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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경쇠 소리는 뜻하는 바가 있다
북쪽의 제(齊)나라 사람들은 공자가 정치를 하면서부터 노나라가 더욱 튼튼하게 됨을 보고 여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공자가 계속 나라를 다스리게 되면 노나라는 반드시 다른 나라들 위에 우뚝 서게 된다. 노나라 힘이 세어지면 우리 제나라를 가장 먼저 무릎 꿇게 만들지 않겠는가. 그러니 우리나라에서 미리 얼마쯤의 땅을 내주고 화친을 맺어야 한다.”
사람들의 말을 듣고, ‘여서’(黎鉏)가 경공에게 말했습니다.
“그보다 먼저 노나라를 한번 혼란스럽게 만들어 보십시오. 그런 후에 그 일이 잘 안되면 그때 땅을 내주어도 늦지 않습니다.”
경공은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그래서 제나라는 80명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뽑아서 모두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강락무’(康樂舞)를 가르친 다음에 120필의 무늬 있는 말과 함께 노나라 군주에게 보냈습니다. 앞의 ‘강락무’에서 ‘강락’은 ‘무곡’(舞曲)의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강락무’는 ‘무곡에 맞추어서 벌이는 춤’이지요.
아름다운 여인들과 멋지게 꾸민 마차들은 우선 노나라의 ‘곡부성’(曲阜城) 남문 밖에 이르렀습니다. 아직 받아들인다는 전갈이 없었으므로, 성의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대문 밖에 늘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일에 누구보다도 호기심을 크게 일으킨 사람은, 노나라의 실권자인 ‘계환자’(季桓子)였습니다. 그는 평복으로 갈아입고 몰래 몇 차례나 그곳으로 가서 아름다운 여인들을 살펴보고 장차 받아들이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나라 군주와 각 지역을 돌아본다는 구실을 내세운 다음, 그곳으로 가서 온종일 즐겼습니다. 그런 내용이 ‘논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나라 사람들이 여자 악사들을 보내왔다. 계환자가 그들을 받아들이고 나서 사흘 동안이나 조회를 보지 않았다. 그래서 공자가 떠났다.(제인 귀녀악. 계환자수지 삼일부조. 공자행: 齊人 歸女樂. 季桓子受之 三日不朝. 孔子行)【논어 18-4】
‘귀녀악’(歸女樂)이라는 말은, ‘음악과 춤을 잘 추는 여자 악단을 보냈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귀’(歸)는 ‘증’(贈)과 같은 의미이지요. 또, ‘공자행’(孔子行)은, ‘공자가 태어난 고향인 노나라를 떠났다.’라는 뜻입니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또 ‘공자가어’에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공자가 노나라 정승이 되었다. 제나라 사람들은 노나라가 장차 패왕 노릇을 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여 공자가 정치를 하지 못하도록 하고자 했다. 이에 예쁜 여자 80명을 뽑아서 비단옷을 입히고 ‘용기’(容璣) 춤을 추게 하며, 또 문채 나는 말 400필을 보내어서 노나라 임금에게 바치게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여악(女樂)을 노나라 성문 밖에 베풀어 놓았다. 이때 계환자가 미복으로 세 차례나 그것을 가서 보고 받아들이기로 하였으며 이 사실을 임금께 고했다. 그래서 노나라 임금도 역시 가서 해가 지도록 정신없이 즐기게 됨으로써 자연히 국가의 정치에는 게을러지게 되었다.』
그러니, 자로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지요. 그는 공자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노나라를 떠나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공자가 말했습니다.
“노나라 군주는 이제 곧 ‘교제’를 지낼 터인데 만약에 그때 군주가 ‘번’을 대부들에게 나누어 준다면 나는 그대로 여기에 남겠다.”
