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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침은 미치지 못하는 바와 같다
공자의 여러 제자 중에는 ‘부르는 이름’(字)이 ‘자’(子)라는 글자로 시작되는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즉, ‘자로’와 ‘자공’과 ‘자유’와 ‘자하’와 ‘자천’과 ‘자금’과 ‘자장’과 ‘자고’ 등이 그들입니다. 이미 앞에서 ‘자로’와 ‘자공’과 ‘자유’와 ‘자하’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그러면 그들 중에서 이제부터는 ‘자천’과 ‘자장’과 ‘자금’과 ‘자고’ 등에 관하여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자천’(子賤)은 성이 ‘복’(宓)이고 이름은 ‘불제’(不齊)입니다. 자(字)가 ‘자천’이지요. 공자보다 30세가 아래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공자가어’에는 49세가 아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공자가어’의 ‘제자해’는 ‘자천’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49세가 적었다. 벼슬은 단부재(單父宰)가 되었으며, 재주가 있고 어질며,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차마 그를 속이지 못했다. 공자도 그를 좋게 여겼다.』
‘논어’에는, 공자가 ‘자천’을 극찬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자가 ‘자천’을 일러 말했다. “군자로다! 이와 같은 사람은, 노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이 사람이 어디서 그것을 본받았겠는가?”(자 위자천 군자재! 약인 노무군자자 사언취사.: 子 謂子賤 君子哉! 若人 魯無君子者 斯焉取斯.)【논어 5-3】
이에 대한 설명이 ‘공자가어’에는 이렇게 나타나 있습니다.
공자는 ‘자천’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벼슬에 나온 후로 얻은 게 무엇이며 잃은 것은 무엇이냐?”
‘자천’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벼슬에 나온 뒤로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얻은 게 3가지 있습니다. 어려서 배웠던 것을 오늘날 실천하게 되니 이는 학문이 더욱 밝아지는 것이며, 봉록을 받음으로써 친척까지 돌봐 줄 수 있으니 이는 골육 간에 더욱 친하게 되는 것이며, 공무를 마친 여가에는 죽은 사람도 조상하고 병든 사람도 위문하게 되니 이는 친구 간에도 더욱 정이 두터워지는 것입니다. 제가 얻은 3가지란 바로 이것들입니다.”
공자는 이 말을 듣고 탄식하며 말했습니다.
“참으로 너는 군자이구나. 노나라에 군자가 없다면 자천이 이런 말을 하겠느냐?”
‘자천’이 ‘선보 고을’을 다스리게 되어서 처음 부임할 때에 그는 임금에게 이렇게 청했답니다.
“사관 두 사람만 데리고 가게 해주십시오.”
임금은 그 말을 들어 주었습니다. ‘자천’은 부임한 뒤에, 관리들을 경계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두 사관을 시켜서 문서에 적어 두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관이 붓을 잡고 그 일을 적으려고 하면 그는 사관의 팔뚝을 잡으면서 위협했습니다.
“글씨를 잘 쓰지 못하면 너도 벌을 주겠다.”
그러니, 두 사관은 걱정이 되어서 자기들의 소임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두 사관은, 임금에게로 다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이에, ‘자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의 글씨 쓰는 것이 아직 완숙하지 못하니 돌아가서 더욱 힘써 글씨 공부에 힘쓰도록 하여라.”
두 사관은 임금에게로 돌아와서 복명하고 말했습니다.
“자천은 저희에게 글씨를 쓰라고 하고는 다시 팔뚝을 부여잡고 글씨가 잘못되면 저희까지 벌하겠다고 겁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마침내 관리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이대로 돌아왔습니다.”
임금이 그 말을 듣고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이는 어찌 된 까닭입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복불제는 군자입니다. 그의 재주를 말씀드리면 패왕을 보좌하는 소임을 맡긴다고 해도 넉넉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절개를 굽혀서 조그만 ‘단부 고을’을 다스리게 되니 이번 일은 자기를 한번 시험해 보는 일일 뿐입니다. 또, 이는 왕께 간접으로 간하는 의미도 됩니다.”
