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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하되, 상하기에 이르면 안 된다
노래는 살아가는 데 참으로 필요합니다. 우리의 기분을 힘차게 일으키는 힘이 노래에 있습니다. 밭에서 힘든 일을 할 때에도 노래를 흥얼거리면 절로 힘이 막 솟아납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노래를 자주 들으면 마음이 맑아지고 착해지는 듯도 합니다.
공자도 노래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압니까? 좋아했어도 아주 좋아했지요. 그 점잖은 공자가 노래를 그토록 좋아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고요? 이제부터는 믿기 바랍니다. 그 당시에도 여러 나라마다 유행하는 노래들이 많이 있었답니다. ‘민요’(民謠)입니다. ‘민요’란, ‘민중 속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여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는, 민중의 생활감정이 소박하게 담긴 노래를 통틀어서 이르는 말’입니다. 공자가 노래를 얼마나 좋아했는지에 대한 이이야기가 ‘논어’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공자가 다른 사람과 함께 노래를 부를 때, 그가 노래를 잘하면 다시 부르게 한 뒤에 따라 불렀다.(자 여인가이선 필사반지 이후화지: 子 與人歌而善 必使反之 而後和之)【논어 7-31】
여기에서 말하는 ‘선’(善)은 ‘노래의 가락이 잘 맞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노래를 잘하는 것’을 이르지요. 그리고 ‘반’(反)은 ‘반복의 뜻’으로 ‘다시 부르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또, ‘화’(和)는 ‘화답하는 것’인데, ‘따라 부름’을 의미합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논어’의 ‘술이편’에는 ‘공자가 초상집에 가서 곡을 한 날에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는, ‘초상집에 가서 곡을 한 날 외에는 매일 노래를 불렀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자, 이만하면 공자가 얼마나 노래를 좋아하였는지에 대하여 짐작할 수 있겠지요?
이렇듯 노래를 좋아하는 공자였기에, 그는 그 당시에 중국의 각 지방에서 유행하고 있던 노래들을 모았습니다. 이 ‘노래 모음’이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에 ‘곡조’는 없어지고 ‘가사’만 겨우 남게 되었습니다. 그 ‘가사’를 ‘시’(詩)라고 하였으며, 그게 지금까지 전해져서 우리는 ‘시경’(詩經)이라는 이름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논어’에서 말하는 이 ‘시’(詩)는, ‘곡조’와 ‘가사’가 모두 있는 ‘노래’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옳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적이 있지만, 수집된 노래를 ‘풍’(風)이라고 합니다. ‘풍’은 곧 ‘민요’입니다. 그러므로 각 나라의 민요를 ‘국풍’(國風)이라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에 유행하던 민요들을 지금 우리가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이 모두가, 노래를 아주 좋아한 공자 덕택입니다. 이 한 가지로도 공자는 칭송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시경’은 ‘중국의 고대가요선집’이라는 사실을 이제 확실히 알게 되었으리라고 믿습니다. ‘시경’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겠습니다.
이 노래 가사들은 크게 ‘풍’(風)과 ‘아’(雅)와 ‘송’(頌)이라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풍’은 주(周)나라 제후국들의 ‘민요’들이고, ‘아’는 ‘귀족의 노래’이며 ‘송’은 ‘종묘제례악’이지요. 전에도 이야기했듯이, ‘풍’에는 15개국의 노래가 실려 있는데 모두 160 수가 전합니다. 그리고 ‘아’는 ‘소아’(小雅)와 ‘대아’(大雅)로 나누어지는데 105 수에 이르며, ‘송’은 ‘주송’(周頌)과 ‘노송’(魯頌)과 ‘상송’(商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40 수에 달합니다. 이 시들을 모두 합치면 305 수가 되지요.
‘시’(詩)라고 할 때에는, 역시 ‘국풍’을 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가사’보다도 ‘곡조’가 노래에서는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공자를 생각하고 ‘시경’을 읽을 때는, 반드시 그 ‘가사’보다도 그 ‘곡조’를 먼저 머리에 그려 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도 그 가사보다 그 곡조가 좋아서 애창하고 있는 노래가 많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시경’의 그 가사만 볼 수 있고 그 곡조를 모릅니다.
