씬쿠러, 콩쯔

11. 너는 양을 아끼느냐? 나는 예를 아낀다/ 김 재 황

시조시인 2022. 1. 24. 08:47

11
너는 양을 아끼느냐? 나는 예를 아낀다





 공자의 여러 제자 중에서 ‘자공’은 세 번째로 손꼽히는 사람입니다. ‘자공’(子貢)의 성은 ‘단목’(端木)이고, 그 이름은 ‘사’(賜)입니다. 그래서 공자가 언제나 ‘사야!’라고 그를 불렀지요. 공자와 같은 노(魯)나라 사람이 아니고, 위(衛)나라 사람이었습니다. 공자보다는 31살이 아래였습니다. ‘안연’과는 한 살 차이였답니다. 물론, ‘자공’은 그의 자(字)입니다.
 ‘자공’은 죽고 난 다음, 739년인 당나라 때에 ‘려후’(黎侯)가 되었으며, 1009년인 송나라 때에 ‘려양공’(黎陽公)이 되었다가 ‘려공’(黎公)으로 추봉되었습니다.
 ‘자공’은 말재주에 능한 사람이었고 지극히 총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재주도 많이 지니고 있었답니다. 공자는 항상 그가 말이 많음을 걱정하여 말을 삼가도록 늘 가르침을 주었지요. 아무튼 ‘자공’은 머리가 좋았기 때문에 스스로 남들보다는 뛰어나다는 우월감을 늘 지니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스승인 공자도, 자기의 뛰어난 점을 인정해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한 마디로 잘난 체를 했지요. 그 이야기가 ‘논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저는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너는 그릇이다.” ‘자공’이 다시 물었다. “어떤 그릇입니까?”공자가 다시 말했다. “호련이다.”(지공문왈 사야하여. 자왈 여, 기야. 왈 하기야. 왈 호련야.:子貢問曰 賜也何如. 子曰 女, 器也. 曰 何器也. 曰 瑚璉也.)【논어 5-4】

 위의 말에서 ‘하여’(何如)는 ‘어떤가?’라고 ‘상태를 나타낼 때’에 흔히 쓰이는 말입니다. ‘여’(女)는 ‘여’(汝)와 같은 ‘너, 그대’의 뜻입니다. 또, ‘기’(器)는 ‘그릇’의 뜻으로 ‘유용한 쓰임’을 가리킵니다. 다만, ‘호련’(瑚璉)이 문제인데, 옛날 ‘주석’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호련이란 수수를 담는 그릇이다. 그 그릇을 하(夏)나라에서는 ‘호’(瑚)라고 불렀으며, 은(殷)나라에서는 ‘연’(璉)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주’(周)나라에서는 ‘보궤’(簠簋)라고 불렀다. 종묘제례에서 쓰는 물건 중에 귀하게 여기는 그릇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서직’(黍稷)을 담는 그릇인데, 옥으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서직’에서 ‘서’(黍)는 ‘찰수수’이고 ‘직’(稷)은 ‘메기장’입니다. 아무튼 그 그릇은 ‘아름답고 화려하다’라고 전합니다. 
 ‘자공’은 공자가 자기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가 매우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지고 물었는데, 공자의 대답이 겨우 ‘그릇’이었으니 실망이 컸습니다. ‘자공’은 그대로 물러설 수가 없었을 테지요. ‘자공’은 다시 물었습니다. 그제야 공자는 ‘호련’이라고 ‘자공’을 높여 주었습니다. 
 왜 ‘그릇’이라는 말이, 자공의 마음에 썩 들지 않았을까요? 내 생각으로는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말 때문인 듯합니다. 이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에서 어쩐지 ‘군자’와 ‘그릇’은 관계가 먼 듯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군자불기’는 결코 그런 뜻이 아니지요. 이 말은 그릇의 부정이 아닙니다. ‘그릇은 그릇이되, 거기에 국한하지 않는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호련’은, 앞으로 이 세상에서 ‘자공’이 ‘귀하게 쓰일 그릇’임을 칭송하였다고 보는 게 옳을 듯합니다.