‘교제’(交祭)는 ‘남쪽 교외에서 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말합니다. 그리고 ‘북쪽 교외에서 하늘에 지내는 제사’는 ‘사제’(社祭)라고 한답니다. 또한, ‘번’(膰)은 고대에서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구운 고기’를 말합니다. 고대에서는 제사를 마치고 이 ‘구운 고기’를 신하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신하들에 대한 존중을 표시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계환자는, 결국에 제나라의 무녀들을 받아들이고 사흘 동안이나 정사를 돌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교제’를 지내고서도 ‘번’, 즉 ‘구운 고기’를 대부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되었으니, 공자는 노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자가 56세가 되던 해였는데, 이로써 햇수로 14년 동안을 방랑하게 됩니다. 공자는 제자들과 함께 성문 밖으로 나온 후에 ‘둔’(屯)이라는 곳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습니다. ‘둔’(屯)은, 노나라 남부에 있는 한 곳의 ‘지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저 ‘노나라 남쪽’을 가리킨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기’(己)라는 이름의 악사가 공자를 전송하며 말했습니다.
“선생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왜 떠나십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내가 노래로 대답해도 괜찮겠습니까?”
아, 공자가 얼마나 노래를 좋아하는지, 기억하겠지요? 더군다나 상대가 악사이니, 공자는 노래 한 곡조를 뽑고 싶었겠지요. 이해됩니다.
군주가 여인의 말을 믿으면, 군자는 떠나가고
군주가 너무 여인을 가까이하면, 신하와 나라는 망한다.
나는 유유히 세월이나 보내려고 하네.
악사 ‘기’가 돌아오자, 계환자가 물었습니다.
“무어라고 말하던가?”
‘기’는 사실대로 모두 이야기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계환자는 크게 탄식하며 말했습니다.
“내가 한 일을 책망하고 있구나.”
공자 일행은 노나라를 벗어나서 위(衛)나라로 들어섰습니다. 위나라는 노나라의 서쪽에 있는 나라입니다. 그들이 위나라의 국경지대에 있는 ‘의(儀)라는 한 고을에 이르러서 잠시 쉬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사람이 공자를 찾아왔습니다. 그때의 일이 ’논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 지방의 ‘봉인’이 뵙기를 청하여 말하였다. “군자가 이곳에 이르면 내가 일찍 만나지 못한 적이 없습니다.”수행하고 있던 제자들이 공자를 만나도록 해주자, 그는 만나고 나와서 말했다. “여러분은 어찌 선생님이 벼슬을 잃었다고 근심합니까? 천하가 도를 잃은 지 오래이기에, 하늘이 장차 선생님으로 목탁을 삼고자 하였습니다.”(의봉인 청현왈 군자지지어사야 오미상불 득견야. 종자현지 출왈 이삼자 하환어상호. 천하지무도야 구의 천장이부자 위목탁.: 儀封人 請見曰 君子之至於斯也 吾未嘗不 得見也. 從者見之 出曰 二三子 何患於喪乎. 天下之無道也 久矣 天將以夫子 爲木鐸.)【논어 3-24】
‘의’(儀)는, 위나라의 한 ‘지방’의 이름입니다. 지금의 하남성 난의현(蘭儀縣)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봉인’(封人)은, ‘국경을 지키는 벼슬 이름’이랍니다. 또한, ‘종자’(從者)는,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공자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이삼자’(二三子)는, ‘여러분’이라고 해석하였으나, ‘너희들’이라고 풀이하는 게 더욱 가까운 뜻이랍니다. 즉, 나이가 많은 사람이 젊은 사람들을 부를 때에 사용하는 말이지요. 그리고 ‘목탁’(木鐸)은, ‘나라에서 정령(政令)을 내리기에 앞서 흔들어 줌으로써 정신을 집중하게 하는 종’을 말합니다. 이는, 무(武)의 일에는 ‘혀가 쇠로 된 종’을 썼고, ‘문’(文)의 일에는 ‘혀가 나무로 된 종’을 썼다고 전합니다. 여기에서 앞에 있는 것은 ‘금탁’(金鐸)이요, 뒤에 있는 것은 ‘목탁’(木鐸)입니다. 또, ‘미상불’(未嘗不)은 ‘여태껏 ~ 안 한 바가 없다.’라는 표현이지요.