더욱이 사마천의 ‘사기’ 중에서 ‘공자세가’에는 ‘시’에 대하여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왜 이런 왜곡이 있었을까요? 그 내용을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옛날에는 시(詩)가 3,000여 편이었으나, 공자에 이르러서 그 중복된 것을 빼고 예의에 응용할 수 있는 것만 취하였다. 위는 ‘설’(契)과 ‘후직’(后稷)에 관한 ‘시’이고, 중간은 은나라와 주나라의 성대함을 서술한 ‘시’이며, 아래는 유왕(幽王)과 여왕(厲王)의 실정(失政)에 관한 ‘시’에까지 이르렀다. ‘시’의 내용은 ‘임석’(衽席) 등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중략- 이렇게 정리한 305편의 ‘시’에 공자는 모두 곡조를 붙여서 노래로 부름으로써 ‘소’(韶)와 ‘무’(武)와 ‘아’(雅)와 ‘송’(頌)의 음악에 맞추려고 하였다. 예와 악이 이로부터 회복되어 서술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로써 왕도가 갖추어지고 육예(六藝)가 완성되었다.【공자세가 중】
‘설’(契)은 ‘전설 속의 상(商)나라 시조’입니다. 일찍이 우(禹) 임금을 도와서 치수에 공을 세웠으므로 순(舜) 임금에 의하여 사도(司徒)로 임명되어 교화의 일을 주관하였다고 합니다. 또, ‘후직’(后稷)은 ‘주(周)나라의 시조’입니다. 그는 일찍이 요순시대(堯舜時代)에 농관(農官)을 지냈으며 백성들에게 농사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서주시대(西周時代)에 ‘농사를 관장하는 관직’의 이름을 ‘후직’이라고 붙이게 되었답니다.
또한, ‘유왕’(幽王)은 ‘서주(西周)의 마지막 천자’입니다. ‘신후’(申侯)가 견융족(犬戎族)과 연합하여 주(周)나라를 공격함으로써 그는 여산(驪山) 아래에서 피살당했으며 그로써 ‘서주’도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여왕’(厲王)도 서주의 천자(天子)입니다. ‘영이공’(榮夷公)을 중용하였고 ‘위무’(衛巫)로 하여금 백성들을 감시하게 하였습니다. 나라일과 천자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사람을 마구 죽였는데, 백성의 폭동으로 천자의 자리에서 쫓겨났지요.
‘임석’(衽席)이라는 말은 ‘요’나 ‘깔개’ 및 ‘자리’ 또는 상석(床席) 등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리고 ‘소’(韶)는 ‘순’(舜) 임금 때의 ‘악곡 이름’이고, ‘무’(武)는 ‘무왕(武王)을 찬미하는 무악(舞樂)’이랍니다. ‘육예’에 대해서는 잊지 않고 있지요?
‘사기’에서의 옳고 그름은 각기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논어’에 나와 있는 ‘시’(詩)에 대한 이야기들을 만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공이 물었다.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고 돈이 많아도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그 말을 듣고, 공자가 말했다. “괜찮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도를 즐기고 돈이 많으면서도 예를 좋아하느니만 못하다.”자공이 말했다. “시에 이르되, ‘절차탁마’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겠군요.” 그 말이 끝나자, 공자가 말했다. “사야, 비로소 함께 시를 이야기할 수 있구나.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일러주니, 아직 알지 못하는 사실을 알아차리는구나.”(자공왈 빈이무첨 부이무교 하여. 자왈 가야. 미약빈이락 부이호례자야. 자공왈 시운여절여차 여탁여마 기사지위여. 자왈 사야, 시가여언시이의. 고저왕이지래자.: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子貢曰 詩云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논어 1-15】
‘첨’(諂)은 ‘비굴하게 아첨함’을 나타내고, ‘교’(驕)는 ‘남을 업신여김’을 말합니다. 그리고 ‘가야’(可也)는 ‘아직 충분하지 않지만 그런 대로 좋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온화한 부정의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 뒤에는 ‘그러나’라는 말이 나오기 마련이지요.
자공의 말에, 공자는 ‘가난하면서도 도를 즐기고 돈이 많아도 예를 좋아함보다는 못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자공은 시의 ‘여절여차 여탁여마’(如切如嗟 如琢如磨)를 인용했습니다. ‘여절여차 여탁여마’를 줄여서 ‘절차탁마’(切嗟琢磨)라고 합니다.
