸 편지를 읽고, 아버지의 가슴은 아팠겠지요. 그저 돈이 원수일 뿐입니다. 원래 ‘돈’은 칼을 뜻하는 ‘도’(刀)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고려 말까지, ‘전’(錢)과 ‘도’(刀)는 화폐를 의미하는 뜻으로 함께 쓰였고, 소리도 ‘도’와 ‘돈’으로 나란히 쓰이다가 조선시대에 한글이 창제되면서 그 이름이 ‘돈’으로 통일되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학설이 있지요. 고려시대에 ‘도’(刀)가 무게의 단위인 ‘돈쭝’으로 변용되어 ‘도’가 ‘돈’으로 와전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돈’은 ‘도’(刀)에서 나온 것으로, 그 의미는 사회정책에 있어서 훈계가 포함된 ‘이름’이라는 이야기도 있지요. ‘돈’은 한 사람이 많이 가지게 되면 ‘칼’의 화를 입기 때문에 그 일을 훈계하기 위해 ‘돈’을 ‘칼’(刀)이라고 하며 그것을 ‘돈’으로 읽었다는 말입니다. 고대 무덤에서 출토되는 명도전(明刀錢) 같은 화폐가 칼 모양으로 생긴 걸 보면, 이 학설도 수긍이 가긴 갑니다. ‘명도전’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사용했던 청동화폐의 하나입니다. 작은 칼 모양인데, ‘명’(明) 자와 비슷한 무늬가 있지요. 어찌 되었든지 간에 앞의 학설 모두가, ‘돈’을 쓰기에 따라서 사물을 자르고 재단하는 칼처럼 이롭기도 하고 생명을 죽이거나 상처를 입히는 칼처럼 해롭기도 하다는, 공통적인 전언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만든 종이돈(紙幣)에 대해서는 궁금하지 않습니까? 한 번 알아보기로 하지요.
고려 공양왕 3년인 1391년에 저질 베의 통용을 금지하는 동시에 종이 화폐인 저화제(楮貨制)를 채용하는 문제가 제기됨으로써 저화를 인조하여 사용할 것을 결정하였지요. 그러나 귀금속화폐의 유통기반이 안정되어 있지 못하고 철전이나 동전 등의 금속화폐가 지속적으로 통용되지 못한 당시의 여건으로 보아서 한낱 종잇조각에 지나지 않은 저화가 국가에서 부여한 액면가치(額面價値)대로 통용될 수는 없었겠지요. 저화제는 당시의 미숙한 사회경제가 수용하기에는 적지 않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화폐제도였습니다. 또한, 고려와 조선의 교체기인 과도기적 혼란이 겹쳐져서 저화는 인조해 놓고도 통용되지 못하고 말았답니다. 얼마나 이해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보충 설명을 드리자면, ‘저화’(楮貨)는, ‘조선왕조 때에 사용되던 종이돈’인데, 그 종이가 ‘저주지’여서 그 이름이 생겼습니다. ‘저주지’(楮注紙)는 ‘길이 한 자 여섯 치에 너비 한 자 네 치의 닥나무 껍질로 만든 종이’입니다. ‘인조’(印造)는 ‘인쇄하여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가장 많이 나오는 ‘통용’(通用)이란 ‘세상에 두루 쓰임’을 가리킵니다.
나폴레옹에게는 남동생들과 누이동생들이 많습니다. 아버지는 그들을 뒷바라지하는 일만으로도 등골이 빠졌을 겁니다. ‘뒷바라지하다’에서 ‘바라지’란 원래 ‘절에서 재를 올릴 때에 법주(法主) 스님을 도와서 경전을 독송하고 시가를 읊는 스님’을 일컫는 말입니다. 죽은 영혼들의 극락왕생을 비는 의식인 ‘재’(齋)를 올릴 때, 바라지 스님은 법주 스님을 도와서 목탁을 치고 경전을 읊으며 ‘향’(香)과 ‘꽃’과 ‘차’(茶)를 올립니다. 바라지 스님이 이처럼 자잘하고 수고스러운 일들을 해 준다는 데에서 ‘뒷바라지하다.’ 또는 ‘옥바라지하다.’ 등의 말이 생겼답니다. ‘뒷바라지하다.’의 지금 뜻은 ‘음식이나 옷을 대어 주는 등, 온갖 궂은일을 도와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등골이 빠지다’에서 ‘등골’의 ‘골’은 ‘뼈 속에 가득하게 차 있는 부드러운 신경조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 쓰이는 ‘등골’이란, 등뼈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뇌와 연결되는 신경중추’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 신경중추에 손상이 생기면 디스크 및 운동신경마비 등의 여러 가지 신체적인 고통을 당하게 되지요. ‘등골이 빠진다.’의 지금 뜻은, ‘견디기 힘들 만큼 몹시 힘이 든다.’입니다. 그 밖에도 ‘남의 재물을 갈취하여 긁어먹는 경우’에 ‘등골을 빼먹다.’라고 하며, ‘남을 몹시 고생스럽게 만드는 경우’에는 ‘등골을 뽑다.’라고 합니다.
편지를 보내고 나서 몇 날 며칠이 지난 다음에, 나폴레옹에게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답장이었지요. 그 내용은 아주 짤막했습니다.
‘집에는 돈이 조금도 없구나. 미안하다. 너는 꾹 참고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버티어야 한다. 나는 네가 그럴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는다.’
나폴레옹이 아버지의 형편을 모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그렇게 투정이라도 부리지 않는다면 견디기 어려웠겠지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편지를 받고 마음이 조금은 섭섭했을 듯합니다. 아마도 보통의 어린이였다면, 마음의 병을 얻어서 자리에 눕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일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다른 쪽으로 생각하면, 그 일이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나폴레옹에게 오히려 도움이 되었을 게 분명합니다. 우리 속담에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게 있으니까요. 이 말은, ‘풍파를 겪은 뒤에 일이 더 든든해진다.’라는 뜻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도 있습니다.(김재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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