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라
공자의 여러 제자 중에 ‘안연’을 ‘오른팔’이라고 말한다면 ‘왼팔’은 당연히 ‘자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로’(子路)는 성이 ‘중’(仲)이고 이름이 ‘유’(由)입니다. 그래서 공자가 ‘자로’를 언제나 ‘유야!’라고 불렀습니다. ‘자로’는 바로 그의 자(字)입니다.
‘자로’는 공자보다 9살이 아래였답니다. 그는 노나라 ‘변’(卞) 지방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의 산동성 사수현(泗水縣) 천림(泉林)이라고 합니다. 그는 사후 739년에 ‘위후’(衛候)가 되었고, 1009년인 송나라 때에는 ‘하내후’(河內候)가 되었으며, 그 뒤에 ‘위공’(衛公)으로 추봉되었습니다.
‘자로’는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그는 공자의 신변 보호를 자처했고, 언제나 스승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는 몹시 경솔하고 예의를 모르는 사람이었다고도 합니다. 사람이 어찌 좋은 면만 지닐 수 있겠습니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경솔한 면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순진함과 솔직함이 더 돋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우선 ‘논어’에 있는 이야기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공자가 ‘안연’에게 말했다. “인정하여 써 주면 나아가서 행동하고 버려서 써 주지 아니하면 물러나서 숨는다고 한 말은, 오직 나와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말을 옆에서 듣고, ‘자로’가 말했다. “선생님께서 삼군을 통솔하신다면 누구와 더불어 하시겠습니까?”자로의 말을 듣고, 공자가 말했다. “맨주먹으로 호랑이와 싸우고 맨발로 강을 건너려고 하다가 죽는 일이 있어도 뉘우침이 없는 그런 무모한 사람과는 함께하지 않겠다. 어려운 일에 당하여는 반드시 두려워하고 미리 계획을 세워서 성공을 이루는 사람과 함께 하겠다.”(자위안연왈 용지즉행 사지즉장 유아여이 유시부. 자로왈 자 행삼군 즉수여. 자왈 포호빙하 사이무회자 오불여야 필야림사이구 호모이성자야.: 子謂顔淵曰 用之則行 舍之則藏 唯我與爾 有是夫. 子路曰 子 行三軍 則誰與. 子曰 暴虎馮河 死而無悔者 吾不與也 必也臨事而懼 好謨而成者也.) 【논어 7-10】
위의 이야기에서 ‘행’(行)은 ‘도를 널리 행하는 것’을 말하고, ‘사’(舍)는 ‘사’(捨)와 같은 뜻으로 ‘못쓰게 된 것을 손으로 집어 버린다.’를 가리킵니다. 또, ‘장’(藏)은 ‘몸을 숨김’, 즉 ‘도를 가슴속에 간직하고 수양한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爾)는 ‘여’(汝)와 같은 뜻으로 ‘너, 당신’을 나타냅니다. 2인칭 대명사입니다. ‘삼군’(三軍)의 규모는, ‘일군’(一軍)이 대략 1만2천5백 명이므로, 그 수가 3만7천5백 명 정도가 됩니다. 대국이라야 낼 수 있는 대군이지요. 또한, ‘포호’(暴虎)는 ‘호랑이를 맨주먹으로 때리는 것’을 뜻합니다. ‘포’(暴)는 ‘박’(博)의 뜻으로 ‘싸우다, 잡다, 두드리다, 때리다’ 등을 나타냅니다. 또, ‘빙’(馮)은 ‘능’(凌)의 뜻으로 ‘맨발로 강을 건너가는 것’을 이릅니다. 물론, ‘하’(河)는 ‘황하’(黃河)를 뜻한답니다.
이는, 우리에게 ‘매사에 진퇴를 분명히 하고 무모한 동기보다는, 신중한 계획이 중요하다.’라는 교훈을 줍니다. 아무튼 여기에서 공자는 ‘안연’을 아주 높이 평가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자로’는 샘이 났겠지요. 그래서 ‘자로’는, 만일에 공자가 삼군을 통솔하게 된다면 그때에는 반드시 자기를 데려가리라는 확신으로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공자는, ‘그런 필부의 용기를 나는 취하지 않겠다.’라고, ‘자로’에게 면박해주었습니다. 그렇다고 ‘자로’가 샐쭉거리거나 뾰로통하게 되었을까요? 천만에, ‘자로’는 그저 뒤통수를 긁으며 물러났을 성싶습니다.
