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然紀念 老巨樹 探訪
<그 趣旨를 밝힌다면...>
어느덧 칠십 고개를 넘기면서 세월의 흐름은 급물살을 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우물쭈물하다가 西山에 걸린 해는 곧 저물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 高齡社會의 長壽時代가 왔다고들 하면서 人生 100歲의 四季節 說을 펴는 이도 있다. 이르기를, 25歲까지는 春季, 50歲까지는 夏季, 75歲까지는 秋季고 그 후 100歲까지가 冬季라고 구분 짓는다. 그러니 70은 丹楓이 아름다운 晩秋쯤에 該當된다는 이야기다. 西歐社會에서도 65~75世代를 <YOUNG OLD>라 부르고 長壽人이 많은 홍콩에서는 그 世代를 <長靑>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어쨌거나 칠십쯤 된 老年들은 鼓舞될 만한 消息이다. 그 밖에도 老境에 접어든 이들이 慰勞를 받을 만한 語錄들은 많이 있다. 美 詩人 사무엘 울먼은 “靑春이란 人生의 어떤 時期가 아니라 마음의 狀態다.”라고 했으며 “나이를 먹기 때문에 늙는 게 아니고 理想과 熱情과 好奇心을 잃을 때 늙어 버린다.”는 얘기를 한 사람도 있다. 그러니 餘生을 再整備해 人生 黃昏期를 즐겁고 活氣 있게 지낼 方案을 講究해 보게 된다. 그 處方箋은 이미 다 나와 있다.
O 好奇心을 갖고 쉬지 말고 새로운 것을 배워라.
O 새로운 文物을 接할 수 있는 곳으로 旅行을 다녀라.
O 隔意 없는 친구와 함께 지내는 시간을 가져라.
그 實行方案으로 綠施 金載晃과 枝木 李廷敏과 그리고 自隱 白承敦이 뜻을 모아 全國의 天然紀念 老巨樹 探訪길에 오르기로 合意하였다. 이 3人은 “北岳山 기슭, 安岩의 언덕”에서 만나 同門修學한 이래 50餘年 넘게 가까이 사귀고 있는 知己之友 사이다. 그 중 한 명은 高逸한 文士의 길을 걸어 文壇에서 尊敬받는 元老가 되어 있고, 또 한 명은 우리 社會의 여러 分野에서 많은 經綸을 쌓아 지금까지도 常勤 勤務處가 있는 現役의 身分이고, 나머지는 公職이라는 制度圈 틀 속에서 삼십여 년 동안을 安住하다가 나와 物情에도 어둡고 주변머리도 별로 없어 江原道 山속에 조그만 農園을 차려 놓고 隱居중인 村夫도 하나 있다. 이렇듯 셋은 걸어온 길이 달라 理念이나 情緖, 性向이 다를 수밖에 없어 間或 現 時局을 놓고 談論을 펴다 보면 或者는 極右性向, 或者는 左偏向으로 意見이 갈리지만 그런 게 問題가 되지는 않는다. 어쨌든 우리는 老境을 함께 活氣 있게 지내길 이미 結義한 사이이다. (글: 자은 백승돈)
(지목 이정민 촬영)
서울 조계사 백송
김 재 황
차 소리 달려들고 불빛 마냥 깜박여도
가다듬은 옷깃이야 무명보다 더 흰 것을
그 가슴 다시 비우고 하늘 가에 기댄다.
경 소리 남아 있고 향불 연기 사라지면
걸어가는 맨발 위에 포개지는 달빛 자락
그 마음 더욱 하얗게 구름 꿈을 닮는다.
(천연기념물 제9호)
(탐방 제 1호)
서울 조계사 백송 (천연기념물 제 9호) 탐방일 : 2012. 1. 14 (토)
명칭 / 서울 曹溪寺 백송
분류 / 자연유산 /천연기념물/문화역사기념물/종교
수량 / 127㎡(보호구역)
지정일 / 1962.12.03
소재지 / 서울종로구 수송동 44
소유및 관리 / 대한불교조개종
설명
백송은 나무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져서 흰빛이 되므로 백송 또는 白骨松이라고도 한다. 중국이 원산지로서 조선시대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다 심은 것이다.