공자는 드디어 위나라 안으로 들어와서 자로의 처형인 ‘안탁추’(顔濁鄒)의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자로의 동서는 누구일까요? 맞습니다. ‘미자하’(彌子瑕)라는 사람입니다. ‘미자하’는, 위나라 영공을 비롯하여 그의 부인인 ‘남자’(南子)의 측근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위나라의 막후에서 상당한 실권을 행사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첨꾼’이라는 좋지 않은 평판을 지니고 있었지요.
어쨌든 공자는 ‘미자하’의 집에 머물면서 위나라 ‘영공’(靈公)을 만날 수 있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이었지요. 위나라의 대부인 ‘거백옥’(蘧伯玉)이 사람을 공자에게 보냈습니다. 공자는 그와 함께 마주 앉아서 물었습니다.
“선생께서는 무엇을 하십니까?”
심부름을 온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은 허물을 덜려고 하나 아직 잘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나간 뒤에, 공자가 말했습니다.
“참 훌륭한 심부름꾼이다.”
이 이야기는 ‘논어’의 ‘헌문’ 편에 있습니다. 공자는 ‘거백옥’을 아주 좋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공자가 좋아하는 위나라 사람이 있었지요. 그 사람 이름은 ‘사어’(史魚)라고 했습니다. 공자는 혼잣말을 낮게 했습니다.
“곧구나, 사어여! 나라에 도가 있어도 화살 같고 나라에 도가 없어도 화살 같다. 군자로구나, 거백옥이여!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벼슬하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거두어서 감추는구나.”
또, 이 내용은 ‘논어’의 ‘위령공’ 편에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에 대하여 좀더 설명해 볼까요? ‘거백옥’은 성이 ‘거’(蘧)이고 이름은 ‘원’(瑗)입니다. ‘백옥’(伯玉)은 자(字)이지요. 위나라의 대부인데, 늘 반성하여 개선해 나가는 군자였답니다. 그리고 ‘사어’는 ‘사’(史)가 ‘관명어’이고 ‘어’는 자(字)이며 이름은 ‘추’(鰌)입니다. 어느 기록에는 ‘사’를 성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이제부터는 ‘공자가어’에 실려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날, 위나라 임금은 밤늦게 근신들을 데리고 무슨 일인가 의논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밖에서 수레 소리가 나더니 궁문 앞에 이르러서 잠시 뚝 그쳤다가 다시 움직이는 소리가 나면서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근신들은 밤늦게 누가 출입을 하는가 하고 의심했습니다. 그러자, 위나라 군주가 서슴지 않고 말했습니다.
“그걸 모르느냐? 저것은 거백옥의 수레 소리일 거다. 거백옥은 사람이 보거나 말거나 이 궁문 앞을 지날 때는 언제나 수레에서 내린 후에 절을 하고 나서 간다.”
근신들은 그 말을 듣고도 믿어지지 않아서 이튿날에 알아보니, 과연 그때 궁문 앞을 지나간 사람은 ‘거백옥’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야말로 어두운 밤이라도 남을 속이지 않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그 절조를 굽히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이때 위나라에는 ‘거백옥’과 함께 ‘사어’가 있었습니다. 맨 처음 ‘거백옥’은 아직 위나라 영공에게 등용되지 않고, 소인인 ‘미자하’가 높은 자리에 올라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앞에서 말한, ‘자로’의 동서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어’는 여러 번을 영공에게 간했건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사어’가 죽게 되었을 때, 그는 자손들을 불러 놓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나는 조정에 벼슬하고 있으면서 저 어진 거백옥을 등용되도록 하지 못하고, 또 소인인 미자하를 내쫓게 만들지도 못했다. 신하로서 살아 있는 동안에 제 임금을 바르게 하지 못했으니 이는 신하로서 해야 할 도리를 못 한 바와 같다. 그러한즉 이제 내가 죽더라도 장사를 예법에 맞추어서 지낼 필요가 없다.”
‘사어’의 자손들은 그의 유언을 거역하지 않고 초라하게 장사를 치렀습니다. 영공이 ‘사어’를 조상하러 갔다가 이 모양을 보았습니다.
