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하늘이 시키는 일을 알아야 한다
공자의 나이가 50살이 되었습니다. 이는, 공자가 말한 바로 그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입니다. 공자가 오십 살의 나이가 되니, 삶의 모습이 원만한 틀을 만들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십 살 때의 주관적 확신에서 보편적 기준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불혹’은 주관적이고 ‘천명’은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명을 알았다.’라는 공자의 이 말을, ‘주자’(朱子)는 ‘만물에 부여하는 것’이라고 풀이했습니다. 이 ‘주자’(1130~1200년)는, 남송 때의 철학자로서 이름이 ‘희’(喜)이고 자(字)는 ‘원회’(元晦)이며 ‘호’(號)는 ‘회암’(晦庵)이지요. 이 사람의 ‘논어에 대한 주석’을 ‘신주’(新注)라고 합니다.
주자의 ‘만물에 부여한다는 것’은 ‘하늘을 좋아하고 하늘이 이르는 바를 안다.’라는 뜻일 성싶습니다. 또, ‘하늘이 이르는 바’는, ‘우리가 깨닫는 바’와 서로 통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공자는 ‘천명을 모르면 군자 노릇을 할 길이 없다.’라고 힘주어서 말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공자는 ‘도가 장차 행해지는 것도 천명이요, 도가 장차 폐하게 되는 것도 천명이다.’라고 했습니다.
공자는 주체적인 힘을 믿었으나 그 한계도 알았습니다. ‘천명’이란 수많은 요소가 서로 작용하는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역할입니다. 천명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리 군자라고 해도 주변의 상황이나 존재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큰일을 수행하기 어렵다.’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이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군자는 이 세상에서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진인사이대천명’(盡人事而待天命)이라는 말도 있지요. 이 말은,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한 후에 천명에 일임함’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 노나라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노나라 정공(定公) 8년, 기원전 502년이었지요. 공산불뉴(公山不狃)는 계씨에게 미움을 사게 되자, 양호(陽虎)를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공산불뉴’는 잊지 않았겠지요? 계씨 가신 중의 한 사람입니다.
“계환자의 본부인 몸에서 태어난 아들을 내쫓아 버리고, 양호 공과 가까운 첩의 아들로 그의 뒤를 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양호는 싫을 까닭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계환자를 잡으려고 하였으나 계환자는 꾀를 써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계환자는 곧 숙씨와 맹씨와 계씨의 모든 군대를 동원했지요.
세 집안의 군대는 힘을 합하여 양호의 집으로 쳐들어갔습니다. 양호도 자기의 부하들을 이끌고 맞아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차츰 힘이 밀리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양호는 노나라 궁궐로 달려가서 노나라의 보물들을 가지고 제나라로 도망쳐 버렸습니다. 이때 공자의 나이는 51세였습니다.
한편, 공산불뉴는 계씨의 ‘비’(費)라는 곳에서 굽히지 않고서 계씨와 맞섰습니다. 그런데 그가 공자에게 도움을 청해 왔습니다. 그 내용이 ‘논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산불요가 비읍을 근거로 하여 반기를 들었는데, 그가 부르자 공자가 가려고 하였다. 자로는 기쁘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가실 곳이 없으면 그만두실 일이지 하필 공산씨에게 가려고 하십니까?”그 말에 공자가 말했다. “나를 부르는 사람이라면 어찌 함부로 부르겠느냐? 나를 써 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나라를 ‘동쪽의 주나라’로 만들겠다.”(공산불요 이비반 소 자욕왕, 자로 불열왈 말지야이 하필공산씨지지야. 자왈 부소아자 이기도재, 여유용아자 오기위동주호.: 公山弗擾 以費畔 召 子欲往, 子路 不說曰 末之也已 何必公山氏之之也. 子曰 夫召我者 而豈徒哉, 如有用我者 吾其爲東周乎.)【논어 17-5】
여기에서 말하는 ‘공산불요’(公山弗擾)는 ‘공산불뉴’(公山不狃)를 나타냅니다. 즉, ‘사마천’의 ‘사기’에는 ‘공산불뉴’로 나와 있고, ‘논어’에는 ‘공산불요’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다른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공산불뉴’가 형이고 ‘공산불요’는 아우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비반’(以費畔)은 ‘비 땅을 근거로 모반했다.’라는 말입니다. ‘반’(畔)은 ‘반’(叛)과 같은 뜻으로 쓰였답니다. 그리고 ‘말지야이’(末之也已)는 ‘갈 필요가 없을 듯하다.’라는 말입니다. ‘말’(末)은 ‘무’(無)와 같은 뜻이고, ‘야이’(也已)는 ‘강조사’일 뿐이랍니다. 또한 ‘기도재’(豈徒哉)는, ‘어찌 실없이 그리하겠느냐?’라는 반어형으로, ‘이유가 있어서 부른다.’라는 의미이지요.
