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형제가 없음을 근심하지 마라
‘공자’의 제자 중에서 시세 파악에 뛰어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자고’입니다. ‘자고’(子羔)라는 사람의 성은 ‘고’(高)이고 이름은 ‘시’(柴)입니다. 그러므로 정식 이름을 부를 때는 ‘고시’라고 해야 옳겠지요. 자(字)가 ‘자고’(子羔)이고, ‘자고’(子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공자보다 30세가 아래랍니다. 그런데 ‘공자가어’에는 공자보다 40세가 아래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제(齊)나라 사람이라고 알려졌지만, 위(衛)나라 사람이라고도 한답니다. 739년인 당나라 때에 ‘공백’(共伯)으로, 그리고 1009년인 송나라 때에 ‘공성후’(共城侯)로 추봉되었습니다.
‘공자가어’ 중의 ‘제자행’에는 ‘자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제나라 사람이다. 고씨들의 ‘별족’(別族)이고, 공자보다 40세가 적었다. 키가 6척에 지나지 않았으며, 얼굴 생김새는 추했으나 사람됨은 효성스럽고 독실하며 모든 행동에 법도가 있었다. 젊었을 때 노나라에 살았던 까닭에 공자의 제자가 되었다. 한때 무성재의 자리에 있었다.』
이 글로 미루어서 ‘자고’는 키가 꽤 작았던 모양입니다. ‘열전’에도 ‘자고’는 ‘키가 다섯 자도 안 된다.’라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자고’에 대한 자공의 평은 어떠했는지 알아보도록 할까요?
“선생님을 뵙게 된 뒤로부터는 출입할 때 남의 신을 넘어가지 않으며, 혼자 다닐 때도 남의 그림자를 밟지 않고 금방 생긴 벌레를 죽이지 않으며, 자라고 있는 나무를 꺾지 않고 상제가 되었을 때는 이(齒)를 드러내 보이지 않았으니, 이는 ‘고시’의 행실입니다. 선생님께서 그를 두고 말씀하시기를 ‘고시는 상제가 되었을 때 그렇듯 한 번도 웃지 않았으니 보통 사람으로서는 능히 할 수 없는 일이다. 또 금방 생긴 벌레를 죽이지 않는 것은 사람의 도리를 순(順)하게 한 것이며, 자라고 있는 나무를 꺾지 않는 것은 어질기 때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논어’에는 ‘자고’에 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로가 ‘자고’를 천거하여 ‘비’(費) 고을의 원으로 삼으니, 공자가 말했다. “남의 자식을 해치는 일이다.”그러자, 자로가 말했다. “그곳에는 백성도 있고 토지와 오곡이 있는데, 왜 반드시 글을 읽은 연후에야 학문을 했다고 하겠습니까?”이에, 공자가 말했다. “그래서 나는 말재주 있는 자를 싫어한다.”(자로 사자고 위비재, 자왈 적부인지자. 자로왈 유민인언 유사직언 하필독서연후 위학. 자왈 시고 오부녕자.: 子路 使子羔 爲費宰, 子曰 賊夫人之者. 子路曰 有民人焉 有社稷焉 何必讀書 然後 爲學. 子曰 是故 惡夫佞者.)【논어 11-24】
여기에서 말하는 ‘적’(賊)은 ‘해’(害)와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부인지자’(夫人之子)는 ‘연소자를 부르는 형식’인데, ‘저 아이’ 정도의 말이지요. ‘영자’(佞者)는 ‘말 잘하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공자가 ‘자고’의 벼슬살이를 염려했던 이유는, 아직 그의 학문이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자로’를 책망함으로써 학문과 정치에는 순서가 있음을 깨우치게 하였습니다. 학덕을 지니지 못한 사람이 정권을 잡고 권력의 자리에 오르는 일은 고금을 통해서 불행한 일이지요.
‘자로’와 ‘자고’가 함께 위(衛)나라에 가서 벼슬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침 ‘괴외’의 난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괴외’에 대해서는, 앞에서 ‘자로’를 이야기하면서 조금 거론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공자는 노나라에 있었습니다. 공자는 그들의 소문을 듣고 한탄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시는 돌아오겠지만, 중유는 이 난리에 필연코 죽겠구나.”
