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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잡는 데에 소 잡는 칼을 쓰다
공자의 수많은 제자 중에서 ‘문학’(文學)에 뛰어났다고 알려진 사람은 바로 ‘자유’와 ‘자하’입니다. 먼저 ‘자유’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자유’(子游)라는 사람은 성이 ‘언’(言)이고 이름은 ‘언’(偃)입니다. 그리고 ‘자유’는 그의 자(字)이지요. 그래서 ‘언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공자보다 45살이 적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공자가어’에는 35살 아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법을 공부했으며, 특히 문학으로 이름을 날렸답니다. 739년인 당나라 때에 ‘오후’(吳侯), 1009년인 송나라 때에 ‘단양공’(丹陽公), 그 뒤에 ‘오공’(吳公)으로 각각 추봉되었습니다. 아마도 ‘자유’가 오(吳)나라 출신이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공자가어’에는, 자공이 ‘자유’를 평한 말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이 생기기 전에 염려해 두었다가 일이 생긴 후에 이를 처리하기 때문에 망령된 행동이 없으니, 이는 ‘언언’(言偃)의 행실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그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능한 일을 하고자 한다면 배워야 하며, 알고자 한다면 남에게 물어야 하며, 착한 일을 하고자 한다면 삼가야 하며, 넉넉하게 일하고자 한다면 예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러한 일을 능히 하는 자는 언(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공자가어’의 ‘제자해’(弟子解)에는 ‘자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씌어 있습니다.
『언언은 공자보다 35세가 적었다. 언제나 예법을 공부했으며 문학으로 이름이 났다. 벼슬은 무성재(武城宰)가 되었다. 일찍이 공자를 따라 위(衛)나라에 갔는데, 위나라 장군의 아들인 ‘난’(蘭)과 친하게 되었고 마침내 ‘난’을 천거하여 공자에게 배움을 받게 했다.』
‘자유’는 매우 품행이 바르고 점잖으며 공명정대했답니다. 그가 ‘무성’ 고을을 다스리고 있을 때의 이야기가 ‘논어’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공자가 ‘무성’에 가서 현악에 맞추어 부르는 노랫소리를 들었다. 공자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닭 잡는 데에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겠느냐?” ‘자유’가 대답했다. “전에 제가 선생님께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아끼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 쉽다.’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그러자, 공자가 말했다. “제자들아, ‘언’의 말이 옳다. 내가 먼저 한 말은 농담이다.”(자 지무성 문현가지성. 부자 완이이소왈 할계 언용우도. 자유대왈 석자언야 문저부자왈 군자 학도즉애인 소인 학도즉이사야. 지왈 이삼자, 언지언시야 전언 희지이.: 子 之武城 聞弦歌之聲. 夫子 莞爾而笑曰 “割雞 焉用牛刀. 子游對曰 “昔者偃也 聞諸夫子曰 君子 學道則愛人 小人 學道則易使也. 子曰 “二三子 偃之言是也 前言 戱之耳.)【논어 17-4】
여기에서 ‘무성’(武城)은 ‘노나라 변경의 읍’ 이름입니다. 지금의 비현(費縣) 서남쪽 8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답니다. ‘현가지성’(弦歌之聲)은 ‘금슬 등의 바른 음악 소리’를 일컫고, ‘완이’(莞爾)는 ‘빙긋이 웃는 것’을 나타내며, ‘이사’(易使)는 ‘다스려 쓰기가 쉬움’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삼인’(二三人)은 ‘너희들’이라는 뜻인데, 여기에서는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앞에서 한 번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또한, ‘시야’(是也)는 ‘옳다’라는 뜻이지요.
이 이야기가 ‘공자가어’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번 볼까요?
『‘자유’가 무성 고을을 다스릴 때, 공자가 손수 찾아간 적이 있었다. 가서 보니, 그 고을 백성들은 거문고를 타거나 시를 읊고 있었다. 공자는 그 모습을 보고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닭 잡는 데에 소 잡는 칼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이 말은, ‘조그만 고을을 다스리는 데에’에 ‘큰 국가를 다스릴 때’ 쓰는 예와 악을 사용함은 지나친 일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스승의 이 말을 듣고, 자유가 이렇게 반문했다.