노나라 임금은 공자의 말을 듣고 그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는 과연 과인의 불초한 탓이었습니다. 과인은 복불제를 잘못 알고 정치를 잘하라고 자주 책망했습니다. 이제 두 시관이 아니었다면 어찌 과인이 과인의 허물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임금은 이렇게 말하고, 급히 그 두 사관을 보내어서 ‘자천’에게 임금의 명을 전하도록 했습니다.
“오늘부터 ‘단부 고을’은 나의 소유가 아니니, 그대의 법령에 따라서 백성들에게 편리한 일이 있으면 그대가 결정하여 다스리고 5년에 한 번씩 그 요점만 들어서 보고하도록 하라.”
‘자천’은 그 명령을 받들었고, 그 결과로 ‘단부 고을’이 아주 잘 다스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자천’이 어떻게 ‘단부 고을’을 다스렸는지 그 내용을 알고 싶지요? 그 요령은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자기 몸부터 먼저 돈후하게 한다. 친한 자를 가까이하는 의리를 분명하게 한다. 독실하고 공경하기를 숭상한다. 남에게 은혜 베풀기를 지극히 어질게 한다. 간곡하고 성실한 마음을 한층 더 굳게 갖는다. 충성스럽고 믿음성 있는 마음을 힘껏 지니게 한다.’
그 뒤의 일이었답니다.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할 때, 그 진격하는 길목에 ‘단부 고을’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에, 단부 고을의 늙은이들이 말했습니다.
“보리가 벌써 모두 익었는데 이제 만일 제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오고 보면 보리를 제대로 수확하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그러니 모든 백성을 일제히 동원함으로써 보리를 수확하면 민간의 부족한 식량을 보충시킬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적의 군사들에게 빼앗기지도 않게 됩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며 세 번씩이나 청했지만, ‘자천’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과연 제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와서 ‘단부 고을’의 다 익은 보리를 마구 먹었습니다.
그 당시의 권력자 집안 중의 하나인 ‘계손씨’가 이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서 크게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자천’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습니다.
“올여름에 보리를 거두지 못한 것은 내년이면 새로 갈아먹을 수가 있지만, 만약 보리를 갈지도 않은 사람에게 이것을 거두게 한다면 이는 백성에게 도둑질하라고 시키는 일이 됩니다. 또, ‘단부 고을’의 보리를 모두 수확해 보았자 노나라가 더 강해지지도 않고, 보리를 모두 잃어 보았자 노나라 더 약해지지도 않습니다. 가령 백성에게 그 보리를 스스로 취하게 했다면 그 법이 옛적부터 내려왔겠지요.”
‘계손씨’는 그 말을 인편에 전해 듣고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지며 말했습니다.
“땅속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나는 들어가고 싶다. 내가 무슨 낯으로 차마 그를 대하겠느냐?”
‘자천’이 ‘단부 고을’을 다스린 지 3년이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공자는 제자 ‘무마기’(巫馬期)로 하여금 ‘자천’이 베풀고 있는 정치를 몰래 돌아보고 오라고 시켰습니다. ‘무마기’는 입었던 옷을 벗고 떨어진 갖옷으로 갈아입은 후에 ‘단부 고을’로 들어섰습니다. 그때는 마침 캄캄한 밤이었다고 합니다.
냇물에서 천렵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물고기를 잡았다가 도로 그 물고기를 놓아주곤 했습니다. 그래서 이상하게 여긴 ‘무마기’가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대체 천렵이란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는 일인데, 잡은 물고기를 왜 놓아주는 것입니까?”
천렵하고 있던,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물고기 중에 작은 것은 이름을 ‘승’(繩)이라고 하는데, 이는 우리 대부께서 키우고자 하십니다. 내가 지금 잡았던 물고기는 바로 그 ‘승’이어서 도로 물속에 넣었습니다.”
‘무마기’는 더 알아볼 게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공자에게로 돌아와서 사실대로 보고했습니다.