“이게 웬일이냐? 사어의 장사를 이리 초라하게 치를 수가 있느냐?”
사어의 자손들은 임금께 그의 유언에 대한 말을 자세히 말했습니다. 영공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는 모두 과인의 허물이었구나.”
영공은 크게 후회하고, ‘사어’의 자손들에게 명하여 새로 예를 갖추고서 장사를 치르게 하였습니다. 물론, 영공은 즉시 거백옥을 등용하였으며, 미자하의 벼슬을 떼어 낸 후에 내쫓았습니다.
공자는 이 이야기를 듣고, 죽어서까지 임금을 간한 ‘사어’의 충성을 칭찬하면서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로 곧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 어느 날이었습니다. 공자는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서 악기를 꺼내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논어’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자가 위나라에 있을 때, ‘경’이란 악기를 쳤다. 그러자 ‘궤’를 메고 ‘공자가 머무는 집’의 문 앞을 지나던 사람이 말하였다. “마음이 있구나. 저 경을 치는 소리에는.”그리고는 좀 있다가 다시 말하였다. “비루하구나, 저 ‘땡땡’ 울리는 소리는. 나를 몰라주면 그만둘 따름이니, 깊으면 깊은 대로 옷을 입은 채로 건너고 얕으면 얕은 대로 옷을 약간 걷고 건너라고 했는데.” 그 말을 듣고, 공자가 말했다. “과감하기도 하다! 그렇게 하기는 어렵지 않다.”(자 격경어위 유하궤이과공씨지문자 왈 유심재, 격경호. 기이왈 비재경경호. 막기지야 사이이이의 심즉려 천즉게. 자왈 과재! 말지난의.:子 擊磬於衛 有荷蕢而過孔氏之門者 曰 有心哉 擊磬乎. 旣而曰 鄙哉硜硜乎. 莫己知也 斯已而已矣 深則厲 淺則揭. 子曰 果哉! 末之難矣.)【논어 14-41】
여기에서 말하는 ‘경’(磬)은, ‘옥으로 만든 타악기’를 이릅니다. 한 개를 매단 ‘단경’(單磬)과 열두 개를 매단 ‘편경’(編磬)이 있습니다. ‘하궤자’(荷蕢者)에서 ‘하’는 ‘부’(負)와 같아서 ‘걸머지는 것’을 뜻하고, ‘궤’는 ‘둥구미’를 가리킵니다. 이는 ‘멱둥구미’라고도 하는데, ‘짚으로 만든 둥글고 울이 높은 그릇’을 말하지요. 농가에서 곡식을 담는 데 쓰입니다. ‘비재’(鄙哉)는, ‘공자의 세상에 대한 집념을 천시한 말’이랍니다. 그리고 ‘경경호’(硜硜乎)는 ‘돌을 두드릴 때 나는 소리’와 같이 융통성이 없음을 그리고 있습니다. ‘심즉려 천즉게’(深則厲 淺則揭)는 공자의 ‘시 모음’ 중의 ‘패풍’(邶風) 편에 있는 ‘노래의 구절’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여’(厲)는 ‘옷 입고 물 건넘’을 뜻하고, ‘게’(揭)는 ‘옷 걷고 물 건넘’을 말합니다. 또한, ‘과재’(果哉)는 ‘세상을 잊는 데에 과감함’을 개탄한 말이고, ‘말지난의’(末之難矣)는 ‘아무 어려움도 없음’을 뜻하며 ‘말’(末)이 ‘무’(無)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공자가어’에는 이렇게 나타나 있습니다.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서 위(衛)나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뜻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공자는 위나라에서 악기의 하나인 경쇠(磬)를 두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삼태기를 등에 지고, 어떤 사람이 ‘공자가 머무는 집’ 앞을 지나갔습니다. 그가 공자가 두드리는 경쇠 소리를 듣고 나더니, 놀란 듯이 중얼거렸습니다.
“저 경쇠 소리는 뜻하는 바가 있는 소리로구나!”
