씬쿠러, 콩쯔

14. 미인을 좋아하듯 현자를 좋아하라/ 김 재 황

시조시인 2022. 1. 27. 08:34

14
미인을 좋아하듯 현자를 좋아하라





 공자와 그 일행은 ‘광’ 땅을 떠난 뒤에 곧 ‘포’(蒲)라는 지방에 도착했습니다. ‘포’는 ‘읍의 이름’이랍니다. 위(衛)나라의 ‘광성’(匡城) 부근에 위치하는데, 지금의 하남성 장원현 북쪽이랍니다.
 그런데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때마침 위나라 대부인 공숙씨(公叔氏)가 ‘포’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포’의 사람들은 몰려와서 공자 일행의 앞길을 가로막았습니다. ‘공자가어’와 ‘공자세가’의 이 이야기는 내용이 비슷합니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공자를 수행하던 제자 중에 ‘공양유’(公良孺)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됨이 어질고 키가 아주 크며 용기와 힘을 지녔고, 자기 개인 소유의 수레를 다섯 채나 가지고 공자를 따라왔습니다. ‘포’의 사람들이 에워싸자, 그는 탄식하며 말했습니다.
 “내가 이전에 선생님을 모시고 ‘광’ 땅에서 어려움을 당했는데, 오늘 또다시 여기에서 위험에 부딪히니 실로 운명인가 보다. 선생님과 함께 위험에 빠져 있느니보다 차라리 싸우다가 죽겠다.”
 공양유가 칼을 뽑아 들고 여러 제자와 힘을 합하여 곧 싸움을 벌일 태세를 취하였습니다. ‘포’의 사람들은 공양유의 그 용감한 모습을 보고 겁이 나서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위나라로 가지 않겠다면 우리는 당신들을 보내 주겠소.”
 공자가 약속하자, 그들은 공자 일행을 동문(東門)으로 내보내 주었습니다. 
 공자는, ‘포’ 땅을 떠난 후에, 장차 위나라의 서쪽에 있는 진(晉)나라로 가서 대신인 ‘조간자’(趙竿子)를 만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위나라와 진나라의 국경지대인 ‘황하’(黃河) 앞에 이르러서 공자는 끔찍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즉, ‘조간자’가 어질기 짝이 없는 ‘두명독’(竇鳴犢)과 ‘순화’(舜華)를 죽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공자는 탄식하며 말했습니다.
 “아름답구나, 황하여! 넓고 넓구나. 내가 이 황하를 못 건너니, 이 또한 내 운명이로구나.”
 자공이 달려 나가서 물었습니다.
 “지금 하신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두명독과 순화는 진(晉)나라의 어진 신하였다. 조간자가 아직 뜻을 얻지 못했을 때 모름지기 이 두 사람의 도움으로 정치를 하였다. 그런데 지금 그가 뜻을 이루자, 도리어 그 두 사람을 죽이고서 정권을 차지하고 있다. 내가 듣기로 ‘짐승의 배를 갈라서 태 안의 새끼를 끄집어내면 기린이 그곳에는 나타나지 않고, 연못을 말리어서 물고기를 잡으면 그곳에 용이 나타나지 않으며, 새의 둥우리를 부수고 새알을 집어내면 그곳에 봉황새가 나타나지 않는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왜냐하면, 같은 무리가 해를 입으면 슬퍼하기 때문이다. 짐승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사람으로서 어찌 진나라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공자는, ‘추향’(陬鄕)에 돌아가서 쉬며, 조간자에게 죽임을 당한 두 어진 신하를 기리기 위하여 거문고 곡인 ‘추조’(陬操)를 지었다고 합니다. 이는, ‘공자세가’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공자가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추조’란 거문고 곡조의 이름이다. ‘추’(陬)는 노나라의 ‘추읍’(陬邑)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다른 글에는 ‘반조’(槃操)를 지었다고도 기록되어 있으나, 아마도 이는 공자가 모든 희망을 세상에서 끊고 추읍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심정으로 이 곡조를 지었을 게 분명하다. 어쨌든 이 곡조는 공자가 작곡하였음이 틀림없다.』


 조간자가 두명독과 순화를 죽이기 전에, 공자와 자로가 조간자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양호’(陽虎)가 제나라로 도망했다가 다시 진(晉)나라로 달아나서 조간자에게 붙어 있었지요. 