그 말 그대로, 나중에 ‘자로’는 그 난리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한 번은, 위(衛)나라 장군인 ‘문자’(文子, 이름은 彌牢)가 죽은 아버지 사당을 세우기로 작정했는데, 그는 ‘자고’를 시켜서 그 예법을 공자에게 물어 오라고 했습니다. 공자는 ‘자고’에게 말했습니다.
“나라의 사당을 사삿집에 세우는 일은 옛날의 예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로서는 모를 일이다.”
‘자고’가 또 물었습니다.
“계급을 따져서 사당에 모신다는 말이 있는데, 그 제도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천하에 임금이 있게 되면서 비로소 땅을 나누어 나라를 세우고 조종에 대해서도 사당을 설치하게 된 것은 친소와 귀천의 많고 적은 수효를 구별하기 위함이었다.”
‘설원’(說苑)의 ‘지공’(至公)에는, 공자의 이런 말이 실려 있습니다.
“관리 노릇을 잘하는 것은 ‘덕망을 심는 일’(樹德)이고, 관리 노릇을 잘못하는 것은 ‘원망을 심는 일’(樹怨)이다.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였다면 그것이 자고를 가리켜서 한 말이던가!”
원래 ‘자고’는 공자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망나니짓을 자주 했다는군요. 그러나 공자의 제자가 되고 난 후부터는 선비로서의 면모를 지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고’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으므로 여기에서 일단 끝을 맺고, 이제부터는 ‘자금’의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자금’(子禽)이라는 사람은 성이 ‘진’(陳)이고 이름은 ‘항’(亢)입니다. 자(字)가 ‘자금’이지요. 때로는 ‘자항’(子亢)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진(陳)나라 사람이랍니다. 739년인 당나라 때에 ‘영백’(潁伯), 1009년인 송나라 때에 ‘남돈후’(南頓侯)로 추봉되었고, 1530년인 명나라 때에 ‘선현진자’(先賢陳子)로 칭송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자금’이 공자의 제자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공자가어’에는 공자의 제자라고 했고, ‘열전’에는 공자의 제자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쨌든 ‘논어’에는 ‘자금’이 몇 번이나 등장하는데, 그 성격이 바르지 못하고 약간 삐뚤어졌습니다. 그중에 하나를 살펴보도록 할까요?
‘자금’이 자공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 가시는 나라마다 반드시 그 나라의 정치를 들으시는데, 그것은 선생님께서 먼저 듣기를 구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그런 기회가 상대방으로부터 요청된 겁니까?” 자공이 대답했다. “선생님께서는 온화하고 선량하며 검소하고 겸양함으로써 그런 기회를 얻으셨소. 선생님의 구하심은 다른 사람의 구하심과는 다르오.”(자금 문어자공왈 부자 지어시방야 필문기정 구지여 억여지여. 자공왈 부자 온량공검 양이득지 부자지구지야 기저이호인지구지여.: 子禽 問於子貢曰 夫子 至於是邦也 必聞其政 求之與 抑與之與. 子貢曰 夫子 溫良恭儉 讓以得之 夫子之求之也 其諸異乎人之求之與.)【논어 1-11】
여기에서 말하는 ‘부자’(夫子)는 ‘선생’ 또는 ‘장자’라는 뜻으로 ‘공자’를 나타내고, ‘시방’(是邦)은 ‘어느 한 나라를 가리키는 게’ 아니고 ‘가는 곳마다의 나라’를 뜻하며, ‘지어’(至於)는 ‘이르렀을 때’인데 그 뒤의 ‘야’(也)는 ‘위를 받아서 아래를 일으키는 글자’랍니다. 또, ‘문기정’(聞其政)은 ‘정치 상담에 참여함’을 말하는데, ‘문’(聞)은 원래 ‘자연히 들리어 온다.’라는 뜻으로 ‘상대방이 상담해 오는 것’을 말합니다.
위의 상황을 보면, ‘자금’은 공자를 존경하는 마음이 없는 성싶습니다. 슬쩍 공자를 헐뜯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아무래도 공자의 제자라면 이러할 리가 없겠지요.