공자는 도를 추구한 지 오래되었고, 또한 그 도를 시험해 볼 곳이 없어서 무척이나 답답했을 터입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처음으로 자동차운전면허를 땄을 때 얼마나 차를 몰고 싶었습니까? 아마도 그와 같은 심정이었을 테지요.
공자는 아주 젊었을 적에 보잘것없는 벼슬을 지냈을 뿐이고 그 후에는 제자들을 가르치기만 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공자는 제자들에게 수업료를 받아서 어렵게 지냈을 성싶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정치에 대한 꿈을 실현해 보고 싶었을 게 분명합니다. 그러나 결국에 공자는 ‘공산불뉴’에게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공자에게도 벼슬길이 열렸습니다. ‘사기’를 비롯해서 ‘묵자’와 ‘맹자’ 및 ‘좌전’ 등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부정하는 학자들도 더러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그런 면이 적지 않게 눈에 띕니다. ‘참’인지 ‘거짓’인지는, 각자 스스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그 후, 정공은 공자를 ‘중도의 우두머리’로 삼았습니다. ‘중도’(中都)는, ‘춘추시대 노나라 고을 이름’입니다. 그 옛 성이,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문상현(汶上縣) 서쪽에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자가 그 고을을 다스린 지 1년 만에 사방이 모두 그의 통치 방법을 따랐다고 합니다.
이 일이 ‘공자가어’의 ‘상노’(相魯) 편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공자는 처음에 중도재(中都宰)가 되었다. 이때 공자는 산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사람을 보내는 절차를 제정했다. 어른과 어린이는 먹는 것을 다르게 하고, 힘이 많은 자와 적은 자의 책임을 다르게 하며, 남녀가 같은 길로 다니지 못하게 하고, 길에 흘린 물건이 있어도 줍지 못하게 하며, 그릇에는 거짓된 그림을 새기지 못하게 했다. 또, 네 치 되는 관(棺)과 다섯 치 되는 곽(槨)을 만들고 언덕에 따라 무덤을 만들되, 봉분을 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거기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지 못하게 했다. 공자가 이렇게 1년 동안을 행하였더니 서쪽 지방 제후들이 모두 이를 본받았다.』
이렇게 되자, 정공이 공자에게 말했습니다.
“부자의 이 법을 배워서 노나라를 다스리면 어떻겠습니까?”
‘부자’(夫子)는 ‘공자를 아주 높여서 부르는 말’입니다. 이에,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천하를 모두 이 법으로 다스려도 옳은데, 어찌 노나라뿐이겠습니까?”
어느 날, 정공은 또 공자를 찾았습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논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공이 물었다.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공자가 대답했다. “임금이 신하를 부리나 예로써 해야 하고, 신하가 임금을 섬기나 충으로 해야 합니다.”(정공 문 군사신 신사군 여지하. 공자 대왈 군사신이례 신사군이충.: 定公 問 君使臣 臣事君 如之何. 孔子 對曰 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논어 3-19】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행하는 ‘예’가 있듯이,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행하는 ‘예’도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공자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행하는 ‘예’를 더욱 크게 존중했는지도 모릅니다. 공자는 ‘예’를 통해서 ‘상호 존중’의 질서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정공은 옳은 말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공자에게 ‘중도의 장’ 정도의 벼슬은 너무 낮다고 생각했습니다.
