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기념물 탐방

천연기념물 탐방 2

시조시인 2012. 4. 10. 15:35

                                                                                                           (사진촬영: 지목 이정민)

 

                                     창덕궁 회화나무군

 

                                                     김 재 황

 

                                   열린 대문 들어서면 늙은 나무 여덟 그루

                                   마치 두 손 마주잡고 양쪽으로 줄 서 있듯,

                                   도대체 어떤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냐?

 

                                   감아 놓은 세월 자락 푸른 이끼 짙게 끼고

                                   힘이 좋던 몸뚱이들 허물어져 버린 지금,

                                   나밖에 누가 또 있냐? 위로의 말 보내는 이.

                                                                                                     -(천연기념물 제472)

 

 

<탐방 제 3> 창덕궁 회화나무 (천연기념수 제 472)

0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율곡로 99 (창덕궁 내)

0 지정일 : 2006. 4. 6

0 탐방일 : 2012. 2. 11

창덕궁의 정문인 敦化門으로 들어서면 觀覽路 양 옆으로 列植8그루의 회화나무를 만나게 된다. 宮闕 입구주변에 심는 회화나무는 중국 궁궐 건축 기준인 <周禮>에 따른 것인데 원래 돈화문 주변은 朝廷 官僚들의 執務官廳이 배치된 外朝의 공간에 해당하였다.

外朝는 왕이 三公判書公卿大夫를 접견하여 國事를 논하는 장소로서 회화나무는 領議政,右議政 三公 좌석의 標識으로 삼는 법이라고 한다.

회화나무는 宮闕 외에도 寺刹과 선비의 고장인 書院이나 書堂 등에도 심어 學者樹라는 칭호도 얻었다.

이 나무의 수령은 300 ~ 400년으로 推定되고 樹高15~16m, 胸高 둘레가 4~5m에 이르니 成人 두세 명이 팔을 벌려 잇대야 겨우 감싸 안을 만한 우람한 자태를 지녔다. 그러나 여덟 그루 중 몇 그루는 이미 天壽를 다한 듯 노쇠한 모습이다.

회화나무의 꽃봉오리는 槐米, 念珠 모양의 꼬투리 열매는 槐實로 불리는데 이는 모두 人體血液循環을 다스리는 藥材로 쓰이고 木材槐木良質家具材로 쓰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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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창덕궁에 간 김에 궁 안에 있는 또 다른 천연기념수인 뽕나무와 다래나무도 만나 볼 셈이었으나 그 접근이 이런 저런 제약으로 불가능하였다.

우선 창덕궁의 전속 안내원인 듯한 젊은 친구에게 물으니 그것을 보려면 일주일 전쯤 미리 예약을 해야 하고, 사진을 찍어도 무슨 초상권료를 내야 한다는 둥 납득하지 못할 소리를 한다.

또 몇 사람에게 물어 이번엔 후원입구 매표소로 가니 제복도 갖춰 입은 정규 근무자가 있어 그들을 만났다. 그런데 다래나무는 절대로 볼 수 없고 다만 뽕나무는 먼 발치에서 바라다 볼 수는 있는데 거길 들어가려면 경로 우대라는 것은 없고 아무리 늙은이라도 입장료를 내야 하고 그것도 아무 때나 들여보내는 게 아니고 매시 정각에만 사람들을 모아서 들여보낸다고 한다.

왜 그렇게 까다롭게 구는가를 따지니 관람 동선을 포함한 제반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 말단 현장근무자와 시비를 다툴 일은 아니고 그 규정을 만들었을 듯한 고명한 문화재 무슨 위원들이나 최종 결재를 했을 문화재 청장에게나 따져 볼 일이겠기에 오늘은 그만두고 발길을 돌렸다.

비록 직접 대면하지는 못 했지만 찾아보기를 별렀던 뽕나무와 다래나무 兩位 천연기념수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어 그들에 관해 몇 마디 이야기를 여기에 부기해 둔다.(글: 자은 백승돈)

 

                                                                                                          (사진촬영: 지목 이정민)

                                             창덕궁 향나무

 

                                                           김 재 황

 

                                          왕의 그림자 모시고 하늘 앞에 엎드리면

                                          맨몸 사른 그 아픔이 나라 마음 닦았는데

                                          여태껏 용틀임으로 긴 세월을 낚고 있다.