끝의 ‘고저왕이지래자’에서 ‘왕’(往)은 이미 들려준 말인 ‘빈이락 부이호례’(貧而樂 富而好禮)를 가리키고, ‘내’(來)는 아직 이야기하지 않은 말인 ‘절차탁마’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사’(賜)가 자공의 이름인 줄은 알고 있지요? 자공은 위(衛)나라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위나라의 머나먼 옛 노래(衛風의 詩)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이 시는 ‘기욱’(淇奧)이란 제목의 노래인데, 그 앞의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첨피기욱 瞻彼淇奧 기수라 저 물굽이
녹죽의의 綠竹猗猗 푸른 대가 우거졌구나.
유비군자 有匪君子 문채 나는 그 사람
여절여차 如切如磋 자른 듯 다듬은 듯
여탁여마 如琢如磨 쪼아 놓은 듯 갈아 놓은 듯
이 시 중에서 ‘욱’(奧)은 ‘물굽이’를 말합니다. 그리고 ‘녹죽’(綠竹)은 ‘녹’(王芻- 조개풀?)과 ‘죽’(篇竹- 범부채?)의 2가지 식물로 보기도 하나, ‘푸른 대나무’가 무난할 듯싶습니다. 또, ‘의의’(猗猗)는 ‘아름답게 우거진 모양’을 이르고, ‘유비’(有匪)는, ‘비’의 뜻만 있고 ‘유’는 거의 무의미한 조자(助字)입니다. ‘비’(匪)는 ‘비’(斐)의 가차(假借)로 ‘문채(文采) 있는 모양’을 가리킵니다.
물론, 여기에 소개한 시의 구절은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전체의 시를 읽어 보아도 ‘사랑의 노래’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시경’에는, 위(衛)나라 무공(武公)은 주실동천(周室東遷)에 ‘공’이 있었고 늙도록 나라를 ‘덕’으로 다스렸기에, 이는 그를 ‘찬미한 노래’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공이나 공자까지도 그런 맥락에서 이 ‘시’를 해석하고 있다는 게 놀랍기만 합니다.
그럼, 다른 이야기를 또 만나 볼까요?
세 대부의 집에서 ‘옹’이란 ‘시’를 읊으며 제사를 끝내자, 공자가 말했다. “시에 말하기를 ‘제후는 제사를 돕고 천자는 매우 흐뭇한 표정’이라고 하였거늘, 어찌 저 가사의 노래를 삼가의 사당에서 부를 수 있겠는가?”(삼가자 이옹철 자왈 상유벽공 천자목목 해취어삼가지당.:三家者 以雍徹 子曰 相維辟公 天子穆穆 奚取於三家之堂)【논어 3-2】
여기에서 ‘삼가’(三家)란 어떤 사람들을 지칭하는지는 알고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노나라의 실권자들인 대부 ‘계손’과 ‘숙손’과 ‘맹손’의 세 집안을 가리킵니다. ‘옹’(雍)은 노래(詩)의 제목입니다. 그 시대에는 ‘옹’(雝)이라고 하기도 했나 봅니다. 그 당시에, 천자가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에 이 노래를 부르며 음식을 물렸다고 합니다. ‘상유벽공’(相維辟公)이나 ‘천자목목’(天子穆穆)은 ‘옹’의 구절들입니다. ‘철’(徹)은, ‘철’(撤)과 같은 뜻으로, ‘제사가 끝나고 나서 올린 음식을 물리는 것’을 말합니다. 또, ‘상’(相)은 ‘조’(助)와 같은 뜻으로 ‘제사를 돕는 것’을 이르고, ‘당’(堂)은 ‘제사 지내는 곳’을 나타내며, ‘해’(奚)는 ‘하’(何)와 같은 뜻으로 ‘어떻게’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에 대한 ‘시’인 ‘옹’(雝)의 첫 4구를 살펴보겠습니다.
유래옹옹 有來雝雝 화목한 모습으로 오네.
지지숙숙 至止肅肅 공경하는 모습으로 와서
상유벽공 相維辟公 제후들이 제사를 돕고
천자목목 天子穆穆 그 가운데 천자 모습 아름답네.