조계사 백송의 나이는 약 5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4m, 뿌리 부분 둘레 1.85m이다. 조계사 뜰 안 대웅전 옆 가까이 서 있고, 대웅전 쪽으로 뻗은 가지만 살아 있다. 나무의 한쪽은 사람들이 오가는 통로에 바로 접해 있고, 다른 한쪽은 대웅전 건물에 인접해 있어서 나무가 자랄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고 생육상태도 좋지 않은 편이다.
백송은 흔히 볼 수 없는 희귀한 소나무이고, 오랜 세월 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이며, 생물학적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이 나무에 대한 내력은 알 수 없으나 전설에 의하면 중국을 다녀온 사신이 가져다 심은 것이라 한다. 서울 사대문 안에 심어놓은 백송도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이 가져온 백송을 자기가 살던 곳에 심은 것으로 여겨진다. 원줄기는 외과수술을 받았고 큰 줄기는 절단되었다.
이 나무에 대한 인터넷 네티즌들의 가십이 분분하지만 그 중 한두 마디를 옮겨 본다.
"천연기념물 이라고 하긴 너무 빈약하다. 차라리 대웅전 앞마당의 회화나무가 우람하고 더 멋있다."
"이 자리에 조계사가 세워진 것이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라니 백송의 나이가 오백 살이라면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백송은 그 자리에 있었겠는데 굳이 그 옆자리에다가 바짝 붙여 대웅전을 지은 것은 무슨 심보인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목 이정민 촬영)
서울 재동 백송
김 재 황
언제나 그랬듯이 그 몸뚱이 깨끗하고
누가 봐도 가난하게 조용한 터 잡았으니
무엇을 바라겠는가 하늘 뜻을 따른다.
세 가닥 바늘잎은 옛 이야기 새파란데
가는 날을 느긋하게 허리춤도 풀어 놓고
젖히듯 그 두 줄기로 '브이' 자를 그린다.
(천연기념물 제8호)
<탐방 제 2호>서울 재동 백송 (천연기념물 제 8호)
탐방일 : 2012.1. 14 (토)
대한민국 헌법재판소구내에 있는 이 백송은 한 그루이지만 뿌리 근처에서 둘로 갈라져 두 그루인 것처럼 자랐다. 나무 높이는 약 17 미터, 밑 부분의 줄기 둘레가 3.8 미터 정도다. 남서쪽 줄기의 둘레가 2.4 미터, 동쪽 줄기의 둘레는 1.9 미터다. 나이는 흔히 600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 않으며 과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서울 통의동의 백송이 1990년에 고사한 뒤 대한민국 최고령 백송이 되었다. 원래 이름은 '서울 재동의 백송' 이었으나 불필요한 조사인 '의' 를 제거한 명칭으로 2008년 변경되었다. 그리고 언제 어떻게 이 자리에 백송이 있게 되었는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이 곳에 헌법재판소가 들어서기 이전에는 경기여고를 거쳐 창덕여자고등학교가 있었고,
원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며 개화파 거두인 우의정 박규수의 집터였으며 구한말에는 외교통상 사무를 관장하던 외아문이 있었고 선교사 알렌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후에 제중원으로 개명)을 세웠던 곳이다.
또한 그 이전에는 신정왕후 조대비의 친정이 있던 곳이라고도 한다. 아들 헌종의 즉위로 왕대비가 되고 철종 때 대왕대비로 진봉된 신정왕후의 친정에는 흥선대원군이 자주 드나들었는데,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종식시키고 왕권을 다시 강화하려는 모의가 이 백송이 지켜보는 사랑채에서 이루어졌으며 이 무렵 백송의 밑둥이 유별나게 희어져 있었기에 대원군이 성사를 확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밖에도 민영익 홍영식 이상재 최린 등, 우리의 근현대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명사들이 이 백송을 둘러싸고 근처에 이웃해 살았다고 한다.