 공자가 첫째로 꼽는 제자는 ‘안연’입니다. 그런데 공자는, ‘안연’과 비교가 될 만한 사람은 ‘자공’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 단서가 ‘논어’의 ‘공야장’ 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때, 공자는 ‘자공’에게 물었습니다.
 “너와 안회 중에 누가 낫다고 생각하느냐?”
 ‘자공’이 대답했습니다.
 “제가 어찌 안회와 비교가 되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사람이고,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 뿐입니다.” 
 그 말을 듣고 공자는 말했습니다.
 “비교가 안 된다. 나와 네가 모두 비교가 안 된다.”
 이 말은, ‘안회’가 그만큼 뛰어남을 칭찬한 말입니다. ‘안회’와 ‘안연’은 같은 사람임을 알고 있지요? ‘나와 네가 모두 비교가 안 된다.’의 원문은 ‘오여여불여야’(吾與女弗如也)입니다. 그런데 이를 ‘나도 네가 안회와 비교가 안 됨을 인정하고 있다.’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나는 공자가 그런 투로 말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공자는 음악을 아주 좋아하는 ‘심미적 감성’을 지닌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제자인 ‘자공’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았을 공자이지요. 스승은 자기보다 나은 제자가 있음이 크나큰 기쁨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너뿐만 아니라 나까지도 안회와는 비교가 안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를 위해 자기 자신까지도 낮추는 공자의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자공’의 겸손한 마음을 공자는 흐뭇하게 생각했습니다. ‘자공’은 마음과 힘을 다하여 스승인 공자를 받들었습니다. 어느 때,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이미 남의 아랫사람이 되었는데, 아랫사람의 하는 도를 알지 못하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남의 아랫사람 노릇을 하는 것도 남의 윗사람 노릇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땅을 깊이 파면 샘물이 솟으며, 땅이 기름지면 백 가지 곡식이 잘 자라고 온갖 나무도 무성하게 되며 새와 짐승도 번성하게 된다. 남의 아랫사람 된 자가 모두 이와 같다.”
 아마도 공자의 제자 중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자공’이었을 거라고 여겨집니다. 그는 돈을 버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으며 운도 따랐다고 합니다. 사마천은 ‘사기’에 ‘자공’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자공은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일을 좋아하여 때를 잘 헤아림으로써 돈을 잘 굴렸다. 그는 장점을 칭찬하기를 좋아하였으나, 남의 잘못을 덮어 주지는 못하였다. 그는 일찍이 노나라와 위나라에서 벼슬살이하였으며 집안에 천금을 쌓아 두기도 하였다.』
 여기에서도 지적했듯이, ‘자공’은 ‘남의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을 이러쿵저러쿵 비교하였지요. 그 모양을 보고, 공자는 다음과 같이 질책하였습니다.
 “사는 현명하기도 하구나. 나는 그럴 여가가 없다.”
 이는, ‘사람의 우열을 비교한다는 것은 자기 수양이 충분한 사람이나 할 일’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사(賜)는 참 현명한가 보다! 나는 내 몸 수양하기도 바빠서 그리 한가하게 남의 우열이나 말하고 있을 틈이 없다.’라는 뜻의 말을 했습니다. 
 ‘자공’을 따라다니는 ‘진자금’(陳子禽)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진자금’은, 성이 ‘진’이고 이름은 ‘항’(亢)이라는 사람입니다. ‘자금’은 자(字)이지요. 앞에서 말했듯이, 이 사람은 진나라에서 왔는데, ‘자공’의 제자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의 제자였다는 설까지 있습니다. 원래 성격이 삐딱한 사람이어서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였으나, 공자의 사후에도 제자들 틈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자공’보다 훨씬 아래의 사람이었을 터이고, 노나라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어느 때, 그는 ‘자공’에게 ‘공자가 누구에게 배웠는가.’에 관해 물었습니다. ‘자공’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도가 아직 땅에 떨어져서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 전해져서 내려오고 있다. 현명한 자들은 그중에서 큰 것을 알고, 현명하지 못한 자들은 작은 것을 안다. 이처럼 문왕과 무왕의 도가 아닌 것이 없으니, 선생님께서는 어디서든지 그것을 배우지 않았겠는가? 어찌 정해진 스승이 따로 있겠는가?”
