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청나라 황실 이야기와
우리가 펼쳐야 할 녹색 정신
김 재 황
나는 우리 민족의 우수함을 내세우고자 하는 마음이 추호도 없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이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흘러갔으며 어떠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우리 누구나 마땅히 알고 있어야 한다. 뿌리를 제대로 갖추지 않고서 어찌 가지가 무성하겠는가. 그래서 ‘숭본이식말’(崇本而息末)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못났으면 못난 대로 잘났으면 잘난 대로 그 역사를 우리는 껴안아야 한다. 그리고 공자의 말대로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싫어하지 말아야 한다.’ (過則勿憚改 논어 1-8) 정말이지, 과거는 미래를 위하여 필요하다. 우리는 이미 맑고 푸른 과거를 지니고 있다. 이제는 그 푸른 과거를 딛고 녹색 정신을 펼쳐야 한다.
오래전의 일이지만, 나는 ‘마지막 황제’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때 영화의 한 장면이 지금까지 잊히지 않고 있다.
조용한 재판장 안이었는데, 여러 사람이 한 젊은이를 주목하고 있었다. 판사가 엄숙한 목소리로 그 젊은이에게 물었다.
“그대의 이름이 무엇인가?”
젊은이는 대답했다.
“아이신지료 푸이.”
젊은이의 대답을 들은 판사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참 이상한 성이군.”
1931년, 일본 관동군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청조에서 폐위된 마지막 황제 ‘푸이’(傅儀)를 황제로 옹립하여 ‘만주국’이라는 괴뢰정권을 세웠다. 그러나 일본이 패망하게 되자, ‘푸이’도 법정에 서게 되었다. 당시 재판은 모택동이 실시하였고, 판사는 한족(漢族)이었다.
‘푸이’의 성씨는 ‘아이신지료’이고 한문으로 ‘애신각라’(愛新覺羅)라고 쓴다. 한족인 판사로서는 이상한 이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런 성씨도 있다.
중국의 장춘에는, 그때 만주국 정부 국무원으로 사용하던 정부청사가 지금은 ‘푸이’와 ‘만주국’ 관계 자료를 전시하는 ‘푸이박물관’으로 남아 있다. 박물관에는 황제 ‘푸이’가 사용하던 집무실과 접견실을 비롯하여 국무위원들의 회의실 및 황후가 쓰던 방과 침실, 그리고 ‘푸이’의 집기와 기구한 인생 이야기들이 담긴 문서들이 가득 전시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뜰 입구의 벽에는 ‘愛新覺羅’(애신각라)라는 글자까지 새겨져 있다.
‘푸이’뿐만 아니라, 청나라 왕실의 성씨가 모두 그렇다. 아니, 청나라 전인 ‘후금’(後金) 때부터 그렇다. 1616년에 후금을 일으킨 ‘누르하치’는 그 이름을 ‘애신각라 노이합적’(愛新覺羅 努爾哈赤)이라고 쓴다. 그리고 1636년에 대청국 황제에 오른 태종 홍타이지는 ‘애신각라 황태극’(愛新覺羅 皇太極)이라고 쓰며, 북경으로 천도한 3대 순치제(1643~1661)는 ‘애신각라 복림’(愛新覺羅 福臨)이라고 쓴다. 또, 중국 내지를 통일한 강희제(1661~1722)는 ‘애신각라 현엽’(愛新覺羅 玄燁)이요, 절대군주권을 확립한 옹정제(1722~1735)는 ‘애신각라 윤진’(愛新覺羅 胤禛)이요, 그런가 하면 중국의 최대 판도를 이룩한 건륭제(1735~1795)는 ‘애신각라 홍력’(愛新覺羅 弘曆)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성씨의 풀이에 있다. 우리나라 일부의 사람들이 이 청조의 성씨인 ‘애신각라’(愛新覺羅)를 가리켜서 ‘애신’은 ‘신라를 사랑한다.’라는 뜻이고 ‘각라’는 ‘신라를 기억한다.’라는 뜻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누르하치를 ‘신라 경순왕의 후예’라고 말하기도 한다.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생각에 ‘愛新覺羅’(애신각라)라는 한자는 만주말의 음역이라고 여겨진다. 예컨대 우리가 불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석가모니’(釋迦牟尼)의 경우와 같다. 이 한자어는 음역이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시 말해서 이는 인도말로 ‘샤카무니’(Sakya-Muni)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샤카’는 종족 이름이고 ‘무니’는 ‘성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샤카무니’는 ‘샤카족의 성자’라고 풀이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자로 쓰인 ‘애신각라’(愛新覺羅)는 만주말인 ‘Aisin Gioro’의 음역일 뿐이다. 만주말로, ‘Aisin’은 ‘금’(金)을 뜻하고 ‘Gioro’는 ‘겨레’(族)를 뜻한다고 한다. 아마도 이는 ‘후금’을 가리키는 성싶다. 그런가 하면, ‘Aisin’은 족명(族名)이고 ‘Gioro’는 성(姓)이라고도 한다. 족명은 우리의 본관이다. 말하자면 ‘김해 김씨’의 ‘김해’와 같다.
또 중국의 어떤 이들은 “‘애신각라’라는 가문은, ‘후금’이나 만주 8대 성씨 중에서 발견할 수 없으므로 원래 만주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따라서 분명히 중국의 송나라가 망한 후인 김제국(金帝國) 시절에 만주지방으로 망명했던 ‘교로’(交魯) 가문일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교로’의 북중국 발음이 ‘Jiao-lu’여서 ‘애신각라’의 ‘각라’와 중국식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을 펴고 있기도 하다. 참으로 중국인들은 엉뚱하다. 이민족인 만주족에게 무려 276년 동안이나 다스림을 받았던 사실을 어떻게 해서든지 숨겨 보려고 한다.