“전에 선생님께서는 ‘정치를 하는 자가 예악을 배우면 사람을 잘 인도할 수 있고, 백성으로서 예악을 배우면 윗사람이 쓰기가 쉽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하니 누구나 예와 악은 배워야 할 게 아닙니까?”
이 말을 듣고, 공자는 옆에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
“‘언’이 하는 말이 옳다. 내가 먼저 한 말은 농담이었다.”』
‘자유’는 공자가 세상을 떠난 뒤에 문학으로 빛을 내어 후진들에게 전했답니다. ‘자유’가 무성 읍재로 있을 때,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공자가 ‘자유’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인재를 얻었느냐?”
‘자유’가 대답했습니다.
“담대멸명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길을 갈 때 지름길로 다니지 않고, 공무가 아니고는 일찍이 제 방에 온 일이 없습니다.”
이왕 여기에서 말이 나왔으니, ‘담대멸명’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담대멸명’(澹臺滅明)이란 사람은 자(字)가 ‘자우’(子羽)이고, 성은 ‘담대’이며 이름이 ‘멸명’입니다. 노나라 ‘무성’(武城) 사람이었지요. 공자보다 39살이 아래라고 합니다. 그러나 ‘공자가어’에는 49살 아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노나라 대부가 되었습니다. 그 후, 739년인 당나라 때에 ‘강백’(江柏)에 추봉되었고, 1009년인 송나라 때에 ‘금향후’(金鄕侯)로 가봉(加封)되었습니다.
‘담대멸명’은 편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융통성을 발휘하며 유연하게 이리저리 요령껏 대처하기보다는 시간이 필요하더라도 정당한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 가는 사람이었다는군요. ‘열전’에는 이런 글이 있답니다.
『그는 매우 못생겨서 공자는 그가 가르침을 받으러 왔을 때 재능이 부족한 사람으로 여겼다. 그러나 교육받은 후로, 물러나면 덕행을 닦는 데 힘썼고, 길을 갈 때는 절대로 샛길로 가지 않았으며, 공적인 일이 아니면 경대부 등을 만나지 않았다.』
‘공자가어’에는 자공이 ‘담대멸명’을 평한 글도 있습니다.
“귀하게 되어도 기뻐하지 않고 천하게 되어도 노여워하지 않으며, 진실로 백성들에게 이익이 있을 때 자기는 얼마든지 청렴을 지키며, 윗사람을 섬기는 데에는 아첨하지 않고 아랫사람을 돕는 데에는 착실히 하니 이는 ‘담대멸명’의 행실입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혼자만 귀하고 혼자만 부한 것은 군자로서 부끄럽게 여기는 일이다. 담대멸명 같은 자는 이에 적중하게 했다고 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공자가어’의 ‘제자행’에는 ‘담대멸명’을 이렇게 설명한 글이 씌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군자의 자질이 있었다. 공자는 일찍이 말하기를 ‘그 재주가 얼굴 모습만 못하다.’라고 했다. 하지만 사람 됨됨이는 공정하고 사욕이 없어서 자기가 무슨 물건을 취하거나 남에게 무슨 물건을 주거나 벼슬을 버리고 물러가거나 혹은 벼슬자리에 나가거나 어느 일을 당해서나 항상 믿음성이 있기로 유명했다. 그는 나라의 대부가 되었다.』
여기에서 ‘그 재주가 얼굴 모습만 못하다.’라는 말에 주목하게 됩니다. 이 글로 본다면, ‘담대멸명’은 그 얼굴이 ‘잘생겼다.’라는 뜻입니다. 정말 혼동이 옵니다. 앞의 ‘열전’에서는 ‘못생겼다.’라고 했지요. 그러면 그는, 잘생겼을까요? 못생겼을까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한비자’의 ‘현학’ 편에는 또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군자의 용모였다. 공자는 기대를 걸고 그 점을 취하였는데, 함께 오랫동안 지내다 보니 행동은 그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공자가 제자들에게 말했다.