앞에서, 공자의 아들인 ‘백어’(伯魚)와의 문답을 소개한 적이 있지만, 그때에도 ‘자금’은 ‘아버지에게 뭐 좀 특별하게 배우는 게 없냐?’라고 물었습니다. 이 또한, 공자에 대한 의심이 내면에 깔려 있었습니다.
또 나중에는, ‘자금’이 자공에게 이렇게까지 말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선생님이 겸손하신 때문이지, 중니가 어찌 선생님보다 현명하겠습니까?”
참으로 그 말이 가관입니다. 여기의 ‘선생님’은 ‘자공’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중니’는 공자의 자(字)입니다. 이는, ‘자금’이라는 야비한 인간성이 잘 드러나는 말입니다. 이렇듯 ‘자금’은 자공에게 아부하며 공자를 깎아내렸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자공이 말했습니다.
“군자는 한마디 말로 지혜롭게 되기도 하고 한마디 말로 지혜롭지 않게 되기도 하니, 말을 조심하지 않을 수 없소. 우리 선생님을 따라갈 수 없는 것은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오르지 못하는 것과 같소. 선생님께서 제후국이나 큰 가문을 맡아서 다스렸다고 한다면, ‘세우면 그 자리에 서고 이끌면 따라가고 편안하게 하면 따라오고 움직이면 조화를 이루어서 살아 계심에 영광스럽고 돌아가심에 슬플 것’이니, 어떻게 그분을 따라가겠소.”
자공은 공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이토록 지극했습니다. 자공은 공자의 몇 손가락 안에 꼽는 제자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서 공자를 헐뜯었다는 사실은, ‘자금’을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좋게 볼 수 없게 만듭니다.
혹자는 ‘자금’이 자공의 제자라고도 말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더욱이 이처럼 공자를 깎아내릴 수 없는 노릇입니다. 어쩌면 ‘자금’은 공자의 제자는 아니지만, 공자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말하자면 ‘건달’ 같은 사람이었을 성싶습니다.
그러면, 이왕 이야기를 시작한 김에, 공자의 제자 몇 사람을 더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공자의 제자 중에 ‘말 많고 근심 많은’ 사람이 있었답니다. 누구인지 궁금하지요? ‘사마우’라는 사람입니다.
‘사마우’(司馬牛)라는 사람은 성이 ‘사마’이고 이름은 ‘경’(耕) 또는 ‘여경’(黎耕)이며 자(字)는 ‘자우’(子牛)입니다. 앞에서 조금 설명했던 적이 있듯이, 그는 공자를 해치려고 했던 ‘사마환퇴’(司馬桓魋)의 아우라고 합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사마우’에 대해 ‘말이 많고 몹시 경솔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마우’와 공자의 대화 내용이 ‘논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마우’가 물었다. “군자란 어떠한 인물입니까?”공자가 대답했다. “군자는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마우’가 또 물었다.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만으로 군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내심으로 반성하여 잘못이 없는데 무엇을 근심하며 무엇을 두려워하겠느냐?”(사마우 문군자, 자왈 군자 불우불구. 왈 불우불구 사위지군자의호. 자왈 내성불구 부하우하구.: 司馬牛 問君子, 子曰 君子 不憂不懼. 曰 不憂不懼 斯謂之君子矣乎. 子曰 內省不疚 夫何憂何懼.)【논어 12-4】
여기에서 말하는 ‘군자’(君子)는 ‘인격이 완성된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리고 ‘불우불구’(不憂不懼)는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논어’의 ‘헌문’ 편에도 ‘인자(仁者)는 불우(不憂)하고 지자(知者)는 불혹(不惑)하며 용자(勇者)는 불구(不懼)한다.’라는, 공자의 말이 나오지요. 그때, 자공은 ‘선생님이 스스로 대하여 하신 말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내성불구’(內省不疚)는 ‘스스로 자기 자신에 반성해 보아서 병 되는 게 없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공자가 ‘사마우’의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없애 주려고 한 말이랍니다. ‘사마우’는 그 형이 난을 일으켰기에 언제나 근심과 두려움을 안고 있었다고 합니다.
언제인가, ‘사마우’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형제들이 있어서 즐겁게 살고 있건만, 나만 형제가 없어서 외로우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자하가 말했습니다.