그렇다면 ‘후금’이란 어떤 나라인가. 1616년 1월, 누르하치가 ‘해서 여진’의 대부분을 통일하고 요령성 신빈현에서 왕의 자리에 올랐는데, 그 나라 이름을 역사상으로 ‘후금’(後金)이라고 칭한다. 실로 금(金)나라(1115~1234)가 멸망한 지 300여 년 후의 일이었다. 그 당시에 그의 나이는 53세였으며 연호를 정하지 않고 자신의 호를 ‘천명’(天命)이라고 정했다. 이게 그 후에 연호처럼 사용되었다.
그런데 나라 이름을 ‘후금’으로 정한 이유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1604년, 누르하치는 부하들을 불러놓고 ‘이제부터 시작이다.’라고 말하며 본격적인 여진 통일 전쟁을 준비하도록 명령했다. 1607년에는 ‘후이파’를 휩쓸고, 1613년에는 ‘우라’(烏拉)를 제압하여 병합함으로써 명실공히 여진을 통일하였다. 그 후 1616년, 누르하치는 칸(汗)에 올랐다. 그는 새 나라의 이름을 ‘대금제국’(大金帝國)의 영광을 계승하는 의미에서 ‘후금’(後金)으로 하고 연호를 ‘천명’(天命)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누르하치가 신라 경순왕의 후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금제국’이 아니라 ‘대김제국’이며, 그에 따라 ‘후금’이 아니라 ‘후김’이라고 해야 옳다고 강변한다. 신라 왕실의 성씨가 ‘김씨’이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역사적 근거도 있다. 그 근거로 그들은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를 들었다. 그 안에, “전해 오는 역사책에 의하면 신라왕은 성이 ‘김씨’로 수십 세를 이었다. 금의 선조가 신라에서 온 것은 의심할 바가 못 되며 건국할 때 나라 이름은 여기에서 취했다.”라는 글이 씌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누르하치의 성도 ‘아이신지료’(愛新覺羅)이다. 그러나 누르하치의 선조가 최초로 거주하였던 ‘Gioro’를 성씨로 삼았다고 전한다. ‘Gioro’는 지금의 흥룡강성 이란(伊蘭, 흥룡강성 하얼빈시 依蘭縣) 일대로 알려졌다. ‘Aisin Gioro’의 발상지는 ‘영고탑(寧古塔) 구성(舊城) 동문(東門)밖 3리(里)’쯤의 거리란다. ‘Gioro’라는 말은 여진어(女眞語)로 ‘원방’(遠方) 또는 ‘원지’(遠支)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Aisin Gioro’는 ‘황금과도 같은 고귀하고 신성한 종족’이라는 뜻이 된다. 청나라가 망하고 나서 ‘아이신지료’(愛新覺羅)의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감추기 위하여 ‘김’(金)씨나 ‘조’(肇)씨나 ‘조’(趙)씨나 ‘애’(艾)씨나 ‘나’(羅)씨나 ‘왕’(王)씨나 ‘손’(孫)씨나 ‘범’(范)씨 등으로 많이 성을 고쳤다고도 한다.
일설에 의하면, 누르하치의 성이 6가지나 된다고도 말한다. 즉, ‘아이신지료’(愛新覺羅)를 비롯해서 ‘동’(佟)이나 ‘동’(童), 그리고 ‘최’(崔)나 ‘작’(雀)이나 그냥 ‘각라’(覺羅) 등이 모두 그의 성이라고 한다.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라는 책에는 누르하치의 성이 ‘동’(佟)으로 버젓이 기록되어 있다.
명나라는 여진족이 우리나라 한족(韓族)과 가깝게 지내는 것을 항상 경계했다. 두렵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명나라에서는 그 길목인 요동지방에 진출하여 정료위(定遼衛)를 설치했다. 그리고 1387년, 그 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나하추’(納哈出)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그 후에 다시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여 고려와의 연결을 차단하려고 하였다.
1388년, 명나라가 고려에 철령위의 설치를 통고하자, 당시 최영의 고려 조정에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여 명나라와 전쟁을 각오하고 요동정벌군을 보냈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좌절되고, 그 때문에 1392년에는 고려가 망하게 되었다. 고려의 뒤를 이은 조선은 사대친명(事大親明)을 표방하고 명나라에 대한 반항의 의사가 전혀 없음을 밝혔다.
명나라는 만주의 여진족을 복속시킨 후에 그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건주’(建州) ‘해서’(海西) ‘야인’(野人)의 3개 그룹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건주’와 ‘해서’는 지명이고 ‘야인’(野人)이란 글자 그대로 ‘미개인’이라는 뜻이었다. 다시 말해서 1403년, 명나라에서는 남만주에 흩어져 살고 있는 여진족을 다스리기 위해 길림(吉林) 부근인 휘발천(揮發川) 상류에 ‘건주위’(建州衛)를 설치하고, 다시 두만강 유역인 회령(會寧)에 ‘건주좌위’를, 이어서 그 동쪽에 ‘건주우위’를 설치하였다. 이를 가리켜서 ‘건주 3위’라고 한다. 그 후에 ‘건주 3위’는 만주의 ‘혼하’(渾河) 유역으로 이전하였다. 이는, 중국이 전통적으로 써 오던 이이제이(以夷制夷)의 교묘한 술책이다. 조선에서는 ‘건주여진’도 ‘야인’이라고 불렀는데, 아마도 이들에 대한 강온정책을 병행하여 때로는 정복하고 때로는 달래기도 하였던 것 같다. 세종 때, 최윤덕(崔閏德)과 김종서(金宗瑞)는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살던 여진족을 몰아내고 각각 4군과 6진을 설치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야인’들을 ‘토관’(土官, 현지인으로 채용한 관리)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세조 때였다. 토관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자, 어유소(魚有沼)와 남이(南怡) 등을 보내어서 토벌하였다. 그 결과로 건주여진의 세력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렇지만 살길이 막힌 그들은 툭하면 무리를 이루어서 자주 변경을 침략하였다. 하는 수 없이 조선에서는 여러 가지 회유책으로 이들을 달래야 했다.