“용모를 가지고 사람을 취했다가 ‘담대멸명’에게서 실패하였고, 말하는 것을 가지고 사람을 취했다가 ‘재여’에게서 실패하였다.”』
하지만 ‘담대멸명’에 대한 평은 엇갈리는 게 많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담대멸명’에게 300명의 제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떳떳한 스승의 처신을 따르는 제자들도 역시 떳떳함을 무기로 나아가고 물러갔다고 전합니다. 이는, ‘열전’에 의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다시 ‘자유’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어느 날, ‘자유’는 공자에게 말했습니다.
“효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공자는 말했습니다.
“요즈음의 효는 잘 공양하는 것을 말하는데, 개와 말도 ‘길러 줌’이 있으니 어버이를 존경하지 않으면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 이야기는 ‘논어’의 ‘위정’ 편에 실려 있습니다. 공자가 살던 당시에는 ‘개’를 방안에서 키운다는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못했겠지요. 기껏해야 밖에 조그만 집이나 지어 주고 먹다가 남긴 밥이나 주었을 테지요. 부모에게 그렇게 잠자리나 제공하고 먹을 것이나 주는 게 무슨 ‘효’가 되겠느냐는, 공자의 말이었습니다. 이를 바꾸어서 말하면, 그보다는 ‘경’(敬), 즉 ‘존경하는 마음’이 없다면 ‘효’라고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느 날, ‘자유’가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부자께서 예를 지극히 말씀하시니, 얻어들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공자가 말했습니다.
“대체로 예는 처음에 음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태고 시대에 있어서는, ‘기장’은 마른 그대로 먹고 고기는 생것으로 먹었으며 물웅덩이를 술잔으로 삼고 손으로 움켜서 마셨다. 또, 옛날에는 임금으로서도 궁실을 갖고 있지 않아서 겨울에는 굴을 파고 살았으며 여름에는 나무를 얽어매고 살았다. 그리고 실이나 무명이 없어서 새의 깃털과 짐승의 가죽을 옷으로 사용했다. 이렇게 얼마 지난 뒤에 성인이 세상에 나서 불을 발명하자, 쇠를 녹여서 솥을 만들고 흙을 구워서 그릇을 만들며 궁실과 집도 만들게 되었다. 그 후, 음식을 구워 먹기도 하고 볶아먹기도 하였다. 이렇게 됨으로써 차츰 ‘예’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즉, 임금과 신하는 정직하고 아비와 자식은 친절하며 형과 아우는 화목하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은 같게 되고 남편과 아내는 각각 처소가 있게 되었다.”
또, 어느 때는 이런 일도 있었지요. 공자가 노나라 ‘사구’로 있을 때, 납향 제사에 참석하고 나서 궁문 밖으로 놀이를 갔답니다. 그때, 공자가 탄식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옆에 있던 ‘자유’(子游)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지금에 와서는 큰 ‘도’가 이미 없어져서 온 천하가 오직 자기 한 집만 위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각각 자기 부모만 부모로 여기고 자기 자식만 자식으로 여긴다. 재물이란 재물은 모두 자기 한 몸만 위해서 저축하고 힘든 일은 자기가 하지 않고 남에게 넘겨 버린다. 모든 일을 예로 행하게 되면 천지와 더불어서 함께 전진해 갈 수도 있겠거니와, 만일 예에 근본을 두지 않고 높은 자리에 있게 되면 곧 재앙만 당하게 된다.”
‘자유’가 또 물었습니다.
“이처럼 ‘예’란 것이 소중합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예라는 것은 선왕이 하늘의 도를 받들어서 모든 일을 사람들의 현실에 적합하게 함으로써 귀신에게까지도 이 법을 벌여 놓았다. 이 예는 또한 상제와 향사와 관혼과 조빙(朝聘)까지도 통용하게 된 까닭에 성인이 예를 가지고 가르치면 천하 국가라도 얻어서 바로잡을 수가 있다.”