자로는 거친 사람입니다. 공자도 그를 가리켜서 ‘유는 거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거칠었기에 그런 말이 지금까지 전하여지고 있는지, 그 이야기를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마천의 ‘사기’ 중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는, 공자와 ‘자로’의 첫 대면 장면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자로’는 본성이 야인 기질을 지니고 있어서 거칠었다. 용감하고 힘쓰는 일을 좋아하였다. 그 마음이 강직하며 직설적으로 반박하기를 즐겼다. 수탉의 꼬리 깃털을 머리에 꽂고 산돼지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를 허리에 차고 다녔다. 그는 공자를 만나자마자 깔보았으며 때리려고 했다. 공자는 ‘자로’를 예로써 대하며 살살 달래어서 이끌었다. 후에 자로는 유복을 입고 폐백을 드리며 충절을 맹세한 후에 문인들을 통해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중니제자열전 중】
이미 앞에서 말한 바대로, ‘자로’는 ‘변’(卞) 땅의 사람이었습니다. ‘변’ 지방이라고 말한 ‘천림’(泉林)은, 그 당시에 노(魯)나라와 위(衛)나라 사이에 있는 새 개간지였다고 합니다. 거친 땅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자로’는 ‘야인’(野人)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야인’이란, ‘사’(士)가 아닌, 그 말 그대로 성 밖의 들에 사는 ‘방외인’(方外人)이었습니다.
그러면 ‘공자가어’(孔子家語)에 기술되어 있는 ‘자로초견’(子路初見)을 한 번 보기로 할까요?
공자가 ‘자로’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자로가 공자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긴 칼을 좋아한다.”
공자가 다시 말했습니다.
“나는 그것을 묻는 게 아니다. 단지 그대의 능한 바에다가 학문을 더하게 되면 누가 그대를 따라올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런 점을 물었다.”
‘자로’가 말했습니다.
“학문이라는 게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그 말을 듣고, 공자가 말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임금도 간하는 신하가 없으면 들은 바를 잃어버리기가 쉽고, 선비는 가르쳐 주는 친구가 없으면 들은 바를 잊어버리기가 쉽다. 그러므로 길이 들지 않은 말을 몰 때는 채찍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고, 활을 당길 때는 이미 두 번 다시 당길 수가 없다. 나무도 먹줄이 닿아야 곧아지고, 사람은 비판받아야 비로소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 배움을 얻고 물음을 소중하게 안다면 누구인들 나쁜 일을 하겠는가. 만일에 어진 사람을 헐뜯거나 선비를 미워한다면, 반드시 화를 면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사나이라면 학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말을 듣고도, ‘자로’는 굴복하지 않고 거칠게 대들었습니다.
“남쪽 산에 대나무가 있는데, 그 대나무를 잡아 주지 않아도 저절로 반듯하게 자란다. 그리고 그 대나무를 잘라서 화살을 만들면 가죽으로 된 과녁을 뚫을 수 있다. 이렇게 바꾸어서 생각한다면, 꼭 학문을 해야 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공자가 부드럽게 타이르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대나무의 한쪽에 깃을 꽂고 다른 한쪽에 촉을 박는다면 그 화살이 가벼움과 날카로움이 더해져서 그 가죽을 더 깊게 뚫지 않겠는가?”
그 말을 들은 후에, ‘자로’는 공손히 두 번 절하고 가르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뒤부터 ‘자로’는 공자의 호위무사를 자처하였지요. 누가 공자의 험담이라도 하면 그는 두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여러 사람 앞에서 말했습니다.
“내가 ‘유’를 얻은 뒤로는 나를 욕하는 자가 없어졌다.”
한번은 ‘자로’가 군복 차림으로 공자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시퍼런 칼을 뽑아 들고 춤추며 물었습니다.
“옛날에 군자도 칼을 가지고 자기 몸을 스스로 호위했습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옛날의 군자는 ‘충성’으로 무기를 삼고 ‘인’(仁)으로 몸을 호위함으로써 담장 밖을 나가지 않고서도 일천 리 밖의 일을 알았다고 한다. 착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충성’으로 감화시키고 거친 사람이 있으면 ‘어진 마음’으로 복종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니 칼을 무엇에 쓰겠느냐?”