 공자가 그 소문을 듣고 자로에게 말했습니다.
 “조씨(조간자)는 장차 재앙과 난리를 일으키게 될 게다.”
 그 말을 듣고, 자로가 말했습니다.
 “그는 아무런 권력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무슨 난을 일으키겠습니까?”
 공자가 다시 말했습니다.
 “유야, 너는 그 내용을 잘 모를 게다. 저 양호란 자는 부자만 친하고 어진 사람은 친할 줄 모르기 때문에 계손씨에게 사랑받고서도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제나라로 도망쳤다. 그러나 제나라에서도 받아 주지 않으므로 이제 진나라로 가게 되었다. 제나라와 노나라로 말하면 그 걱정되고 염려되던 두통거리를 떼어 버리게 되었거니와, 저 조간자로 말하면 자기에게 이로운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양호의 말을 믿게 될 게다. 남을 몹시 믿게 되면 반드시 그 말에 빠지게 되고 그 꾀에 휩쓸리게 될 게 불을 보듯 환한 이치이니 장차 화란을 일으켜서 망하게 될 것을 모르느냐?”
 진(晉)나라는 그 당시에 나라 안이 혼란스러웠습니다. 조간자가 권세를 잡고 나라를 흔드니, 보다 못한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가 들고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모두 진나라의 귀족이었습니다. 조간자가 이들을 격파하려고 하였는데, 중모성(中牟城)이 불복했습니다. 그래서 조간자는 중모성을 공격했습니다. 그 때문에 중모성을 다스리고 있던 ‘필힐’(佛肹)이 조간자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 ‘필힐’이 공자의 소식을 중모성에서 들었던 모양입니다. 필힐이 부르자, 공자가 가려고 하였습니다. 자로가 펄쩍 뛰며 말했습니다.
 “전에 저는 선생님께서 ‘군자는 스스로 그 자신이 악한 일을 한 사람의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필힐이 중모읍에서 반기를 들었는데도 선생님께서 가시려고 하니 어찌 된 일입니까?”
 ‘필힐’이라는 이름은, 그 당시에 ‘클 필’(佛)과 ‘클 힐’(肹)로 읽었답니다. 그는, 범씨(范仲行)의 가신으로 ‘중모’의 원이었다고 합니다. 조간자의 가신(家臣)이라는 말도 있지요. 그 후의 이야기가 ‘논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말에 공자가 대답했다. “그렇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갈아도 엷어지지 아니한다면 굳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물들여도 검어지지 아니한다면 희다고 하지 않겠느냐? 내가 어찌 박이나 외이겠느냐? 어찌 매달려 있기만 하고 먹지 못하는 것이겠느냐?”(자왈 연. 유시언야. 불왈견호 마이불린, 불왈백호 날이불치, 오 기포과야재 언능계이불식.: 子曰 然. 有是言也. 不曰堅乎 磨而不磷, 不曰白乎 涅而不緇. 吾 豈匏瓜也哉 焉能繫而不食.)【논어 17-7】

 여기에서 ‘포과’(匏瓜)는 ‘박이나 외’를 말하는데, 그 맛이 써서 먹을 수가 없답니다. 
공자는 그렇게 말을 했지만, 결국에는 필힐에게로 가지 않았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공자는 갈 생각이 있었으나 자로의 말이 아무래도 맘에 걸렸을 성싶습니다.
 그 후에 공자는 ‘포’ 사람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드디어 위(衛)나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자공이 말했습니다.
 “이는 선생님이 저들과의 언약을 저버리는 게 아닙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그들이 원래 나에게 의리가 아닌 것을 두고 언약을 강제로 요구했기 때문이다.”
공자가 위나라로 갈 때, 제자인 ‘염유’(冉有)가 수레를 몰았습니다. 수레를 타고 가면서 공자는 사람들이 길에 많은 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백성들이 참 많구나.”