이미 태종 때부터 국경지대에 무역소를 열어서 필요한 물자를 교역해 가도록 했고, ‘상경야인’(上京野人)이라고 하여 조공(朝貢)을 바치는 추장(酋長)에게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호군’(護軍) ‘사직’(司直) ‘도만호’(都萬戶) ‘만호’(萬戶) ‘천호’(千戶) ‘백호’(百戶) 등의 명예관직과 함께 얼마간의 녹봉(祿俸)도 주었다고 한다. 결국, 명나라와 조선의 여진에 대한 정책은 비슷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건주 여진은 주로 요동의 산간 지방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 우두머리는 명나라로부터 건주위(建州衛)의 지휘사로 임명을 받고 건주위에 딸린 여진족들을 다스렸다. 그러므로 건주위의 사람들은 명나라에 호의적이었고 사는 모습도 명나라를 따랐다.
누르하치는 ‘건주위’에 속하는 수장의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타커시’(搭克世)라는 사람인데, 성씨는 물론 ‘아이신지료’(愛新覺羅)였다. 누르하치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계모 밑에서 자라다가 19세 때에 가출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그는 조선족 출신인 명나라 장군 이성량(李成梁)을 알게 된 듯싶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이성량의 가신이 되었다고도 하나, 확인된 바는 없다. 이성량 장군은, 임진왜란 때에 명나라 제독으로서 구원군을 이끌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을 평양에서 격퇴한, 바로 그 이여송(李如松) 장군의 아버지이다. 이성량은 명나라로부터 여진족에 대한 전권을 부여받고 있었던 듯싶다. 요동 군사의 책임자였다.
아무튼, 누르하치뿐만 아니라,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塔克世)도 이성량을 도왔다. 1583년,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이성량을 돕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 당시에 누르하치의 나이는 25세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일시에 잃은 누르하치! 그 때문에 이성량은 누르하치에게 큰 빚을 졌다고 여겼다. 이성량은 그 보상으로 30통의 칙서와 30필의 말을 누르하치에게 수여하였다고 한다.
명나라의 여진족 분산 정책은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여진족 내의 군소 부족끼리의 싸움이 그치지 않았다. 이성량은 이에 대한 대책으로서 여진족 가운데에서 하나를 고른 후에 집중적인 지원을 하고, 명나라가 배후에서 그를 조종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그래서 선택된 사람이 누르하치였다.
이성량이 왜 누르하치를 선택하였는지, 그 내막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를 비롯하여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이성량을 도왔기 때문인지, 그가 여러 부족의 우두머리 중에서 가장 똘똘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가계가 이성량과 같이 조선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인지, 어느 게 옳은지는 알 수가 없다. 이성량의 주선으로 누르하치는, 명나라로부터 좌도독 용호장군의 칭호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매년 은銀 800냥씩의 보수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도움으로 누르하치는 건주 여진을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1586년, 마침내 그는 건주 여진의 이름을 ‘만주’(滿洲)로 개칭하였다. 여진족에서 이렇듯 만주족이 생겨났다.
그러면 여기에서 만주족(滿洲族, Manju)에 대한 설명을 들어 보기로 한다.
“만주(중국 동북부: 랴오닝 성, 지린 성, 헤이룽장 성)에서 발상한 퉁구스계 민족이다. 여진족의 후신으로,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를 잇는다(후계자, 後)는 뜻으로 ‘후금’(後金)을 건국하였다. 본래 ‘만주’라는 한문은 ‘만주’(滿珠)이나, 글자가 잘못 전해져서 ‘만주’(滿洲)로 쓰이게 되었다. 만주어의 민족명인 ‘Manju’의 차음이다. 중국 내의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이다. 만주족은 대대로 동북 지역에 살았으나 여러 가지 역사적인 원인으로 지금은 거의 각지에 분포되어 있다. 2000년 당시에 1,068만 명이 살고 있음이 조사되었다. 주요 분포지역은 동북 3성으로 7백만 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으며 그 중 랴오닝 성이 5백만 명 정도로 가장 많다. 과거에는 만주어를 일상어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청나라 시대에 진행된 민족문화의 한족화漢族化로 인해 현재에 만족어의 사용인구는 극소수이고 대부분 중국어를 사용한다. 현재에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인 ‘시버족’은 건륭제 시대에 원정군으로 참가하여 정착한 만주족의 후예이지만, 스스로 만주족과는 다른 별개의 민족으로 간주한다.”
다른 주장도 있다. 건주 여진족의 가장 존귀한 칭호는 ‘만주’(滿住)인데, 이를 누르하치가 계승해서 사용했다고도 말한다.
또한, 만주족의 기원에 대한 P. Huang의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한다.
“만주의 선사시대 조상은 황화유역, 몽골 고원, 태평양 연안, 바이칼 호 근처의 탈가 지역에 살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최초의 조상은 기원전 2세기에서 1세기에 살았던 숙신(肅愼)이었다. 이후 고구려와 발해의 지배 아래에서 ‘물길’ ‘말갈’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고려조부터는 여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조선조까지도 북부의 한민족들은 여진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역시 함경도 지방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고려 정계에 진출했으며 그의 휘하에는 많은 여진 병사들이 따르고 있었다. 또한, 그의 의동생 ‘퉁두란’ 역시 여진의 명문가인 ‘완안부’ 출신이다. 여진족은 동부 아시아의 광범위한 지역을 정복하여 12세기에 금나라를 세웠다. 완안 부족이 지배했다. 후에 징기스칸의 원나라에 정복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1586년, 누르하치가 여진족의 세 부족을 통합하고 연합된 부족의 이름을 ‘만주족’으로 바꾸었다. 누르하치는 유목 법령을 통합하여 강력한 제도를 만들게 되는데, 이는 후금(後金)과 ‘중국을 점령한 후의 청(淸)제국’이 된다.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는 ‘여진족’이라는 호칭의 사용을 금지하였다.”
여기에서 ‘숙신’이라는 말에 주목한다.