 그 당시에는 아마도, 공자는 뚜렷한 스승이 없다고 알려져 있었으므로 그의 학문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런 뼈 있는 질문에 ‘자공’은 말솜씨를 발휘하여 그 입을 다물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 또한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언제나 잃지 않은 ‘자공’의 면모였습니다. 
 공자가 ‘자공’의 이런 마음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자신의 재주와 재력을 믿고 거만해지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자공’의 말이나 행동에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크게 질책하였습니다. 그 한 예가 ‘논어’의 ‘팔일’ 편에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자공이 ‘고삭’의 예식에 바치는 양을 치우려고 하자, 공자가 말했다. “사야, 너는 그 양을 아끼느냐? 나는 그 예를 아낀다.”(자공 욕거고삭지희양, 자왈 사야, 아애기양, 아애기례.: 子貢 欲去告朔之餼羊, 子曰 賜也, 爾愛其羊, 我愛其禮.)【논어 3-17】

 여기에서 ‘고삭’(告朔)은 ‘매월 초하룻날에 선조 묘에 산 채로 양을 바치고 초하루를 고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옛날 중국의 천자는 매년 12월에 역서(曆書)를 각 제후에게 나누어 주었고 제후들은 그 역서를 사당에 보관하였다가 매월 초하루에 양을 바치고 나서 그달의 역서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고삭’을 ‘곡삭’이라고 읽기도 하는데, 알릴 때는 ‘고’로 읽고 청할 때는 ‘곡’으로 읽습니다. 그러므로 ‘고’로 읽는 게 옳다고 봅니다. 또, ‘산 채로 바치는 양’을 ‘희양’(餼羊)이라고 합니다. 
 ‘자공’은, ‘예는 정신적이지 형식적은 아니라.라’는 생각을 가졌던 듯싶습니다. 그래서 한 마리의 양이라도 아끼려고 하였겠지요. 그러나 공자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허례일지라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번거롭지만 ‘예’에는 형식도 필요하다는 뜻이었습니다.
 문득, 공자가 ‘예’에 대하여 ‘언언’(言偃, 子游의 이름)에게 한 말이 생각납니다.
 “예라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마치 술과도 같은 존재다. 같은 술일지라도 군자는 이를 이로우며 좋게 마시고 소인은 해롭고 나쁘게 마신다. 모두 같은 사람으로서 군자는 모든 일이 후하고 소인은 모든 일이 박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성왕은 의리의 자루와 예의 질서를 닦아서 이것으로 사람의 감정을 억제하고 다스렸다. 이 ‘사람의 감정’이란, 성왕의 농사짓는 밭과 마찬가지이다. 이 밭을 ‘예’라는 쟁기로 갈고 ‘의리’라는 씨를 뿌리며 ‘학문’이란 호미로 김을 맨 다음에 흙을 북돋우고 ‘악’(樂)으로 거름을 주어서 곡식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러므로 또 ‘예’란, ‘의리의 열매’라고도 한다.”
 잠시 쉬었다가, 공자는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모든 의리를 합치게 되면 모든 일이 화락해지고 협조될 것은 정한 이치이다. 그리만 된다면 ‘예’라는 명칭은 없어도 무방하겠지. 그래서 ‘예’는 의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또 의리는 예술의 분수(分數)이고 어진 것의 절차다. 모든 재주를 합쳐서 어진 결과로 익히도록 하면, 이를 얻는 사람은 자연히 건강해지고 이를 잃는 사람은 자연히 약해진다.”
어느 날이었지요. ‘자공’이 납향(臘享) 제사를 구경하고 돌아왔습니다. ‘납향 제사’란, 임금이 섣달에 지내는 제사를 말합니다. 공자는 ‘자공’에게 물었습니다.