또 한 번은, ‘자유’가 공자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자산’을 은혜로운 사람이라고 지극히 칭찬하시니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러면 잠깐, 여기에서 ‘자산’에 대하여 알아보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자산’(子産)은 정(鄭)나라 왕족 출신의 재상입니다. 이름은 ‘공손교’(公孫僑)이지요. 물론, ‘자산’은 그의 자(字)입니다. 그는 정나라 목공(穆公)의 손(孫)이며, ‘자국’(子國)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기원전 554년에 경(卿)이 되었고, 기원전 543년에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공자보다 1세대가 빠른, 명망 높은 정치가였습니다. 자산이 타계하였을 때는, 노나라 소공(昭公) 20년으로 기원전 522년의 일이며, 공자의 나이 30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자산’이 정치를 행한 정(鄭)나라는 노나라와 비슷한 크기의 ‘작은 나라’였습니다. 그가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던 시기, 즉 정나라의 ‘간공’(簡公)과 ‘정공’(定公)과 헌공(獻公)과 성공(聲公)에 이르는 22년 동안의 시기는, 진(晉)나라와 초(楚)나라의 두 대국이 서로 주도권을 다투던 때였습니다. 그사이에 끼어서 ‘자산’은 박식과 웅변으로 남다른 수완을 발휘하여 평화를 도모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일찍이 공자는 ‘자산’을 다음과 같이 평하였습니다.
“군자의 도가 4가지 있으니, 몸가짐이 공손하여 윗사람을 섬김이 공경스러우며 백성을 기름이 은혜로우며 백성을 부림이 의롭다.”
이는, ‘논어’의 ‘공야장’ 중에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서 ‘자유’의 물음에 대한 공자의 대답을 들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자산’이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자유가 다시 물었습니다.
“백성을 사랑한다면 이를 덕교(德敎)라고 하겠는데, 어찌 은혜롭다고 말씀하십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그 ‘자산’으로 말하면 마치 여러 사람의 어머니와 같으나 이 사람은 백성들을 능히 먹이기만 하고 능히 가르치지는 못했다. 그래서 은혜롭다고만 말한다.”
‘자유’가 이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가르치지 못했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그 ‘자산’이라는 사람은 겨울철이 되면 자기가 타고 다니는 수레로 여러 사람에게 물을 건네주고 있으니, 이는 백성을 사랑할 줄만 알고 가르칠 줄은 모른다고 하겠다. 그래서 나는 ‘자산’이 백성을 가르치지 못했다고 말했다.”
‘논어’ 중에는 ‘자유’가 한 말이 여러 번이나 나옵니다. ‘이인’ 편을 보면, “임금을 섬기는 데 자주 간하면 욕되고, 벗을 사귀는 데 자주 충고하면 사이가 벌어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특히 ‘붕우삭 사소의’(朋友數 斯䟽矣)란 말을 가슴에 반드시 새겨 두어야 합니다. 요즘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우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논어’의 ‘자장’ 편에는 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상사를 당해서는 슬픔을 다하는 데에서 그쳐야 한다.”
이는, 사람이 상을 당했을 때는 진심으로 슬퍼하고 정성을 다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필요하지 않은 허식을 삼가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지요.
‘자유’의 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끝맺기로 하고, 이제부터는 ‘자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자하’(子夏)라는 사람은 성이 ‘복’(卜)이고 이름은 ‘상’(商)입니다. 공자보다 44세가 아래였다고 합니다. 그는 진(晉)나라 온국인(溫國人)이라고도 하고 위(衛)나라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온국’이 원래는 위나라에 속해 있었으므로, 위나라 사람이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지요. 그는 739년에 ‘위후’(衛侯), 1009년인 송나라 때에 ‘동아공’(東阿公) 혹은 ‘하동공’(河東公), 그 뒤에 ‘위공’(衛公)으로 추봉되었습니다.