원래 음악이란 그 악기를 쓰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그 소리가 다르답니다. 공자는 천하와 국가를 몹시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위나라에 와서도 자기의 뜻한 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울적한 마음이 경쇠 소리에 묻어 나왔습니다.
이에 삼태기를 지고 있는 노인은 처음에는 앞에서처럼 놀라워했으나, 다시 생각하고는 ‘비루하고도 고집불통이다.’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는 공자의 경쇠 소리를 듣고 공자의 마음을 읽었지요. 그래서 그는 시의 구절을 노래했습니다.
“내를 건널 적에 물이 깊으면 옷을 입은 채로 건너는 것이 옳다. 그리고 냇물이 얕으면 입은 옷을 조금만 걷고 건너면 그만이다.”
이는, 자기를 써 주는 시국이라면 뜻을 행하는 게 옳지만, 자기를 써 주지 않는 시국이라면 자기 행위만 올바르게 처신하며 사는 게 옳다는 말이었지요. 공자는 그 말을 듣고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저 사람의 말은 너무 세상을 피하려고 한다. 만일 그렇게 세상을 단념할 수만 있다면 아무 문제도 없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세상을 그냥 버려둘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앞의 시(노래)에 대하여 무척 궁금해집니다. 아, 이 노래는 제목이 ‘포유고엽’(匏有苦葉)이군요. 이 말은, ‘박에는 쓰디쓴 잎사귀가 있다.’라는 뜻입니다. 이 노래는, 개울가에서 남녀가 서로 희롱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 이 노래의 한 절만 감상해 볼까요?
포유고엽 匏有苦葉 박에는 쓰디쓴 잎사귀 있고
제유심섭 濟有深涉 나루에는 깊고 깊은 건널목 있네.
심즉려 深則厲 깊으면 옷 입은 채로 건너고
천즉게 淺則揭 얕으면 얕은 대로 걷고 건너지.
여기에서 말하는 ‘포’(匏)는, ‘박’을 이르고, ‘제’(濟)는 ‘물의 건널목’을 말합니다. 그런데 ‘나루터’가 아니라, ‘걸어서 건너기에 편리한 곳’을 가리킨다는군요. 그런가 하면 ‘섭’(涉)은 ‘무릎 위에까지 잠기는 깊이’를 가리키고, ‘여’(厲)는 ‘옷을 입은 채로 물을 건넘’을 나타냅니다. 즉, ‘여’는 ‘허리띠 위에까지 물이 잠김’을 이릅니다. 또한, ‘게’(揭)는 ‘바지를 걷음’을 말하는데, ‘물이 무릎 밑에 차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듯 공자가 위나라에서 무료하게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루는, 아침 일찍이 공자가 눈을 떠 보니, 옆에 ‘안연’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어디에선가 갑자기 아주 슬픈 울음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공자가 안연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이 울음소리가 무엇 때문에 저리 슬픈지를 아느냐?”
안연이 대답했습니다.
“이 울음소리는, 보통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게 아니라, 생이별하여 우는 소리로 들립니다.”
공자가 또 물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리 생각하느냐?”
이에, 안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환유(桓由) 땅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새가 품은 알에서 네 마리의 새끼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날개가 생기게 되자, 새끼들은 각기 흩어져서 날아가려고 하더랍니다. 그러니 어미새는 비명을 올리면서 이들 네 아기새를 날려 보냈습니다. 이때 그 어미새의 울음소리가 몹시 슬픈 이유는, 그 아기새들이 한 번 날아가 버리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이 소리가 몹시 애처롭게 들리기에 생이별의 울음소리로 생각했습니다.”
안연의 말을 듣고, 공자는 사람을 시켜서 그 울음소리의 연유를 알아보도록 일렀습니다. 관연, 그 우는 사람은 그 사연을 이렇게 말하며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제 아비가 죽었는데 집이 가난한 탓으로 부득이 자식을 팔아서 장사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나오는 게 울음뿐입니다.”
공자는 감탄을 쏟으며 말했습니다.
“회는 참으로 소리를 잘 알아듣는구나.”