앞에서는 ‘숙신’이 기원전 2세기에서 1세기에 살았다고 되어 있으나, 진서(晉書)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숙신씨(肅愼氏)는 읍루(挹婁)이고 불함산(不咸山)의 북쪽에 있으며 부여(夫餘)에서 거의 60일 걸리는 곳에 있다. 그 땅의 경계는 동서와 남북이 수천 리이며 깊은 산의 궁벽한 산골에 거처하여 그 길이 험준하여 수레나 말이 왕래하지 못한다. 말이 있으나 타지 않고 재산으로 여길 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불함산’은 ‘백두산’을 가리킨다고 한다.
또, 청나라 건륭(乾隆) 황제가 지시하여 쓴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만주족(숙신, 읍루, 말갈, 여진)의 역사는 물론이고 고구려, 부여, 삼한(마한, 진한, 변한), 백제, 신라, 발해의 역사가 기재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모두를 ‘같은 겨레의 역사’로 보고 있다.
‘만주원류고’는 정식 명칭이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이다. 이 책의 편찬경위에 대해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청나라 건륭제는 건륭42년(1777년)에 명령을 내려 만주의 내력과 근원 및 지명 등을 상세히 조사하고 그 내용을 책으로 만들도록 하였다. 건륭제의 명을 받은 대학자 ‘아계’(阿桂)와 군기대신 우민중(于敏中) 등 43명의 학자가 이 책의 편찬에 참가하였다. 약 1년 동안의 작업을 거친 후, 건륭43년(1778년)에 ‘흠정만주원류고’라는 제목으로 총 20권의 책이 완성되었다. 이 책의 제목에는 ‘황제가 직접 썼다.’라는 뜻을 지닌 ‘흠정’(欽定)이란 글자가 들어가 있는데, 그 이유는 책의 제작을 처음 지시한 것도 황제였고 학자들이 초고를 하나씩 완성할 때마다 항상 황제에게 미리 올림으로써 읽어보고 수정하게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그 내용이 사실일 수도 있다. 과거 고구려 시대에는 만주의 모든 땅이 고구려 땅이 아니었는가. 그래서 어떤 이들은 ‘숙신’이 조금 변하여 ‘주신’이 되었고 ‘주신’이 ‘Jusen’으로 되었다가 그게 ‘주션’으로 되었으며 그 후에 다시 ‘조선’으로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고조선의 뿌리는 ‘숙신’이었다고 확신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공자가 진(陳)나라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매 한 마리가 진나라 궁정에 떨어져 죽었는데, 싸리나무로 만든 화살이 몸에 꽂혀 있었고 그 화살촉은 돌로 되어 있었으며 화살의 깊이는 1척8촌이었다. 진나라의 민공(湣公)이 사자를 보내어서 공자에게 그 뜻을 물었다.
공자가 대답했다.
“매는 멀리에서 왔습니다. 이것은 ‘숙신’(肅愼)의 화살입니다. 그 때 ‘숙신’이라는 야만 민족이 이런 화살을 공물로 바쳤습니다. 무왕(武王)은 그 화살을 사랑하는 맏딸 ‘태희’(太姬)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공주는, 순임금의 자손이며 우(虞)나라를 다스리는 ‘호공’(胡公 이름은 滿)에게로 시집갔습니다. 그 호공이 진(陳)나라의 시조가 되었는데, 그 때 그 화살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렇게 되어 숙신족의 화살이 진나라에 와 있게 되었습니다.”
공자의 말을 듣고, 진나라의 옛 창고를 뒤져 보니, 정말로 그 화살과 비슷하게 생긴 돌촉의 화살이 있었다. 진나라 임금은 공자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했다. 그러나 대신들의 눈치 때문에 공자를 높이 쓰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숙신’이란, “옛 부족 이름으로 뒤의 ‘여진족(女眞族)’을 가리킨다. 장백산(長白山) 북쪽에 거하였는데 동쪽으로는 대해(大海)에 인접하였고 북쪽으로는 흑룡강(黑龍江) 중하류에 이르렀으며 수렵에 종사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면 여기에서 ‘여진’에 대해 살펴보아야 하겠다.
“처음에 ‘여진’은 당조시기 ‘예맥’(濊貊)에서 발전하여 나왔으며 ‘발해’가 ‘거란’에 망하면서 송화강과 흑룡강 및 러시아 연해주 등에 머물게 되었다. 남자들은 고기잡이와 사냥을 위주로 하고 여자들은 돼지를 기르고 화전을 일구었다. ‘예맥’은 만주부터 한반도 북동부까지 걸쳐서 살았던 고대 퉁구스계 민족을 가리킨다. 수렵과 목축을 주로 하고 농경도 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 ‘부여’(夫餘)와 ‘고구려’ 등이 갈려 나왔다고도 한다.”
다시 누르하치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일설은 이렇다. 그의 선조인 ‘멍구태물’(猛哥帖木)은 명나라에 의하여 현재의 우리 함경북도와 중국 연변지역의 ‘건주좌위도지휘사’로 임명되었다. ‘명구태물’은 명나라와 조선 왕조의 변경지역에서 활동하다가 1434년에 우디하 촌락의 습격으로 사살되었고, 화장된 후에는 조선 회녕에서 28킬로미터쯤 떨어진 양강도 풍산군에 그 골회를 묻혔다고 한다. 풍산군은 자고로 여진족이 생활한 지역이다. 특히 풍산개는 영리하고 사냥을 잘하기로 유명하다. ‘명구태물’이 소속된 ‘어들이 촌락’의 주력이 푸주강 일대로 이주하게 된 시기는 ‘명구태물’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인 듯싶다. 명구태물의 6세손인 누르하치는, 오늘의 요녕성 신빈지역으로 이주한 후에 태어났다고 한다.
