씬쿠러, 콩쯔

15. 모진 바람 앞에 소나무처럼 푸르다/ 김 재 황

시조시인 2022. 1. 28. 07:50

15
모진 바람 앞에 소나무처럼 푸르다





 공자는 그 이름 그대로 제자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습니다. 만일에 그 여러 제자 중에 훌륭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면, 공자 또한 한 사람의 평범한 선생님으로 긴 역사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공자는 남다른 매력이 있었던지 많은 제자가 그에게로 몰려왔습니다. 줄잡아서 공자의 제자가 3천 명이나 되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 중 실제로 ‘사기열전’의 ‘중니제자열전’에 기록된 제자들은 77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특별히 공자와 친했거나 학문과 덕행이 뛰어났던 10명의 제자를 일컬어서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고 합니다. 자세히 말하면, 덕행(德行)에는 ‘안연’과 ‘민자건’과 ‘염백우’와 ‘중궁’이요, 언어(言語)에는 ‘재아’와 ‘자공’이요, 정사(政事)에는 ‘염유’와 ‘자로’요, 문학(文學)에는 ‘자유’와 ‘자하’였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덕행에 대한 제자들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미 ‘안연’(顔淵, 이름은 回)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바가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하고, 이제 ‘민자건’과 ‘염백우’와 중궁‘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민자건’(閔子騫)이란 사람은 성이 ‘민’이고 이름은 ‘손’(損)이며 자(字)는 ‘자건’입니다. 공자보다 15살이 적었다고 합니다. 노나라 사람으로, 어려서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계모의 학대를 받으며 자랐다고 전합니다. 그는 그런 계모에게도 효성을 다했답니다. 그는, 당나라 개원(開元) 8년(720년)에 조칙으로 십철(十哲)이 되었고, 개원 27년(739년)에는 비후(費侯)로 추봉되었습니다.
 공자의 여러 제자 가운데에서 ‘민자건’을 높이 사는 이유는, 그의 삶이 언덕 위의 소나무처럼 청청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이야기가 ‘논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계씨가 ‘민자건’을 ‘비’라는 고을의 책임자로 삼으려고 하니, ‘민자건’이 말했다. “제발 나를 위해 거절해 주십시오. 만일에 또다시 나를 부른다면 나는 반드시 ‘문수강’가에 가서 있겠습니다.”(계씨 사민자건 위비재 미자건왈 선위아사언 여유부아자 즉오 필재문상의.: 季氏 使閔子騫 爲費宰 閔子騫曰 善爲我辭焉 如有復我者 則吾 必在汶上矣.)【논어 6-7】

 여기에서 말하는 ‘계씨’(季氏)는 ‘노나라 대부인 계손씨’를 말합니다. ‘삼환’ 중에 세력이 가장 강하여서 노나라 ‘소공’을 축출하는 등, 월권행위가 많았지요. 그런가 하면, ‘사위비재’(使爲費宰)라는 말은 ‘민자건으로 비(費) 고을의 관장을 삼으려고 했다.’라는 뜻입니다. 또, ‘부아’(復我)는 ‘다시 나를 부름’을 말하고, ‘문상’(汶上)은 ‘문수(汶水)라는 강의 유역’을 이릅니다. 즉, ‘문수’는 제남(齊南)과 노북(魯北) 사이에 있는 강입니다. 이 강은 내무현(萊蕪縣) 원산(原山)에서 발원하여 제수(濟水)로 흘러 들어갑니다.
 모두 알다시피, ‘계씨’는 권력자입니다. 공자가 가장 싫어한 사람이기도 했지요. 그러니 덕이 높은 ‘민자건’이 그런 사람 밑으로 가서 벼슬살이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래서 ‘민자건’은, 노나라 대부 계씨의 초청을 또다시 받게 된다면 노나라를 떠난 후에 제나라의 ‘문수’(汶水)로 가서 있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에 공자의 여러 제자 중 여러 명이 이미 계씨의 신하로 들어가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민자건’은 결코 그런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그 하나만 보더라도 많은 제자 중에서 그가 우뚝했음을 미루어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논어’의 ‘선진’ 편에는 ‘효자로구나, 민자건이여! 사람들이 그 부모와 형제의 말에는 트집을 잡지 못하는구나.’라는, 공자의 말이 나옵니다. 아마도 ‘민자건’의 부모가 자기 아들인 ‘민자건’을 효자라고 남들에게 자랑한 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자기 자식 자랑은 쑥스러운 일이지요. ‘팔불출’(八不出)이라고 놀림을 받을 만한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민자건’이 워낙 효심이 깊었기 때문에 이 일에 대해 이론을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 효심이 어떠했는지를 알아볼까요?