여기에서 ‘옹옹’(雝雝)은 ‘평화로운 모습’을 일컫고, ‘숙숙’(肅肅)은 ‘공경하는 모양’을 나타냅니다. ‘상’(相)은 ‘서로 돕는 것’이며, ‘목목’(穆穆)은 ‘덕이 겉으로 드러나서 아름다운 모양’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어느 책에는 ‘옹옹숙숙’을 ‘귀신이 와서 머문 모습’이라고 기술되어 있기도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아무튼 이에 대한 일을 천자가 올리는 제사라고 볼 때, 노나라의 대부 집안에서 제사를 지내며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지적입니다. 공자는 예(禮)를 중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 모양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번에는 ‘논어’에 들어 있는, ‘자하’(子夏)라는 제자와 공자의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자하가 물었다. “교소천혜며 미목반혜며 소이위현혜라고 하니, 이는 무슨 말들입니까?”공자가 대답하였다. “회사후소이다.”그 말이 끝나자, 자하가 말했다. “예후호.” 그 말을 듣고 나서, 공자가 말했다. “나를 일으키는 사람은 ‘상’이로구나. 비로소 함께 시를 이야기할 수 있겠구나.”(자하문왈 교소천혜 미목반혜 소이위현혜 하위야. 자왈 회사후소. 왈 예후호. 자왈 기여자 상야. 시가여언시이의.: 子夏問曰 巧笑倩兮 美目盼兮 素以爲絢兮 何謂也. 子曰 繪事後素. 曰 禮後乎. 子曰 起予者 商也. 始可與言詩已矣.)【논어 3-8】
앞에서 ‘교소’(巧笑)는 ‘호소’(好笑)와 같이 ‘사랑스럽게 웃는 것’을 말하고, ‘천혜’(倩兮)는 ‘보조개를 보이며 웃는, 예쁜 모습’을 가리킵니다. ‘혜’(兮)는 ‘시’에서 많이 쓰이는 영탄적인 종조사이지요. ‘미목반혜’(美目盼兮)는 ‘예쁜 눈에 검은 눈동자와 흰자위가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을 이릅니다. 또, ‘소이위현혜’(素以爲絢兮)는 ‘흰 물감으로 칠한다는 말’이지요. 그런가 하면, ‘하위야’(何謂也)는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뜻이고, ‘기여자’(起予者)는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게 해준 사람’을 이르며, ‘시가여언시’(始可與言詩)는 ‘비로소 시를 논할 만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회사후소’라는 말입니다. ‘회사후소’(繪事後素)는, ‘그림을 그리려고 하면 흰 바탕이 이루어진 뒤에 무늬를 그린다는 말’이라고 하기도 하며, ‘그림을 그리는 데 먼저 색색의 물감으로 모든 형체를 구현하고 제일 나중에 흰 물감으로 그 형체를 명료하게 드러내야 한다는 말’이라고도 합니다. 어느 게 옳을까요? 이는 아주 중요합니다. 만약에 ‘흰 바탕’을 ‘소’(素)라고 하면, ‘소’(素)는 그 ‘예’(禮)를 실현할 수 있는 ‘천성적 바탕’이 됩니다. 그러나 ‘끝맺음’을 ‘소’(素)로 한다면, ‘소’(素)는 ‘예’(禮)의 실행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 이루는 ‘후천적 완성’이 되지요.
나는 ‘앞의 말’에 공감합니다. 왜냐고요?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말이 ‘논어’의 ‘팔일편’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공자는 ‘사람됨이 어질지 않으면 예를 갖추어서 무엇을 하며, 사람됨이 어질지 아니하면 음악은 해서 무엇을 하냐?’라고 하였지요. 그러므로 ‘흰바탕’을 ‘소’(素)로 해야 합니다. 따라서 자하의 ‘예후호’(禮後乎)는, ‘그렇다면 예나 악은 인의 뒤에 온다는 말이겠군요.’라고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건 그렇고, 인용된 ‘교소천혜’나 ‘미목반혜’가 들어 있는 ‘시’를 한 번 만나보도록 할까요? 이 시의 제목은 ‘석인’(碩人)입니다. ‘석인’은 ‘키 큰 사람’을 이르지요. 그 중 7구는 아래와 같습니다.
수여유제 手如柔荑 손은 부드러운 띠풀 같고
부여응지 膚如凝脂 살결은 기름 바른 듯 부드러우며
영여추제 領如蝤蠐 목은 탐스럽게 주름이 지고
치여호서 齒如瓠犀 이는 박씨처럼 빛나며
진수아미 螓首蛾眉 매미 같은 이마와 나방 같은 눈썹이여
교소천혜 巧笑倩兮 웃으면 보조개가 파이고
미목반혜 美目盼兮 아름다운 눈은 초롱초롱하다.