‘자로’가 그 말을 듣고 말했습니다.
“제가 오늘날 이런 말씀을 들었으니 옷자락을 움켜쥐고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또 한 번은, ‘자로’가 옷차림을 멋지게 하고 거드름을 피우며 공자를 찾아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공자가 말했습니다.
“유야! 어찌 이렇게 거만하냐? 저 강물을 보아라. 처음으로 ‘민산’(岷山)에서 나올 때는 그 근원이 겨우 술잔에 넘칠 만한 물줄기였지만 저 강나루에 내려와서는 배를 타지 않고 또 바람을 피하지 않고서는 건너지 못할 만큼 큰 강이 되었다. 이는, 아래로 흘러 내려갈수록 물이 많아지는 까닭이 아니겠느냐? 이와 마찬가지로 너도, 좋은 의복을 차려입고 얼굴 모습을 두텁게 갖는다면 천하에 그 누가 너에게 그르다는 말로 충고해 주기를 즐겨 하겠느냐?”
‘자로’는 공자의 말을 듣고서 물러 나온 후에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들어갔는데 얼굴빛이 태연했습니다. 그러자, 공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야! 너는 기억해 두어라. 내가 너에게 말하겠다. 말만 흥청거리는 자는 빛뿐이고 실상은 없으며, 행동을 과단성 있게 하는 자는 자랑이 지나치게 된다. 대체 겉으로 아는 체하고 능한 체하는 자는 모두 소인이다. 그런 까닭에 군자가 아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말의 요령이고, 능하지 못한 것을 능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은 행실이 지극하다고 말할 수 있다. 말을 요령 있게 하면 지혜가 있음이요, 행실을 지극히 하면 어짊을 이름이니, 어질고 지혜가 있다면 무엇이 부족할 게 있겠느냐?”
그리고 또 어느 때,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여기 한 사람이 있는데 베옷을 입고 옥을 품속에 품고 있다면,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공자가 ‘자로’에게 말했습니다.
“나라에 도가 없다면 숨기는 게 옳겠지만, 나라에 도가 있다면 문채 나는 옷을 입고 옥을 쥐어도 옳다고 하겠다.”
공자는 말년에 실의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숨을 쉬며 다음과 같이 혼잣말을 뇌까렸습니다.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에 둥둥 떠 있고 싶다. 이럴 때, 나를 따르는 자는 ‘유’뿐이겠지?”
이 말을 옆에서 듣고, ‘자로’는 기뻐서 입이 크게 벌어졌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공자가 말했습니다.
“유가 용맹을 좋아하기는 나를 뛰어넘지만, 사리를 헤아릴 줄을 아주 모른다.”
앞에서 ‘바다에 둥둥 떠 있고 싶다.’라는 말이 ‘승부부우해’(乘桴浮于海)입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요? 공자의 도가 행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속에 공자의 한탄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로’는 자기를 데려가겠다는 말에 그저 좋아하기만 했습니다. 도가 행해지지 않는 절망적인 현실을 아랑곳하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고, 어찌 공자는 역정이 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사리를 헤아릴 줄 모른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의역이고 원문은 ‘무소취재’(無所取材)입니다. 이 말을 글자 그대로 직역하면, ‘뗏목의 재목을 구할 수 없다.’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용기는 가상하지만, 뗏목도 없는 데 가기는 뭘 가냐!’라고, 꾸짖는 말이지요.