 ‘민자건’의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버지는 후처를 얻어다가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한겨울이었습니다. 계모는, 자신이 낳은 두 아들에게는 목화로 짠 두툼한 속옷을 입혔으나, ‘민자건’에게는 얇은 갈대의 잎으로 짠 속옷을 입게 했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민자건’으로 하여금 수레를 몰게 하였는데, 그는 세찬 바람에 그만 말고삐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민자건’은 급히 말고삐를 다시 잡으려고 하였겠지요. 그 바람에 ‘민자건’의 겉옷이 찢어지면서 갈대의 잎으로 만든 속옷이 드러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때에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크게 화를 내면서 후처를 집에서 내쫓으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 ‘민자건’이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계시면 한 아들만 춥지만, 어머니가 나가시면 세 아들이 모두 추워집니다.”
 그 말을 듣고, 계모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도 계모를 내쫓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로 하여, ‘민손어거’(閔損於車)란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민손’은 ‘민자건’의 성과 이름입니다. 그 후부터 동네 사람들은, 계모를 생모처럼 여긴 민자건의 효행을 입을 모아서 칭찬했습니다.
 또, ‘논어’의 ‘선진’ 편에는 이러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즉, ‘노나라 사람’이 장부(長府)를 다시 짓자, ‘민자건’이 말했습니다. 
 “옛것을 고쳐 쓰면 어떤가? 어찌 반드시 다시 지어야만 하는가?”
 이 말을 듣고 공자가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말이 없지만, 말을 하기만 하면 반드시 이치에 맞는구나.”
 여기에서 말하는 ‘노나라 사람’은 원문에 ‘노인’(魯人)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노나라의 당국자’를 이르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노나라의 당국자’는 바로 ‘노나라의 군주’를 말하지요. 또, ‘장부’(長府)에서 ‘부’(府)는 ‘금과 옥 및 비단 등을 쌓아 놓은 창고’를 말하고, ‘장’(長)은 ‘그 이름’을 뜻한답니다. 
 공자는 ‘민자건’의 말이 도리에 맞음을 크게 칭찬했습니다.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도리에 맞는 말을 하는 사람은 분명히 덕을 지녔습니다. 그야말로 ‘민자건’은 마음을 비우고 살았던 선비였습니다. 그러니 마음은 항상 편했을 터이고, 걱정 근심이 없었으니 살도 찌게 되었나 봅니다.
 하루는 자공이 ‘민자건’에게 물었습니다.
 “살이 왜 그리 찌었는가?”
 그러자, ‘민자건’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밖에 나가서 아름다운 마차와 말을 보면 나도 저렇게 아름다운 마차와 말을 갖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앞서 떠난 선왕들의 말씀을 경전에서 대할 때마다 나도 그렇게 훌륭한 언행을 갖추어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네. 마음속에서 이 두 생각이 싸웠는데, 지금은 선왕들의 말을 따르는 쪽이 승리했다네.”
 참으로, ‘민자건’의 말은 훌륭합니다. 모두 가슴에 새기어 놓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여러 갈림길에서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만 합니다. 이는, 어떤 쪽으로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서 그 삶의 모습이 완전히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민자건’은 외적으로 화려한 삶을 추구하기보다는 내적으로 풍요한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민자건의 그 삶이 여러 사람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논어’의 ‘선진’ 편에는 ‘공자를 옆에 모시고 서 있는 민자건의 모습은 은은하였다.’라고 씌어 있습니다. ‘은은’(誾誾)이라는 말이 매력적입니다. ‘은은’은 ‘향기가 대단히 나는 모양’ 또는 ‘온화하게 의논하는 모양’ 등을 나타냅니다. ‘은’(誾)은 ‘따뜻한 빛이 넘치다.’ ‘점잖다.’ ‘이야기하다.’ ‘향기 짙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공자는 ‘은은’이라는 단 두 글자로 ‘민자건’을 나타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표현입니다.
 ‘민자건’은 정치에 대하여 무조건 외면하지는 않은 듯싶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자에게 정치하는 방법을 묻기도 했습니다.
 공자가 ‘민자건’에게 말했습니다.