 “사야, 너는 납향 제사를 보니 즐겁더냐?”
 ‘자공’이 대답했습니다.
 “온 나라 안의 사람들이 모두 미치광이 같으니 저로서는 별로 즐거운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공자가 말했습니다.
 “백일 동안 수고로운 일과 하루 동안 즐거운 일에 대한, 군자의 하루 혜택을 너는 모른다. 모든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 펴기만 하고 접지를 않는다면 이는 문무로도 능하다고 할 수 없고, 접기만 하고 펴지를 않는다면 역시 문무로서도 해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은 펴고 한 번은 접는 게 문무의 도라고 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 그 동안 수고로운 일에 짓눌려 있던 백성들이 즐거웠을 때를 만났으니 미치광이처럼 들떠서 놀았겠지요. 놀 때는 즐겁게 놀고 일할 때는 땀 흘리며 일한다는 적극성이 군자에게는 필요하다는 뜻으로 여겨집니다. 
 공자가 위(衛)나라에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위나라 사람 가운데 장사지내는 사람이 있었는데, 공자는 그 모습을 보고 말했습니다.
 “상제 노릇을 잘하는구나. 족히 이를 본받을 만하다. 너희들은 이 일을 기록해 두어라.”
 그 말을 듣고, ‘자공’이 물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무얼 잘한다고 말씀하십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상제가 되어서 장사지내러 갈 때는 무엇을 생각하듯 하더니 돌아올 때는 무엇을 의심하듯 하기에 그렇다.”
 ‘자공’이 다시 물었습니다.
 “저렇게 지체하느니보다는 빨리 돌아가서 우제(虞祭)라도 지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우제’는 세 번 지내는 제사인데, ‘초우’(初虞)와 ‘재우’(再虞)와 ‘삼우’(三虞)의 총칭입니다. 아무튼 ‘자공’의 말을 듣고, 공자가 말했습니다.
 “저렇듯 머뭇거리는 것은 정리 때문이다. 너희들은 기록해 두어라. 나로서도 능히 저렇게 하기 어렵다.”
 이와 비슷한 또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변’(卞)나라 사람인데, 자기 어머니가 죽어서 울고 있는 ‘어린 자식’이 있었습니다. 공자는 이를 보고 말했습니다.
 “슬프기야 하겠지만 저 울음을 어찌 계속할 수가 있겠느냐? 대체로 ‘예’라는 것은 가히 전해서 할 만해야 한다. 그러므로 울거나 뛰는 것도 법도가 있고, 복을 벗는 것도 기한이 있기 마련이다.”
또 어느 한때,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부모의 초상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공경으로 하는 게 첫째고, 슬픔으로 하는 게 다음이며, 울다가 지쳐서 파리해지고 병이 나는 게 제일 못하는 일이다. 얼굴빛은 자기의 정에 맞게 가져야 하며, 슬퍼하는 일은 자기가 입는 복에 맞게 해야 한다.”
 ‘자공’이 또 물었습니다.
 “형제의 초상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서적에 씌어 있는 대로 할 뿐이다.”
 다른 날,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안자’에게 들은 바로는 ‘소연’(少連)이라는 사람과 ‘대연’(大連)이라는 사람이 상제 노릇을 잘했다고 하는데, 과연 별달리 잘한 점이 있었습니까?”
 ‘안자’는 ‘안 선생님’이라는 뜻인데, 앞에서 말했듯이 제나라의 재상인 ‘안평중’(晏平仲)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사람의 성은 ‘안’(晏)이고 이름은 ‘영’(嬰)이며 자는 ‘중’(仲)이고 시호는 ‘평’(平)입니다. 또 ‘소연’과 ‘대연’은 형제라고 여겨집니다.
 공자가 말했습니다.
 “부모 초상에 사흘 동안을 게으르지 않았고 석 달 동안이나 옷을 풀지 않았으며 기년이 되어도 오히려 슬피 울었고 3년이 지나도 오히려 근심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러니 그들은 예법을 아는 사람들이다.”