“자천의 덕은 백성이 어두운 밤길을 가는데도 마치 곁에서 엄한 형법이 지켜보고 있는 듯이 생각하게 하니, 그는 어떠한 정치를 행해서 이러한 감화를 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공자가 말했습니다.
“내 일찍이 그와 이야기할 때, 이 일에 성실한 자는 저 일에도 법을 받게 된다고 말했더니 그는 이 법을 단부 고을에 시행했구나.”
‘무마기’란 사람에 대해서도 앞에서 조금 이야기한 바가 있습니다. 진(陳)나라 사패(司敗)가 공자에게 ‘소공의 예’를 물은 일이 있었지요? 그때 ‘무마기’가 등장했습니다. 이 사람은 성이 ‘무마’이고 이름은 ‘시’(施)입니다. 자(字)가 ‘기’(期)입니다. 노(魯)나라 사람이라고도 하고, 진(陳)나라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공자보다 30살이 아래랍니다.
‘여씨춘추’의 ‘찰현’(察賢) 편에는 같은 ‘단부 고을’을 다스렸던 ‘무마기’와 ‘자천’의 고사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럼, 그 내용을 살펴볼까요?
『자천은 ‘단부’를 다스렸다. 그는 앉아서 가야금을 울리면서도 그 몸은 당 밑으로 내려오지를 않았다. 그렇지만 ‘단부’는 잘 다스려졌다. 무마기는 별이 떴을 때 출근하여 별이 떴을 때 퇴근하였다.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한시도 쉼이 없었다. 그리고 몸소 모두 돌아다녔다. 그의 노력으로 ‘단부’ 또한 다스려졌다. 무마기는 자신이 고통스럽기에 그 까닭을 자천에게 물었다. 자천은 대답하였다.
“나는 모두 사람에게 맡기지만, 그대는 모두 힘에 맡긴다. 힘에 맡기면 수고롭고 사람에 맡기면 한가롭다.”
자천은 군자다. 사지를 편안하게 하고 이목을 온전하게 하며 심기를 편안하게 가지니 백관이 모두 의롭게 다스릴 뿐이다. 그는 대세의 법칙에 맡길 뿐이다. 그러나 무마기는 그렇지를 못하다.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정력을 낭비한다. 수족을 괴롭히고 정령을 번거롭게 한다. 비록 다스려지기는 해도 이르지 못함이 있다.』
‘설원’(說苑)이나 ‘한시외전’(漢詩外傳)에는 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자천’이 ‘단부 고을’을 잘 다스리자, 공자가 그를 만났을 때 그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자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아버지처럼 섬기는 자는 셋이고, 형처럼 모시는 자가 다섯이며, 벗으로 사귀는 자가 열둘이고 스승으로 삼는 자가 하나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공자는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어버이처럼 섬긴 사람들로부터는 효도를 배웠고, 형처럼 섬긴 사람들로부터는 공경을 배웠으며 벗으로 사귄 사람들로부터는 잘못을 고쳐 받았겠지. 그렇다면 그 공은 요순과 같지 않겠는가?”
‘열전’에는 그 당시 ‘자천’과 공자가 나눈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자천’이 말을 꺼냈습니다.
“이 나라에는 나보다 어진 사람들이 다섯이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저에게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는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도 공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천’이 자리를 떠나자,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타깝구나! 자천이 다스리는 곳이 너무도 작다. 다스리는 곳이 컸더라면 이상적인 정치를 펼 수 있었을 텐데.”
자, 그러면 ‘자천’의 이야기는 이쯤 해두겠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자장’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야 하겠군요.
‘자장’(子張)이라는 사람은 성이 ‘전손’(顓孫)이고 이름은 ‘사’(師)입니다. ‘자장’은 그의 자(字)이지요. 공자보다 48세가 아래라고 합니다. 진(陳)나라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739년인 당나라 때에 ‘진백’(陳柏), 1009년인 송나라 때에 ‘완구후’(宛邱侯), 그 후에 ‘진공’(陳公)으로 추봉되었습니다.