공자의 나이 52세가 되었을 때, 정공은 마침내 공자에게 ‘사공’(司空)이라는 벼슬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얼마 후에는 다시 직급을 높여서 ‘사구’(司寇)라는 벼슬을 그에게 내렸습니다. ‘사구’는 ‘주(周)나라 때에 만든 관직’으로 ‘형벌이나 규찰 등의 일’을 맡았다고 합니다.
사구가 된 후, 공자는 옥송(獄訟)을 판결하는 데 의논하는 사람들을 모두 모아 놓고 물어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이 죄수를 어떻게 보며, 또한 저 사람은 이 죄수를 어떻게 보는가?”
이렇게 물은 후에 그들이 대답하는 말을 모두 종합해서 생각한 다음, 공자는 다시 ‘저 사람이 옳다.’라고 마침내 판결을 끝냈습니다.
공자가 노나라의 ‘사구’가 되고 나서 계환자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계환자는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자기를 돕지 않고 정공을 돕는 게 못마땅하여 그랬겠지요. 그래도 공자는 재차 그를 찾아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공자의 제자인 ‘재여’(宰予)가 물었습니다.
“옛날에 제가 듣자 오니 선생님께서는 ‘나를 왕공(王公)으로 초빙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겠다.’라고 하셨는데, 이제 선생님께서는 ‘사구’ 벼슬을 하신 지가 얼마 안 되시는 데도 절개를 굽혀 가면서 너무 자주 계환자를 찾으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공자가 말했습니다.
“그러하다. 하지만 오늘날 노나라 형세를 보건대 무리로써 서로 업신여기고 병기로써 서로 폭동을 일으켰던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유사란 자가 앉아서 보기만 하고 다스리지 않으니 장차 혼란이 오게 되었다. 이런 때에 기왕 나를 초빙하여 이 벼슬을 맡겼으니 나로서 할 일이 이보다 더 큰 게 있겠느냐?”
노나라 사람들은 이 소문을 듣고, 서로 만나서 말했습니다.
“성인이 장차 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으니, 어찌 형벌부터 먼저 엄하게 다스리지 않겠는가. 오늘부터는 온 나라에 다투는 자가 없게 해야 하겠다.”
정공 10년, 공자가 ‘사구’가 된 해의 봄이었습니다. 노나라는 제나라와 화친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제나라의 대부인 ‘여서’(黎鉏)가 제나라 임금인 경공(景公)에게 말했습니다.
“노나라가 ‘공구’를 중용하였으니 그 세가 반드시 제나라를 위태롭게 할 겁니다.”
‘공구’(孔丘)가 공자임을 잊지 않았지요? ‘여서’의 말을 듣고, 경공은 노나라에 사신을 보내어서 친목 도모를 위한 모임을 협곡(夾谷)에서 갖자고 제의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협곡’은,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무협현(蕪莢縣)에 있는 협곡협(夾谷峽)이라고 합니다.
노나라 정공은 싫을 까닭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차 수레를 타고 아무런 방비도 없이 그곳으로 찾아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공자는 정공에게 말했습니다.
“신이 듣기에 문사(文事)에는 반드시 무(武)를 갖추어야 하며, 무사(武事)에는 반드시 문(文)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옛날에는 제후가 국경을 나설 때는 반드시 문무 관원을 수행시켰다고 합니다. 좌우사마(左右司馬)를 대동하고 가십시오.”
정공은 공자의 말대로 따랐습니다. 노나라 정공이 협곡에서 제나라 경공과 만났습니다. 제사에 쓸 높은 대(臺)를 마련하고 3단의 흙 계단을 만든 뒤에 제나라 경공과 노나라 정공은 예에 따라 상견례를 하였습니다. 서로 절하고 사양하면서 대 위로 올라간 후에 술잔을 주고받았습니다. 절차가 모두 끝나자, 제나라 관리가 앞으로 달려 나와서 말했습니다.