‘회’(回)는 ‘안연’을 가리키는 말인 줄은 알고 있지요? 그러면 ‘자로’는 공자가 어떻게 불렀지요? 그렇습니다. ‘유’(由)라고 불렀습니다. 그럼, ‘자공’은요? 맞습니다. ‘사’(賜)라고 불렀답니다.
며칠 후, 마침내 공자는 위(衛)나라의 영공(靈公)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영공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노나라에 있을 때, 봉록은 얼마나 받았습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조 6만 두(斗)를 받았습니다.”
그 말에 따라, 위나라에서도 그만큼의 봉록을 주었습니다.
또 하루는 위나라 영공이 공자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느 사람이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나라를 가지고 있는 자는 조정에 앉아서 계획만 세우면 정치가 된다.’라고 했는데, 그 말이 옳습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남을 사랑하면 그 사람도 나를 사랑하게 되고, 내가 남을 미워하면 그 사람도 나를 미워하게 되며, 자기를 얻을 줄 아는 자는 남을 얻는 방법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이른바 자기 집의 담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의 일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디이든지 소인배들이 있기 마련이지요. 위나라 여러 대신 중에도 공자가 큰 세력을 얻게 될까 보아서 헐뜯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영공도 차츰 공자를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공은 ‘공손여가’(公孫余假)로 하여금 칼을 찬 채로 출입하며 공자를 감시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공자는 억울한 누명이나 쓰게 되지 않을까 하여 여간 마음이 불안한 게 아니었습니다. 공자가 위나라에 머문 지 10달 정도 되었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정월에 위나라로 들어왔는데, 11월이 되었습니다.
공자가 위나라를 떠나려고 짐을 챙기고 있을 때, 위나라 대부인 ‘왕손가’(王孫賈)가 찾아왔습니다. 그 후의 일은 ‘논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손가가 물었다. “방안 신에 아첨하느니보다 부엌 신에 아첨하라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공자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죄를 하늘에 지으면 기도할 곳도 없게 됩니다.”(왕손가 문왈 여기미어오 영미어조 하위야. 자왈 불연. 획죄어천 무소도야.: 王孫賈 問曰 與其媚於奧 寧媚於竈 何謂也. 子曰 不然. 獲罪於天 無所禱也.)【논어 3-13】
‘왕손가’라는 사람은, 위나라의 대부인데, 영공 때의 명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은 ‘왕손’이고 이름은 ‘가’(賈)입니다. 그리고 ‘미’(媚)는 ‘아첨함’을 말하며, ‘오’(奧)는 ‘방안 서남 모퉁이 깊숙한 곳’을 이릅니다. 바로 집안의 신을 여기에 모시지요. 이 말은 위나라의 ‘영공’이나 그의 부인인 ‘남자’(南子)를 비유해서 한 말이랍니다. 또, ‘조’(竈)는 ‘부엌의 신’을 가리킵니다. 즉, 오사(五祀)가 있습니다. ‘맹춘(孟春)에는 ‘호’(戶)에, 맹하(孟夏)에는 ‘조’(竈)에, 맹추(孟秋)에는 ‘문’(門)에, 그리고 ‘맹동’(孟冬)에는 ‘길’에 제사 지낸다.’라고 했습니다. ‘천’(天)은 ‘하늘의 신’이고, ‘무소도야’(無所禱也)는 ‘빌 곳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렇고말고요. 하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늘은 모든 만물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명’(天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자는 위나라를 떠났습니다. 위나라를 떠난 공자 일행은, 장차 진(陳)나라로 가려고 ‘광’(匡) 땅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광’이라는 지역은 위나라에 속한 땅이었습니다. 그리 크지 않은 고을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장원현(長垣縣)에 속한다고 합니다.