‘공자가어’의 ‘제자해’에는 ‘자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씌어 있습니다.
『사람됨이 용모가 잘생겼으며 성질이 몹시 너그럽고 교제도 넓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 인의로 행할 것을 힘쓰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다 같은 공자의 문인끼리면서도 벗으로 사귀긴 했지만 그를 공경하지는 않았다.』
그러면 자공은 ‘자장’을 어떻게 평했는지, 그의 말을 들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자기에게 아름다운 공로가 있어도 자랑하지 않고, 귀한 벼슬에 올랐어도 그것을 좋게 여기지 않으며, 비천한 자를 만나도 그를 업신여기지 않고, ‘환과고독’(鰥寡孤獨), 즉 아내 없는 사내와 남편 없는 여인과 부모 없는 아이와 자식 없는 노인 등의 의탁할 곳 없는 사람들을 더욱 불쌍히 여기니, 이는 바로 ‘전손사’의 행실입니다. 이 사람에 대하여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 공로가 있어도 자랑하지 않는 것은 혹시 할 수 있거니와, ‘그 백성들에게 폐단이 없게 하는 것’은 어질지 않으면 못 하는 일이다. 시에 이르기를 용모와 기상이 화락하고 단아한 군자는 백성의 부모라고 하였으니 그 어진 것으로서 대학(大學)의 깊은 뜻을 얻었다.’라고 하셨습니다.”
‘대학’(大學)에 대하여도 앞에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이는 ‘사서’(四書) 중의 하나로, 공자 제자들이 지은 책입니다.
‘논어’ 중의 ‘선진’ 편에는, ‘사(師)는 편벽되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편벽됨’은 ‘충신’(忠信)에 힘쓰면 고칠 수 있다고 합니다.
또, 한번은 자공이 공자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사와 상은 누가 더 현명합니까?”
알고 있지요? ‘사’(師)는 ‘자장’이고 ‘상’(商)은 ‘자하’입니다.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사는 지나치고 상은 모자란다.”
자공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하면 ‘사’가 더 낫습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지나침은 미치지 못하는 바와 같다.”
그리고 ‘논어’ 중의 ‘자장’ 편에는, ‘자장’(子張)에 대한 ‘자유’(子游)의 말도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나의 벗인 장(張)은 하기 어려운 일을 능히 해내지만, 아직 인자하지는 않다.’라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자유’의 말에 공자의 말투가 나타납니다.
‘자장’은 꽤 출세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하루는 공자에게 ‘출세하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그 내용이 ‘논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장이 벼슬 구하기를 공자에게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많이 들어서 의아스러운 것을 빼놓고 그 나머지를 삼가 말하면 허물이 작으며, 많이 보아서 위태로운 것을 빼놓고 그 나머지를 행하면 뉘우침이 적게 된다. 말에 허물이 작으며 행실에 뉘우침이 적으면 벼슬은 그 가운데에 있다.”(자장 학간록 자왈 다문궐의 신언기여즉과우 다견궐태 신행기여즉과회 언과우 행가회 녹재기중의.: 子張 學干祿 子曰 多聞闕疑 愼言其餘則寡尤 多見闕殆 愼行其餘則寡悔 言寡尤行寡悔 祿在其中矣.)【논어 2-18】
여기에서 말하는 ‘간록’(干祿)은 ‘관록(官祿)을 구하는 것’을 말하는데, 요새 말로 ‘취직’이나 ‘출세’를 가리킵니다. ‘과우’(寡尤)는 ‘허물이 적다.’라는 뜻이고, ‘재기중의’(在其中矣)는 ‘스스로 그 속에 생긴다.’를 이릅니다. 이는, ‘구하지 않아도 자연히 얻게 된다.’라는 뜻이랍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말은, ‘궐’(闕)입니다. 이 뜻은 ‘빼놓다.’라고 했으나, 정확하게 말한다면 ‘괄호 속에 넣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다시 쉽게 설명하면 ‘판단을 중지시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판단의 보류’입니다.