 그 말을 듣고, 염유가 물었습니다.
 “백성이 많으면 무엇을 더해야 합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백성을 넉넉하고 잘살게 해주어야 한다.”
 염유가 또 물었습니다.
 “백성이 모두 부자가 된 다음엔 무엇을 더해야 합니까?”
 공자는 다시 말했습니다.
 “백성들을 가르쳐야 한다.”
 이 이야기는, ‘논어’의 ‘자로’ 편에 실리어 있습니다. 
 위나라 영공(靈公)은 공자가 다시 온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며 교외까지 나가서 맞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영공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제 ‘포’ 고을에서 어려움을 당했으니 그 고을을 토벌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공자는 대답했습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이에, 영공은 다시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부들은 불가능하다고 여깁니다. 오늘날 ‘포’는 위나라가 진나라와 초나라를 방어하는 요지인데, 위나라가 직접 그곳을 공격하는 일은 무리가 따르지 않겠습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그곳의 장정들은 모두 위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의지가 있고 부녀자들도 그들의 ‘서하’ 땅을 지키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토벌하려는 대상은 반란을 일으킨 너더댓 명의 우두머리에 불과합니다.”
 이 말은, 공숙씨가 ‘포’ 땅을 가지고 다른 나라에 몸을 의탁(依託)할 생각이 있는 만면에 그곳의 젊은이들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공숙씨의 뜻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서하’(西河)는, 위(衛)나라 땅으로 지금의 하남성 ‘준현’(浚縣)과 ‘활현’(滑縣) 일대라고 합니다.
 공자의 말을 듣고 영공이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나 영공은 ‘포’ 지역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공자는 위나라에서 대신인 ‘거백옥’(蘧伯玉)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앞에서 ‘거백옥’에 대한 이야기는 했으니, 여기에서는 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이때, 공자의 나이는 57세였다고 합니다. 이 당시의 이야기가 ‘논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자가 영공의 부인인 ‘남자’를 만나 보았는데, 자로가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공자가 굳게 마음을 다져서 말했다. “내가 잘못이 있다면 하늘이 날 싫어할 것이니라. 하늘이 날 싫어할 것이니라.”(자 견남자 자로불열. 부자 시지왈 여소부자 천염지천염지.: 子 見南子 子路不說. 夫子 矢之曰 予所否者 天厭之天厭之.)【논어 6-26 】

 여기에서 ‘시’(矢)는 ‘맹세함’ 또는 ‘다짐함’ 등을 말합니다. 그 당시에 ‘화살을 꺾어서 맹세’했기 때문에 ‘시’(矢)를 ‘서’(誓)의 뜻으로 쓴답니다. ‘소부자’(所否者)는 ‘좋지 못한 점’ 또는 ‘잘못된 점’ 등을 이른답니다. 
 또, ‘공자세가’에 나타난 이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위나라 영공의 부인인 ‘남자’(南子)는, 사람을 시켜서 공자를 만난 후에 자기의 뜻을 전하도록 일렀습니다. 그 심부름꾼이 말했습니다.
 “사방의 군자들은 우리 군주와 친하게 사귀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그 부인을 만납니다. 우리 부인께서 뵙기를 원합니다.”
 공자는 사양하다가 부득이 가서 만났습니다. 부인은 휘장 안에 있었습니다. 공자가 문으로 들어가서 북쪽을 향하여 절하자, 부인도 휘장 안에서 답례하였습니다. 그때, 그녀의 허리에 찬 구슬 장식이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냈습니다. 돌아와서 공자가 말했습니다.
 “나는 원래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기왕에 부득이해서 만났으니 이제는 예로 대접해 주어야 하겠다.”
 그러나 자로는 역시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하늘을 들먹이며 다짐을 연거푸 했습니다. 그러면 대체 이 ‘남자’라는 여인이 어떤 여자였기에 자로가 그리 못마땅하게 여겼고, 공자는 왜 그리 뜨겁게 맹세했을까요?