“곡의 연주를 허락해 주십시오.”
경공이 말했습니다.
“좋다. 그렇게 하도록 하라.”
임금의 허락이 떨어지자, 깃발과 우불과 창칼과 방패를 든 무리가 북을 치고 시끄럽게 떠들며 몰려나왔습니다. ‘우불’(羽祓)은, ‘꿩의 깃털로 장식한 먼지떨이 모양의 용구’를 말합니다. 무당이 굿할 때 흔드는 그것 말입니다.
그 때, 공자가 재빨리 앞으로 나와서 한 발에 한 걸음으로 대에 올랐는데 마지막 한 계단을 오르지 않고 긴 소매를 쳐들며 말했습니다.
“두 군주께서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만나셨는데 어찌하여 여기서 이적(夷狄)의 곡을 연주하는가! 물러가게 하십시오.”
그 말에 따라 관리가 그들을 물러가라고 하였으나 그들이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좌우의 수행원들이 제나라 경공의 눈치를 살피었습니다. 그제야 경공은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하면서 그들을 물러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금 지나니까, 또 제나라 관리가 앞으로 달려 나와서 말했습니다.
“청컨대 궁중의 곡을 연주하게 하옵소서.”
경공이 말하였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라.”
그 말에, 광대와 난쟁이가 재주를 부리며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공자가 다시 빨리 달려 나가서 한 발에 한 계단씩 빠른 걸음으로 ‘대’에 오르더니 마지막 한 계단을 오르지 않고 말했습니다.
“필부로써 임금을 현혹케 하는 자는 마땅히 처형해야 합니다. 반드시 처형을 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말을 듣고, 관리가 칼을 빼어서 광대와 난쟁이의 허리를 두 동강으로 잘라 버리고 말았습니다. 공자의 이와 같은 행동에, 제나라 경공은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공은 자기 나라로 돌아간 후에도 크게 두려워하며 군신들에게 말했습니다.
“노나라의 신하는 군자의 도로써 그 군주를 보필하는데, 그대들은 오로지 이적(夷狄)의 도로써 과인이 노군(魯君)에게 죄를 짓게 하였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그러자, 한 관리가 나서서 말했습니다.
“군자는 잘못을 범하면 실질적인 물증으로 사죄하지만, 소인은 과실을 저지르면 곁으로 꾸민 말로만 사죄한다고 합니다. 군주께서 그 일로 마음이 불편하시다면 실질적인 물건을 내놓고 사죄하십시오.”
그 말이 옳다고 여긴 경공은 즉시, 노나라로부터 빼앗은 ‘운’(鄆)과 ‘문양’(汶陽)과 ‘구음’(龜陰)의 세 땅을 곧 반환함으로써 사죄하였습니다. ‘운’ 땅은,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기수현(沂水縣)의 북쪽에 있는데, 이를 ‘동운’(東鄆)이라고 한답니다. 기원전 616년에 ‘계손행부’(季孫行父)가 군사를 지휘하여 성을 쌓았고, 그 후에 ‘거’(莒)에게 점령당하였지요. 또 ‘서운’(西鄆)은, 지금의 산동성 운성(鄆城)의 동쪽에 있었고, 기원전 588년에 노나라 성공(成公)이 쌓았답니다. 제(齊)나라가 노(魯)나라에게 돌려준 땅은, 바로 이 ‘서운’을 가리킨답니다. 그리고 ‘문양’은 춘추시대 때 노나라 땅입니다. ‘문수’(汶水)의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지금의 산동성 ‘태안’(泰安)의 서북쪽 지역이랍니다. 여러 차례 제(齊)나라에게 점령당하였습니다. 또, ‘구음’은, ‘구산’(龜山) 북쪽의 땅을 이릅니다. ‘구산’은, 지금의 산동성 사수현(泗水縣) 동북쪽에 위치하였는데, ‘몽산’(蒙山)과 서로 이어져 있답니다. 춘추시대에는 ‘몽산’의 서북쪽을 ‘구산’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동북쪽은 ‘몽산’이라고 불렀다는군요. 그러나 후세의 사람들은 ‘구산’을 ‘몽산’으로 여겨서 ‘구산’이란 이름은 없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산동성 몽산의 주봉(主峰)이 바로 ‘구몽산’(龜蒙山)이랍니다.