이는, 위(衛)나라 장공(莊公)이 제(齊)나라 태자 ‘득신’(得臣)의 여동생인 ‘장강’(莊姜)을 맞이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그녀가 ‘장공’에게 시집 올 당시에 위나라 사람들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미한 노래라고 합니다.
노래라면 끔찍이도 좋아했던 공자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노래 중에서 공자가 가장 좋아했던 노래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노래는 ‘관저’(關雎)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논어’에 기술되어 있는 다음의 내용들 때문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관저는 즐거우면서도 음란하지 않고, 구슬프면서도 상심하게 만들지 않는다.”(자왈 관저 낙이불음 애이불상.: 子曰 關雎 樂而不淫 哀而不傷.)【논어 3-20】
공자가 말했다. “악사인 ‘지’가 ‘시’를 연주하였는데, ‘관저’의 마지막 장은 마치 넘쳐흐르는 듯이 귀에 가득하였다.”(자왈 사지지시 관저지란 양양호영이재.:子曰 師摯之始 關雎之亂 洋洋乎盈耳哉.)【논어 8-15】
두 이야기 중, 앞에서 ‘음’(淫)은 ‘즐거움이 도에 넘치는 것’을 말하므로 ‘문란하다’는 뜻을 지닙니다. 그리고 ‘상’(傷)은 ‘슬픔이 지나쳐서 조화를 잃는 것’을 말하므로 ‘마음이 상함’을 이릅니다.
그리고 뒤에 한 말에서, ‘사지’(師摯)의 ‘사’는 ‘악사장’(樂師長)을 가리키고, ‘지’는 ‘악사장의 이름’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시’(始)는 ‘사시’(四始)를 이릅니다. ‘사시’를 보면, ‘풍’(風)의 시(始)는 ‘관저’(關雎)이고 ‘소아’(小雅)의 시(始)는 ‘녹명’(鹿鳴)이며 ‘대아’(大雅)의 시(始)는 ‘문왕’(文王)이고 ‘송’(頌)의 시(始)는 ‘청묘’(淸廟)입니다.
또한, ‘난’(亂)은 ‘마지막 장’이란 뜻이고 ‘양양’(洋洋)은 ‘넘쳐흐르듯이 아름다운 모양’을 이릅니다. 그러면 ‘관저’를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관저’(關雎)란 ‘우는 물수리.’라는 뜻이지요.
관관저구 關關雎鳩 까옥까옥 물수리
재하지주 在河之洲 저 강가의 모래톱에서
요조숙녀 窈窕淑女 아름다운 아가씨
군자호구 君子好逑 사나이의 좋은 배필
참치행채 參差荇菜 들쭉날쭉 마름 풀
좌우유지 左右流之 이리저리 흘러가고
요조숙녀 窈窕淑女 아름다운 아가씨
오매구지 寤寐求之 자나 깨나 그리워하네.
구지부득 求之不得 그리워도 만날 수 없고
오매사복 寤寐思服 자나 깨나 임 생각에
유재유재 悠哉悠哉 길고도 길어라 이 밤
전전반측 輾輾反側 잠 못 이루고 뒤척이네.
참치행채 參差荇菜 들쭉날쭉 마름 풀
좌우채지 左右采之 여기저기 뜯고
요조숙녀 窈窕淑女 아름다운 아가씨
금슬우지 琴瑟友之 거문고와 비파를 벗 삼으리.
참치행채 參差荇菜 들쭉날쭉 마름 풀
좌우모지 左右芼之 이리저리 고르고
요조숙녀 窈窕淑女 아름다운 아가씨
종고낙지 鐘鼓樂之 종과 북 치며 즐기리.