 공자의 이러한 예법은 그의 모두 따뜻한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자는 부모뿐만 아니라 하찮은 동물에게까지 그에 맞는 예를 절대로 잊지 않았습니다. 
 어느 때, 공자의 집을 지키던 개가 죽었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자공’에게 다음과 같이 일렀습니다.
 “말이 죽으면 장막을 뜯어서 묻어 주고 개가 죽으면 일산(蓋)으로 묻어 주는 것이니, 너는 이 개를 갖다가 묻어 주어라. ‘떨어진 장막을 버리지 않는 이유는 장차 말을 묻어 주기 위하였기 때문’이고 ‘떨어진 일산을 버리지 않는 이유는 장차 개를 묻어 주기 위하였기 때문’이라고, 나는 들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가난한 탓으로 일산도 없으니 개의 무덤을 만드는 데에 내가 깔고 있는 자리(席)나 줄까? 너는 이것이라도 가지고 가서 개의 머리가 튀어나오지 않도록 잘 묻어 주어라.”
 아, 공자의 따뜻한 그 마음이 전해져 옵니다. 이런 게 바로 ‘예’가 아닐까요? 진심 어린 마음에서 우러나와야만 그게 값있는 ‘예’가 되겠지요.
 ‘논어’의 ‘공야장’ 편에는 이런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자공이 말했습니다.
 “저는 남이 저에게 시키기를 원치 않는 일은 저도 남에게 시키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공자가 말했습니다.
 “사야, 너의 미칠 바가 아니다.”
 ‘자공’이 한 말은, 공자가 말한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과 같은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자기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실행하기가 쉽지 않다는 공자의 말입니다. 숨어 있는 내용까지 모두 드러내어 보면, ‘사야, 그 생각은 좋다만, 지금 너의 힘으로는 쉽사리 그걸 해내기는 어려울 듯싶구나!’라는 말이 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공자의 말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저 내가 듣기 싫은 말을 남에게 하지 않는다면 ‘고언’(苦言)이라는 말이 왜 생겼겠습니까? 이 ‘듣기는 싫으나 유익한 말’을 해주는 게 참된 스승이요 친구입니다.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자식으로서 아비의 명령을 쫓아서 행하는 것을 ‘효’(孝)라고 하며, 신하로서 임금의 명령을 좇아 행하는 것을 ‘정’(貞)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의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고루하구나, 사야! 네가 아직 식견이 부족하구나. 옛날의 밝은 임금을 보면 그렇지 않아서 만 승의 나라에 간하는 신하가 일곱 사람만 있으면 임금에게 지나친 행동이 없으며, 천 승의 나라에 간하는 신하가 다섯 사람만 있으면 사직이 위태롭지 않으며, 백 승의 집에 간하는 신하가 세 사람만 있으면 벼슬자리가 떨어지지 않으며, 아비로서 간하는 자식이 있으면 무례한 지경에 빠지지 않으며, 선비로서 간하는 친구가 있으면 불의한 일을 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자식으로서 아비의 명령을 따르기만 한다고 하여 어찌 ‘효’라고 할 수 있겠으며, 신하로서 임금의 명령을 따르기만 한다고 하여 이를 어찌 ‘정’이라고 하겠느냐? 오직 그 좇아서 할 일을 알아서 행해야만 그것을 ‘효’라고도 하게 되고 곧 ‘정’이라고도 하게 된다.”
 참으로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말입니다. 이러한 명쾌한 말을 들려주는 스승이 있다는 게, ‘자공’으로서는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느 때인가,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군자도 미워하는 게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미워하는 게 있다. 남의 악함을 말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아랫사람으로 윗사람을 비난하는 자를 미워하며, 용맹스러우면서 무례한 사람을 미워하고 과감하면서 막힌 사람을 미워한다.” 
말을 잠깐 마친 다음, 공자는 ‘자공’에게 물었습니다.
 “사야, 너도 미워하는 게 있느냐?”