어느덧 정공 13년, 공자의 나이도 55세가 되었습니다. 공자는 정공에게 말했습니다.
“신하는 무기를 비축하면 안 되고, 대부는 100치의 성을 쌓아서는 안 됩니다.”
‘치’(雉)는, 그 당시 성벽의 면적을 계산하는 단위로서 ‘1치’는 길이가 3장(丈)이고 높이가 1장(丈)이었다고 합니다.
공자는 ‘중유’(仲由)를 계씨의 가신으로 임명하여 삼도(三都)를 헐어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중유’가 누구인지는 잘 알고 있지요? 그렇습니다. ‘자로’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삼도’는, 계손씨와 숙손씨와 맹손씨의 그 삼가(三家) 성벽을 가리킵니다.
계손씨와 숙손씨와 맹손씨의 어른들은 이에 모두 찬성하였습니다. 특히 계씨는 대찬성이었지요. 왜냐고요? ‘공산불뉴’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숙손씨가 ‘후’(郈)를 허물었습니다. ‘후’는 숙손씨의 땅에 속하며 지금의 산동성 동평현(東平縣) 동남쪽에 위치합니다. 그리고 계씨가 곧 비(費)를 허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공산불뉴와 숙손첩(叔孫輒)은 ‘비’ 고을의 사람들을 이끌고 노나라를 습격하였습니다.
정공은 세 아들과 함께 계씨의 집안으로 피신하여 ‘계무자’(季武子)의 누대로 올라갔습니다. ‘계무자’는 ‘계평자’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비’의 사람들은 그곳까지 공격하여 누대 옆까지 다가왔습니다.
공자는 ‘신구수’(申句須)와 ‘악기’(樂頎)에게 명하여 그들을 격퇴하도록 했습니다. 이에 ‘비’의 사람들은 도망치기 시작하였고 노나라 사람들이 그들을 추격하여 고멸(姑蔑)에서 격파하였습니다. 그럼으로써 공산불뉴와 공손첩은 제나라로 도망쳤습니다. 비로소 ‘비’는 함락되었지요.
또한, 맹손씨가 ‘성’(成)을 허물려고 할 때였습니다. 맹손씨의 가신(家臣)이며 ‘성’(成)의 지방관인 ‘공렴처보’(公斂處父)가 맹손(孟孫)에게 말했습니다.
“성읍을 격파하면 제나라 사람들이 반드시 북문까지 쳐들어오게 됩니다. 또 성읍은 맹씨들의 보루이므로 성읍이 없으면 맹씨가 없는 바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 성을 파괴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成)은, 맹손씨 가내에 딸린 땅입니다. 지금의 산동성 영양현(寧陽縣) 북쪽에 있답니다. 그해 12월, 노나라 정공은 ‘성’을 포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정공 14년이었습니다. 공자의 나이는 56세가 되었는데, 그는 ‘대사구’(大司寇)로서 재상의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때, 공자의 얼굴에는 기쁜 빛이 돌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한 제자가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듣기에 군자는 화가 닥쳐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이 찾아와도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에,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그런 말이 있다. 그러나 ‘귀한 신분으로 신분이 낮은 사람을 공손하게 대하는 데 낙이 있다.’라고도 하지 않았는가?”