공자의 말은, 오로지 학문과 인격 수양에 힘을 다하고 언행을 삼가면 취직이나 출세 따위는 저절로 해결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직설적으로, ‘자장’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정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자,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다섯 가지 미덕을 존귀하게 여기고 네 가지 악덕을 물리치면 정사를 다스릴 수 있다.”
이를 설명하건대 ‘다섯 가지 미덕’은, ‘백성들에게 좋은 일을 베풀되, 허비함이 없는 것’과 ‘백성에게 일을 시키되, 원망함이 없는 것’과 ‘인과 의를 베풀고자 하나,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과 ‘태연하되, 교만하지 않은 것’과 ‘위엄이 있으되, 사납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네 가지 악덕’은 ‘학’(虐)과 ‘포’(暴)와 ‘적’(賊)과 ‘인’(吝)입니다. 즉, ‘학’은 ‘교육하지 않고 살육을 자행하는 것’을 이르고, ‘포’는 ‘미리 일러주지 않고 공적 올리기를 요구하는 것’을 말하며, ‘적’은 ‘처음에는 늦추어 주었다가 기한을 재촉하는 것’을 뜻하며, ‘인’은 ‘사람에게 재물을 주어야 할 때, 인색하게 구는 것’을 나타냅니다.
어느 때, 또 ‘자장’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앞으로 10대의 일을 알 수 있겠습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과거의 역사를 살펴보면, 은나라 전대인 하나라의 예를 따라 손익을 조절했고, 주나라는 그 전대인 은나라의 예를 따라 손익을 조절했다. 그러므로 예의 대강(大綱)은 변함이 없다. 앞으로 주나라의 바른 전통을 계승하는 새로운 세대가 세워진다면 1백대 앞일이라도 예측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논어’ 중에서 ‘위정’ 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자의 말에는, ‘예의 형식과 수식에는 변천이 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형적이고 사회적일 뿐이며 인간 본질의 것은 아니다.’라는 뜻이 담겨 있답니다.
‘자장’은 또 이런 질문을 공자에게 했습니다.
“선비가 어떠하여야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공자는 ‘자장’에게 되물었습니다.
“네가 말하는 ‘도달’이란 무엇을 가리키느냐?”
‘자장’이 대답했습니다.
“나라에 있어도 반드시 소문나는 것이며 집안에 있어도 반드시 소문나는 것입니다.”
‘자장’이 말하는 ‘선비의 도달함’이란 바로 ‘입신양명’(立身揚名)을 뜻하였지요. 이는, 바로 요즘에 말하는 ‘유명해지는 것’입니다. 어찌 이를 바른 생각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공자는 말했습니다.
“네가 말하는 그것은 소문일 뿐이지 도달한 것은 아니다. ‘도달했다.’라고 하는 것은 질박하면서 정직하며 의를 좋아하고 남의 말을 살피며 얼굴빛을 관찰하고 생각해서 몸을 낮추는 것이니, 나라에서도 반드시 도달하고 집안에서도 반드시 도달하게 된다. 소문이라는 것은 얼굴빛이 인을 취하나 실제로는 어긋나며 그대로 머물면서 의심하지 않는 것이니, 나라에 있어도 반드시 소문이 나며 집의 안에 있어도 반드시 소문이 나게 된다.”
‘자장’은 ‘소문나는 것’과 ‘도달하는 것’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소문나는 것’을 출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거의 모두 겉치레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순자’(荀子)의 ‘비십이자’(非十二子) 편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 관을 바로 쓰지 않고 고상한 말만 늘어놓으며 우(禹) 임금처럼 걷고 순(舜)임금처럼 달리며 흉내내는 것이야말로 ‘자장’의 천한 선비 모습이다.』
어느 날, ‘자장’은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영윤 자문이 세 번 벼슬하여 영윤이 되었는데도 그때마다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고, 세 번 벼슬을 그만두면서도 그때마다 서운하게 여기는 기색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맡아 보던 영윤의 정사를 새로 부임해 온 영윤에게 반드시 상세하게 일러주었습니다. 이만하면 어떻습니까?”