 ‘자공’이 대답했습니다.
 “남의 비밀을 엿듣고 아는 체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용기만 가지고 윗사람에게 불손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미워하며, 남의 허물을 드러냄으로써 곧다고 여기는 사람을 미워합니다.”
 여기에서 ‘자공’이 말한 ‘군자’라는 말은, ‘덕이 높은 사람’이며 ‘인후박애’(仁厚博愛)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아무리 그런 ‘군자’라고 해도, 미워하는 부류의 사람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그런 사람을 모두들 미워합니다. 이는, ‘논어’의 ‘양화’ 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공’은 공자로부터 여러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그는 그 여러 가르침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말을 듣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는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한 마디로써 평생토록 지켜서 행할 만한 말이 있습니까?”
 공자는 선뜻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서’(恕)이다. 내가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아야 한다.”
 ‘자공’은 자신이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을 수 있는 멋진 말을 얻고 싶었던가 봅니다. 그런데 공자는 아주 간단히 ‘서’라고 대답했지요. ‘서’(恕)란, ‘다른 사람도 자신처럼 사랑하는 어진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짊에 이르는 가장 가까운 길’이 ‘서’입니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아야 한다.’를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앞에서 소개한 바가 있습니다.
 원래 ‘자공’은 벼슬에 뜻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에 관한 내용이 ‘논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공’이 물었다. “여기에 아름다운 옥이 있다면 궤 속에 넣어서 감추어 두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좋은 값을 받고 팔아야 하겠습니까?”공자가 말했다. “팔아야지, 팔고말고. 나는 값을 놓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자공왈 유미옥어사 온독이장저, 구선가이고저. 자왈 고지재고지재 아 대가자야.: 子貢曰 有美玉於斯 韞匵而藏諸, 求善賈而沽諸. 子曰 沽之哉沽之哉 我 待賈者也.)【논어 9-12】 

 위에서 ‘미옥’(美玉)은, ‘아름다운 옥’으로 ‘군자’에 비유한 말이고, ‘온독’(韞匵)은 ‘궤 속에 간직함’으로 ‘출사(出仕)하지 않음’을 비유한 말입니다. 그리고 ‘장저’(藏諸)는 ‘창고 속에 감추어 두는 것’을 말하며, ‘선가’(善賈)는 ‘옥의 가치를 잘 알아주는 상인’이란 뜻으로 ‘명군’에 비유한 말이지요. 또, ‘고’(沽)는 ‘파는 것’을 이릅니다. 또한, ‘대가자야’(待賈者也), 즉 ‘나는 좋은 값을 놓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라는 말은, 공자도 자기를 써 줄 훌륭한 임금이 있어서 자기를 불러 준다면 언제고 나가서 벼슬할 생각이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옥’(玉)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군자는 ‘옥’(玉)을 귀하게 여기고 ‘민’(珉)을 천하게 여긴다고 하는데, 이는 무슨 까닭입니까? ‘옥’은 귀하고 ‘민’은 흔하게 난다고 해서 그러는 것입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아니다. ‘옥’은 적게 나기 때문에 귀하게 여기고 ‘민’은 흔하게 많이 나기 때문에 천하게 여기는 게 아니다. 옛날에 군자는 ‘덕’을 ‘옥’에 비유한 말이 있다. 그것은, 따뜻하면서도 윤택한 것은 ‘인’이며, 치밀하면서도 까칠까칠한 것은 ‘지혜’이며, 청렴하면서도 꺾이지 않는 것은 ‘의리’이며, 드리워서 떨어지는 듯이 보이는 것은 ‘예’이며, 두드리면 그 소리가 맑고 길며 끝마칠 때는 쨍하면서 음악같이 아름답게 울려서 ‘하’(瑕)가 ‘유’(瑜)를 덮지 못하고 ‘유’(瑜)가 ‘하’(瑕)를 덮지 못하는 것은 ‘충성’이며, 부윤(孚尹)하고 방달(旁達)한 것은 ‘신의’이며, 기운이 흰 무지개와 같은 것은 ‘하늘’이며, 정신이 산과 물에 나타나는 것은 ‘땅’이며, ‘규’(珪)와 ‘장’(璋)이 특별히 통달한 것은 ‘덕’이며, 온 천하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도’이다. ‘시’에 이르기를 ‘군자를 생각하니 따뜻함이 그 옥과 같다.’라고 하였으니, 이런 때문에 이 ‘옥’을 군자가 특별히 귀하게 여기게 되었다.”