‘누르하치’(Nurhaci)라는 이름에 대하여 어느 학자는, “위글어로 ‘누르’(nur)는 ‘광명’(光明)이라는 뜻이고 ‘하치’(haci)는 ‘신성’(神聖)이라는 뜻이 있는데, 청태조의 이름인 ‘누르하치’가 만약 위글어에서 몽골어를 거친 다음에 만주말로 흡수되었다고 한다면 만주말에는 당연히 이런 의미가 표현되었을 터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런가 하면 ‘누르하치’가 아니라 ‘누르가치’(Nurgaci)가 옳다는 이견도 있다. ‘누르하치’(努爾哈赤)는 만주문자로 된 ‘옥첩’(玉牒)에 쓰여 있고, 그것을 라틴어로 전사하면 ‘Nurgaci’가 되며 일반적으로 ‘Nurhaci’로 쓴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진어로는 ‘누르하치’가 ‘멧돼지 가죽’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누르하치’를 한문으로 ‘努爾哈赤’이라고 쓰는데, 어떤 사람들은 ‘奴兒哈赤’이라고 쓴다. 그리고 그 누르하치는 우리 말(朝鮮語)인 ‘늙은까치’(老鵲)를 중국 한자로 음역(音譯)한 거라고 주장한다. 이는 중국의 상(商)나라 건국과 일맥이 상통한다고 한다.
‘청성잡기’(靑城雜記)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씌어 있다.
“청나라의 선대에 영험한 까치의 상서(祥瑞)가 있었으니 현조(玄鳥)가 상(商)나라의 시조를 낳은 것과 같다. 그러므로 현조(顯祖) 타실(他失)이 아들의 이름을 지으면서 큰아들은 ‘노작’(老鵲), 작은아들은 ‘소작’(少鵲)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늙은까치’와 ‘젊은까치’라는 조선말로 지은 이름인데 중국어로 음역하면 ‘누르하치’(奴兒哈赤)과 ‘쑤르하치’(速兒哈赤)가 된다. 타실은 그의 부친 경조(景祖) 규장(叫場)과 함께 이성량(李成樑)에게 살해되고 두 아들은 포로로 잡혀서 노예가 되었는데, 이성량이 그들의 공손함과 씩씩함을 어여삐 여겨 타실의 병력을 다시 그들에게 주었다. 누르하치가 늘 중원을 호시탐탐 노리자, 쑤르하치는 누차 이를 만류하다가 결국 형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누르하치는 중국에 맞서 갑자기 일어났다. 그런데 그 발흥함이 금나라나 원나라도 미치지 못하는 바였다. 천하를 통일한 뒤에, 그는 이성량을 국가의 원수라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후손 ‘이시요’(李侍堯)를 등용하여 고관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하였으니, 그의 ‘사람을 등용하는 포용력’을 알 수 있다.”
[淸之先代 有靈鵲之祥 若玄鳥之生商 故顯祖他失 名其二子 長曰老鵲 季曰少鵲 名用鮮語 而華音譯之 則爲奴兒哈赤 速兒哈赤也. 他失及其父景祖叫場 並殲於李成樑. 而二子俘 爲之奴 成樑愛其謹媚 復以他失餘衆畀之. 奴常睥睨中原 速屢止之 卒爲奴所殺 未久 與中國抗 勃興 殆金元之所不及也. 及並天下 謂成樑國讎 而猶用其後孫侍堯 則至大官 可見其用人之弘也.(청지선대 유령작지상 약현조지생상 고현조타실 명기이자 장왈노작 계왈소작 명용선어 이화음역지 즉위노아합적 속아합적야. 타실급기부경조규장 병섬어이성량. 이이자부 위지노 성량애기근미 복이타실여중비지. 노상비예중원 속루지지 졸위노소살 미구 여중국항 발흥 태금원지소불급야. 급병천하 위성량국수 이유용기후손시요 즉지대관 가현기용인지홍야.) 권4 성언(醒言)]
그렇다면 누르하치는 생긴 모습이 어떠한가? 우리와 같은 핏줄이라면 생긴 모습도 비슷해야 할 것인데,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그에 관한 기록이 있다.
1592년, 우리나라(조선조)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가 의주(義州)로 몽진(蒙塵)하자, 누르하치는 사람을 보내어서 원조해 줄 뜻이 있음을 알려 왔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그 참뜻을 알 수 없어서 완곡하게 이를 거절하였다.
그 후 1593년, 누르하치는 해서 여진과 몽골의 연합군을 격파하여 만주의 서남부를 장악하고 나서 이른바 만주 5부를 성립시켰다. 이 일은, 조선으로서는 위협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로 말미암은 북변의 위험이 전해지자, 조선에서는 임진란의 경황 중에서도 그 실상을 조금 더 정확하게 알기 위해 누르하치가 사는 곳으로 사람을 보내게 되었다.