‘자로’에게서 용맹을 뺀다면 남는 게 별로 없습니다. 또, 그에 대한 말이 ‘논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 “군자도 용기를 숭상합니까?” 공자가 ‘자로’에게 말했다. “군자는 정의를 가장 높이 숭상해야 한다. 군자가 용기만 있고 정의가 없으면 난동을 부리게 되고, 소인이 용기만 있고 정의가 없으면 도둑질하게 된다.”(자로왈 군자 상용호. 자왈 군자 의이위상 군자유용이무의 위란 소인유용이무의 위도.:子路曰 君子 尙勇乎. 子曰 君子 義以爲上 君子有勇而無義 爲亂 小人有勇而無義 爲盜.)【논어 17-23】
‘자로’는 그야말로 우직한 질문을 했습니다. 자기의 용맹함을 인정받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공자는 ‘정의’가 없는 용기는 그저 ‘난동을 부리게 될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말하자면, ‘용맹’보다 ‘정의’가 더욱 소중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정의로운 용맹’을 지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순순히 물러날 ‘자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자로는 ‘좋은 말을 들으면 곧바로 행동에 옮겨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공자는 그 말에 간단히 ‘부형이 계시니, 어찌 듣고 바로 행하겠느냐?’라고 답했습니다. 이는, 공자가 성급한 ‘자로’를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혼자 생각하여 모든 일을 처리하지 말고, 어른들과 상의함으로써 실수가 없도록 일을 처리하라는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논어’의 ‘선진’ 편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자로’는 용감했고 우직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무척이나 고집이 세기 마련입니다. 공자가 ‘담’(郯)나라에 갈 때의 일이었습니다. ‘담’나라는 ‘소호’(少昊)의 후예가 세운 나라랍니다. 아주 조그만 나라였습니다. 공자는 길에서 ‘정자’(程子)를 만났습니다. 이 사람은 춘추시대 진(秦)나라 사람인데 자기 스스로 ‘정자’라고 일컬었답니다. 그는 박학하였으므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 후에 그는 이름을 ‘자화자’(子華子)라고 고쳤습니다.
공자가 담나라로 가는 도중에 그를 만났습니다. 공자는 그를 만나서 해가 지도록 시화(詩話)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공자는, 이야기를 나누는 중간에 자로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유야, 저 묶어 놓은 비단을 선생께 드려라.”
그러나 ‘자로’는 불쾌한 빛으로 공자에게 말했습니다.
“군자란, 선비로서 중간에 소개하는 사람이 없이 사귀거나 여자로서 중매 없이 시집을 가는 사람과는 교제를 아니 한다고 들었습니다.”
공자는 얼마 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먼저와 같이 말했습니다. 이번에도 ‘자로’는 고집스럽게 먼저 대답대로 말하고 공자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자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야, 들어 보아라. ‘시’에 말하지 않았더냐? ‘아름다운 한 사람이 있으니 그 눈매 서늘했네. 어쩌다가 잠깐 만난다 해도 나의 소원은 흡족하겠네.’라고. 이제 ‘정자’로 말하면 천하의 어진 선비이다. 이 사람에게 선물을 주지 않는다면 몸을 마칠 때까지 볼 수가 없게 된다. 소자야! 어서 시키는 대로 하여라.”
그런데 공자가 인용한 ‘시’는 어떤 걸까요? 이 시는 공자가 수집한 ‘노래의 모음’ 속에 들어 있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시경’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자세히 말하면, ‘정풍’(鄭風) 중의 ‘야유만초’(野有蔓艸)라는 제목의 노래입니다. 그러면 그 한 절을 만나 볼까요?
야유만초 野有蔓艸 들에는 치렁치렁 넝쿨이 벋고
영로단혜 零露漙兮 잎에는 구슬인 양 이슬 맺히네
유미일인 有美一人 아름다움을 지닌 오직 한 사람
청양완혜 淸揚婉兮 드러내는 눈짓 그 은근함이여
해후상우 邂逅相遇 어쩌다 한 번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적아원혜 適我願兮 내 평생소원은 풀리겠다마는.
이는 ‘아름다운 여인을 그리워하는 노래’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만초’(蔓艸)는 ‘넝쿨이 있는 풀’을 말하고, ‘청양’(淸揚)은 ‘눈썹과 눈 사이’를 이릅니다. 그리고 ‘완’(婉)은 ‘은근한 모양’을 나타내고 ‘적’(適)은 ‘알맞음’을 가리킵니다. 나는 이 ‘시’를 읽다가 문득 ‘어진 이에 대해 어질게 여기기를 아름다운 여인을 즐기듯이 한다.’라는, ‘현현역색’(賢賢易色)을 떠올렸습니다. 이 말은 ‘선을 선하게 여김으로써 현덕을 존중하기를 여색을 좋아하듯이 한다.’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모든 남자가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듯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어진 사람을 좋아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밝아지겠습니까?