 “정치란 덕으로 해야 하며 법으로 해야 한다. 이 덕과 법은 백성을 다스리는 도구로써 마치 말을 모는 데에 재갈과 굴레가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다시 쉽게 말해서 임금은 ‘사람’이고 관리는 ‘말고삐’이며 형법은 ‘채찍’에 비유할 수 있다. 남의 임금이 되어서 정치를 하자면 그 고삐와 채찍을 바로 잡아야 한다.”
 ‘민자건’은 또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옛날 임금들의 정치하는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러자, 공자가 말했습니다.
 “옛날에 천자들은 내사(內史)로 왼쪽과 오른쪽 손을 삼고, 덕과 법으로 재갈과 굴레를 삼았다. 또, 백관(百官)으로 고삐를 삼고, 형법으로 채찍을 삼으며 만백성으로 말(馬)을 삼았다. 이렇게 한 까닭에 천하를 다스려서 수백 년 동안을 지냈어도 나라를 잃지 않았다. 대개 말을 잘 모는 자는 재갈과 굴레를 반듯하게 하고 고삐와 채찍을 정비해서 말의 힘을 고르게 이용하여 마음을 순하게 해주기 때문에 구태여 입으로 큰소리를 내지 않고서도 말이 먼저 알아차렸다. 또 고삐와 채찍을 들지 않더라도 천릿길을 그대로 달릴 수 있었다.” 
 자, 이만하면 ‘민자건’이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대강은 짐작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이제부터 ‘염백우’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염백우’(冉伯牛)라는 사람의 성은 ‘염’이고 이름은 ‘경’(耕)이며 자(字)는 ‘백우’입니다. 노나라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공자보다 7살이 아래랍니다. 739년인 당나라 때에 ‘운후’(鄆侯)로, 1009년인 송나라 때에 동평공(東平公)으로, 그리고 1009년에는 운공(鄆公)으로 각각 추봉되었습니다.
 ‘논어’에는 ‘염백우’에 대한 글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백우가 병들자, 공자는 문병하러 가서 창 너머로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운명이로구나. 이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이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백우유질 자문지 자유 집기수왈 무지 명의부. 사인야 이유사질야! 사인야 이유사질야!: 伯牛有疾 子問之 自牖 執其手曰 亡之 命矣夫. 斯人也 而有斯疾也! 斯人也 而有斯疾也!)【논어 6-8】
 여기에서 ‘유질’(有疾)은 ‘병에 걸림’을 이릅니다. ‘문둥병’이라고도 하나, 나는 ‘돌림병’에 걸렸다고 생각합니다. 창을 통하여 공자가 만난 이유는, 앓는 ‘염백우’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공자의 배려였겠지요. 그리고 ‘자유’(自牖)는 ‘창 너머로’라는 뜻입니다. ‘유’(牖)는 ‘남쪽 창’을 가리킨답니다. 또, ‘무지’(亡之)는 ‘이런 병에 걸릴 리가 없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명의부’(命矣夫)는 ‘천명이로구나!’라고 개탄하는 말입니다. 
 이 글에는 병든 제자에 대한 공자의 안타까움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염백우가 그런 몹쓸 병에 걸려서 일찍 죽으니 공자는 아주 애통해하였습니다. 후씨(侯氏)의 ‘집주’ 중에서 ‘논형’의 ‘명의’(命義) 편에 담긴 기록은 이렇습니다. 
 ‘안연이나 염백우 같은 사람들이 왜 이렇듯 흉화를 만났는가? 안연과 염백우는 선을 행한 사람들이다. 당연히 수명을 얻어서 복이 따라야 할 터인데, 무슨 이유로 화를 만났는가? 안연은 학문에 전념하다가 그 자신의 재주 때문에 생명을 잃었으며, 염백우는 집에서 성실하게 살았는데 나쁜 병에 걸렸다.’
 또, ‘공자가어’의 ‘제자행’에 기록된 염백우에 대한 모습은 그의 삶을 한 마디로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아무리 가난해도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고 아무리 부귀해도 교만하지 않았으며, 이 사람에게 노여워한 것을 저 사람에게 옮기지 않았고 어제 가졌던 원망을 오늘까지 연장하지 않았으며, 이전에 있었던 남의 과실을 기억하지 않았다.’
아무튼 염백우는 시속의 분위기에 영합하기보다는 고상한 말과 정당한 행동을 실천한 사람이었답니다. 그렇기에 공자는 그를 노나라 중도재(中都宰)로 추천하여 벼슬살이시킨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다만, ‘염백우’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적은 게 아쉽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중궁’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중궁’(仲弓)이라는 사람은 성이 ‘염’(冉)이고 이름은 ‘옹’(雍)이며 자(字)가 ‘중궁’입니다. 혹은 ‘자궁’(子弓)이라고도 하였답니다. 노나라 사람이랍니다. 739년의 당나라 때에 ‘설후’(薛侯), 1009년의 송나라 때에 ‘천하비공’(天下邳公), 그리고 1265년에는 ‘설공’(薛公)으로 추봉되었다고 합니다.