 

                                          난데없는 큰 바람에 비록 윗동 꺾였으나

                                          구름 잃은 용 한 마리 웅크리고 숨은 모습

                                          우짖음 머금은 채로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천연기념물 제194)

 

 

<탐방 제 4> 창덕궁 향나무 (천연기념수 제 194)

0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와룡동 2-71 (창덕궁 내)

0 지정일 : 1968. 3. 4

0 탐방일 : 2012. 2. 11

昌德宮은 조선왕조 태종 4(1404)에 왕실의 別宮으로 축조되어 正宮인 경복궁의 동편에 있다고 하여 東闕로도 일컬어졌다. 경복궁과 창덕궁이 모두 임진왜란 때 戰火를 입었으나 전란 후 그나마 손상이 경미한 창덕궁을 우선 재건하였고 그 후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창건하기까지는 창덕궁이 사실상 정궁의 역할을 했다. 창덕궁은 국내에 잔존하는 궁궐 중에선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어 UNESCO 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었다.

창덕궁에는 이 향나무(194)와 더불어 다래나무(251), 뽕나무(271)와 회화나무(272), 이렇게 4의 천연기념수가 보존되어 있다.

향나무는 우리나라 중부 이남과 일본 등지에 분포하여 일명 상나무, 노송나무로도 불린다. 강한 향기를 지녀 祭祀 焚香材로 쓰이며우리나라에서 庭園이나 公園造景樹로 많이 심는다.

창덕궁 향나무의 수령을 700년으로 추정하는데 이는 이 창건된 지도 600여 년이 지났고 그 시기에 이미 상당 수령의, 樹形이 갖춰진 成木移植했으리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 후 왕의 공간에서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귀하게 자랐겠으나 王朝興亡盛衰를 지켜보는 그 長久한 세월의 무게를 버티기에는 힘이 부치는 모습이다.

이 나무는 가지가 東西南北으로 1개씩 뻗었는데 南枝는 잘렸고 北枝枯死했고 東枝는 누워 구불구불 奇形으로 자랐다.

특히 지난 2010년 여름 태풍 곤파스의 타격으로 주지가 상해 원래 壯觀이던, 하늘을 날아오르는 <飛龍>의 형상이 손상되었으나 온갖 風霜災難을 격고도 아직 毅然한 모습이어서 천연기념수의 타이틀은 보존하고 있다.

그때 잘린 가지는 버리지 않고 木香材로 가공되어 宗廟 祭禮宮陵 행사에 焚香材로 쓰인다 하니 死後나마 사랑과 보살핌을 주고받던 옛 國王들을 다시 만나는 形局이라 하겠다.(글: 자은 백승돈)

 

                                                                                                         (사진촬영: 지목 이정민)

                                         선농단 향나무

 

                                                       김 재 황

 

                                       나라님이 직접 와서 풍년을 기원하던 곳

                                       그 남서쪽 모퉁이에 보란 듯이 서 있으니

                                       제사가 시작될 때엔 매운 연기 짙었겠다.

 

                                       내어 걸은 가마솥엔 설렁탕이 펄펄 끓고

                                       한 말들이 막걸리에 뿌리 끝이 젖던 얘기

                                       문인석 그 앞에 서서 어제인 듯 되뇐다.

                                                                                                         -(천연기념물 제240)

 

 

 

<탐방 제 5> 선농단 나무 (천연기념수 제 240)

0 소재지 : 서울 동대문구 제기2274-1 (선농단 내)

0 지정일 : 1972. 7. 31

0 탐방일 : 2012. 2. 11

先農壇은 농사법을 인간에게 傳授해 줬다는 神話적 인물인 神農氏后稷氏에게 先農祭를 지내는 祭壇이다.