공자가 시키는 대로, ‘자로’가 따랐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공자가 그렇게까지 이야기했으니, 아무리 고집스러운 ‘자로’라고 할지라도 그 말을 듣지 않을 수는 없었겠지요.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노나라 ‘환공’의 사당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공자는 그곳에서 기울어져 있는 그릇 하나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사당을 지키는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그릇입니까?”
사당을 지키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이것은 ‘유좌’(宥坐)라는 그릇입니다.”
그 말을 듣고, 공자가 말했습니다.
“유좌라는 그릇은 속을 비워 두면 기울어지고 중간쯤 채워 놓으면 반듯하게 되며 가득 채우면 자빠지게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밝은 임금은 이 그릇이 아주 정성스럽다고 하여 언제든지 자기가 앉아 있는 곁에 두었다고 합니다.”
공자는 말을 마치자, 제자들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험 삼아서 물을 부어 보아라.”
제자들이 물을 떠다가 부었더니, 물이 중간쯤 차게 되자 그릇이 반듯하게 섰습니다. 그러나 가득 차게 되니까 곧 자빠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공자가 탄식했습니다.
“아! 세상에 어떤 물건을 막론하고 가득 차고서 엎어지지 않는 게 있겠느냐?”
이때, ‘자로’가 앞으로 나서며 물었습니다.
“가득 차고서 그대로 있을 수는 없습니까?”
공자가 ‘자로’에게 말했습니다.
“왜 없겠느냐? 아무리 총명하고 지혜가 넘친다고 하더라도 자기 몸을 지키는 데는 어리석은 듯이 해야 하고, 아무리 공로를 천하에 밝게 드러냈다고 할지라도 자기 몸을 지키는 데는 양보해야 하며, 아무리 용력이 이 세상에 두루 떨친다고 하더라도 자기 몸을 지키는 데는 두려워하는 것처럼 해야 하고, 아무리 재산을 그득 차지했다고 할지라도 자기 몸을 지키는 데는 검소하게 해야 한다. 이것들이 이른바 자기 몸을 덜어 주고 바르게 해주는 도리이다.”
공자가 그러했듯이, 자로도 군자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틈이 있을 적마다 ‘자로’에게 ‘군자와 소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습니다.
공자가 ‘자로’에게 말했습니다.
“어른을 뵈었을 때 어른의 말이 끝나기 전에는 아무리 갑자기 바람과 비가 몰아친다고 하여도 자리를 떠나면 안 된다. 그런 까닭으로 군자는 자기의 능한 바를 가지고 남을 공경하며 소인은 이와 반대로 한다.”
공자는 잠깐 말을 끝냈다가 다시 이었습니다.
“군자는 자기 마음으로 귀와 눈을 인도하며 의리를 세워서 용맹스러운 일을 한다. 그렇지만, 소인은 이와 반대로 귀와 눈으로 마음을 인도하여 공손하지 못한 태도를 용맹한 일로 안다. 그렇기에 나는 남에게 배척당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을 원망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를 스승으로 삼아도 좋다.”
노나라에는 검소하고 인색한 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왓장으로 만든 솥에 밥을 지어 먹으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맛이 좋다고 하고는 흙으로 만든 ‘자배기’에 밥을 담아서 공자에게 건네었습니다. 공자는 그 밥을 받아서 먹고는 즐거워하기를 마치 큰 소라도 한 마리 받은 듯이 하였습니다. 그 모양을 옆에서 보고, ‘자로’가 물었습니다.
“‘흙으로 만든 자배기’는 추한 그릇입니다. 그리고 ‘기와 솥에 지은 밥’은 아주 보잘것없는 음식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어찌 이다지도 기뻐하십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대체로 간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그 임금을 생각하고, 아름다운 음식을 먹는 자는 그 부모를 생각하는 법이다. 내가 지금 기뻐하는 것은, 그 음식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의 생각하는 바가 후하기 때문이다.”
‘자로’는 궁금한 일이 있으면 언제나 불쑥 묻곤 하였던 모양입니다. 그는 또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강함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공자가 말했습니다.