 ‘논어’에는 중궁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공자가 중궁에게 말했다. “얼룩소의 새끼가 털이 붉고 또 뿔이 제대로 났다면 비록 희생으로 쓰지 않으려고 하나 산천의 신이 내버려 두겠는가?”(자 위중궁왈 이우지자 성차각 수욕물용 산천 기사저.: 子 謂仲弓曰 犁牛之子 騂且角 雖欲勿用 山川 其舍諸.)【논어 6-4】

 여기에서 말하는 ‘이우’(犁牛)는 ‘얼룩소’를 가리키고, ‘성’(騂)은 ‘붉은색’을 나타냅니다. 주(周)나라 사람들은 붉은색을 좋아하였고, 그래서 붉은색으로 희생을 썼다고 합니다. ‘용’(用)은 ‘제사에 씀’을 말합니다. 그리고 ‘사’(舍)는 ‘사’(捨) 또는 ‘치’(置)의 뜻으로 ‘그냥 버려둠’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한 ‘주희’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여기에서 이(犁)는, ‘여러 가지 무늬가 섞여 있는 것’이고, ‘성’(騂)은 ‘붉은색’이다. 그리고 ‘각’(角)은 ‘뿔이 완전하고 단정하여 희생의 규격에 알맞은 것’이고, ‘용’(用)은 ‘그것을 써서 제사함’이다. 또 ‘산천’은 ‘산천의 신’을 이름이니, 사람들이 비록 그것을 제사에 쓰지 않으려고 해도 산천의 신이 반드시 버리지 않음을 말했다. 중궁은 아버지가 미천하고 행실이 악하였기에 공자가 이렇게 비유하여 ‘아버지의 악함이 그 자식의 선함을 버릴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중궁과 같이 어진 인물은 마땅히 세상에 쓰여야 한다.”
 어느 때, 공자가 말했습니다.
 “옹은, 남쪽을 바라보고 앉을 만하다.”
 이 말은 굉장한 뜻을 지녔습니다. 여기에서 ‘남쪽을 바라본다.’의 ‘남면’(南面)은 ‘가장 존귀한 방향의 위치’를 나타냅니다. 한 마디로 이는 ‘임금’의 자리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천자’만 남면했던 게 아니고 ‘제후’나 ‘경대부’도 남쪽을 바라보고 앉았다고 합니다. ‘옹’(雍)은 ‘중궁’의 이름이지요.
 그러자, 중궁이 말했습니다.
 “제가 그렇다면 자상백자는 어떻습니까?”
 ‘자상백자’(子桑伯子)는, 노나라 사람이라는데, 확실히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장자’에 나오는 ‘자상호’(子桑戶)라고도 하고, 또는 진(秦)나라 목공(穆公) 때의 ‘자상’(子桑)이라고도 합니다. 이 말들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그는 몹시 간소하다.”
 중궁이 말했습니다.
 “마음속으로 엄숙하고 진지하되, 그것을 간소하게 행하여 백성을 다스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마음속으로도 간소한데 다시 그것을 간소하게 행한다면, 지나치게 간소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공자가 말했습니다.
 “네 말이 옳구나.”
 ‘중궁’이 ‘남쪽을 바라보고 앉을 만한 사람’이라고 칭찬한 말은, 바로 그가 관용온후(寬容溫厚)함을 뜻합니다. 그리고 ‘자상백자’에 대한 이야기는, ‘소탈한 것도 도를 넘으면 안 됨’을 말하였다고 여겨집니다. 공자는 ‘중궁’의 말이 마음에 흡족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논어’ 중의 ‘옹야’ 첫머리에 실려 있습니다.
 또 어느 때, 중궁은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인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공자는 말했습니다.
 “문의 밖에 나가서는 사람을 귀한 손님 대하듯 하고, 백성을 부릴 때는 제사를 모시듯이 하며, 내가 싫어하는 바를 남에게 시키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원망이 없게 된다.”
 인(仁)에 대한 말은, 앞에서 장황하게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시 들어도 그 내용이 새롭기만 합니다. 그래서인지 공자는 제자를 평가할 때 좀처럼 ‘인하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가 인한 줄은 모르겠다.’라고 말했을 뿐이었습니다.