그러면 여기에서 잠깐, 공자가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 그 모습이 어떠하였는지를 알고 싶지요? 그러면 ‘논어’에 기록된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규를 잡고 있을 때는 몸을 굽히어서 그것을 못 이기는 듯이 하였다. 올리는 것은 읍하는 정도로 하고 내릴 때는 물건을 내주는 듯이 하였는데, 두려워하는 것 같은 얼굴빛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발은 뒤꿈치로 옮겨 가는데, 무엇인가를 더듬어 가는 것같이 하였다. 연회 석상에서는 점잖은 기색을 보이고 사적인 응대에는 즐거운 기색을 보였다.(집규 국궁여야 여불승. 상여읍 하여수 발여전색. 족축축여유순. 향례 유용색 사적 유유여야: 執圭 鞠躬如也 如不勝. 上如揖 下如授 勃如戰色. 足蹜蹜如有循. 享禮 有容色 私覿 愉愉如也)【논어 10-5】
이는, 임금의 사신으로 외국을 방문했을 때의 태도를 적은 글이라고 합니다. 즉, 사신으로 갖추어야 할 예식을 공자가 어찌 차렸는지를 알게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규’(圭)는, ‘교제할 때 신표로 삼는, 옥으로 만든 물건’입니다. ‘공’(公)은 9촌이고, ‘후’(侯)와 ‘백’(伯)은 7촌이며, ‘자’(子)와 ‘남’(男)은 5촌이라는 규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하가 임금의 대리로 사신이 될 때는 임금의 옥보다 1촌씩 작은 옥을 썼다고 하는군요. ‘상여읍’(上如揖)은, ‘규를 위로 치켜들 때는 읍하는 듯이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전색’(戰色)은 ‘너무 긴장하여 전율하는 듯이 보이는 얼굴빛’을 이르고, ‘축축’(蹜蹜)은 ‘발걸음을 좁게 내딛는 모양’을 말하며 ‘여유순’(如有循)은 ‘발을 땅에서 떼지 않고 미는 듯이 걷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 ‘향례’(享禮)는 ‘상대방 임금에게 규를 바친 다음, 여러 가지 예물을 바치는 예’이고, ‘용색’(容色)은 ‘부드러운 표정’이며, ‘사적’(私覿)은 ‘사신이 사사롭게 예물을 바치는 회견례’입니다. 또한, ‘유유여’(愉愉如)는 ‘유쾌한 모양’을 이릅니다. 어떻습니까? 공자의 모습이 아주 잘 그려지나요? 참으로 공자는 예를 잘 지켰습니다.
‘공자가어’에는, ‘대사구’의 지위에 올랐을 때, 공자의 다스림에 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즉, 부자 사이에 소송을 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공자는 그들을 같은 옥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석 달이 되어도 사건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비 되는 자가 소송을 중지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이를 허락하고 용서해 주었습니다.
계환자가 이 말을 듣고 불쾌한 빛으로 말했습니다.
“대사구는 나를 속이는구나. 지난번에 나에게 말하기를 ‘국가는 반드시 먼저 효도를 가르쳐야 한다. 이제 나는 한 사람의 불효자를 죽여서 백성들에게 효도를 가르쳤으므로 또한 옳지 않은가.’라고 하였는데, 여기 와서는 저들 불효한 자들을 도리어 용서하여 놓아주었으니 이는 무엇 때문인가?”