先農祭禮 儀式은 중국에서 기원한 것이지만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우리나라에 전래되었고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왕조 시대에도 개국 초기부터 역대 임금이 그 에 따라 풍년 祈願祭를 지냈다.

조선 개국 초기에는 그 祭禮를 지내는 籍田이 개경과 한양에 양분되어 있었는데 지금의 선농단 남쪽 들판이 한양의 적전지로서 현재의 전농동 일대에 해당한다.

해마다 驚蟄다음 첫 번째 돼지날(亥日)에 국왕이 친히 선농단에 행차 하여 선농제를 지내고 몸소 소를 몰아 밭을 가는 親耕행사를 거행했다. 간혹 病弱한 국왕이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듯도 하다.

친경 행사에 관한 儀軌 기록에 따르면 그야말로 3D(힘들고, 불결하고, 위험한) 작업인 소 몰아 밭가는 일에 대한 국왕의 안전을 세심하게 배려한 측면이 있음을 엿 볼 수 있다. 즉, 건장한 농부가 좌우로 국왕을 保衛했음은 물론이고 국왕의 耕牛 앞에 또 다른 소를 앞 세워 캄보이하게 함으로써 국왕의 소가 온순히 따라 가도록 유도했다고 한다.

왕이 몇 걸음 儀禮的인 친경을 하고 나면 곧 이어 세자와 공경 대부 순으로 참여하고 그 후 일반 농부가 마무리지었다고 한다.

선농제와 친경 행사를 마친 후 소를 잡아 끓인 국밥을 행사 참가 인원들이 함께 나눠 먹었는데 그것이 <先農湯>이고 그 이 변해 오늘의 <설렁탕>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국왕 친경행사의 현대판 격인 대통령의 勸農행사에 관한 짧은 일화 한 토막을 부기한다. 최근에는 별로 그런 행사를 하는 것 같지 않지만 제3공화국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해마다 권농일에 대통령이 모내기 행사를 하고 논두렁에서 농민과 막걸리를 함께 따라 마시기도 하였기에 그런 장면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었다. 1960년대 중반 나는 농촌진흥청에 적을 두고 근무한 적이 있는데 마침 권농일을 맞아 농진청 試驗沓地에 소위 貴賓沓을 설치하고 그 행사를 준비 하는 것을 목격했다. 대통령이 발 벗고 들어가 모를 심을 논을 '귀빈답'이라 하여 행사 며칠 전부터 인부를 동원해 고운체로 논흙을 체질해 걸렀고 거머리 죽이는 농약도 뿌렸다. 행여 논흙에 사금파리나 유리조각이라도 섞여 있을까 우려해서이고 거머리가 종아리를 물어 피를 흘리게 되는 流血事態(?)를 미연에 방지하자는 세심한 배려였다. 그런 만반의 조치를 한 귀빈답에는 행사 직전까지 줄을 치고 관계자 외의 접근을 엄히 통제한 것은 물론이다. 세월이 바뀌어 아무나 대통령을 우롱하고 험한 말을 마구 해대는 세상이 되었지만 국가원수에 대한 어느 만큼의 敬意禮遇는 지켜지는 게 옳다는 생각이다.

이 선농단 향나무의 수령을 약 500년 정도로 보는데 이는 선농단의 축조시기인 1476년을 기점으로 추정한 것이다. 국내 향나무 보호수 중에서는 고참 급에 속한다.

향나무는 구불구불 자라는 특성이 있지만 이 나무는 樹高 13m胸高 둘레 2.3m로 곧고 우람하게 자라 老益壯을 과시하고 있다. 선농제가 끝나면 祭酒를 이 나무 주변에 뿌려 를 갖췄다고도 한다.

선농제와 국왕의 친경 의례는 1909(융희 3)에 마지막 행사를 갖고 폐지되었다는데 그렇다면 조선왕조의 <><><><><><><>로 시작 해 <><><><><><><>에 이르는 스물일곱 분 임금님 대부분이 이곳에 거동해 이 향나무와도 대면하시지 않았겠는가 여겨진다.