‘공자가어’의 ‘제자해’(弟子解)를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자하’는 시에 익숙하여 그 뜻을 능히 통달했으며 문학으로 이름이 났다. 성품은 넓지 못했으나 ‘정미’(精微)한 의논에 있어서는 당시 여러 제자 중에 그를 따를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일찍이 위나라에 돌아와서 ‘사기’를 읽고 있는데, ‘진사벌진 삼시도하’(晋師伐秦 三豕渡河)라는 구절에 이르렀다. 그는 말하기를 ‘이것은 잘못되었다. 이 삼시(三豕)는 반드시 기해(己亥)를 잘못 쓴 글자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사기’를 공부하는 자가 진(晋)나라 역사를 참고해 보았더니 과연 ‘자하’의 말이 옳았다. 이에 위나라 사람들은 ‘자하’를 성인이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진사벌진 삼시도하’는 ‘진(晋)나라 군사들이 진(秦)나라를 칠 때에 세 마리의 돼지가 황하를 건넜다.’라는 말입니다. 읽어 보니, 그 내용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하’는 여기에서 ‘삼시’(三豕)는 ‘기해’(己亥)의 오기라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그렇게 글자를 놓고 보면, ‘기해도하’로 바뀌어서 ‘기해년에 황하를 건넜다.’라는 말이 됩니다. 이처럼 ‘자하’는 ‘정미’한 안목을 지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사기는, ‘사마천’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아주 먼 역사의 기록입니다. 착오 없기를 바랍니다.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공자가 죽은 뒤에 ‘자하’는 서하(西河)에서 선생 노릇을 했는데, 이 때 위(魏)나라 문후(文侯), 즉 위나라 임금이 그를 스승으로 섬겼고 모든 국정을 그에게 물어서 행했다.”라고 전합니다. ‘자하’의 여러 제자 중에는 후에 이름을 떨친 사람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그를 ‘서하의 공자’라고까지 떠받들었다고 합니다.
‘자하’의 제자들에 대하여 언급한 이야기가 ‘논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할까요?
‘자유’가 말했다. “자하의 문인 제자들은 물 뿌리고 쓸고 응대하고 드나들고 하는 데는 제법이지만, 그건 말단의 일이다. 본질적인 일에는 보잘 게 없으니 어쩌겠는가?”그 말을 듣고, ‘자하’가 말했다. “아아! 자유의 말은 잘못이다. 군자의 ‘도’에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을 게으르게 하겠는가? 초목에 비유하면, 종류에 따라 분별이 된다. 군자의 ‘도’를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처음이 있고 나중이 있는 사람은 오직 성인뿐이다.”(자유왈 자하지문인소자 당쇄소응대진퇴 즉가의 억말야 본지즉무 여지하. 자하문지왈 희. 언유과의. 군자지도 숙선전언 숙후권언. 비저초목 구이별의 군자지도 언가무야. 유시유졸자 기유성인호.: 子游曰 子夏之門人小子 當灑掃應對進退 則可矣 抑末也 本之則無 如之何. 子夏聞之曰 噫. 言游過矣. 君子之道 孰先傳焉 孰後倦焉. 譬諸草木 區以別矣 君子之道 焉可誣也. 有始有卒者 其惟聖人乎.)【논어 19-12】
여기에서 말하는 ‘쇄소’(灑掃)는 ‘물 뿌리고 쓰는 것’을 말하고, ‘응대’(應對)는 ‘손님을 맞는 예’를 말합니다. 또, ‘희’(噫)는 ‘탄식하는 소리’이고 ‘권’(倦)은 ‘게으르게 하여 가르치지 않는 것’을 이릅니다. 그리고 ‘구’(區)는 ‘종류에 따라서 구별이 있는 것’을 가리키고 ‘무’(誣)는 ‘속임’의 뜻으로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도달하도록 무리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는, 교육하는 방법에 대한 말들입니다. ‘자유’는 ‘본질적인 것은 안 가르치고 말단적인 것만을 가르친다.’라고 지적했지만, ‘자하’는 ‘교육은 교육받는 사람의 수준과 정도에 따라 차츰 더하여서 높고 먼 근본 문제에 이르러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침내 ‘자하’가 거보(莒父)의 읍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자에게 ‘정치하는 도(道)’를 물었습니다. 이에, 공자가 말했습니다.