공자의 제자인 ‘염유’(冉有)가 이 말을 듣고, 공자에게 전했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크게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아! 윗사람이 도를 잃어서 아랫사람을 죽이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효로써 교화시키지 못하고 옥사만 몹시 다스린다는 것은 허물없는 백성들만 죽이는 꼴이 된다. 삼군(三軍)이 크게 패한다고 해도 그 장수를 목 벨 수는 없으며, 옥에 가둔 죄수를 다스리지 않는다고 해도 옥리(獄吏)를 벌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위에서 교화가 행하여지지 못했기에 그런 것이지, 백성들의 죄는 아니기 때문이다. 대체 법령은 게으르게 하면서 죄를 다스리는 데만 부지런히 하는 것은 백성을 해치는 짓이고, 세금 거두기를 때가 없이 하는 것은 백성에게 모질게 구는 것이며, 시험도 해보지 않고 잘하라고 책망하는 것은 백성을 못살게 하는 짓이다. 정치를 하면서 이 세 가지 폐단이 없는 후에라야 형벌을 행할 수 있다. 상서(尙書)에 이르기를 ‘형벌도 의(義)로 하고 죽이는 것도 의(義)로 하여 오직 일에 조심하라.’라고 하였다. 이것은 반드시 가르친 뒤에 형벌을 가하라는 말이다. 이제 이미 백성을 가르치는 데 먼저 도덕으로써 복종해야 한다고 하지만, 이 도덕으로 가르쳐도 안 될 때는 어진 사람에게 그들이 잘하게 권장하도록 해야 한다. 권해도 안 될 때는 하는 수 없이 위력으로 탄압하는 수밖에 없다. 이처럼 하여 3년만 지나면 백성이 바르게 될 터이니, 그중에서 혹 간사한 백성이 있어서 이 교화를 따르지 않는 자가 있을 때 비로소 부득이 형벌을 가한다면 아무리 무지한 백성일지라도 모두 저들의 죄를 알게 된다. ‘시’에 이르기를 ‘천자를 도와서 백성이 혼미하게 하지 않았다.’라고 하였으니, 이런 까닭에 옛날에는 위엄이 있어도 이를 시험하지 않았고 형법이 있어도 이를 쓰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그렇지 못하고 그 가르침이 어렵기만 하며 그 형벌이 번잡하기만 하여서 백성이 미혹하게 하여 함정에 몰아넣고 말았다. 또, 여기에 계속해 독재하는 까닭에 형벌만 번거로워지고 도둑놈을 막을 수가 없게 되었다. 도대체 석 자 정도의 가까운 거리를 빈 수레로도 올라가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길이 험준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일백 길 또는 높은 산을 무거운 짐을 싣고서 올라갈 수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점점 무너져 들어가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세속을 본다면 무너져 들어간 지가 오래되었으니, 형법이 있다고 한들 백성들이 능히 이를 범하지 않겠느냐?”
법령을 소홀하게 하면서 형벌에만 힘쓰는 것을 ‘적’(賊)이라고 하며, 시도 때도 없이 세금을 징수하는 것을 ‘폭’(暴)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시험해 보지도 않고 좋은 성과만을 바라는 것을 ‘학’(虐)이라고 하지요. 공자의 말은, 정치에 이 세 가지가 없어진 다음에야 형벌을 내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 ‘논어’의 ‘안연’ 편에서 공자는 ‘소송을 판결하는 일은 나도 남같이 할 수 있지만, 반드시 송사가 없게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공자가 조정에서 일한 지 7일째 되는 날에, 공자는 정치를 어지럽히던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노나라 궁전인 양관(兩觀) 아래에서 죽였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은 지 사흘이 지난 후에,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소정묘는 노나라에서 착하기로 소문난 사람인데 오늘날 부자께서 첫 정사(政事)에 그를 죽였으니, 혹자들은 이 일을 부자께서 실수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듣고, 공자가 말했습니다.