 중궁이 대답했습니다.
 “제가 비록 어리석으나, 선생님의 말씀을 실천해 보겠습니다.”
 참으로 그 대답이 크고 진실합니다. 공자의 제자 중에서 ‘십철’(十哲)의 한 사람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이 말은 ‘논어’의 ‘안연’ 편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드디어 중궁도 벼슬살이를 맡게 되었습니다. 즉, 세도가인 계씨 집안의 가재(家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자에게 정치에 관하여 물었습니다. 공자는 대답했습니다.
 “먼저 각 관원에게 일을 맡기고, 작은 과실은 용서해 주며, 현명한 재사를 등용해야 한다.”
 중궁이 다시 물었습니다.
 “어떻게 현명한 재사를 알아서 등용합니까?”
 그 말에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네가 아는 재사를 등용하면 네가 알지 못하는 재사를 다른 사람들이 버리어 두겠느냐?”
 공자는 먼저 정치의 대략을 설명하고, 그다음에는 재사를 등용하는 데 역점을 두라고 말했습니다. 정치는 혼자서는 할 수 없으므로 훌륭한 사람을 많이 거느리는 게 어느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 이야기는 ‘논어’의 ‘자로’ 편에 들어 있습니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옹은 인자하나 말재주가 없다.”
 그 말을 듣고, 공자는 역정을 내며 말했습니다.
 “말재주를 무엇에 쓰겠는가? 약삭빠른 말재주로 남의 말을 막아 내면 남에게 자주 미움을 사게 된다. 그가 인자한지는 모르겠으나, 말재주를 도대체 어디에 쓰겠는가?” 
 ‘옹’(雍)이 ‘중궁’의 이름임은 알고 있지요? 공자는, 말만 번드르르하게 잘하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을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중궁’, 다시 말해서 ‘염옹’은 아주 비천한 집안의 출신이었습니다. ‘공자가어’에는 ‘불초지부’(不肖之父)라는 말이 나옵니다. ‘불초’(不肖)란,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덕망이나 유업을 대받지 못함, 또는 그러한 사람’을 일컫습니다. 말하자면, 중궁은 그러한 나쁜 아버지를 두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중궁’은, 점잖은 말보다는 상스러운 말을 들으며 자랐겠지요. 아마도 ‘중궁’은, 천한 말이 자기도 모르게 입에 배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일단 말이 입에 붙으면 좀처럼 떼어 내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중궁’은 말에 대한 실수를 염려하여 떠듬거렸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공자의 눈에 아주 긍정적으로 비쳤을 게 분명합니다. 이 이야기는 ‘논어’의 ‘공야장’ 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공자가어’에는 ‘중궁’의 묻는 말솜씨가 ‘청산유수’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말을 한 번 들어 보도록 할까요?
 ‘중궁’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듣기로 지극한 형벌은 정치도 쓸 곳이 없고, 지극한 정치는 형벌도 쓸 곳이 없다고 합니다. ‘지극한 형벌에 정치도 쓸 곳이 없게 된 시대는 걸주의 시대라고 하겠으며, 지극한 형벌도 쓸 곳이 없었던 시대는 주나라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의 시대라고 하겠다.’라고 했으니, 이 말이 과연 옳습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성인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반드시 형벌과 정치를 참고해서 쓰는 법이다. 태상(太上)으로 말하면 덕으로 백성을 가르치고 예로 다스리며, 그 후에는 정치로 백성을 인도하고 형벌로 제지한다. 이 형벌이란, 반드시 형벌로 베푸는 게 아니라, 덕화(德化)로 가르쳐도 변할 줄 모르거나 좋은 길로 인도해도 따를 줄 모르거나 의리를 상하게 하고 풍속을 더럽히는 사람에게는 부득이 형벌을 쓰게 된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 형벌을 마련하는 데는 반드시 천륜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일단 형벌을 집행하는 데 있어서 아무리 가벼운 죄라도 이를 놓아주는 법이 없다. 형벌이란 뜻을 따져 보면, 법이라는 말이며, 법이란 뜻은 ‘일을 이루어지게 한다.’라는 말이다. 다시 자세히 말하면, 일을 일정하게 만들어서 고치지 못하게 해서 군자는 마음을 다해서 일하게 된다.”
 중궁이 다시 물었습니다.
 “옛날에 송사하는데 허물대로 벌을 준 것은, 모두 그 사건에 따라서 할 뿐이고 그 마음씨에는 상관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를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공자가 말했습니다.