이때, 공자의 제자인 ‘안각’(顔刻)이 공자가 탄 수레의 말을 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의 채찍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전에 제가 여기 왔을 때, 저 파손된 성곽의 틈 사이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광’ 지역 사람들이 듣고, 노나라의 ‘양호’(陽虎)가 또 왔다고 여겼습니다. ‘양호’는 알지요? 노나라에서 난을 일으킨 그 사람입니다. 양호는 일찍이 이곳으로 와서 ‘광’ 지역 사람들에게 나쁜 짓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몰려와서 공자 일행의 앞을 막았습니다. ‘안각’의 말도 문제가 되었지만, 공자의 모습이 ‘양호’와 비슷하였기 때문에 더욱 그들은 오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양호’는 노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제나라로 도망쳤습니다. 그러자, 노나라에서는 ‘양호’를 붙잡아서 보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제나라에서는 ‘양호’를 체포하여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양호’는 옥을 부수고 송나라로 다시 도망쳤습니다. 송나라로 간 ‘양호’는 군사들을 모은 후에 그들을 이끌고 위나라 땅으로 와서 ‘광’의 성을 빼앗았습니다. 그때 함께 ‘안각’이 이곳으로 왔답니다.
‘양호’가 ‘광’ 지역이 사람들을 잘 대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는 그곳 사람들의 물건을 뺏고 부녀자들을 못살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그곳 사람들이 ‘양호’ 비슷한 사람만 보아도 이를 갈 게 분명하지요. 그들은 공자 일행을 닷새 동안이나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갇혀 있는 동안, 뒤에 떨어져서 소식을 모르고 있던 ‘안연’이 그곳으로 공자를 찾아왔습니다. ‘논어’에 기록된 그 사연은 이렇습니다.
공자가 ‘광’ 땅에서 난을 당하였을 때, 안연이 뒤에서야 오니, 공자가 말했다.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구나.”그 말을 듣고 안연이 대답했다. “선생님께서 계시는데 제가 어찌 감히 죽겠습니까?”(자 외어광 안연 후, 자왈 오이여위사의. 왈 자재 회하감사.: 子 畏於匡 顔淵 後, 子曰 吾以女爲死矣. 曰 子在 回何敢死.)【논어 11-22】
공자는 포위당해 있는 그 절박한 상황에서 그토록 아끼던 제자를 다시 만났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달려가서 덥석 두 손을 잡으며 눈물을 글썽거렸겠지요. 그 모습이 눈앞에 환히 떠오릅니다. 그리고 안연의 대답을 좀 들어 보십시오. ‘자재 회하감사’(子在 回何敢死), 즉 ‘선생님께서 계시는데 제가 어찌 감히 죽겠습니까?’라는, 그 말 한마디가 가슴을 크게 울립니다. 그 말을 듣고, 공자는 ‘암, 그렇고말고.’를 연발하며 사랑스러운 ‘안연’의 등을 마냥 쓰다듬어 주었을 게 분명합니다. 아, 선생님과 제자의 그 사랑함이 눈물겹도록 아름답습니다. 나는 ‘논어’의 이 대목을 읽으며 여러 번이나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그러면 성질이 급한 ‘자로’는 그 당시에 어떤 행동을 보였을까요? ‘공자가어’에는 이런 내용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광’ 사람들이 에워싸자, ‘자로’는 화가 치밀어서 창을 휘두르며 그들과 싸우려고 했습니다. 공자가 자로를 말리며 말했습니다.
“유야, 인과 의를 닦으면서 어찌 습속을 면하지 못할 행동을 한단 말이냐? ‘시’와 ‘서’를 강론하지 않고 예악을 익히지 않은 것은 나의 허물이라고 하겠거니와, 만일 선왕의 뒤를 따라서 하고 옛 법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것을 허물로 돌린다면 이것은 나의 죄가 아니다.”
공자는 자로에게 명령하여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그 말에 따라, 자로는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공자는 이 노래에 화답하여 세 곡조를 끝마쳤습니다. 이 모양을 본 ‘광’ 지방 사람들은, 모두 흩어지고 말았답니다.
어쩐지, 이 이야기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장자’라는 책에는 이 당시의 일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공자가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광’이라는 고장에 도착했을 때, 그 곳 사람들은 공자를 ‘양호’로 착각하고 포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태가 매우 위급하게 되었지만, 공자는 거문고를 뜯으며 노래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에 자로가 공자에게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어찌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태연히 노래를 부르고 계십니까?”