“거기 좀 앉아라. 내가 그 연유를 이야기해 주겠다. 천하에 큰 죄악이 다섯 가지가 있다. 절도 같은 것은 여기에 해당도 되지 않는다. 그 다섯 가지 죄악을 말하면, 첫째는 마음이 역(逆)하고 험(險)한 것, 둘째는 행실이 괴벽하고 굳은 것, 셋째는 거짓된 말을 하고 변론을 하는 것, 넷째는 추한 것만 기억하고 넓게 아는 것, 다섯째는 그릇된 일만 따라서 하고 자기 몸을 윤택하게 하는 것 등이다. 사람으로서 이 다섯 가지 가운데 한 가지만 범한 것이 있어도 죽음을 면치 못할 터인데, 소정묘는 이 다섯 가지 큰 죄악을 모두 범하고 있다. 왜 그런가 하면, 그 거처하는 곳에 가 보면 무리를 모아서 당파를 이루고 있으며, 그 말솜씨를 보면 자기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는 쩔쩔매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 앞에서는 잘난 체한다. 그뿐만 아니라, 강한 모습을 보면 옳을 일을 반대하고 자기 혼자만 서 있다. 이런 자는 사람 중의 간웅이니 이를 제거하여 버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소정묘는 용서하지 못할 5가지 죄를 지었기에, 공자는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공자는 아무리 죄를 지었더라도 회개하는 자는 용서해 주었고,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부자끼리 소송을 일으킨 자들도 그 아비가 저절로 뉘우침이 있자 그들을 모두 용서했습니다. 기억하지요? 그래서 제자들이 다시 물으니, 공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윗사람들이 올바른 도리를 잃고서 아랫사람들만 벌주려고 하는 것은 마땅치 못하다. 효도하라고 가르치지도 않고서 법으로 옭아매어 백성들을 죽인다면 이는 온당한 일이 아니다.”
불현듯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라는 속담이 생각납니다. 그렇기에 같은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큰 벌로 다스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옳긴 옳습니다만, 이 이야기는 어쩐지 후대에 지어낸 듯싶은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아무튼 공자는 정치에 성실히 임했습니다. 그래서 3개월이 지나게 되었을 때는 양과 돼지를 파는 사람들이 값을 속이지 않게 되었으며 사방에서 읍으로 찾아오는 여행자들도 관리에게 허가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고 모두 잘 대접하여 만족한 마음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공자가 정치를 펴니 태평성대(太平聖代)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고, 결과가 그처럼 좋았을까요? 어쩐지 머리를 자꾸 갸우뚱거리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잇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이만 끝을 맺고자 하며, 나의 시 한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길이 너무 머니, 먼 곳을 바라보며
외롭게 모두 걸음을 옮긴다.
달을 벗 삼아 밤에만 떠나는 길
긴 그림자가 내 뒤를 따르고,
조심스레 고요만 밟고 가는데
누웠던 들꽃들이 하얗게 잠을 깬다.
우리는 너무 힘든 길을 걷고 있다.
그것도 넓은 들길이 아니라
좁고 험한 산길이니,
불 켠 초롱꽃 한 포기 멀리 바라보며
부지런히 앞으로만 발을 딛는다.
밤길을 기쁘게 걸어가는 그곳
동구 밖의 늙은 느티나무 아래에서 그분이
기다리고 계실 것임을
우리는 모두 마음 뜨겁게 믿고 있다.
- 졸시 ‘먼 곳을 바라보며’ 전문
이제 공자는, 주관적 확신에서 보편적 기준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된, ‘지천명’(知天命)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주자의 말처럼 ‘지천명’은 ‘하늘을 좋아하고 하늘이 이르는 바를 안다.’라는 뜻이라고 여겨집니다.
각 사람에게는 ‘하늘이 이르는 바’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자기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겠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말하는 ‘소질’이라는 게 ‘천성적’으로 ‘타고난 것’이니 이게 ‘천명’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천명을 모르면 군자 노릇을 할 길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우선 먼저 ‘천명’이라고 여기는 길이 결정되면, 그 ‘먼 곳을 바라보며’ 힘차게 발걸음을 옮겨야만 합니다. 그 길이 아무리 험하고 외롭더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으며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부지런히 앞만 보고 열심히 걸어가다 보면, 불 켠 초롱꽃 하나를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게 커다란 위안이 되고 즐거움도 됩니다. 마음만 진실하게 기울이면 풀의 말도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 안에서 노력하는 만큼 깨달음도 얻게 됩니다. 이게 보람으로 결실을 보게 되겠지요.
공자는 50대에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공자는 처음에 ‘중도의 우두머리’(中都宰)가 되었는데, 그는 이를 ‘천명’이라고 여기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공자가 그 고을을 맡아서 다스린 지 1년 만에 사방이 모두 그의 통치 방법을 따르게 되었다고 전합니다.(글: 김 재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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