“내가 듣건대, 사람은 살고 죽으며, 또 부자로 산다든지 고귀한 지위에 오른다든지 하는 일은 모두 하늘의 운수라고 합니다. 그러니, 그 일은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형제가 없음은 천명입니다. 아무리 근심하여도 소용이 없지요. 따라서 천명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순종하며 내가 할 일을 성실히 할 뿐입니다. 군자가 자기의 몸가짐을 항상 공경스럽게 하여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힘쓰며, 또 남과 접촉할 때 항시 예의를 지키면 이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나를 공경하고 사랑하여 형제처럼 됩니다. 그렇기에 군자는 형제 없음을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자하가 인간 세상의 ‘수인사대천명’(遂人事待天命)을 말한 내용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사마우’는 형제가 있었으나 나라에 큰 죄를 지었으므로 형제가 없는 바와 같다고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사마우’의 심정을 알 만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는,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역적으로 몰리면 그의 ‘삼족’을 멸하는 벌을 내렸습니다. ‘삼족’(三族)이란, 부계(父系)와 모계(母系)와 처계(妻系)의 세 족속을 말합니다. 그러니 그 범위가 굉장하였습니다.
또 어느 날, ‘사마우’가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어질(仁)다는 것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어질다는 것은 ‘말을 참는 것’을 말한다.”
‘사마우’가 다시 물었습니다.
“말을 참는 것이 ‘어짊’(仁)이 되겠습니까?”
공자가 다시 말했습니다.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이니, 어찌 말을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그렇습니다. 말이 모든 화근의 불씨가 됩니다. 그래서 공자는 말을 잘하기보다는 아끼는 사람을 좋아하였습니다. 앞의 내용으로 보면, ‘사마우’도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렇기에, 말을 참아야 인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공자는 ‘사마우’를 타일렀습니다.
제자들이 ‘인’이나 ‘예’ 등을 물었을 때, 공자는 각 제자의 결점을 고치라는 차원에서 그와 결부된 답을 주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스승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더없이 정감을 지니게 만듭니다. 공자가, 그만큼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려니와, 모든 제자에게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한 사랑을 지니고 있었음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공자는, 제자들의 즐거움과 슬픔까지도 모두 껴안고 살았습니다.
이제는 ‘칠조개’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칠조개’(漆雕開)라는 사람은 성이 ‘칠조’이고 이름이 ‘개’입니다. 자(字)는 ‘자약’(子若) 또는 ‘자개’(子開)라고 하였습니다. 노(魯)나라 사람이라는 설도 있고, 채(蔡)나라 사람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공자보다 11세가 아래랍니다. 원래의 이름은 ‘계’(啓)였는데, 한(漢)나라 경제(景帝)의 이름이 ‘계’(啓)였기 때문에 ‘개’(開)로 고치게 되었답니다. 예로부터 ‘임금의 이름과 같은’ 이름은 피하는 게 관례였다고 하는군요. 739년인 당나라 때에 ‘등백’(滕伯)으로, 1009년인 송나라 때에 ‘평여후’(平與侯)로 추봉되었습니다.
‘공자가어’의 ‘제자해’는 ‘칠조개’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칠조개는 채나라 사람이다. 자(字)가 ‘자약’이고 공자보다 11살 아래였다. ‘상서’를 열심히 공부했으며 벼슬하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처럼 ‘칠조개’는 공부만 열심히 하였고 벼슬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공자가 보기에 딱했던 모양입니다. 다른 제자들보다 ‘칠조개’는 나이가 많은 편이었으니, 공자는 애처로운 생각이 들어서 벼슬을 권하였겠지요. 그 이야기가 ‘논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자가 벼슬을 권하자, ‘칠조개’가 말했다. “저는 아직 벼슬할 자신이 없습니다.”그 말을 듣고, 공자가 기뻐하였다. (자 사칠조개 사, 대왈 오사지미능신. 자 열.: 子 使漆雕開 仕, 對曰 吾斯之未能信. 子 說)【논어 5-6】
‘칠조개’는 벼슬보다 학문에 뜻이 있었습니다. 그가 ‘아직 벼슬할 자신이 없다.’라고 한 말은, 실제로 벼슬을 감당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나름의 겸손을 나타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칠조개’는 벼슬에 대해 그리 좋은 느낌을 갖지 못하고 있었던 듯싶습니다.