 “대개 다섯 가지 형벌에 대한 송사를 들어 보면 반드시 부자 사이의 정리부터 살펴야 하고 군신 사이의 의리부터 세워야 하므로 일을 세밀히 구별하게 되고, 따라서 모든 일을 ‘총명하게 그리고 진실하게’ 살펴야 한다. 옛날에는 모든 나라에서 형벌을 당한 사람은 써 주지 않았다. 아무리 대부나 선비라고 할지라도 길에서 만나면 말도 서로 하지 않고 저 변방에 내쳐 버려서 그가 가는 대로 맡겨 둘 뿐이고 정치에 다시는 간섭하지 못하게 했으니, 이는 그를 다시 살리고자 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궁이 또 물었습니다.
 “형벌에 금할 일은 무엇입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말을 교묘히 해서 법률을 깨뜨리거나 죄를 감추기 위하여 이름을 고치거나 세력을 잡았다고 해서 정사를 어지럽히는 자는 죽여야 한다. 또 음탕한 소리를 일삼거나 괴이한 의복을 만들거나 괴상한 그릇을 만들어서 임금의 마음을 현혹하는 자도 죽여야 한다. 행동은 거짓으로 하면서 정당한 체하고 입만 열면 거짓말만 하면서 옳게 행동하는 체하며 학문은 하지 않으면서 학식이 많은 체하고 그른 일만 하면서 겉으로는 뻔뻔스레 옳은 체해서 여러 사람을 미혹하게 만드는 자도 죽여야만 한다. 또 귀신에게 빌거나 날마다 점만 쳐서 여러 사람을 의심하게 하는 자도 죽여야만 한다. 이 네 가지를 죽이는 데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을 것도 없다.”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이는, 현재에도 크나큰 병폐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를 뿌리 뽑지 않고서는 좋은 정치를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로써 ‘안연’을 비롯하여 ‘민자건’과 ‘염백우’와 ‘중궁’의 이야기는 대강 끝났습니다. ‘공문십철’ 중에서 덕행에 뛰어난 네 명의 제자들 이야기는 일단 여기에서 끝을 맺겠습니다.
 자, 이제는 나의 시 한 편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비워도 무거운 가지에는
어둠이 밤새도록 친친 감기고
푸른 숨결 의지한 하늘에서
우수수우수수 별들이 떨어진다.

살기는, 산바람 힘겹게 넘는
외진 산골짝 가파른 땅
산 뒤에 또 산을 두르고
하루하루 엮어 가는 나무들의 꿈

그래도 오늘은 눈이 내린다.
날리는 눈발 속에서 새로 난 길로
생각난 듯 그분이 찾아오실까,
흰 옷깃 펄럭이며 바삐 오실까.
- 졸시 ‘눈 내리는 날’ 전문

 공자의 여러 제자 중 ‘십철’(十哲)로 꼽히는 ‘민자건’과 ‘염백우’와 ‘중궁’이 모두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눈이 내리는 날에 산길을 걸어갈 때 유난히 생각나는 사람은, 그중에 ‘민자건’이라는 사람입니다. 하얗게 내린 눈을 ‘뽀드득 뽀드득’ 밟으며 걸어갈 때 내가 ‘민자건’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는, 그의 삶이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소나무처럼 청정했기 때문입니다.
 민자건은 권력자 앞에서 결코 머리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또, ‘민손어거’(閔損於車)란 말을 잊지 않았겠지요? 그때, ‘어머니가 계시면 한 아들만 춥지만, 어머니가 나가시면 세 아들이 모두 추워집니다.’라고 한, 민자건의 말이 항상 귓전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 어린 그였을 텐데, 그 말 한마디로 그 계모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도록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공자를 옆에 모시고 서 있는 민자건의 모습은 은은하였다.’라고 기술하였습니다. ‘은은’(誾誾)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향기가 대단히 나는 모양’이나 ‘온화하게 의논하는 모양’ 또는 ‘따뜻한 빛이 넘치는 모양’ 등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나는 ‘눈 내리는 날’을 ‘은은하다’라고 표현했으면 합니다. 그래서 ‘내리는 눈발 속에 새로 난 길로 생각난 듯 그분이 찾아오기를’ 나는 기다리고 싶습니다. 
 이렇듯 그 마음이 착하고 그 몸가짐이 깨끗한 사람은, 아무래도 흰 눈이 내리는 산골짜기에서 조용히 만나는 게 마땅하겠지요.(글: 김 재 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