이는, 바로 ‘어여쁜 아가씨를 짝사랑하는 노래’입니다. ‘관관’(關關)은 ‘새의 울음소리’를 나타내지요. 의성어(擬聲語)입니다. ‘저구’(雎鳩)는 ‘물가에 살면서 물고기를 잡아먹고 사는 물수리’를 가리킵니다. ‘주’(洲)는 ‘강물 가운데에 모래가 쌓여서 섬처럼 된 것’을 말하고, ‘요조’(窈窕)는 ‘얌전한 모양’을 이르며, ‘구’(逑)는 ‘배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참치’(參差)는 ‘가지런하지 않은 모양’이고, ‘행채’(荇菜)는 ‘마름이라는 물풀’입니다. ‘사복’(思服)에서 ‘복’은 의미 없는 글자입니다. 그래서 ‘사복’은 ‘생각한다.’로 풀이됩니다. 또, 여기에서 ‘유지’(流之)는 ‘그리워함’을 뜻하고, ‘채지’(采之)는 ‘만남’을 의미하며 ‘모지’(芼之)는 ‘선택함, 즉 배필이 됨’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이 노래에 대해 이르기를, 공자는 ‘즐거우면서도 음란하지 않고, 구슬프면서도 상심하게 만들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즐거우면서도 음란하지 않음’은 가사의 경우이고, ‘구슬프면서도 상심하게 만들지 않음’은 곡조의 경우일 듯합니다. 그리고 ‘관저의 마지막 장은 마치 귀에 넘쳐흐르는 듯이 가득하였다.’라고 한 공자의 말은, ‘관저’의 아름다운 곡조에 대한 예찬이 분명합니다. 이 노래는 곡조와 가사가 아름다웠기 때문에 ‘노래 모음’의 앞자리에 놓이게 되었겠지요. 그러고 보니, 공자는 ‘감미로우면서도 슬픔이 깃든 노래’를 좋아하였음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슬퍼하되, 상하기에 이르면 안 된다.’라고 했습니다.
또, 논어의 ‘위정편’에는 공자가 모은 3백여 편의 ‘노래’(詩)를 그가 일언이폐지로 평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는 ‘구구한 말을 모두 줄이고 한 마디의 말로써 함’이라는 뜻이지요.
공자는 수집된 3백여 편의 시를 한 마디로 ‘사무사’(思無邪)라고 표현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 ‘사무사’의 해석에 혼란을 느꼈습니다. 왜냐 하면, 수집된 3백여 편의 시 중에 ‘사무사’라는 말이 들어 있기 때문이었지요. 그 노래(詩)는, 바로 ‘노송’(魯頌) 중에 들어 있는 ‘경’(駉)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사무사’가 들어 있는 그 노래를 살펴볼까요? 노래 ‘경’은, ‘말을 예찬하는 노래’인데, 사장(四章)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넷째 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무사 思無邪 정말로(어긋남이 없이)
사마사조 思馬斯徂 장한 말일세.
이 노래의 전체를 해석해 보아도, 공자가 말한 ‘사무사’(思無邪)의 뜻을 알아낼 수가 없습니다. 이 노래에서 ‘사무사’의 ‘사’(思)는 뜻을 지니지 않은 조자(助字)에 불과하니까요. 그렇다면, 공자가 말한 ‘사무사’는 노래에 나오는 ‘사무사’와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공자는 제자들이 ‘인’(仁)이나 ‘예’(禮)나 ‘군자’(君子) 등에 대하여 물었을 때에 똑같은 내용의 답변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지요. 그런데 공자가 3백여 편의 시에 대한 내용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서 구태여 시에 있는 문구를 끌어다가 썼겠습니까? 제자들이 ‘사무사가 무슨 말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묻는 제자에 따라 각각 다른 내용을 답하였을 공자입니다. 그러므로 공자가 말한 ‘사무사’(思無邪)에서 ‘사’는 의미를 지녀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생각이 바르지 아니한 일이 없다.’라고 풀이되어야 합니다. 어느 문구에 대한 해석이 한결같아야 한다는, 그런 고정관념은 버려야 합니다. ‘시’를 읽을 때는 무한한 상상력을 펼쳐야 됩니다.
‘논어’에도 ‘시’ 때문에 장가를 간 사람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누구냐고요? ‘남용’(南容)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시’의 모음 중에서 ‘억편’(抑篇)에 있는 ‘백옥의 흠은 갈아서 아름답게 할 수 있으나 한 번 뱉은 말의 실수는 고칠 수 없도다.’라는 구절을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읊었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이와 같이 말을 삼가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됨이 훌륭하다고 여기어서 형님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답니다.