공자는 그 뜻을 대번에 간파했습니다. ‘기뻐하였다.’라는 말 속에 공자의 마음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묵자’ 중의 ‘비유’(非儒) 편을 보면, ‘칠조개는 사형당했으니, 혼란은 이보다 더 클 수 없다.’라는 글이 나옵니다. 이로 미루어서 ‘칠조개’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어떤 잘못 때문에 형벌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총자’(孔叢子)의 ‘힐묵’(詰墨) 편에는, ‘칠조개는 비록 형벌을 받았어도 그의 죄 때문이 아니다.’라고 했으니, 그는 아마도 누명을 썼던 모양입니다.
‘칠조개’는 나이가 많으나 공자 초기의 제자는 아닌 듯싶습니다. 왜냐하면, 공자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닐 때 그의 이름이 한 번도 거론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중에 늦깎이로 공자의 제자가 된 사람이 옳겠지요.
늦게 배우는 사람이 더욱 ‘향학열’에 불타게 되기 마련입니다. ‘늦게 배우는 사람’을 요즘에는 ‘늦깎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사람 중에 성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하자면 ‘배움에 대한 재미를 제대로 알기’ 때문이겠지요. 그렇기에 그는 벼슬보다 학문에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터입니다. 학문을 하는 ‘바른길’은 벼슬로 나아가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학문에 뜻을 두었으면 학문에만 몰두하는 게 바른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칠조개’는 선비로서의 바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졌으니, 어찌 이리 착한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생기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또, 공자의 제자 중에 ‘품격 있는 예절로 손님을 잘 접대하는’ 또 한 사람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공서화’입니다.
‘공서화’(公西華)라는 사람은 성이 ‘공서’이고 이름은 ‘적’(赤)입니다. 자(字)를 ‘서화’ 또는 ‘자화’(子華)라고 했습니다.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42세가 아래라고 합니다. 당나라 때인 739년에 ‘변백’(汴伯)으로 추봉되고, 1009년 송나라 때에 ‘평음후’(平陰侯)로, 그리고 1530년 명나라 때에 다시 ‘선현공서자’(先賢公西子)로 추증되었습니다.
그러면, ‘공자가어’에서 자공이 ‘공서화’를 평한 내용을 볼까요?
『모습은 공손하면서도 엄숙하며, 뜻은 형통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며, 두 나라 임금을 서로 만나게 할 때는 접대하는 예법을 독실하게 하고 또 절도에 맞게 하니, 이는 공서적의 행실입니다.』
어느 때, 노나라의 권력자인 ‘맹무백’(孟武伯)이 공자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공서적이 인(仁)합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적(赤)은 대례복을 성대히 차려입고 조정에 서서 외국 사신들을 응대하며 말을 나누게 할 만하지만, 그가 인(仁)한 줄은 모르겠습니다.”
‘공서적’, 다시 말해서 ‘공서화’는 공자의 말년 제자임이 틀림없습니다. 공자가 타계할 때, 그는 겨우 30살 정도였지요. 그래서 그는 공자를 존경하며 잘 따랐다고 여겨집니다. ‘논어’에는 선생님과 제자, 즉 공자와 ‘공서화’의 대화 모습이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성인과 인인을 내가 어찌 감당하겠는가? 그렇지만 그 도를 배우기에 싫증을 내지 않고 사람을 가르치기에 게으르지 않은 일만은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다.”그 말을 듣고, ‘공서화’가 말했다. “바로 그 점이 우리로서는 흉내도 못 내는 어려운 일입니다.”(자왈 약성여인 즉오기감? 억위지불염 회인불권 즉가위운이이의. 공서화왈 정유제자 불능학야.: 子曰 若聖與仁 則吾豈敢? 抑爲之不厭 誨人不倦 則可謂云爾已矣. 公西華曰 正唯弟子 不能學也.)【논어 7-33】
여기에서 말하는 ‘성여인’(聖與仁)은 ‘성인(聖人)과 인인(仁人)’을 이릅니다. 그리고 ‘억’(抑)은 ‘허나’라는 가벼운 반어랍니다. ‘위지불염’(爲之不厭)은 ‘인의 도에 대한 배움을 싫어하지 않음’을 나타냅니다. 또, ‘가위운이이의’(可謂云爾已矣)는 ‘그것만은 그렇다고 할 수 있을 뿐’이라는 말이랍니다. ‘정유’(正唯)는 ‘바로 그것’이란 뜻이라는군요.