“빠르게 뭔가를 이루려고 서두르지 말며, 작은 이익에 한눈팔지 마라. 서두르면 이르지 못하고, 한눈팔면 큰일을 이루지 못한다.”
이 이야기는 ‘논어’의 ‘자로’ 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번은, ‘자하’가 ‘서’(書)를 읽고 공자에게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서’는 알지요? 앞에서 말했듯이, 그 당시의 교육 내용인 ‘육예’(六藝) 중 하나로서 ‘역사’에 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공자가 ‘자하’에게 물었습니다.
“그래, ‘서’를 모두 읽고 난 후에 무슨 생각이 들었느냐?”
‘자하’가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서’의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논의는 해와 달처럼 분명하였습니다. 선생님께 배운 바를 감히 잊을 수 없고, 비록 황하(黃河)나 제수(濟水) 가로 물러나서 궁핍하게 살거나 깊은 산속에서 황토로 집을 짓고 살아도 의연히 거문고를 타며 선왕(先王)의 노래를 부르는데 주변에 사람들이 있어도 즐기고 없어도 즐기며 위로 요순의 ‘도’를 바라보고 아래로 ‘삼왕’(三王)의 뜻을 바라보면서 생사를 잊을 수 있었습니다.”
‘자하’는 공자가 자기의 말에 매우 흡족하게 여기리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탄식하며 말했습니다.
“아! 너와 함께 ‘서’를 말할 수 있겠구나. 비록 그렇다고 해도, 그 겉만 보고 속은 보지 못했으며 그 문을 찾고서도 그 안으로 아직 들어가지는 못했구나.”
‘자하’는 이처럼 처음에는 좀 모자란다는 말을 들었어도 그로부터 더욱 학문을 닦은 후에는 실력과 융통성을 갖추게 되었답니다. 그는 지도자의 도리에 대하여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지요. 공자가 자하에게 물었습니다.
“군주가 된 자의 도리에 대하여 알고 있는가?”
‘자하’가 대답하였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곧바로 죽고 맙니다. 하지만 물은 물고기를 잃어도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이는, 군주와 백성을 물고기와 물로 비유하여 말한 내용이지요. 배가 물 위를 자유롭게 떠다니고 있어도 한 번 물이 크게 출렁거리게 되면 그 배는 곧 뒤집혀 버리고 말게 됩니다.
‘논어’ 중의 ‘의정’ 편에는 ‘자하’가 공자에게 ‘효’를 묻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때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즐거운 얼굴빛으로 섬기기가 어려우니, 일이 있을 때는 젊은이가 수고를 맡고 술과 먹을 게 있을 때는 어른에게 잡수시게 하는 정도를 가지고 ‘효’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이 말은, ‘자유’에게 ‘효’에 대하여 이야기한 말과 거의 그 뜻이 같습니다. 기억하고 있지요? ‘즐거운 얼굴빛’이 바로 ‘존경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술과 먹을 게 있을 때 어른에게 잡수시게 하는 것’은 ‘개와 말도 길러 줌이 있는 것’과 서로 그 뜻이 상통합니다.
어느 날, 공자는 주역을 읽다가 ‘손익’(損益)에 이르자 슬피 탄식했습니다. ‘손익’은 주역의 ‘괘명’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자하’가 자리를 피하면서 물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왜 탄식하십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대개 스스로 덜려고 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유익함이 오는 것이고, 스스로 더하려고 하는 자에게는 손해가 있게 되는 법이다. 나는 이런 것을 보고 탄식한다.”
‘자하’는 또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배우는 자로서 더하려고 하는 것이 못 쓴다는 말씀입니까?”