여기에서 ‘영윤’(令尹)이란, 초(楚)나라에서만 사용했던 ‘관직명’이랍니다. 말하자면 ‘재상’에 해당한다는군요. ‘자문’(子文)은 성이 ‘투’(鬪)이고 이름은 ‘누’(穀)이라고 했으며 자(字)는 ‘도’(菟)라고 했습니다. 어쩐지 그 이름이 특이합니다. ‘좌전’에 보면 이런 내용의 기록이 있습니다.
‘운’(鄖)나라에 ‘투백비’(鬪伯比)라는 사람이 살았답니다. 그는 운나라의 공주와 간통하여 몰래 아들 하나를 낳게 되었습니다. 임금(군주)이 알고 질책할까 두려웠지요. 그래서 공주와 군부인은 그 아이를 ‘몽’(夢)이라는 습지에 내다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암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서 그 아이에게 젖을 먹였다는군요. 그때 마침, 그곳으로 사냥을 나갔던 임금이 그 모양을 보고 자기 부인을 다그쳤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임금은, 그 아이를 데려다가 기르게 하였답니다. 임금은 아이 이름을 ‘누오도’(穀於菟)라고 지었습니다. ‘누’는 ‘젖을 먹이는 것’을 의미하고 ‘오도’는 ‘호랑이’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 아이가 자라서, 후에 초나라의 영윤이 된, ‘자문(子文)이라는 사람이랍니다.
‘자장’의 말에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충성스럽다고 할 만하다.”
그러자, ‘자장’이 또 물었습니다.
“인자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는 대답했습니다.
“모르겠다. 어찌 어질(仁)다고까지 말할 수 있겠느냐?”
‘자장’이 다시 물었습니다.
“최자가 제나라 임금을 시해하자, 진문자는 말 10승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그 부(富)를 모두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 이르러서 말하기를 ‘이 나라의 권력자들도 우리 대부인 최자 같다.’라며 떠나 버렸습니다. 다시 한 나라에 이르러서 또 말하기를 ‘이 나라 권력자들도 우리나라 대부인 최자 같다.’라고 하며 다시 떠났습니다. 이만하면 어떠합니까?”
‘진문자’(陳文子)는, 공자가 7세가 될 때까지 활동하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제(齊)나라 사람이었지요. ‘문자’는 시호이고, 성은 ‘진’(陳)이며 이름은 ‘수무’(須無)입니다. 진나라 여공(厲公)의 아들인 ‘완’(完)의 증손이므로, 성을 ‘진’이라고 했답니다. 제나라 대부였습니다. ‘10승을 소유하고 있었다.’라는 말은, ‘말을 40필이나 가지고 있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당대의 상당한 부자였지요. 그는, 발호하는 ‘최자’의 꼴을 보지 않으려고 다른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로 떠나갈 때마다 최저와 같은 사람들을 보게 됨으로써 계속 다른 나라를 떠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자시제군’(崔子弑齊君)이란, 기원전 548년 5월 을해(乙亥)의 날에 제나라의 가로(家老)인 ‘최저’(崔杼)가 그의 군주인 ‘장공’(莊公)을 죽인 사건입니다. ‘최자’(崔子)가 곧 ‘최저’이지요. 성이 ‘최’이고 이름은 ‘저’입니다. 제나라 대신으로 ‘정공’(丁公)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자장’의 말을 듣고, 공자는 말했습니다.
“청백하다.”
그러자, ‘자장’이 다그쳐 물었습니다.
“어질(仁)다고 하겠습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알 수는 없지만, 어찌 어질(仁)다고 하겠느냐?”