공자는 스승으로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여기에서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한 번은 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공서화’가 제나라에 사신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염구가 말했습니다.
“서화의 어머니에게 곡식을 얼마나 전할까요?”
공자가 말했습니다.
“1부(釜), 즉 6두 4승을 주어라.”
그러나 염구는 조금 더 주자고 청했습니다. 이에, 공자가 말했습니다.
“1유(庾), 즉 16두를 주어라.”
그런데 염구는 자기가 생각하고 있던 대로 5병(秉), 즉 80석의 곡식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공자가 말했습니다.
“적이 제나라에 갈 때,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갖옷’ 차림으로 갔다. 내가 듣기로는 ‘군자는 위급할 때 도와주되, 부자는 더 부자가 되게 도와주지 않는다.’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너는 부자를 더욱 부자가 되게 만드는구나.”
‘공자가어’에는 공자와 ‘공서화’의 이런 대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공자가 말했습니다.
“떳떳한 예절 300가지는 힘써 실천하면 능히 할 수 있지만, 위엄스러운 모습 3,000가지는 실천하기 어렵다.”
이 말은 앞에서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공서화’가 물었습니다.
“어찌해서 그렇게 어렵습니까?”
공자가 대답하였습니다.
“두 나라 임금을 돕는 예는 표정도 좋아야 하지만 말도 역시 잘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어렵다는 뜻이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다른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공서화는 그 일을 능히 해낼 사람입니다.”
그 말을 듣고, 공자가 말했습니다.
“공서화가 손님 접대하는 일은 능히 해낸다고 하더라도 나라 다스리는 근본은 능통하다고 할 수 없다.”
공자는 말을 잠깐 끊었다가 다시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손님 접대에 대한 예절을 배우고자 한다면 저 공서화에게 배우도록 하여라.”
공자는 여러 제자 앞에서 이렇게 ‘공서화’를 칭찬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공백료’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공백료’(公伯寮)는 노나라 사람으로 성이 ‘공백’이고 이름은 ‘요’(寮)입니다. 자(字)는 ‘자주’(子周)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부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논어’에는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공백료’가 자로를 권력자인 ‘계손’에게 참소하니, 자복경백이 공자에게 이렇게 고하였다. “계손은 진실로 공백료의 참소에 따라 자로를 의심하고 있는데, 나의 힘이 아직도 공백료를 저자나 조정의 광장에서 사형시킬 수 있습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도가 행해지는 것도 천명이요, 도가 폐하는 것도 천명이다. 공백료가 천명을 어찌하겠는가?”(공백료 소자로어계손 자복경백 이고왈 부자 고유혹지어공백료 오력 유능사저시조. 자왈 도지장행야여 명야 도지장폐야여 명야 공백료 기여명자 하.: 公伯寮 愬子路於季孫 子服景伯 以告曰 夫子 固有惑志於公伯寮 吾力 有能肆諸市朝. 子曰 道之將行也與 命也 道之將廢也與 命也 公伯寮 其如命 何.)【논어 14-38】
여기에서 말하는, ‘자복경백’(子服景伯)은 노나라 대부로, 노나라 세도가 ‘숙손씨’의 일족인 ‘자복씨’(子服氏)입니다. 공자와 그 제자들에게 호감을 지닌 사람이랍니다. ‘자복’은 성이고, 이름은 ‘하’(何) 또는 ‘하기’(何忌)이고 ‘경’(景)은 시호이며, ‘백’(伯)은 자(字)입니다.
그리고 ‘혹지’(惑志)는, ‘마음속으로 자로를 의심하는 것’을 말하고, ‘역’(力)은 ‘대부의 권력’을 말하며, ‘사’(肆)는 ‘시체를 거리에 내걸어서 여러 사람에게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시조’(市朝)는, ‘죄를 짓고 죽임을 당한, 대부 이상은 그 시체를 조정에 내걸고 대부 이하는 거리에 내건다.’라는 뜻이랍니다.