그래서 선조 28년(1595년) 12월에 나라에서는 신충일(申忠一)과 하세국(河世國)을 누르하치가 머물고 있는 ‘헤투알라’(赫圖阿拉)로 보내었다. 그들은 그곳의 실정을 살피고 나서 그다음해(1596년) 1월에 귀국하였다. 그곳에 머물렀던 약 1주일 동안, 신충일은 누르하치의 성곽과 생활 모습에서부터 서민들의 주거와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 기록을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라고 하였다. 그중에서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노추(努酋: 누르하치)는 비대하거나 수척한 편도 아닌데, 체구가 건장하고 코는 곧고 크며 얼굴은 야무지면서 길었고 머리에는 초피(貂皮, 담비 가죽)를 얹고 그 위에 이엄(耳掩, 귀 덮게)을 썼는데, 그 위에 꽂은 상모(象毛, 모자 위에 단 수술)가 주먹만 하였다. 또 은(銀)으로 꽃받침을 만들고 그 받침 위에 인형(人形)을 만들어서 상모 앞에 장식하였는데, 모든 장수가 쓰고 있는 것도 역시 같았다. 몸에는 5색 용문(龍文)의 철릭(天益, 무관 복장)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상익의 길이는 무릎까지 이르고 하의의 길이는 발등에까지 이르렀으며 초피(貂皮)를 재단하여 연식(緣飾: 이어붙임)을 하였다. 모든 장수 역시 용문(龍文)의 옷을 입었으나, 연식은 초피나 표피(豹皮)나 수달피 또는 산서피(山鼠皮)로 하였다. 허리에는 은입사금대(銀入絲金帶)를 매고 여기에 수건과 도자(刀子, 작은칼)와 여석(礪石, 숫돌)과 장각(獐角, 노루 뿔) 등을 한 줄에 꿰찼다. 발에는 녹피올라화(鹿皮兀刺靴, 무관 신발)를 신었는데 황색이거나 흑색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머리를 깎았고 뇌후(腦後, 뒤통수)에만 조금 남겨서 두 가닥으로 땋아 드리웠으며 윗수염 역시 좌우로 10여 개만 남겨두고 모두 깎아 버렸다. 노추(누르하치)가 출입할 때 특별한 의장(儀仗)은 없고 군뢰(軍牢) 등과 길을 인도하는데 2명이나 4명의 장수가 짝을 지어 노추가 타면 같이 타고 노추가 걸으면 같이 걸으면서 앞을 인도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앞서기도 하고 뒤서기도 하면서 갔다. 양식은 각처의 촌락에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그 촌락의 추장으로 하여금 경작을 관장하게 하여 그곳에 그대로 쌓아 두었다가 사용할 임시에 가져다 쓰며 성중에는 쌓아 두지 않았다. 전지(田地)가 비옥한 곳이면 1두의 조를 파종하여 8~9석은 수확할 수 있고 척박한 곳이면 1석도 겨우 수확한다. 호인들은 모두 물을 따라 살기 때문에 호인의 집은 냇가에 많고 산골짜기에는 적었다. 집집이 모두 닭이나 돼지나 오리나 염소 등의 짐승을 길렀다. 노추(누르하치)는 형장(刑杖)을 쓰지 않고 죄가 있는 자에게는 그 옷을 벗긴 다음에 명적전(鳴鏑箭, 요란한 소리만 내는 화살, 선전포고용으로 사용)으로 등을 쏘는데 죄의 경중에 따라 쏘는 숫자가 다르며, 또 뺨을 때리는 체벌도 있다. 위원에서 인삼을 채취하는 호인들을 노추가 각 촌락으로 하여금 색출하게 한 다음, 1인당 소 1마리 혹은 은자 18냥을 징수하여 스스로 강을 건넌 죄를 갚게 하였는데, 그 중 가난하여 은자와 소를 구해내지 못하는 자는 그 식솔을 잡아다가 사환으로 부렸다. 노추(누르하치)의 성에서 서북쪽으로 중국 무순(撫順, 푸순)까지의 거리는 이틀 길이며, 서쪽으로 청하(淸河, 칭허)까지의 거리는 하루 길이다. 남쪽으로 압록강까지의 거리도 하루 길이다. 조선으로부터는 물자보다 관작官爵을 원하고 상경(上京, 조선 서울에 오는 것) 여부를 물어보았다.”
이 내용으로 보아서는 누르하치는 상당히 조선에 호의적이었다. 적국이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어찌 이토록 세세하게 살필 수 있게 하였겠는가. 게다가 누르하치는 조선으로부터 관작을 원했다지 않는가.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들이 겉으로는 친하게 대하나 속으로는 어떤 흑심을 품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을 터이다.
그래서 1596년 1월 30일, 이충일의 서계를 본 선조 임금은 오랑캐의 형세가 심상치 않으니 철저한 대비가 있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정원政院에 전교하였다.
“신충일의 서계를 보니 노을가적(老乙加赤, 조선에서 누르하치를 부르는 이름)의 형세가 매우 심상치 않아 끝내는 필시 큰 걱정이 있을 것 같다.(중략) 지금 남북에 이처럼 큰 적이 있게 되었으니 이는 천지간의 기화(氣化)가 일대 변하는 것이다. (중략) 오늘날 모든 방비는 힘을 다해 조치해야 하겠다. 반드시 산성을 수축하여 양식을 저축하고 군사를 훈련시켜야 한다. (중략) 이것은 도체찰사의 소관 지방이니 범연히 회의해서는 안 된다. 이를 비변사에 말하라.”
누르하치는 ‘후금’을 세운 다음 해(1617년)에 명나라에 대한 선전포고로서 무순(撫順)을 공격하였다. 무순의 공략과 함락에는 누르하치가 창시한 ‘팔기군’(八旗軍)이 맹위를 떨쳤다. 그 후, 팔기 제도는 청나라 군사제도의 근간이 되었다. 나는 여기에서 고구려의 씩씩한 기상을 느낀다. 그 만주 벌판을 종횡으로 누비던 고구려 군사들의 용맹함이 여기 스미어 있는 성싶다.
이 팔기 제도는 사냥할 때의 조직에서 출발하였다고 한다. 벌써 믿음이 간다. 사냥할 때 3백 명을 한 ‘니루’(牛彔)로 했다. 그런데 누르하치는 이를 군제로 개편하여 5개 ‘니루’를 1 ‘쟈란’(甲喇)으로 하고 5개 ‘쟈란’을 1 ‘구사’(固山)로 하였다. 이 ‘구사’가 바로 ‘기’(旗)를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기’의 색깔을 ‘황’ ‘남’ ‘홍’ ‘백’의 4색으로 나누어서 짐승을 몰아넣을 곳을 미리 정하여 황색의 깃발을 세우고, 짐승을 모는 몰이꾼들이 3대로 나누어서 차츰 포위망을 좁혀 들어가는데, 3대의 가운데에서 남색 기를 표적으로 하는 1대가 움직이고 동시에 좌우에서 홍색기와 백색기가 각각 황색기를 향하여 돌격하는 전술로 되어 있었다.
이 제도는 수렵단위를 전투 단위로 편제한 일종의 사회조직제도이기도 했다. 즉, 황남홍백의 4가지 색깔의 깃발에 각각 선을 둘러서 8기로 개편하였다. 다시 말해서 남과 황과 백의 기에는 붉은색의 선을 두르고 홍색 기에는 흰색 선을 둘렀다. 두르지 않은 깃발을 ‘정황’(正黃) ‘정백’(正白) ‘정홍’(正紅) ‘정남’(正藍)이라고 불렀으며, 선을 두른 깃발을 ‘양화’(鑲黃) ‘양백’(鑲白) ‘양홍’(鑲紅) ‘양람’(鑲藍)이라고 하였다.