공자는 긴 이야기를 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말을 비유로 설명하자면, 마치 수레를 타고 가다가 세 사람을 만나면 내리게 되고 두 사람을 만나면 머리만 숙이게 되는 이유는, 그 차고 빈 것을 조절하여 한 편만 가득 차게 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에, ‘자하’가 말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기록하여 몸이 다하도록 받들어 행하겠습니다.”
그리고 ‘공자가어’에도 ‘자하’와 공자의 대화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 내용도 한번 엿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하’가 공자 옆에 앉아서 물었습니다.
“시에 말하기를 ‘용모와 기상이 화락하고 단아한 어느 군자는 백성들의 부모’라고 했는데, 어떻게 해야만 ‘백성의 부모’라고 말하겠습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백성의 부모가 되자면, 반드시 예악의 근원을 통달하여 다섯 가지 지극함을 이루고 세 가지 없는 것을 행하여서 널리 천하에 펴야 하며, 사방에 ‘패할 경우가 있을 때’(有敗, 재앙의 조짐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남보다 먼저 알아야 한다. 이를 ‘백성의 부모’라고 이른다.”
이에, ‘자하’가 다시 물었습니다.
“다섯 가지 지극함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잘 들어라. ‘뜻’이 지극한 데에는 ‘시’도 또한 지극하며, ‘시’가 지극하게 되면 ‘예’도 또한 지극하며, ‘예’가 지극하게 되면 ‘악’도 또한 지극하며, ‘악’이 지극하면 ‘슬픈 마음’도 지극하게 된다. 시와 예가 서로 어우러지고 슬픔과 즐거움이 서로 생기게 되면 아무리 눈을 밝히고 보더라도 볼 수가 없고 아무리 귀를 기울이고 듣더라도 들을 수 없으며 뜻과 기운은 천지에 차게 되고 덕과 행실은 사해에 차게 된다. 이를 다섯 가지 지극함이라고 말한다.”
‘자하’가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세 가지 없는 것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소리 없는 풍류와 형체 없는 예와 복이 없는 초상을 가리킨다.”
‘자하’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이것만으로 다하는 것입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어찌 그것뿐이겠느냐? 아직 다섯 가지로 일으켜야 하는 뜻이 있다.”
‘자하’가 또 물었습니다.
“그것은 또 무엇입니까?”
공자가 다시 말했습니다.
“소리가 없는 풍류는 기분이 이르는 대로 하고 어김이 없는 법이며, 형체가 없는 예는 위의가 느직느직한 법이며, 복(服)이 없는 초상은 속마음이 몹시 슬프게 되는 법이다. 이 위에 더욱이 세 가지 사사로움이 없는 것으로 받들어서 온 천하를 위로해야 한다. 이것이 다섯 가지로 일으킨다는 말이다.”
‘자하’가 다시 물었습니다.
“세 가지 사사로운 마음이 없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하늘은 만물을 덮어 주는 데 사사로움이 없고, 땅은 만물을 실어 주는 데 사사로움이 없으며, 일월은 만물을 비춰 주는 데 사사로움이 없다.”
‘자하’는 공자의 말을 듣고 나자, 놀란 듯이 일어서서 남을 등지고 말했습니다.
“저희가 이 말씀을 감히 기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논어’에는 ‘자하’의 말이 여러 번이나 나옵니다. 그 말들을 한 번 살펴볼까요? 우선 ‘학이’ 편을 보면,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기를 미색 즐기듯이 하며, 부모 섬김에 그 힘을 다하며, 임금 섬김에 그 몸을 바치며, 벗과 사귐에 있어서 말에 신의가 있으면 비록 배우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배웠다고 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공자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옮긴 듯합니다.