이 글은, 공자가 ‘자로’를 계무자(季武子)에게 추천하여 ‘비성’(費城)의 성주가 되게 했을 당시의 이야기라고 여겨집니다. 당시에 공자는 세력가 집안인 삼환(三桓)들의 세력을 꺾고 왕권을 회복하려다가 실패한 적이 있었습니다. 공백료는 그에 대해 계무자에게 자로를 참소했습니다.
공자는 ‘자복경백’에게는 성급함을 일깨워 주고 자로는 안심시키며 공백료에게는 경고를 내리기 위해 ‘천명’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공백료’에 대한 자료가 충분하지 못하기에 일단 여기에서 이야기를 멈추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또 나의 시 한 편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숲에서 피리 소리가 난다.
댓잎이 좁은 소리를 지녔는가 하면
오동잎은 넓은 소리를 지녔고,
미루나무 꼭대기의 어린잎이 높은
음성을 내는가 하면
땅바닥에서 구르는 가랑잎은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음성을 낸다.
솔잎 소리는 있는 듯 없는 듯
잎들이 모여서 이어 가는
자연의 가락
바람은 가는 나뭇가지 사이를 돌아
요리조리 힘차게 빠져나가고,
나무들은 교묘히 구멍과 또 구멍을
막았다가 풀었다가
아름다운 곡조를 연주한다.
때로는 즐겁게, 가다간 아주 슬프게.
- 졸시 ‘위대한 화음’ 전문
공자는 많은 제자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한 선생님 밑에서 배웠으나 그 배움의 크기는 같을 수가 없었지요. 그렇기에 오히려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동문이니, 어울려서 좋은 화음을 이루었습니다. 마치 ‘잎들이 모여서 이어 가는 자연의 가락’처럼 말입니다. 높은 나무 꼭대기의 잎이 있는가 하면, 땅바닥을 구르는 가랑잎도 있었겠지요. 그래서 공자는 ‘교묘하게 구멍과 구멍을 막았다가 풀었다가’ 하면서 아름다운 곡조를 연주했을 성싶습니다.
예컨대, 사람됨이 효성스럽고 독실하며 법도가 있었다는 ‘자고’를 ‘댓잎’에 비유한다면, 그 성격이 바르지 못하고 약간 비틀린 ‘자금’은 땅바닥을 굴러다니는 ‘가랑잎’에 비유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항상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닌 ‘사마우’를 미루나무 꼭대기의 ‘어린잎’이라고 한다면, 공부만 열심히 하고 벼슬에 관심이 없었다는 ‘칠조개’는 단연코 ‘오동잎’에 해당하겠지요. 아, 그리고 또 한 사람, 모습은 공손하고 엄숙하며 뜻은 형통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공서적’이 있었군요. 이 사람은 모든 일을 술술 잘 풀었으므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앉아 있었을 듯싶습니다. 그러니 ‘솔잎’의 이미지가 어떻겠습니까?
이들이 모두 공자를 따르며 웃고 떠드는 모습을 상상하면 나는 절로 미소가 떠오릅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하나둘 공자를 떠나는 장면을 떠올리면 나는 그만 눈시울을 적시고 맙니다. 우리 인생이 모두 그렇듯, ‘때로는 즐겁게, 가다간 슬프게’ 그들의 피리 연주도 희로애락을 그 안에 지니게 되기 마련입니다.(글: 김 재 황)
'씬쿠러, 콩쯔' 카테고리의 다른 글
21. 이제는 누가 욕해도 화가 안 난다/ 김 재 황 (0) | 2022.01.31 |
---|---|
20. 농사에 관한 한, 나는 늙은 농부보다 못하다/ 김 재 황 (0) | 2022.01.30 |
18. 지나침은 미치지 못하는 바와 같다/ 김 재 황 (0) | 2022.01.29 |
17. 닭 잡는 데에 소 잡는 칼을 쓰다/ 김 재 황 (0) | 2022.01.29 |
16. 썩어 버린 나무에는 글자를 새길 수 없다/ 김 재 황 (0) | 2022.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