고시조에 이르기를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라고 읊었듯이 역대 임금님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지만 이 향나무는 오늘날 까지도, 아니 앞으로도 오랜 세월 동안 울울창창하겠기에 인간의 有限함과 無常함을 切感하게 된다.

(글: 자은 백승돈)

 

 

 

 

  -(사진촬영: 지목 이정민)

 

 

 

창덕궁 뽕나무

 

김 재 황

 

가냘프고 고운 손길 그 가지에 스칠 때면

잎사귀야 따든 말든 하늘 밖이 멀리 뵈고

누에가 고치를 짓듯 긴긴 밤을 서렸으리.

 

비록 세월 흘러 와서 늙은 몸이 되었지만

나라에서 첫 손 꼽는 아름다움 잃지 않고

담 너머 눈길을 주니 비단 같은 마음이리.

                     -(천연기념물 제471호)

 

 

창덕궁 뽕나무 (천연기념수 제 471)

0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율곡로 99 (창덕궁 내)

0 지정일 : 2006. 4. 6

0 탐방일 : 2012. 2. 11

(*당일에 세 사람은 후원으로 들어가는 문 앞까지 같으나 여의치 않아 입장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사진을 담당한 지목 이정민 형이 그 다음날 일찍이 가서 사진을 찍었다. 다행이 자은 백승돈 형과 본인은 전에 가본 적이 있기에 그 기억을 살려서 글과 작품을 썼다. 녹시 씀)

뽕나무 老巨樹朝鮮王朝 시대 養蠶 장려 시책을 말해 주는 象徵이라 하겠다. 누에를 침으로써 고치에서 실을 뽑아 비단을 짜는 일은 그 당시 나라의 주요 物産施策의 하나였다.

조선왕조 초기(태종 년간, 1409)에 중국 나라 成王公桑제도를 본따 궁궐 후원에 뽕나무를 심어 養蠶을 권장했다는 기록이 있고 세종 조에도 창덕궁에 1,000, 경복궁에 3,590, 그리고 한강 밤섬에 8,280주의 뽕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러니 이 천연기념수 <471> 뽕나무는 조선양잠의 중요성을 考證할 수 있는 수많은 뽕나무 중 代表格이고 더욱이 역대 왕비의 손길이 닿았을 것으로도 여겨지는 의미 있는 遺物이라고 할 수 있다.

양잠업의 권장은 近現代까지 이어져 창덕궁 후원 西香閣養蠶所를 설치하여 양잠의 신 <西陵氏>에게 제사를 지내는 親蠶禮가 일제 강점기에도 행해졌고,

가까이는 제 3공화국 60~70년대에도 양잠 진흥시책이 시행되어 내가 入村한 강원도 횡성 병지방 계곡 가에도 그 시절에 심었다는 수령 50~60년짜리 뽕나무가 몇 주 남아 있기 때문에 해마다 오디 철이 되면 나무 밑바닥에 시트를 넓게 깔고 저절로 익어 떨어지는 오디를 한말쯤 쓸어 모아 오디쨈도 만들고 오디를 담가 먹는다.(글: 자은 백승돈)

[探訪 別記]

두 번째 천연기념물 탐방에 나서는 211()은 새롭게 한반도 冬節期의 기후특성이 되었다는 “533이 시작되는 날이어서 두 뺨에 스치는 바람결도 요 며칠 동안의 그 혹독한 칼바람은 아니었다. 우리 3인은 종로 3가 옛 단성사 앞에서 만나 돈화문으로 직행해 경로 우대 免費票를 받아가지고 창덕궁에 입장하였다.

초입부터 좌우로 줄지어 선 노거수 회화나무와 규장각 쪽으로 모퉁이를 돌아가 어렵지 않게 진기한 형상의 그 향나무를 만나 볼 수 있었다. 문제는 같은 내에 있다는 뽕나무와 다래나무를 보기 위해, 위에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약간의 실랑이를 벌리다가 그만두고 다음번 방문 예정지인 先農壇으로 향했다.