 ‘남자’(南子)는 본래 송(宋)나라의 귀족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위(衛)나라 영공에게 시집오기 전에 이미 송나라 공자(公子)인 ‘조’(朝)라는 바람둥이와 염문을 뿌렸습니다. 한 마디로, ‘남자’는 보기 드문 음녀(淫女)였지요. 그런데 이 ‘남자’와 영공 사이에 ‘괴외’(蒯聵)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괴외’가 진짜로 영공의 자식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영공 39년, ‘괴외’는 음녀인 어머니, 즉 ‘남자’의 횡포를 견디다 못하여 그녀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일이 사전에 발각됨으로써 ‘괴외’는 송(宋)나라로 도망갔다가 그 뒤에 진(晉)나라로 갔습니다.
 그 후, 영공이 죽자, 위(衛)나라에서는 ‘괴외’의 아들인 ‘첩’(輒)을 위나라의 군주로 삼았습니다. 그가 바로 위나라의 ‘출공’(出公)입니다. 출공이 위나라의 주인이 된 후에 12년이 되도록, 출공의 아버지인 ‘괴외’는 귀국하지 못했습니다. 출공이 막강한 신하들을 동원하여 아버지인 ‘괴외’의 입국을 막았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그 아들에 그 아버지였습니다. ‘괴외’는 집요하게 복위를 꾀하였고 그럼으로써 기나긴 부자 사이의 싸움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이야기와 자로의 죽음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이 이야기는 끊고, 다음에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공자가 영공의 부인인 ‘남자’와 만나고 나서 얼마 뒤에, 영공은 ‘남자’와 더불어 수레 맨 앞자리에 함께 타고 길거리로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영공은 자기와 ‘남자’ 뒤의 자리에 공자를 앉히고 또 그다음 자리에는 내시인 ‘옹거’(雍渠)를 앉게 한 후에 여러 백성이 보는 앞에서 거리를 지나갔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공자세가’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영공은 부인과 함께 수레를 타고, 환관인 ‘옹거’를 시위관으로 옆에 태운 다음, 궁전을 나서서 갔다. 그런데 공자는 뒤의 수레를 타고 따라오게 하면서, 영공은 거드름을 피우고 뽐내며 시내를 지나갔다.』

 공자는 자존심이 상했겠지요.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아직껏 현자 좋아하기를 미인 좋아하듯이 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이는, 그 유명한 ‘오미견호덕 여호색자야’(吾未見好德 如好色者也)라는 말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색’은 ‘아름다운 여인’을 가리킵니다. 이 말은 ‘논어’의 ‘자한’ 편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또, 이와 같은 내용이 ‘영공’ 편에도 있지요.
 공자는 큰 실망을 안고 위나라를 떠나서 이번에는 조(曹)나라로 갔습니다. 조나라는 ‘주’(周)의 무왕(武王)이 희씨(姬氏)에게 봉한 나라입니다. 처음 군주는 무왕의 동생인 ‘숙진탁’(叔振鐸)이었습니다. ‘도구’(陶丘)에 도읍하였습니다. ‘도구’는 지금의 산동성 정도현(定陶縣)의 서남쪽이랍니다. 기원전 487년에 송(宋)나라에 멸망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조나라에서 공자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알 수 없고, 공자 일행이 조나라로 떠날 때 노나라의 ‘정공’이 죽고 ‘애공’(哀公)이 그 자리를 이었습니다. 공자는 조나라를 거쳐서 송(宋)나라로 향했습니다. 
 어느 날, 공자 일행이 송나라를 향하여 가다가 커다란 나무 밑에 자리를 정하고 앉아서 제자들에게 ‘예’(禮)에 대하여 가르침을 폈습니다. 그런데 전부터 공자가 송나라로 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김으로써 공자를 죽이려고 벼르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송나라 사마(司馬)인 ‘환퇴’(桓魋)였습니다. 
 그가 공자 일행이 있는 곳으로 와서 공자를 해치려고 그 커다란 나무를 넘어뜨려 버렸습니다. 그러한 불의의 일을 당하고서도 공자는 태연하게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하늘이 덕을 나에게 내리셨으니 환퇴가 나를 어찌하겠는가?”