 ‘민’(珉)은, ‘옥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옥보다 못한 돌’을 이르고, ‘하’(瑕)는 ‘옥에 있는 티’를 말하며, ‘유’(瑜)는 ‘옥의 일종’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하’는 ‘흠’을 뜻하고 ‘유’는 ‘아름다움’을 의미합니다. 또, ‘부윤’(孚尹)은 ‘광채 나는 것’을 말하고 ‘방달’(旁達)은 ‘안과 밖이 통한다.’라는 말이며 ‘규’(珪)는 ‘옥의 일종’으로 ‘서옥’(瑞玉)을 나타냅니다. ‘장’(璋)은 ‘반쪽 서옥’을 말한답니다. 

 아무래도 ‘자공’은 일찍이 정치에 뜻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치에 대하여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공자의 대답을 들어 볼까요?
 “정치를 함에는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백성의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식량을 충분히 저축하고 군비를 갖추며 백성에게 믿음을 얻어야 한다.”
 ‘자공’이 물었습니다.
 “부득이 세 가지 중에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이 먼저입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군비를 버려야 한다.”
 또, ‘자공’이 물었습니다.
 “부득이하여 남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이 먼저입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식량을 버려야 한다. 백성은 식량이 없으면 목숨을 잃는다. 예로부터 죽음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백성들에게 믿는 마음이 없으면 정치도 나라도 모두 존립할 수 없다.”
 마지막의 말이 긴 여운을 끕니다. 이는,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이란 말로, ‘백성들 사이에 신의가 없으면 아무 일도 성립되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과연 옳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정치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에 가장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논어’의 ‘안연’ 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자공’은 실제로 자기의 배운 바를 쓸 기회가 오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스승인 공자의 마음을 슬쩍 떠본 적이 있습니다. 그 대화를 엿들어 보겠습니다.
 ‘자공’이 공자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학문을 해보아도 권태증만 생기고 도를 해보아도 곤경에만 몰리게 되니, 이제 이런 것은 그만두고 그대로 임금이나 섬겨서 정치를 하는 게 옳을까 생각합니다.”
 공자가 말했습니다.
 “시에 이르기를 ‘아침과 저녁으로 뜻을 쌓고 일을 잡아서 하는 데 공경으로 해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임금 섬기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어찌 배우기를 쉴 수가 있겠느냐?”
 그러자, ‘자공’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임금을 섬기는 일은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가서 부모나 섬길까 합니다.”
 공자가 다시 말했습니다.
 “시에 이르기를 ‘효자란 끝이 없나니 너에게 길이길이 착함을 준다.’라고 하였으니, 부모 섬기기도 어렵기 그지없다. 어찌 배우기를 쉴 수가 있겠느냐?”
 이에, ‘자공’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처자나 데리고 쉴까 합니다.”
 그 말을 듣고 공자가 말했습니다.
 “시에 이르기를 ‘아내에게 법이 되어 형제에까지 이르게 되어야만 가정과 나라가 잘 다스려진다.’라고 하였으니, 처자를 거느리기도 이처럼 어렵다. 어찌 배우기를 쉴 수가 있겠느냐?”
 ‘자공’이 또 말했습니다.
 “그러하다면, 저는 친구나 사귀면서 쉬어 볼까 합니다.”
 공자가 말했습니다.
 “시에 이르기를 ‘친구 간에 서로 교제하는 것은 위의(威儀)로 한다.’라고 하였으니, 친구를 사귀기도 이렇게 어렵다. 어찌 배움을 쉴 수가 있겠느냐?”