백송(Pinus bungeana Zuccarini)은 소나무科 소나무屬에 속하는 나무로서 중국의 서북부가 원산지이다. 그러나 원산지인 화북성과 북경에서도 백송을 쉽게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개체수가 많지 않은 희귀 수종으로서 자금성에서나 몇 그루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우리나라에는 600여 년 전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들여와 식재한 것이 자라고 있는데, 서울, 경기도의 고양ㆍ이천, 경남의 밀양, 충북의 보은, 충남의 예산 등지와 기타 지역에 몇 그루가 자라고 있으며, 이 중 큰 나무를 골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백송은 나무높이 15∼30m, 줄기의 가슴높이직경〔胸高直徑〕 0.6∼1.7m에 달하는 상록 침엽 교목이다. 樹皮는 어릴 때에는 연회색이나 나무의 樹齡이 많아지면서 나무껍질이 벗겨져서 20년 정도 되면 청갈색이 나타나고 40년 정도 되면 청백색의 얼룩점이 생긴다. 수피의 흰색은 납질(蠟質)로서 점점 회백색으로 변해 가는 특징에서 白松 또는 白骨松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가지는 굵고 길며 小枝는 적다. 침엽은 세 개씩 뭉쳐서 나고〔束生〕, 잎은 길이 7∼9㎝, 나비1.8㎜로서 3∼4년 동안 가지에 남아 있다. 잎을 자르면 향기가 난다. 구과(毬果, 소나무과 식물의 열매)는 卵形이며 길이 6㎝에 나비 4.5㎝로서 50∼60개의 實片으로 구성되고 실편은 갈색이 돌며 옆으로 주름이 발달하고 중앙부의 돌기는 길이 3㎜이다. 꽃은 5월에 피며 열매는 다음해 10월에 익는다. 현재는 정원수나 관상용으로 심는다. 재동의 백송은 과거 창덕여자고등학교 자리에 신축한 헌법재판소 건물 뒤뜰 3m 높이의 축대 위에 위치한다. 백송의 상징성과 도시적 조화성을 고려하여 현대적 감각과 고전적 양식을 결합한 석조건축물로서 그 예술성과 기능성을 인정받고 있는 헌법재판소 청사와 어우러져 있어 품격을 느낄 수 있다. 지표면에서부터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V자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줄기가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두 줄기를 쇠막대기로 연결하여 조임으로써 물리적 강도를 주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던 '통의동 백송'이 1990년 7월 돌풍으로 쓰러져 죽은 뒤에, 이 나무가 수령 약 600년으로 한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백송이 되었다. 나무높이는 15m, 둘레는 2.01m이다. 가지의 길이는 동쪽 5m. 서쪽8m, 남쪽7m, 북쪽7m이다. 이 백송은 조선말기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집권과정을 지켜본 나무로 전해진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바와 같이, 안동 김씨의 세도를 종식시키고 왕정복고를 은밀히 추진할 때, 이 무렵 백송 밑동이 별나게 흰 빛을 보임으로써 흥선 대원군에게 자신감을 갖게 했다. 이처럼 백송의 색깔이 평소보다 더욱 희어지면 길조로 여기고 있다. 한편, 이 백송은 일제강점이 되던 경술국치 때부터 갑자기 생기를 잃고 성장이 거의 멈추다시피 하였다가, 광복이 된 1945년 이후부터 서서히 정상을 되찾았다고 한다. 이 백송이 나라를 빼앗긴 억울함을 감지하고 있었던 神樹 靈木임에 틀림없다.(글: 자은 백승돈)
첫 탐방에 나선 2012.1.14일은 小寒과 大寒 사이, 연중 嚴冬절기지만 날씨가 화창하고 한 낮 기온도 零上으로 올라 擇日을 잘 한 듯하였다.
3人은 종각 역 지하 영풍문고에서 만나 舊 화신과 신신 사이로 뚫린 도로를 따라 조계사에 당도하였다. 조계사 경내를 들어가 본 것이 이런 저런 계제로 한두 차례 뿐만은 아니겠기에 대웅전 옆에 가꿔놓은 흰 소나무가 눈에 띈 적도 있었겠지만 이번만큼은 오로지 천연기념물 <수송동 백송>을 만나러 가는 것이어서 그 의미가 각별하다.
과연 나무 둥치와 樹幹의 表皮가 순백색은 아니어도 회백 또는 옅은 청백의 빛을 띠고 있어 늘 대하던 일반 소나무와는 判異한 모습이다. 듣던 바대로 곁가지는 대웅전 처마 쪽으로만 우거졌고 그 반대편으로는 꺾여 나간 듯, 樹木 外科手術 技法으로 그 큰 상처를 아물려 놓았다. 그 크기나 풍채로는 老巨樹의 인상에 못 미치지만 이미 모진 風霜을 겪어 낸 모습이 느껴져 안쓰럽다. 백송 앞뒤로 세운 대리석 標識石과 화강석 碑石은 먼지와 때로 찌들었고 마멸되어 글자를 알아보기 어렵다. 천연기념수의 대접이 소홀한 게 아닌가 여겨진다. 겸하여 대웅전 앞마당에 자릴 잡고 서 있는 수령 450년의 회화나무도 눈 여겨 보게 되는데 두세 아름은 될 법한 우람한 밑둥치가 전혀 손상되지 않고 온전한 모습이어서 대견스럽다.