참으로, 공자는 ‘어질다.’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어짊’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또, 어느 때였지요. ‘자장’은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예라는 것은 무엇을 가리켜서 하는 말입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예라는 것은 직접 일을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군자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처리할 줄 알아야 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예가 없으면 마치 눈먼 소경이 길잡이가 없이 길을 가는 바와 같다. 허둥지둥하면서 어디로 갈 것인가? 이를 또 비유해서 말한다면, 캄캄한 밤 어두운 방 안에서 무엇을 찾으려고 할 때, 불빛 없이는 보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가 하면, 어느 때인가 ‘자장’이 ‘선인’(善人)의 도를 묻기도 했습니다. ‘선인’은 ‘아름다운 성질을 가지고 있으나 배우지 않은 사람’을 뜻한답니다. 공자는 말했습니다.
“성현의 자취를 밟지 않아도 착한 일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성인의 경지에는 들지 못한다.”
이는, 훌륭한 천분(天分)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선인이 악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천성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인의 경지에 들지 못하는 이유는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한때, ‘자장’이 ‘명’(明)에 관하여 물었습니다. ‘명’은 ‘총명’을 뜻하고 ‘마음이 밝음’을 나타냅니다. 그 말을 듣고, 공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이 스며드는 것 같은 참언과 살갗에 느껴질 것 같은 하소연을 물리친다면 가히 총명하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물이 스며드는 것 같은 참언과 살갗에 느껴질 것 같은 하소연을 물리친다면 가히 총명이 멀리까지 내다본다고도 할 수 있다.”
‘침윤의 참’(浸潤之譖)이라고 하여 ‘줄기차게 남을 헐뜯으면 물이 스며드는 것 같이 듣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그 말에 젖게 됨으로써’ 점점 그 말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부수의 소’(膚受之愬)라고 하여 ‘자기의 원죄를 호소하는 데 살갗을 아프게 찌르는 것 같이 이해관계가 몸에 절박함을 말하면 듣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말에 느끼게 됨으로써’ 점점 동정심이 생기게 됩니다.
이 ‘침윤의 참’과 ‘부수의 소’는 사람들이 잘 판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수단으로 사람을 속이려고 하는 것을 잘 간파하여 행하지 못하게 하면 총명하다고 할 수 있으며 총명이 멀리까지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자장’이 공자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서(書)에 이르기를 ‘고종은 양음 3년 동안이나 말을 하지 않았다.’라고 했으니, 참으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고종’(高宗)이라면, 바로 ‘은(殷)나라를 중흥시킨 왕’입니다. 그리고 ‘양음’(諒陰)은 ‘천자가 거상하는 동안’을 이릅니다. ‘양암’(諒闇)이라고도 한답니다.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옛날에 천자가 죽으면 세자는 모든 정치를 3년 동안 총재에게 위임시킨다. 그런 때문에 은나라의 성탕(成湯)이 죽자 ‘태갑’(太甲)은 ‘이윤’(伊尹)에게 모든 일을 물어서 행했으며, 주나라의 무왕이 죽자 성왕은 주공에게 모든 일을 물어서 행했으니 그 뜻이 이와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 ‘태갑’은 ‘은나라의 제2대 임금인 태종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윤’은 ‘본래 요리사였으나 나중에 은나라의 재상이 된 사람’이지요. 또, ‘주공’(周公)은, ‘주나라 무왕의 아우’로 조카인 성왕을 보좌하였고, 노공(魯公)인 ‘백금’(伯禽)의 아버지입니다.
‘자장’은 공자에게 ‘좌우명’으로 삼을 만한 말을 듣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행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말이 충실하고 믿음직스러우며 하는 짓이 독실하고 정중하면 비록 야만인의 나라에 가서라도 생각대로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비록 자기 고향이라고 하더라도 행할 수 있겠는가? 서 있을 때는 이 말이 눈앞에 있음을 보고 수레를 타고 있을 때는 이 말이 수레 멍에에 걸려 있음을 볼 것이니, 그렇게 한 뒤에야 행할 수 있다.”
‘자장’은 이 말을 듣고 잊어버리지 않도록 허리띠에 적었다고 합니다. 그는 성인에 대해서도 궁금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자장’은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성인은 가르치기를 무엇으로 합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사야, 내 너에게 말해 주마. 성인은 예와 악에 밝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지 하기만 하면 제대로 된다.”