 ‘자공’이 지지 않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시골에 파묻혀서 농사나 지으며 쉴까 합니다.”
 공자도 끈질기게 말했습니다.
 “시에 이르기를 ‘낮으로는 띠를 자르고 밤으로는 새끼를 꼬아서 빨리 지붕을 덮어야만 비로소 백 가지 곡식을 뿌리게 된다.’라고 하였으니, 농사짓기도 이처럼 어렵다. 어찌 잠시인들 배우기를 쉴까 보냐?”
  ‘자공’이 힘없이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장차 쉴 곳이 없겠습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왜 없기야 하겠느냐? 스스로 저 넓은 것을 바라보면 우뚝한 듯도 하며 그 높은 것을 쳐다보면 꽉 찬 듯도 하며 그 주위를 둘러보면 멀리 막힌 듯도 하였으니, 이곳이 휴식하는 곳일 거다.”
 ‘자공’이 이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크기도 합니다. 저 죽음이여! 군자도 쉬게 되고 소인도 쉬게 되니, 참 크기도 합니다. 그 죽음이여!”
 그렇습니다. 죽음이 오면 모두 편히 쉴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가 오기까지 살아 있는 동안은 모두 열심히 자기가 맡은 일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나의 시 한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여전히 바로 그 자리에
둥근 보름달 하나 열려 있다.
창밖에는 일그러진 반달이 떴다가 지고
성난 초승달이 돌아서서 종종걸음쳐도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
환한 보름달 하나 매달려 있다.
사랑아, 이렇듯 모진 세상을 살면서
어찌 보름달처럼 둥글기만 했겠는가.
향기롭기만 했겠는가.
그러나 마냥 기쁘게 바라보는 눈길
풀 수가 없다 멈출 수가 없다
설령 그대가 일그러지는 반달을 꿈꾸고
성난 초승달의 종종걸음을 흉내 낸다고 하여도
결코 그대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리.
한 번 그대에게 내준 하늘에
영원한 보름달로 피어 있게 하리.
- 졸시 ‘지지 않는 달’ 전문

 ‘자공’은 변설(말재주)에 능하였고 지극히 총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재주도 많이 지니고 있었답니다. 특히 그는 물건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일을 좋아하여 때를 잘 헤아림으로써 돈을 잘 굴렸습니다. 즉, 그는 돈을 버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고 운도 따랐답니다. 물론, 큰 부자가 되었지요. 그래서 좋은 옷을 입고 멋진 수레를 타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니 여러 사람이 우러러보았겠지요. 마치 저 하늘에 환하게 떠 있는 보름달을 보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공’도 공자에게 꾸지람을 들은 적이 있답니다. 그도 ‘늘 둥글기만 한 게’ 아니었고 ‘향기롭기만 한 게’ 아니었습니다. 자공이 ‘고삭’의 예식에 바치는 양을 치우려고 하였을 때, 공자는 ‘사야, 너는 양을 아끼느냐? 나는 그 예를 아낀다.’라고 야단을 쳤습니다. 또, 자공이 ‘저는 남이 저에게 시키기를 원치 않는 일은 저도 남에게 시키지 않으려고 합니다.’라고 말했을 때, 공자는 ‘사야, 너의 미칠 바가 아니다.’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자공은 말재주가 뛰어났고 거부로 알려졌습니다. 일설에는 공자를 따르는 모임인 ‘공따모’의 재무 담당자였다고도 합니다. 그는 세상이 원하는 사람이었고, 특히 조정에서는 공자보다 낫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습니다. 그런 말을 듣는 게, 자공은 참으로 민망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학문을 연마하는 데 노력했습니다. 이런 자공을 공자는 대견하게 생각하여 ‘더불어 시를 논할 수 있게 되었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공자가 타계하자, 자공은 6년의 시묘(侍墓)를 했습니다. 
 이는, ‘영원한 보름달’로 피어 있을 만한 ‘본보기’의 모습입니다.(글: 김 재 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