 이는, ‘논어’의 ‘술이’ 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자의 옛 선조들이 송나라 사람이라는 사실은 잊지 않았지요? 아마도 공자는 송나라로 들어설 때 누구보다도 감회가 깊었을 터입니다. 그리고 ‘공자가어’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자가 송나라 임금을 찾아보았을 때, 송나라 임금이 말했습니다.
 “나는 영구히 나라를 차지하고 사방으로 벌려 있는 도시에 각각 도(道)가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나는 또 백성들에게 의혹이 없게 하고자 하며, 선비에게 자기들의 힘을 다하여 나를 돕게 하고자 하며, 해와 달이 항상 밝게 하고자 합니다. 나는 성인이 저절로 나를 찾아오게 하고자 하며, 관부(官府)의 일이 잘 다스려지게 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하자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천 승을 가진 나라의 임금들도 나에게 나라 다스리는 법을 묻는 이는 많았지만 지금 임금께서 물으시듯이 자세한 말을 묻는 이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임금께서 원하시는 일은 모두 이룰 수가 있습니다. 이웃나라끼리 서로 친하게 지내면 영구히 나라를 유지할 수가 있으며, 임금은 은혜를 베풀고 신하는 충성을 다하여 섬기면 도시가 늘어서게 될 수 있으며, 죄 없는 자를 죽이지 않고 죄 있는 자를 놓아주지 않으면 백성들이 미혹하지 않게 될 수 있으며, 선비에게 녹(祿)을 후하게 주면 자기들의 힘을 다하게 할 수 있으며, 하늘을 높이 받들고 공경하면 해와 달도 흐려지지 않게 할 수 있으며, 도를 숭상하고 덕을 귀하게 여기면 성인도 저절로 오게 할 수 있으며, 능한 사람을 올려 쓰고 능하지 못한 자를 내쳐 버리면 관부도 잘 다스려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송나라 임금이 말했습니다.
 “참 좋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어찌 그리할 수가 있겠습니까? 재수 없는 나로서는 그런 일을 해내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공자가 말했습니다.
 “이는 그리 어려운 일들이 아닙니다. 오직 하고 싶은 일을 행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송나라의 대부인 ‘추괴’(魋魁, 본명은 向魋)는 석곽(石槨)을 만드는 데 3년이 지났어도 역사를 끝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만드는 사람들이 모두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이에 공자가 낯을 찌푸리며 말했습니다.
 “왜 이렇게 사치스럽게 만드느냐? 사람이란 죽으면 차라리 빨리 썩어 버리는 게 나은 일이다.”
 제자인 ‘염자복’(冉子僕)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예기에 이르기를 ‘흉한 일에 쓸 물건은 미리 준비하지 않는 법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임금은 죽은 다음에 익호를 논하게 되고, 익호가 정해진 뒤에 장사를 지내게 되며, 장사를 지낸 뒤에야 사당을 세우게 된다. 이는, 모두 신하가 하는 일이기 때문에 미리 부탁하지 않는다. 그런데 하물며 자기가 스스로 한단 말이냐?”
공자는 송(宋)나라에서 정(鄭)나라로 갔습니다. 그때, 공자는 제자들과 서로 길이 어긋나서 홀로 성곽(成郭) 동문에 서 있었습니다. 어느 정나라 사람이 자공을 보고 말했습니다.
 “동문에 어떤 사람이 서 있는데, 그 이마는 요(堯)나라 임금과 닮았고 그 목덜미는 옛날의 대신인 ‘고요’(臯陶) 같으며 어깨는 정나라의 대신인 ‘자산’(子産)과 닮았습니다. 그러나 허리 아래는 우(禹) 임금보다 3촌(寸)이 짧으며, 풀 죽은 모습은 마치 상가(喪家)의 개와 같았습니다.”
 공자를 만난 후에, 자공은 그 말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그 말을 듣고, 공자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한 사람의 모습이 어떻다는 말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상가의 개’와 같다니! 하기는 옳은 말이다. 그런 모습이었고말고.”