“남방에서 말하는 강함인가, 북방에서 말하는 강함인가? 아니면 너 자신이 강하게 하여야 할 바를 말하는가? 너그럽고 유순히 하여 가르쳐 주고 무도함에 보복하지 않는 것은 남방의 강함이다. 군자는 여기에 처한다. 병기와 갑옷을 깔고 자며 죽어도 싫지 않음은 북방의 강함이다. 강한 자는 여기에 속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온순하지만 흐르지 않으니, 강하다 꿋꿋함이여! 또, 중립하여 치우치지 않으니, 강하다 꿋꿋함이여!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궁할 적의 의지를 변치 않으니, 강하다 꿋꿋함이여!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죽음에 이르러도 지조를 변치 않으니, 강하다 꿋꿋함이여!”
‘용기와 강함’이라고 한다면 ‘자로’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었기에, 공자는 언제나 ‘자로’에게 신중한 언행으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자로’ 또한 그 가르침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공자는, 가끔 ‘자로’에게 면박을 주기는 했으나, 그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공자는 ‘자로’에게 다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유야! 내가 너에게 ‘앎’을 가르쳐 주마! 아는 것을 안다고 하며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게 바로 ‘앎’이다.”
내 귀에도 이 말이 부드럽게 들립니다. 마치 제비가 지저귀는 듯합니다. 그러니 공자에게 정이 안 가려고 해야 안 갈 수가 없습니다.
공자가 음악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앞에서 했지요? 그러니 ‘자로’도 자연히 음악에 관하여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 무지막지한 ‘자로’가 비파를 탔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 이야기가 ‘논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유가 어찌 우리 집에서 비파를 타는가?”그 말을 듣고, 문인들이 ‘자로’를 공경하지 않았다. 그러자, 공자는 다시 말했다. “유는 당에 올랐다. 실에 들지 못했을 뿐.”(자왈 유지슬 해위어구지문. 문인 불경자로. 자왈 유야 승당의 미입어실야.: 子曰 由之瑟 奚爲於丘之門. 門人 不敬子路. 子曰 由也 升堂矣 未入於室也.)【논어 11-14】
여기에서 ‘슬’(瑟)은 ‘25현의 악기’를 말한다는데, 보통은 ‘비파’를 뜻하고 ‘큰 거문고’를 가리킨다고도 말합니다. 그리고 ‘위’(爲)는 ‘슬을 타는 것’을 나타내지요. 또, ‘구지문’(丘之門)에서 ‘구’는 ‘공자’를 가리킵니다. ‘구’(丘)가 ‘공자의 이름’이라는 사실은 잊지 않았겠지요? 그래서 ‘구지문’은 ‘공자의 집’을 말합니다.
또, ‘당’(堂)은 ‘집의 정면에 위치하고 손님을 맞는 방’이며 ‘실’(室)은 ‘집의 안쪽에 깊숙이 있는 방’입니다. 즉, ‘당’과 ‘실’은 그 이룸의 정도가 얕음과 깊음을 비유한 말이지요.
악기를 다루는 데에는 그 사람의 성품이 모두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자로’가 연주하는 소리도 난폭하고 중화(中和)를 잃었을 게 분명합니다. 그렇기에 공자는 ‘어찌 그런 비파를 내 집에서 타는가?’라고, ‘자로’를 나무랐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난 후부터, 그곳의 사람들이 달라졌습니다. 자로를 대하는 태도가 그러하였지요. 아마도 스승에게 ‘꾸지람이나 듣는 사람’이라고 가볍게 보는 느낌을 받았던 듯싶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자로를 가리켜서 ‘아직 실에는 들지 못했지만, 당에는 올랐다.’라고 인정하는 말을 했습니다. ‘당’(堂)은 ‘악에 대한 기틀’을 말하고, ‘실’(室)은 ‘악에 대한 정미한 경지’를 말한다고도 합니다.
‘자로’는 공자에게 가르침을 받기 시작하면서 그 삶의 태도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논어’의 ‘공야장’ 편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로는 좋은 가르침을 듣고 아직 미처 실행하지 못했으면, 오직 새로 좋은 가르침을 듣게 될까 보아서 걱정하였다.’