‘노래’, 즉 ‘시’에 대하여 공자는 제자들에게 공부하라고 자주 당부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도 ‘논어’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공자는 말했다. “너희는 왜 시를 배우지 않느냐? 시는 그것으로 감흥을 자아낼 수 있고, 그것으로 살필 수 있으며, 그것으로 여럿이 모일 수 있고, 그것으로 불의를 원망할 수 있으며, 가까이는 아버지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길 수 있게 하며, 새와 짐승 및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자왈 소자하막학부시. 시 가이흥 가이관 가이군 가이원 이지사부 원지사군 다식어조수초목지명.:子曰 小子 河莫學夫詩. 詩 可以興 可以觀 可以羣 可以怨 邇之事父 遠之事君 多識於鳥獸草木之名)【논어 17-9】
여기에서 ‘소자’(小子)는 ‘너희들’이라는 뜻입니다. 공자가 제자들을 가리킨 말이라고 여겨집니다. 또 ‘흥’(興)은 ‘감흥을 일으킴.’을 나타냅니다. 이는, 공자의 ‘시관’(詩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를 배우는 법’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네요.
그래서 공자는, “시 3백 편을 외우고도 (그에게) 정사를 맡겼을 때에 제대로 처리를 못한다든지 또는 외국에 사신으로 내보냈을 때에 홀로 응대하지 못한다면, 많은 시를 외웠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말하였습니다.
또 공자는, ‘시는 인정에 근본을 두어서 도리를 밝히고 풍속의 성쇠를 말하며 정치의 득실을 볼 수 있고 그 말이 온후하며 풍류를 지녔기에 이를 배우면 정치에 통달하고 말도 잘하게 된다.’라고도 했지요.
공자가 말했습니다.
“말재주가 아주 좋은 자는 ‘의리’를 해롭게 하고, 말이 너무 적은 자는 ‘도’를 깨뜨리게 된다. 그러므로 ‘시의 모음’ 중 ‘관저’(關雎) 편에 새를 ‘흥’(興)으로 하여 군자가 이를 아름답게 여긴 것은 그 암수의 분별이 있기 때문이며, ‘시의 모음’ 중 ‘소아’(小雅) 가운데의 ‘녹명’(鹿鳴) 편에 짐승을 ‘흥’(興)으로 하여 군자가 이를 크게 여긴 것은 그들이 먹이를 얻어 놓고 서로 불러 가며 함께 먹기 때문이다.”
‘관저’에서는 ‘흥’으로 ‘관관’(關關)을 썼고 ‘녹명’에서는 ‘흥’으로 ‘유유’(呦呦)를 사용했습니다. 새나 짐승의 울음소리로 상상하여 들어 보면 그런 대로 흥취가 납니다. 그러면 이제 나의 시를 소개하겠습니다.
달빛이 너무 밝아
뒷산으로 시를 쓰려고 와서 앉았는데
내 원고지 위에
앞산 억새의 가늘고 긴 그림자가
찾아와서 글씨를 쓰고
좀처럼
시는 몸을 드러내지 않는다.
깊은 숲 속에 자리 잡고 앉은 너와집처럼.
- 졸시 ‘너와집처럼’ 전문
‘시’(詩)는 참으로 부끄러움을 많이 타나 봅니다. 늘 그 모습을 환하게 나타내지 않습니다. ‘은유’라든가 ‘비유’의 장옷을 눌러 쓰고 수줍은 듯이 내외를 합니다. 나는 이를 가리켜서 ‘너와집’과 같다고 여겼습니다. 깊은 숲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너와집’은 좀처럼 찾기 힘듭니다. 그렇기에 시에게 다가가려면 반드시 가슴을 깨끗하게 비워야 합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왜 시를 배우지 않느냐? 시는, 그것으로 감흥을 자아낼 수 있고 그것으로 살필 수 있으며, 그것으로 여럿이 모일 수 있고 그것으로 불의를 원망할 수 있으며, 가까이는 아버지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길 수 있게 하며, 새와 짐승 및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
자, 어떻습니까? 공자의 말이 옳지 않습니까? 그래서 공자는 ‘시 3백 편을 외우고도, 그에게 정사를 맡겼을 때에 제대로 처리를 못한다든지 또는 외국에 사신으로 내보냈을 때에 홀로 응대하지 못한다면 많은 시를 외웠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또 공자는, ‘시는 인정에 근본을 두어서 도리를 밝히고 풍속의 성쇠를 말하며 정치의 득실을 볼 수 있고 그 말이 온후하며 풍류를 지녔기에 이를 배우면 정치에 통달하고 말도 잘하게 된다.’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니, 정치에 나선 사람을 뽑을 때는 반드시 ‘시’를 아는 사람인가 모르는 사람인가를 먼저 검증해야 하겠습니다.(글: 김 재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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