 공자는 정나라를 떠나서 진(陳)나라로 갔습니다. 그리고 진나라에 이르러서 진나라 대부인 ‘사성정자’(司城貞子)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이때, 한 사람이 공자를 찾아왔습니다. 그 이야기가 ‘논어’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진나라 관리인 사패가 공자에게 물었다. “노나라 소공이 예를 아는 분입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예를 아는 분입니다.”공자가 밖으로 나가자, 사패가 무마기에게 읍하고 다가와서 말했다. “내가 들으니 군자는 편들지 않는다고 하는데, 군자도 편드는군요. 소공이 오나라에서 부인을 맞았는데, 같은 성씨이기에 ‘오맹자’라고 하였으니 노나라 임금이 예를 안다면 누가 예를 모르겠소?” 무마기가 그 말을 공자에게 전하자, 공자가 말했다. “나는 행복하다. 진실로 잘못이 있으면 남이 반드시 일러주는구나.”(진사패 문 소공 지례호. 공자왈 지례. 공자퇴 읍무마기이진지왈 오문군자 부당 군자 역당호. 군 취어오 위동성 위지오맹자 군이지례 숙부지례. 무마기 이고. 자왈 구야행. 구유과 인필지지.: 陳司敗 問 昭公 知禮乎. 孔子曰 知禮. 孔子退 揖巫馬期而進之曰 吾聞君子 不黨 君子 亦黨乎. 君 取於吳 爲同姓 謂之吳孟子 君而知禮 孰不知禮. 巫馬期 以告. 子曰 丘也幸. 苟有過 人必知之.)【논어 7-30】

 여기에서 ‘사패’(司敗)는 ‘사법을 맡은 관리’를 말한답니다. 그러나 이를, ‘관리의 이름’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나는 후자를 따랐지요. 그리고 ‘당’(黨)은 ‘편들어 비위를 숨겨 주는 것’을 이릅니다. 또한, ‘취어오’(取於吳)는 ‘오나라에서 부인을 맞아들임’을 뜻합니다. ‘취’(取)는 ‘취’(娶)와 같은 뜻이랍니다. 그리고 ‘위동성’(爲同姓)은 ‘노와 오가 모두 주나라에서 갈린 희성(姬姓)’이라는 말입니다. ‘오맹자’(吳孟子)는 ‘노나라 소공의 부인 이름’입니다. ‘맹자’는 ‘맏딸’을 이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노나라 소공(昭公)이 오나라 공주를 부인으로 맞았는데, 같은 성씨이었으므로 이를 꺼리어서 ‘오희’(吳姬)라고 해야 옳은 것을 ‘오맹자’(吳孟子)라고 이름을 고쳐서 불렀다는 뜻입니다. 이런 소공을 보고 예를 안다고 하면 예를 모를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는 이야기였지요.
 그래서 공자는 그 지적을 솔직히 받아들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 되지요. 그 잘못을 아는 즉시, 바르게 고쳐야 합니다. 
 진나라에서 1년 남짓 머물렀을 때, 오(吳)나라 왕인 ‘부차’(夫差)가 진(陳)나라를 쳐서 세 읍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진(晉)나라 ‘조간자’(趙簡子, 이름은 ‘鞅’)가 위(衛)나라의 도성인 ‘조가’(朝歌)를 공격하였습니다. 초(楚)나라는 채(蔡)나라를 포위하였고, 채나라는 오나라의 땅으로 옮기어 가서 그 나라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나라는 월(越)나라 왕인 ‘구천’(句踐)을 회계(會稽)에서 패배시켰습니다. 이른바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눈여겨볼 것은 ‘부차’와 ‘구천’입니다. 이들로 해서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주(周)나라 경왕(敬王) 24년에 오(吳)나라 왕인 ‘합려’(闔閭)는, 월(越)나라 왕인 ‘구천’(句踐)과 초리(樵李)에서 싸웠는데 패배하였습니다. ‘합려’는 적의 화살에 손가락을 다쳤고, ‘형’(陘)이라는 곳까지 도망쳤을 때 그 상처가 덧나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음이 임박하여서 그 아들 ‘부차’에게 반드시 복수해 달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오나라 왕이 된 ‘부차’의 귀에는, 늘 아버지의 유언이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버지의 원한을 풀어야 하겠다는 굳은 다짐으로 밤마다 ‘땔나무 위에 누워서’(臥薪) 아버지의 남긴 한을 새롭게 하여 복수의 칼날을 갈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는 자기 방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유언을 이렇게 소리치게 하였습니다.