조계사에서 나와 안국동 로터리 쪽으로 걸어 헌법재판소에 당도하였다. 오늘이 토요일로 휴무일 이지만 정문은 열려 있고 수위근무자도 우리를 흔쾌히 들여보내 준다. 본관 좌측 둔덕에 고고한 자태로 높직이 서 있는 백송이 눈에 띄어 곧바로 쉽게 접근한다. 역시 수송동 백송보다는 격이 높고 어른스러워 보인다. V자로 갈라진 두 둥치 중 큰 둥치를 감싸 안아 보며 愛情과 함께 敬畏감을 느낀다.
오늘 탐방 길에 3인이 함께 구경하고 먹고 마시고 閑談을 나눈 行蹟을 摘記해 둔다.
♣ 맛 집으로 이름이 나 있다는 里門 설농탕 집에서 점심을 했다. 통상명칭<설렁탕>과는 차별화하겠다는 의도가 그 집 <설농탕> 간판에서도 읽혀진다.
♣ 구한말 개화파 명사 박영효의 古宅 터에 차려진 미술전시관을 관람했다. 그전 우리네 보통 가정에서도 흔히 헝겊 조각을 꿰매 밥상 덮개로 쓰던 조각보를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이 전시되어 있어 눈길을 끌었다.
♣ 인사동 거리를 산책하였다.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찾는다는 골동품 상가엔 우리의 전통 공예품보다 모조품 중국산이 더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어 씁쓸해진다.
♣시립 노인 복지회관을 들어가 보았다.
안국동 로터리에서 수운회관 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3층 건물의 대형 복지회관이다. 영화 상영실, 체력 단련실, 노인 상담실, 바둑 장기실, PC방, 식당, 휴게실 등이 잘 갖춰져 있고 각종 교양 취미 교육프로그램이 운용되고 있다. 장수시대에 어디가나 넘쳐나는 노인들로 젊은이들이 불쌍하다는 말이 나오는데 표 계산이 빠른 정치권 일각에선 노인복지당을 만든다고 하니 그걸 반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를 일이다.
♣ 탑골공원도 둘러보았다.
내부 대 보수공사 이후 처음 들어가 보는데 토목건축과 풍수지리에도 안목이 있는 枝木의 비평이 예리하다. 삼일문 들어서자마자 밟게 되는 바닥은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은 인조대리석으로 쫘악 깔았는데 그것은 포장재를 잘못 선택한 것이고, 독립선언문을 부조해 놓은 석벽과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는 志士의 동상이 西쪽을 향해 있는 것도 지극히 딱한 모습이라고 一針을 가한다. 숭례문에 이어 국보 제2호인 원각사 10층 석탑은 유리館에 잘 모셔져 있는데 새삼 탑신에 새겨진 美麗하고 精巧한 彫刻물 들을 눈여겨보았다.
♣ 광장시장 먹자거리도 갔다.
우리나라에 외식문화가 오늘날처럼 번성하기 오래 전부터 이곳은 먹勢가 세었던 전통 있는 먹자거리지만 오늘도 좀 과장해 입추의 여지가 없이 먹자는 人波로 붐빈다. 우리 3인도 좁은 공간에 자리를 잡고 앉아 녹두빈대떡과 찹쌀 순대, 돼지 머릿고기 등을 푸짐하게 시켜 장수막걸리 세 병을 곁들여 포식을 했다.
♣ 옛날식 다방에 앉아 한담을 나누고..
요즘 커피숍이나 카페엘 들어가면 공연히 젊은이들에 눈치가 보여 자릴 차지하고 늘어지게 앉아 있기가 불편하지만 오늘 어쩌다가 만난 지하상가 다방은 최백호 유행가 가사에 나오는 바로 그 “옛날식 다방”이다. 마담도, 실내장식과 소품도, 우리 3인을 포함해 드문드문 앉은 늙수그레한 客도 모두 타임머신을 타고 수십 년 전 그 시절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오늘 하루 첫 탐방 행사를 성공적으로 잘 치른 걸 자축하며 한담을 나누다가 밤이 이슥해서야 작별하였다.(글: 자은 백승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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