‘자장’이 또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나 제대로 된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사야, 사람이 꼭 자리를 펴고 읍하면서 오르내리고 술잔을 잡고 수작해야만 반드시 ‘예’(禮)라고 하겠느냐? 또 너는 생각하기에 반드시 ‘철조’(綴兆)를 행하고 ‘우약’(羽籥)을 잡고 ‘종고’(鐘鼓)를 벌여 놓은 뒤에라야 ‘악’(樂)이라고 말하겠느냐? 입으로 말을 해서 행동하는 것이 바로 ‘예’이고, 행해서 즐기는 것이 바로 ‘악’이다. 성인은 이 두 가지를 힘들여 행해서 자기 몸부터 공경하고 남쪽을 향해 앉아서 천하를 다스렸다.”
여기에서 말하는, ‘철조’는 ‘악기의 일종’을 말하고, ‘우약’은 ‘피리’를 말하며, ‘종고’는 ‘종과 북’이지요. 참으로 ‘예’와 ‘악’을 제대로 규정한 멋진 말입니다.
아무튼, ‘자장’은 스스로 만족한 군자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자장’이 병들어서 누워 있을 때, 아들 ‘신상’(申祥)을 불러서 말했습니다.
“군자는 ‘마친다.’(終)라고 말하고, 소인은 ‘죽는다.’(死)라고 말한다. 나는 오늘에야 거의 군자이기를 바랄 수 있겠구나.”
이는, 군자는 수양과 덕을 쌓았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로써 ‘자장’은 군자의 삶을 살면서 나름대로 수양과 덕을 쌓았다는 자신감을 표현했습니다. 참으로 이렇게 되기는 힘든 일입니다.
‘자장’에 대한 이야기가 좀 길어졌습니다. 아무래도 ‘자고’와 ‘자금’의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다시 나의 시 한 편을 소개하지요.
급히 산길을 오르다가
나무의 길게 뻗은 다리에 걸려서
넘어진다.
나무가 껄껄 웃는다.
왜 그리 허둥거렸을까,
산도 산길도 그 자리에 그리 있는데
갈 길도 정해져 있는데
나무가 쯧쯧 혀를 찬다.
-졸시 ‘길은 그대로’ 전문
‘자천’이 ‘단부 고을’을 다스린 지 3년이 되었을 때, 공자는 제자 ‘무마기’로 하여금 ‘자천’이 베풀고 있는 정치를 몰래 돌아보고 오라고 시켰지요. 그래서 그는 허름한 갖옷으로 갈아입고 ‘단부 고을’로 밤이 되어서야 들어서게 되었는데, 냇물에서 천렵하는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았다가 도로 놓아주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한 사람이 말했지요.
“물고기 중에 작은 것은 이름을 ‘승’이라고 하는데, 이는 우리 대부께서 키우고자 하십니다. 내가 지금 잡았던 물고기는 바로 그 ‘승’이어서 도로 물속에 넣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무마기’는 더 볼 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공자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 반면에, ‘자장’은 ‘선비의 도달함’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공자가 ‘네가 말하는 도달이란 무엇을 가리키느냐?’라고 묻자, 그는 ‘나라에 있어도 반드시 소문나며 집 안에 있어도 반드시 소문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유명해지고 싶었지요. 그 말을 듣고, 공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말하는 그것은 소문일 뿐이지 도달한 것은 아니다. ‘도달했다.’라고 하는 것은, 질박하면서 정직하며 의를 좋아하고 남의 말을 살피며 얼굴빛을 관찰하고 생각해서 몸을 낮추는 것이다.”
‘자장’의 ‘출세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그 헛된 모습을 보았다면, 나무가 또 껄껄 웃다가 혀를 쯧쯧 찼겠지요. ‘산도 산길도 그 자리에 있고 갈 길도 정해져 있으니’, 그리 허둥거릴 필요가 없습니다.(글: 김 재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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