누르하치는 만주족을 이 편제에 가담시킴으로써 모든 사람이 이 팔기에 소속되었다. 말하자면 ‘정황기 출신’이라든가 ‘남황기 출신’이라는 등의 호칭이 그들을 따라다녔다. 이른바 이는 우리의 호적과 같았다. 누르하치가 왕의 자리에 올랐을 무렵, ‘니루’의 수가 4백에 달했다고 한다. 1‘니루’에 속한 인원을 3백 명으로 계산한다면 모두 12만 명이 된다. 이 팔기제도는 군사와 행정을 비롯하여 생산의 각 방면에 걸친 직능을 겸비하고 있기에 평상시에는 생산에 참여하고 전쟁 시에는 모두 전투에 참가하였다.
물론, 중국의 통일에 누르하치는 그 기반을 마련한 데 그치고, 중국 통일은 누르하치가 죽은 후인 1636년에 그의 여덟째 아들인 홍타이지가 이루었다. 1626년에 홍타이지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후금’의 주인이 되었으며 그가 나중의 청나라 태종이다. 1636년, 그는 나라 이름을 ‘후금’에서 ‘청’으로 바꾸었다.
아무튼, 중국을 정복할 당시에 만주족은 채 1백만 명도되지 않았으나 1억 명의 한족을 굴복시켰다. 이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 백기제도의 힘이었다. 게다가 1636년에서 1912년까지 276년 동안이나 중국을 통치했으니 참으로 놀라울 뿐이다.
1625년, 누르하치는 ‘후금’의 서울을 심양으로 옮긴 후에 요하 이동 70여 성을 모조리 탈환하였다. 이 과정에서 연로한 누르하치가 병사하였다. 그러나 일설에는 누르하치가 요하를 건너서 ‘요서’(遼西)를 공격할 때에 산해관 앞의 영원성(寧遠城)에서 쏜 ‘포르트갈의 대포’에 부상을 당하여 그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고도 한다. 그는 죽을 때에 그의 여덟 번째 아들인 홍타이지(皇太極)에게 다음과 같이 유언했다.
“우리는 본래 백두산 천지에서 나온 민족이다. 조선은 어머니의 나라이니 잘 지내도록 하여라. 그리고 너는 반드시 본래의 영토를 수복하는 과업을 이루어야 한다. 이를 명심하라.”
이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실이라고 하여도 ‘조선은 어머니의 나라’라는 말의 의미가 잘 잡히지 않는다. 조선이 ‘어머니와 같은 위치의 나라’라는 말인지, 정말로 누르하치의 어머니가 ‘조선 사람’이라는 말인지, 분간이 안 간다. 사실로 만주 땅은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였고 그 후에 ‘고구려와 발해 유민’은 여진족과 섞여 살았으므로 서로의 결혼이 빈번했다고 한다.
그런데 1627년(인조 5년),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으로 ‘후금’이 조선을 침략했다. 이는 바로 ‘정묘호란’인데, ‘후금’의 군대가 보급로를 차단당하여 강화를 제의함으로써 진정되었다. 그 후, 1636년(인조 14년)에 ‘후금’은 세력을 확장하여 국호를 ‘청’이라고 고치고 ‘심양’을 수도로 삼았는데, 대세가 주전론 쪽으로 기울자, 청은 다시 대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쳐들어왔다. 이는 바로 ‘병자호란’이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청군에 대항했으나 결국 청군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 결과로 조선은 청나라와 군신 관계를 맺게 되었고, 중국의 명나라와는 외교를 단절하였다.
홍타이지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나라 이름을 ‘후금’에서 백두산 천지를 뜻하는 ‘청’(淸)으로 고치고 ‘여진인’을 ‘세계의 중심지’란 뜻인 ‘만주인’으로 부르도록 명령하였다.
누르하치가 우리에게 호의적이었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우리를 가깝게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는 나라를 세우고 ‘후금’이라는 국호를 사용할 정도로 ‘금’나라를 자기의 뿌리로 생각했다. 그렇다면 ‘금나라’는 누가 어떻게 세웠을까? 그러면 지금부터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서 ‘금나라’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1113년경, 여진족은 요(遼)나라에 복속되어 있었다. 앞에서 설명한 바가 있지만, 여진족은 오랜 역시를 가진 민족으로 선진시대에는 ‘숙신’이라고 했고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에는 ‘말갈’이라고 불렀으며, 오대에 들어서면서 ‘여진’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요나라는 거란족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세운 나라인데, 그 당시에 몽골과 만주 및 화북 일부를 지배했으며 이 요나라에 우리의 발해국이 멸망하는 비운을 맞았다.
요나라는 여진족이 힘을 쓰지 못하도록 ‘생여직’(生女直)과 ‘숙여직’(熟女直)으로 나누어서 나누어 지배했다. 즉 ‘숙여직’은 요나라 영내에 이주시켜 요나라 국적을 부여하였고, ‘생여직’은 원주지로부터 이동시키지 않고 살던 곳에서 요나라 국적만을 지니도록 했다. 그 생녀직의 한 똘똘한 수장이 있었다. 그 이름이 ‘아골타’(阿骨打, Aguda)였는데, 정직하고 용감하였으므로 여진족의 부족 사이에서는 꽤 알려져 있었다.
여진족은 요나라에 복속되면서 매년 ‘인삼’ ‘금’ ‘모피’ ‘말’ ‘진주’ ‘매’(海東靑) 등을 요나라의 왕실에 바쳤다. 그러나 요나라의 왕실에서는 해마다 연공을 증가하라고 압력을 가하였다. 그래서 1114년 9월, ‘아골타’는 여진족의 각 부족을 규합하여 요나라에 대항하였다. 그는 여진족의 여러 사람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싸움에서 공을 세운 자에게는 상을 주겠다. 노예는 평민으로 만들고, 평민은 관리로 등용하며, 관리는 직급을 높이겠다.”