이는, 공자의 말도 아니고 ‘자로’의 말도 아닙니다. 누구인가 옆에 있던 사람이 ‘자로’의 그 성실한 모습을 보고 들려준 말입니다. ‘자로’는 우직함과 진실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서운 실천력도 가지고 있었지요. 지식은 알기만 하고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로’는 이런 면모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았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말했습니다.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여우나 담비 털옷을 입은 사람과 함께 서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사람은 오직 ‘유’뿐이겠다. ‘시’에 이르기를, ‘탐심만 내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있겠는가.’란 말이 있다.”
여기에서 ‘탐심만 내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있겠는가.’라는 구절은, ‘시’의 ‘불기불구 하용부장’(不忮不求 何用不臧)을 가리킵니다. 이는, 지금 우리가 보는 ‘시경’ 안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즉, ‘국풍’ 중 ‘패풍’(邶風)의 ‘웅치’(雄雉)라는 가사이지요. ‘웅치’는 ‘장끼’를 말합니다. 그러면 앞의 ‘문장’이 들어 있는 노래 한 절을 볼까요.
백이군자 百爾君子 세상의 남정네들
부지덕행 不知德行 정을 어이 모르는지
불기불구 不忮不求 탐심만 곧 아니라면
하용부장 何用不臧 무슨 일이 있으랴만.
이는, ‘멀리 가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원망하는 노래’랍니다. 여기에서 ‘군자’라는 말은 ‘일반적인 남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덕행’은 ‘정이 있는 행동’을 말하지요. 또, ‘기’(忮)는 ‘해침’을 뜻하고 ‘구’(求)는 ‘탐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장’(臧)은 ‘좋음’을 가리킵니다.
‘자로’는 공자의 말을 듣고, 이 시의 그 두 구(句)를 되풀이하여 외우려고 하였습니다. 그 모양을 보고, 공자는 말했지요.
“이 시의 도리만으로 어떻게 선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공자의 말은, ‘탐심을 내지 않음은 물론이고 선을 이루려고 한다면 적극적으로 정진해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는 모두 ‘논어’의 ‘자한’ 편에 실려 있습니다.
어느 날, 자로는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한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그는 날이 새면 일어나고 밤이 되면 일찍 잠을 자며 밭을 갈기도 하고 곡식을 심기도 합니다. 손과 발이 부르트도록 그는 일해서 부모를 봉양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건만 그를 효자라고 일컫지 않으니, 이는 어째서 그러합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혹 자기 몸을 공경할 줄 모르거나 말을 순하게 할 줄 모르거나 얼굴빛을 기쁘게 가질 줄 모르거나 할 테지.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남이나 나나 다 마찬가지이니 부디 너는 속이지 마라.’라고 하였으니, 이제 그 사람이 힘을 다해서 그 부모를 봉양하는데, 이 세 가지가 하나도 빠짐이 없다면 어찌 효자라고 하지 않겠느냐?”
그 후, ‘자로’가 공자를 만나서 말했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자면 자리를 가리지 않고 쉬게 되며, 집이 가난하고 부모가 늙으면 녹의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고 벼슬하게 됩니다. 옛날에 제가 양친을 섬길 적에 때마다 나물밥과 아욱국을 먹으면서 부모를 위해 백 리 밖의 먼 길에 가서 쌀을 얻어 가지고 왔습니다. 그 뒤에 부모님께서 돌아가시자, 초나라로 유세(遊說)하러 갈 때 따르는 수레가 일백 채나 되며 쌓아놓은 곡식이 일만 섬이나 되었습니다. 또, 자리를 겹으로 깔고 솥은 여러 개를 벌여 놓은 채로 먹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나물밥을 먹어 가며 부모를 위해 백 리 밖에 가서 쌀을 구하여 오고 싶어도 다시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으니 마른 물고기를 새끼로 꾄다면 얼마 동안이나 이 물고기가 썩지 않겠습니까? 양친께서 수를 누리셨다고 해도 그것은 잠깐 지나가는 동안이어서 마치 천리마가 창문 틈으로 지나가듯 그 속도가 빠를 터입니다.”
듣고 나자, 공자가 말했습니다.
“‘유’는 부모를 섬기는 데 가히 살아서도 힘을 극진히 하였고 돌아가신 후에도 생각을 극진히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말 한마디로, ‘자로’는 공자가 인정해 주는 효자가 되었습니다.
어느 때인가, ‘자로’가 자기 누이의 상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자로’는 복을 벗을 때가 되었어도 벗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왜 복을 벗지 않느냐?”