그리고 ‘자장’ 편에는 몇 개의 말이 나옵니다. 즉, ‘비록 작은 기술이라도 반드시 볼 만한 것이 있을 터이나, 원대한 것을 이루는 데 거리낌이 있을까 두려워서 군자는 그런 것에 종사하지 않는다.’라든가 ‘날마다 자기에게 없는 것을 알고 달마다 능한 것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가히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라든가 ‘군자는 세 가지 다른 면이 있는데, 멀리 바라보면 정중하고 가까이 보면 온화하며 그 말을 들으면 엄정하다.’라는 말 등이 있지요. 이 말들을 보면, ‘서하의 공자’라는 이름답게 공자의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열전’에 의하면, ‘자하’는 자식의 죽음을 너무나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소리 높여 울다가 눈이 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논형’의 ‘화허’(禍虛) 편에는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자하’가 눈이 멀었을 때 증삼이 그의 죄를 들추며 책망하였답니다. 그러자 ‘자하’는 들고 있던 지팡이를 내던지며 자기 잘못을 반성했다고 합니다.
‘논어’에 있는 ‘자하’의 말 중에 ‘벼슬하면서 여가가 있으면 학문을 하고, 학문을 하면서 여가가 있으면 벼슬을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좀 아리송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벼슬하는 사람은 그 일에 온 힘을 쏟고 학문하는 사람은 학문에만 온 힘을 쏟아라.’라는 말로 들리기도 하며, 또 다르게 생각하면 ‘벼슬’과 ‘학문’을 동등하게 놓음으로써 ‘벼슬’의 중요성을 강조한 듯이 여겨지기도 합니다. 아마도 ‘자하’는 ‘학문’보다 ‘벼슬’에 더 뜻이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공자의 손꼽히는 10명의 제자에 관한 이야기는 대강 끝이 났습니다. 아니, ‘담대멸명’까지 합치면 모두 11명이 거론되었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다시 나의 시 한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어둠에 잠기면 남몰래
하늘을 바라보며 읊고 있는
나무의 시를 듣는다.
너무나 시리다.
물결은 흘러가고 물소리만 남은 시
가지를 딛고 내린 달빛이
그 위에 몸을 포개고
시가 닿는 자리는 모두 젖는다.
- 졸시 ‘모두 젖는다’ 전문
공자의 많은 제자 중에 문학에 뛰어난 사람으로는 ‘자유’와 ‘자하’를 꼽습니다. ‘자유’가 무성 고을을 다스릴 때, 공자가 손수 찾아간 적이 있었지요. 가서 보니, 그 고을 백성들은 거문고를 타거나 시를 읊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공자가 무심코 말했습니다.
“닭 잡는 데에 소 잡는 칼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이 말은, ‘조그만 고을을 다스리는 데에, 무슨 ‘악’과 ‘시’가 필요하겠느냐‘라는 뜻이었지요. 그 말을 듣고, 자유가 정색하며 말했습니다.
“전에 선생님께서 ‘정치를 하는 자가 예와 악과 시를 배우면 사람을 잘 인도할 수 있고, 백성으로서 예와 악과 시를 배우면 윗사람이 쓰기가 쉽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하니 누구나 이를 배워야 할 게 아닙니까?”
이 말을 듣고, 공자는 옆에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말했습니다.
“제자들아, ‘언’이 하는 말이 옳다. 내가 먼저 한 말은 농담이었다.”
어찌 ‘시’를 듣는 게 사람뿐이겠습니까. 나무들도 ‘시’를 듣습니다. 물결은 흘러가고 물소리만 남은 시, 그 시가 닿는 자리는 모두 젖습니다.
‘자하’도 시에 익숙하여 그 뜻을 능히 통달했다고 합니다. 공자가 타계한 후에 그는 서하(西河)에서 선생 노릇을 했는데, 그의 여러 제자 중에는 후에 이름을 떨친 사람이 여럿 있었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서 ‘서하의 공자’라고까지 떠받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공자의 ‘다섯 가지 지극함’에 대한 말을 다시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반드시 ‘뜻’이 지극한 데에는 ‘시’도 또한 지극하며, ‘시’가 지극하게 되면 ‘예’도 또한 지극하며, ‘예’가 지극하게 되면 ‘악’도 또한 지극하며, ‘악’이 지극하게 되면 ‘슬픈 마음’도 또한 지극하게 된다.”(글: 김 재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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