모두 앞으로 나섰다. 이 때 여진족의 병력은 겨우 2,500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2개월 후에는 1만 명 정도가 되었으며, 그들이 요나라의 10만 대군을 격파하였다. 이듬해 2월, 요나라의 ‘천조제’(天祚帝)는 친히 70만 대군을 거느리고 출진하였으나, 아골타는 2 만에 불과한 병력으로 이들과 싸워서 이겼다.
그 당시 100리에 걸친 싸움터에는 요나라 전사자의 시체가 즐비하였다고 전한다. 천조제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부리나케 도망치고 요양부에서 황룡부에 이르는 요동 땅은 모두 아골타에게로 돌아갔다.
1115년 1월 1일, 아골타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 그 나라 이름을 ‘대금’(大金)이라고 정했다. 나라 이름을 정할 때, 아골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요나라는 빈철(鑌鐵)을 상징하고 있다. 확실히 빈철은 튼튼하기는 하지만 녹스는 일이 있다. 영구히 변하지 않고 빛을 내는 것은 금뿐이다. 게다가 우리 여진족은 안출호(按出虎, 여진 말로 ‘금’이라는 뜻) 강가에 살고 있다. 그렇기에 ‘금’이라는 나라 이름이 가장 어울린다.”
1125년, 마침내 요나라는 금나라와 송나라의 협공을 받아서 멸망하였다. 그리고 1234년, 몽골과 남송의 공격으로 금나라도 멸망하였다.
그런데 ‘아골타’(Aguda)의 선조가 ‘김한보’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고려인이며 그의 조상은 ‘신라인’(신라의 왕족)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골타가 ‘신라’ 왕족의 성씨인 ‘김씨’를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고 말한다. 그 때문에 금나라는 고려와 전쟁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아골타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金傅 또는 金富)의 손자(마의태자의 아들) ‘김행’(金幸 또는 金俊. 函普는 법명)의 6대손이라고도 한다. 다시 말해서 ‘금나라’의 개국시조를 기록한 ‘금사’(金史)에는, 금나라 시조 아골타가 신라인으로 마의태자(金鎰)의 6대손, 즉 마의태자로부터 7대째가 되는 인물이며 성이 ‘김씨’이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금’(김)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금사’의 내용을 더 들어 보아야 하겠다.
“금의 시조는 ‘함보’이다. 처음에 고려에서 왔는데 나이가 이미 60여 세였다. 그가 완옌부에 살기 오래였고, 그 부족 사람이 일찍이 다른 부족 사람을 죽였던바, 이로 말미암아 두 부족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서 화해할 수 없었다. 이에 완옌부 사람이 시조(함보)에게 말하기를 ‘만일 완옌부 사람을 위하여 이 원망을 풀어서 두 부족으로 하여금 서로 죽이는 일이 없게 해준다면, 완옌부에는 나이 60에 시집은 안 간 처녀(어진 처녀)가 있으니 마땅히 배필로 삼아서 완옌부의 사람이 되게 할 것이오.’라고 하니, 시조는 그것을 허락하고 스스로 상대 부족에게 나아가서 타이르기를 ‘한 사람을 죽인 것 때문에 싸움이 끝나지 않고 다치는 사람이 더욱 많으니 난의 괴수 하나만 베어 죽이는 데에 그치면 부족 내에서 물건으로 보상하겠다. 너희는 싸우지 아니하고 이익을 얻는 게 좋지 아니하냐?’라고 하였다. 저편에서 이 말을 따랐다.”
[金之始祖諱函普 初從高麗來 年已六十餘矣 兄阿古好佛 留高麗不肯從(금지시조휘함보 초종고려래 연이육십여의 형아고호불 유고려불긍종): 금나라 시조는 이름이 함보이다. 처음 고려에서 나올 때 60세가 넘었다. 형 ‘아고호불’은 따라가지 않고 고려에 남았다. 金史 중]
게다가 누르하치는 이 아골타의 16대손이라고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고려사’(高麗史, 세가 예종 10년 정월 초의 기사)에도 ‘평주의 승려 김행(金幸, 마의태자의 아들)의 아들인 김극기가 금나라의 조상이다.’라는 내용의 글이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예전의 우리 평주 승려 ‘금준’(今俊, 金俊)이 달아나서 여진의 아지고촌(阿之古村)에 들어가 살았는데 그를 금의 조상이라고 한다. 혹은 말하기를 평주(平州)의 승려 ‘김행’(金幸)의 아들 ‘극기’(克己)가 처음에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서 여진 여자에게 장가를 든 후에 아들 ‘고을 태사’(古乙太師)를 낳고 ‘고을’(古乙)이 ‘활라 태사’(活羅太師)를 낳았다. ‘활라’는 아들이 많았는데 큰아들은 ‘핵리발(劾里鉢)이요, 막내(季子)는 ‘영가’(盈歌)였다. ‘영가’가 가장 웅걸(雄傑)하여 민심을 얻었더니(衆心) ‘영가’가 죽은 후에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烏雅束)이 뒤를 이었으며 ‘오아속’이 죽으니 아우 ‘아골타’가 섰다.”
아무튼,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의 조상이 신라 사람이든 아니든, 만주지역은 우리의 고구려와 발해가 지배하던 지역이었으니 서로의 피가 많이 섞였을 것임은 너무나 당연하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이 세상에서 만주족과 가장 혈연적으로 가까운 민족은 한민족韓民族이다. 그러므로 만주족이 할 수 있었던 일은 우리도 할 수 있다. 아니, 그들보다 더 위대한 일을 우리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무력적 지배가 아니라 공존적 인류애를 실천할 때이다. 다시 말하면 녹색 깃발을 높이 들고 녹색 정신을 온 세상에 퍼뜨려야 한다. 녹색 정신은 대체 어떠한 것인가. 풀과 나무야말로 성실하다. 때에 맞추어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고 있다. 바로 그런 성실함이 녹색 정신의 바탕이다. 온 인류가 자연과 함께 자연의 일부로 살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녹색 정신으로 모든 사람의 세계관과 자연관을 바로잡아 주어야만 한다. (녹색문학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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