공자는 자로의 말에 전혀 개의치 않는 듯이 천천히 거문고를 내려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야, 내 말 들어 보아라. 물길을 가면서 물뱀 같은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어부의 용기이고, 산중에서 호랑이를 만나도 피하지 않는 것은 사냥꾼의 용기이며, 시퍼런 칼날이 눈앞에서 춤을 추어도 죽음을 삶처럼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것이 병사의 용기라고 한다. 그리고 세상일에는 명운의 때가 있음을 알고 큰 어려움에 부닥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성인의 용기라고 한다. 유야, 그저 침착하게 가만히 있어라.”
잠시 후, 여러 사람을 지휘하고 있던 우두머리가 찾아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선생님 일행을 양호 일당으로 잘못 알고 포위해서 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런가 하면, ‘논어’에도 이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즉, ‘광’ 땅에서 위험에 빠졌을 때, 공자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문왕(文王)은 이미 돌아가셨으나 그 문화는 나에게 전해져 있지 않으냐? 하늘이 이 문화를 없애 버리려고 하였다면 뒤에 죽을 내가 이 문화에 참여할 수 없었을 터이지만, 하늘이 아직 이 문화를 없애 버리려고 아니하였으니 저 ‘광’ 땅의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참으로 공자는 ‘천명’(天命)을 가슴에 안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 정도의 굳은 신념을 지녔다면 아무런 두려움도 없었겠지요. 여기에서 말하는 ‘문화’라는 말은 주(周)나라의 ‘예’(禮)와 ‘악’(樂)과 ‘덕치’(德治)를 일컫는다고 합니다. 그 ‘문화’를 건설한 사람은 주나라를 세운 ‘문왕’을 비롯해서 ‘무왕’(武王)과 ‘주공’(周公) 등입니다. 공자는 그들이 일으킨 ‘예’와 ‘악’과 ‘덕치’를 사상적 핵심으로 가슴에 담았습니다. 말하자면, 공자는 ‘임금의 어진 마음에 의한 문화정치’를 회복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면 이제 나의 시 한 편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달빛 아래
잠들어 있는
콩짜개란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눈시울이 젖어 있다.
너무 깊고 맑게
반짝이며 멀어지는 별빛들
- 졸시 ‘잠든 얼굴’ 전문
‘콩짜개란’은 남쪽 섬의 늙은 나무줄기나 바위 곁에 붙어서 자라는 상록의 여러해살이풀입니다. 내가 제주도 서귀포에서 귤밭을 경영할 때, 자주 만난 풀이지요. 나는 그 꽃보다도 그 조그만 잎에 사랑을 느낍니다. 아마도 그 잎이 어린 모습이기 때문인 듯싶습니다.
그래서 이 풀은 공자의 가장 아끼는 제자 ‘안회’의 이미지를 지녔습니다. 공자가 노나라를 떠난 후에 ‘광’(匡) 땅에서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있는 동안, 뒤에 떨어져서 소식을 모르고 있던 ‘안회’가 그곳으로 공자를 찾아왔습니다. 얼마나 기쁘던지, 공자는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며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구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안회는 ‘선생님께서 계시는데 제가 어찌 감히 죽겠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공자는 ‘암, 그렇고말고.’를 연발하며, 그의 등을 쓸어 주었을 게 분명한 일입니다. 어디 그뿐이었겠습니까?
그 당시는 야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자는 한밤에 살며시 일어나서 한쪽에 쪼그린 채로 잠들어 있는 ‘안회’의 얼굴을 들여다보기도 했을 터입니다. 그리고는, 달빛에 젖어 있는 듯이 보이는 ‘안회’의 눈시울로 하여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을 듯합니다. 그래서 공자는 하늘을 올려다보았겠지요. 그때, ‘반짝이며 멀어지는 별빛들’이 더욱 그의 가슴을 시리게 만들었을 성싶습니다.(글: 김 재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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