 “부차여, 네 아버지를 죽인 자는 구천임을 잊으면 안 된다.”
 그때마다 ‘부차’는 ‘잊지 않겠다.’라고 크게 대답하곤 했습니다. 이리하여 그는 밤이고 낮이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병사들을 훈련하며 때를 기다렸습니다. 
 월나라 ‘구천’이 그 사실을 알고, 기선을 잡아서 오나라를 치려고 했습니다. 충직한 신하인 ‘범려’(范蠡)가 극구 말렸으나, ‘구천’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부차’는 이를 맞아서 싸웠습니다. 마침내 양쪽 군대는 오나라의 부초산(夫椒山)에서 격돌했으나, ‘부차’의 단련된 오나라 군사들에게 월나라 병사들은 크게 패하였습니다. 하는 수 없이 ‘구천’은 패잔병들을 이끌고 겨우 ‘회계산’(會稽山)으로 도망쳤습니다. 
 오나라 병사들이 추격하여 그 산을 에워쌌습니다.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물러설 수도 없게 된 ‘구천’은, 나라를 버리고 오나라 왕의 신하가 된다는 조건으로 항복했습니다. 그는, ‘월나라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야 한다.’라는 ‘범려’의 충언을 따랐지요. ‘부차’는 승자의 도량으로 ‘구천’을 고국으로 돌려보내 주었습니다.
 ‘구천’은 고국으로 돌아갈 수는 있었으나 오나라 왕의 신하가 된 몸이었습니다. 전에 ‘부차’가 땔나무 위에 누워서 한을 되새기듯, ‘구천’은 언제나 곁에 ‘쓸개를 매달아 놓고 때때로 그것을 핥으며’(嘗膽) ‘회계의 치욕’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밭을 갈고 부인은 스스로 길쌈하며, 오로지 국력의 재흥을 꾀했습니다.
 어느덧 12년이 지나가고 그해의 봄, 오나라 왕인 ‘부차’는 기(杞)의 황지(黃池)에서 제후들을 모아놓고 천하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부차’는 득의의 절정에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오래도록 기회를 엿보고 있던 ‘구천’은, 신하인 ‘범려’와 함께 ‘부차’가 궁을 비운 사이에 느닷없이 오나라로 쳐들어갔습니다. 오나라의 잔류군은 크게 격파되었으나 아직 오나라에 결정적인 타격은 가할 수 없었습니다.
 그 후 4년, ‘구천’은 다시 오나라를 공격했습니다. 그래서 ‘입택’(笠澤)에서 월나라 군대는 오나라 군대에게 크게 이기고 그대로 오나라에 머물며 각지에서 오나라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그리하여 2년 후에, 다시 ‘입택’에 집결한 월나라 군대는 오나라 수도인 ‘고소’(姑蘇)에 육박하여 이듬해에는 오나라 왕인 ‘부차’의 항복을 받아내고야 말았습니다.
 ‘회계의 치욕’을 깨끗이 씻은 ‘구천’은 ‘부차’를 죽이지 않고 ‘용동’(甬東)으로 귀양 보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차’는 ‘구천’의 호의를 외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래서 ‘와신상담’이라고 하면, ‘마음먹은 일을 이루려고 어려움을 참고 견딤’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다시 진(陳)나라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어느 날, 매 한 마리가 진나라 궁정에 떨어져 죽었는데, 싸리나무로 만든 화살이 몸에 꽂혀 있었고 그 화살촉은 돌로 되어 있었으며 화살의 깊이는 1척8촌이었습니다. 진나라의 민공(湣公)이 사자를 보내어서 공자에게 그 뜻을 물었습니다.