점심때가 되어 선농단 가는 길목인 전철 제기역 부근에서 식사를 하였다. 그 주변에는 <왕갈비탕>집이 늘어 서 있는데 간판만 보고도 왕갈비임을 느끼게 할 만큼 어마어마하게 큰 글씨로 간판들을 해 붙였다. 한 군데를 들어서니 넓은 홀엔 食客이 꽉 들어 차 앉아 있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이들도 있다.

길 건너편을 보니 의 그 대문짝만한 왕갈비 간판이 붙은 집인데 좀 한산해 보이기에 그 집으로 들어가서 식사를 했다. 길 건너 집과 뭐가 어떻게 다른지는 갈비탕을 비교해 보지 않았으니 그건 알 수 없으나 풍수지리에 정통한 枝木에 따르면 음식점 터의 地運 또는 向方에 관계가 있고 또 업주의 財運과도 무관치 않을 거라 풀이하고, 일단은 푸짐한 갈비탕을 맛있게 잘 먹었다.

나오면서 業主인지 從業員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잘 먹었습니다하고 인사를 하니 대꾸를 하는 둥 마는 둥 정신이 다른 데 팔려 있다. , 풍수지리에 덧붙여 현대 마케팅 기법에서도 문제를 찾아 봐야 할 일이로구나 했다.

제기역에서 선농단 가는 길을 주민에게 물어서 密集한 주택가 골목을 헤집고 찾아갔다. 선농단의 첫 인상은 조선왕조 오백년 동안 임금님이 거동하여 큰 행사를 치르던 곳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협소한데다 옹색해 보이기까지 한다. 산업 근대화와 도시개발 과정에서의 亂開發로 주택지, 학교, 어린이 놀이터 등이 犯接했고 그리하여 역사의 소중한 유적지는 어쩔 수 없이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던 듯싶다.

최근 이 지역 관할 동대문구청에서는 선농단 정비 사업을 계획하여 설계 공모까지 마쳤다고 하는데 已往에 들어찬 주변 시설 들을 몽땅 수용 철거해 옛 원형을 복원할 작정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또 다른 난개발이 우려되기도 한다. 그래서 인지 인근 주민들의 집단 반대에 부딪쳤다고도 한다.

선농단 향나무 탐방을 마치고 경동시장 지하에 있는 수산시장 먹자거리를 가기로 하였다. 옛 사대부고 자리와 安岩川邊을 지나면서 ‘60년대 초의 대학교 登下校 길이었음을 돌이켜본다. 당시 도로 위를 발발거리고 다니던 단칸짜리 電車를 이용해 제기역에서 내리고 타면서 그 천변 길을 걸어서 안암동의 학교를 오갔었다. 등하교 길에 자주 동행하면서 젊은 시절의 憂愁苦惱를 함께 吐露하던, 이제는 故人이 된 서산 팔봉출신 柳勝守를 잠시 회상해 보았다. 그는 그 당시 習作이지만 몇 편을 내게 보여주던 文人 志望生이었다.

안암천 다리를 건너면 곧 옛 城東驛 터를 지난다. 지금은 무슨 巨大 상업시설이 들어섰지만 그곳은 주로 군용 열차가 着發하던 기차역이었다. 신병 훈련을 마치고 일시 휴가를 얻었다가 전방의 補充隊自隊를 가려면 군용 지급품을 담은 따블빽을 울러 메고 꼭 성동역서 군용열차를 타게 된다. 綠施枝木도 그랬다지만, 나도 ‘654월 학군장교로 임관되어 광주 송정리에 있는 戰鬪兵科 교육사령부에서 3개월의 초급장교 훈련과정을 마치고 잠시 휴가를 나왔다가 전방 任地로 가면서 그 열차를 이용했다. 당시 나의 어머니는 重患鬪病 중이어서 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몹시 무거웠고 빗속에서 성동역까지 나를 배웅해 준 여동생과의 우울한 작별도 지금 회상하면 마음이 아려진다.