‘자로’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형제가 적기 때문에 차마 복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자가 다시 말했습니다.
“저 길에 걸어서 다니는 사람들에게도 모두 차마 못 한다는 마음은 있는 법이다. 그런 까닭에 선왕이 예법을 만들 때는 너무 지나친 자를 낮추어서 맞게 해주고 못 미치는 자는 바라보고 따라가도록 만들었다.”
그 말을 듣고, ‘자로’는 곧 누이의 복을 벗었다고 합니다.
공자에게는 ‘원양’(原壤)이라는 못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가 모친상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공자는 관 하나를 부조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자 ‘자로’가 물었습니다.
“옛날 제가 선생님께 듣자오니 ‘자기만 못한 자와는 벗을 아니하고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라고 하셨는데, 이제 선생님께서는 이 말씀을 잊어버리신 게 아닌지요? 이제 하신다는 부조는 그만두시는 게 어떠하십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대체로 백성이 죽었어도 엉금엉금 기어가서 구원하는 법인데, 하물며 옛 친구이겠는가? 친구가 아닐지라도 나는 가 보아야 하겠다.”
말을 마치고, 공자는 관을 만들어서 원양의 집에 부조를 보냈습니다. ‘원양’은 그 관을 받아놓고 관 위에 올라앉아서 말했습니다.
“내가 오랫동안 음악을 버려두었다.”
그는 드디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너구리 머리는 아롱거리고 네 손을 잡으니 정성스러운 듯-.”
‘원양’이 이처럼 노래 부르는 모양을 공자는 숨어서 보고는 못 들은 체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자로’가 물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절개를 굽히기가 여기에 이르셨으니, 너무 지나치신 게 아니십니까? 그만두실 수는 없으십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내가 듣기론 친하다는 것은 친하다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말이고, 옛 친구라는 것은 그 옛일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머리가 갸우뚱해집니다. 친하다는 마음을 잃지 않거나 옛일을 잊지 않는 마음은 귀중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의리라고는 눈을 씻고 보아도 없는,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을 그런 마음 때문에 가까이할 필요가 있을까요? ‘자로’의 말처럼, 그 또한 지나친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머리로 사람을 사랑하는 경우이고, 공자는 가슴으로 사람을 사랑했지요. 그럼, 여기에서 ‘자로’의 이야기도 일단 끝내기로 하고 다시 나의 시 한 편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바위의 움푹 팬 자리에
빗물이 고여 있고,
곧은 소나무가 고달픈 그림자를 벋어서
그 물에 손을 씻는다.
세상을 안은 눈빛이 잔잔하다.
내 호기심이 소나무 옆으로 다가가서
그 그림자의 손을 잡아당기자,
산의 뿌리까지 힘없이 딸려 올라오고,
빈 하늘만 몸을 떤다.
- 졸시 ‘손 씻은 하늘’ 전문
‘곧은 소나무’를 보면 ‘자로’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 소나무 잎이 뾰족뾰족한 것이 마치 ‘자로’의 ‘거친 성미’를 나타내는 성싶습니다. 그는, 용감하고 힘쓰는 일을 좋아하였으며 직설적이고 반박하기를 즐겼으나, 그보다는 순진함과 솔직함이 돋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곧은 소나무’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그가 너무 용기를 숭상하려고 하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군자는 정의를 가장 높이 숭상해야 한다. 군자가 용기만 있고 정의가 없으면 난동을 부리게 되고, 소인이 용기만 있고 정의가 없으면 도둑질하게 된다.”
그래서 ‘자로’는 그 가르침에 따라 정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곧은 소나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하늘을 바라보아도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을 이릅니다. 어느 날, 공자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유야, 내가 너에게 앎을 가르쳐 주마! 아는 것을 안다고 하며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게 바로 앎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로’는 공자에게 가르침을 받기 시작하면서 그 삶의 태도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뿌리가 깊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결과로 마침내 ‘자로’는, ‘좋은 가르침을 듣고 아직 미처 실행하지 못했으면, 오직 새로 가르침을 듣게 될까 보아서 걱정’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앞에서 ‘빈 하늘’이 몸을 떨 수밖에 없습니다.(글: 김 재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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