 공자가 말했습니다.
 “매는 멀리에서 왔습니다. 이것은 ‘숙신’(肅愼)의 화살입니다. 그때 ‘숙신’이라는 야만 민족이 이런 화살을 공물로 바쳤습니다. 무왕(武王)은 그 화살을 사랑하는 맏딸 ‘태희’(太姬)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공주는, 순임금의 자손이며 우(虞)나라를 다스리는 ‘호공’(胡公, 이름은 ‘滿’)에게로 시집갔습니다. 그 호공이 진(陳)나라의 시조가 되었는데, 그때 그 화살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렇게 되어 숙신족의 화살이 진나라에 와 있게 되었습니다.”
 공자의 말을 듣고, 진나라의 옛 창고를 뒤져 보니, 정말로 그 화살과 비슷하게 생긴 돌촉의 화살이 있었습니다. 진나라 임금은 공자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했습니다. 그러나 대신들의 눈치 때문에 공자를 높이 쓰지 못하였습니다. 공자는 다시 위(衛)나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공자의 나이가 59세가 되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위나라 영공(靈公)은 공자에게 ‘군사를 부리는 법’에 관하여 물었습니다.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군사를 쓰는 법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습니다.”
 이튿날이 되었습니다. 영공은 공자에게 이번에는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공자는 때가 왔구나 하고 그 일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들오리 한 마리가 창문 밖으로 날아서 지나갔습니다. 그 들오리를 보고, 영공은 신기한 듯이 말했습니다.
 “저런, 들오리 좀 보아!”
 공자가 열심히 하는 말을 영공이 귓결로 흘려서 듣고 딴전을 부리자, 공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공자는 제자들을 재촉하여 그날로 위나라를 떠났습니다. 그럼, 그다음에는 어느 나라로 갔을까요? 아마도 공자는 다시 진(陳)나라로 갔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면 이제 나의 시를 소개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불쑥 물 위로 솟은 연꽃이
활짝 웃으며 살짝 숨을 들이마신다.
바람이 잔가지를 켜서
들려주는 가느다란 음곡에 맞추어
이름다운 율동을 그려 낸다.
물을 안고 떠 있는 일이 어찌 쉽겠는가.
남몰래 연꽃도 뛰어가고 있다.
넓게 펼친 연잎 그 아래에서
쉴 사이 없이 움직이고 있는 발, 발, 발
안 보이는 삶도 꽃 일부가 되어
향기를 둥글게 날려 보낸다.
여기저기 그들만이 알게 자리를 잡고
한 동작으로 벌이는 연꽃들의 춤
보는 사람들마저 모두 숨이 멎는다.
- 졸시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전문

 남자라면 당연히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합니다. 아름다운 여인은 꽃을 보는 듯이 눈이 부십니다. 더욱 아름다운 것은, 춤추고 노래하는 여인들의 모습입니다. 땅 위의 여인들을 아름다운 ‘장미’에 비유한다면, 물속에서 멋지게 율동을 보이는 여인들은 아름다운 ‘연꽃’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 춤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둥근 향기까지 맡게 만듭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하여 안 보이는 곳에서 큰 노력을 기울입니다. 마치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을 하는 여인이 물 밑에서 쉴 사이 없이 발을 움직이고 있듯이’ 말입니다. 그렇기에 더욱 여인들이 사랑스럽습니다.
 아무리 현자라고 해도 아름다운 여인만큼 사랑받기는 어렵습니다. ‘언감생심’(焉敢生心)이라고, 감히 그런 마음을 품을 수도 없겠지요. 그래서 공자도 ‘오미견호덕 여호색자야’(吾未見好德 如好色者也), 즉 ‘나는 아직껏 현자 좋아하기를 미인 좋아하듯이 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이는 ‘위’(衛)나라 ‘영공’(靈公)에게 푸대접받았을 때, 공자가 한 말입니다. 이 말은, ‘나(공자)를 좋아하지 않고 미인만 좋아한다.’라는 불평의 의미로 쓰였습니다.(글: 김 재 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