제기동 약령시장을 지나 경동시장 지하 수산물 판매장 주변의 해산물 전문 음식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枝木은 누구보다도 부침성이 있고 말씨가 고울 뿐더러 인상도 좋기에 어딜 가나 女主와 수작을 트게 됨으로써 분위기를 잘 만든다. 여기서 감히 수작(酬酌)”이란 용어를 쓰는 건 綠施의 가르침이 있어서다. 나는 수작이란 말이 엉큼한 속셈으로 상대방을 꾀려는 말짓거리쯤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원래는 '서로 술잔을 주고받는다는 뜻'으로 '나그네가 주막의 주모와 술잔을 주고받는 것'에서 비롯되었단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식으로 담론을 주고받는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언어의 鍊金術師이고 글로서 비단을 짜고 수를 놓는 文士의 해설이니 신뢰해도 될 성싶다. 어쨌든 枝木의 몇 마디 수작에 女主는 금방 즐거워져서 해물탕만 주문한 우리에게 코끝을 찡하게 만드는 홍어 살점도 몇 점 곁들여 준다

그 옛적 군용열차를 탔던 성동역 터를 방금 전에 지나온 터라 그 시절의 아련한 추억이 되살아나기도 하여 이야기는 자연스레 군 입대하던 시절로 흘러갔다. 남자 셋이 만나면 으레 군대 얘기가 나오는 법이라니, 아무리 늙었어도 우리는 남자임에 틀림없는지라 그게 이상할 것도 없다.

나는 학도군사훈련과정(ROTC)을 마쳤기에 졸업하자마자 곧 군에 소집되었으나 綠施枝木은 졸업 후에 어차피 군복무를 해야 하겠는데 징집영장이 나오질 않아 그것을 苦待했다고 한다. 그걸 막연히 앉아 기다리는 것도 無謀해 적극적으로 군에 가는 길을 뚫었다. 때마침 서울지구 징집자 집결이 한양대 교정에서 있었는데, 그 결원의 빈 자리를 綠施가 노렸다. 綠施는 징병관인 육군 대위에게 맨입은 아니지만 잘 말하여 현지입대 기회를 잡았다고 한다.

枝木武勇談은 더욱 흥미롭다. 당돌한 면이 있고 機智도 있는 枝木은 아예 서울지구 병무청장실로 쳐들어갔다고 한다. 制止하는 부속실 근무자에겐 외삼촌을 만나러 왔노라 하니, 그래도 일류대학 배지를 달고 교복도 갖춰 입은, 잘 생긴 청년인지라 신뢰를 했던지 들여보내 줘서 청장을 만났고 아마 구변 좋게 말을 잘 했겠지만 그 청장한테서 메모지를 건네받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부친에게 저 내일 군대 가요!”하직인사 드리고 그 이튿날 바로 입대했다고 한다. 그 당시 청년들은 국토방위 의무를 준수하기 위해 그토록 적극적이었는데 근래 생니를 뽑는다는 둥 어깨뼈를 탈골시킨다는 둥 이런 저런 구실을 만들어서 군대 가길 회피하려는 젊은이도 있다고 하니 심히 개탄스러운 일이다.

해물탕을 안주하여 막걸리를 몇 병 걸치고 거나해진 김에 이번에는 분위기가 좋은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현대식과 옛날식을 아우르는 것 같은 분위기에 생맥주도 함께 파는 집이다. 여기서도 역시 枝木은 실력을 발휘함으로써 미모의 여종업원과 몇 마디 의 그 수작을 건네는 듯싶더니 그녀는 아예 枝木 옆자리에 붙어 앉아 떠날 줄을 모른다. 생맥주로 對酌인지 酬酌인지를 하는 동안 분위기는 무르익었고, 그들을 건너다보던 綠施가 짐짓 눙쳐서 '그대들만 재미보지 말고 이쪽도 좀 챙겨 주거라' 하니 그는 알겠다고 하면서 웨이팅리스트에 우선 綠施를 올려 주고, 그 다음 대기번호표를 自隱인 나도 받은 셈 치기로 하였다. 이렇게 웃고 즐기는 가운데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이렇게 제 2차 천연기념 노거수 탐방도 성공적으로 유쾌하게 잘 마쳤다.(글: 자은 백승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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