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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알아주지 않음을 근심하지 마라
어느 덧, 공자의 나이가 마흔 살이 되었습니다. 이는, 바로 공자가 말하는 ‘불혹’의 나이입니다. 그런데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에서 이 ‘불혹’(不惑)은 그저 ‘의혹이 없어진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40대는 ‘황금기’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활기 있게 일할 시기이지요. 그러므로 주위의 여러 사람들로부터 귀에 솔깃한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됩니다. 그럴 때, 그런 달콤한 이야기에 현혹됨으로써 갈팡질팡할 경우도 생기게 마련입니다. 공자는 그걸 경계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이가 40살에 이르면 자신의 올바른 주장에 따라 흔들림이 없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 공자는, ‘나이가 사십이나 되어서 남에게 미움을 받는다면, 그 사람은 이미 볼 장을 다 보았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렇듯, 노나라로 돌아온 공자는 마음을 모두 비우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먼 곳에서도 배우려는 사람들이 공자를 찾아왔습니다. 공자는 그들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논어’에서는, ‘먼 곳으로부터 뜻을 함께하는 사람이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뜻을 함께하는 사람’의 원문은 ‘유붕’(有朋)입니다. 그 뜻이 잘 집히지 않습니다. 그저 막연하게,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그런 ‘친구’는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배우기를 좋아하는 벗’, 즉 ‘배우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가리켰을 성싶습니다. 공자의 큰 기쁨은, 그들이 먼 곳으로부터 배우려고 찾아올 때였겠지요. 그 이상의 기쁨은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서 ‘부끄럽지 않다.’는 원문이 ‘불온’(不慍)인데, ‘온’(慍)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이 ‘온’은 그저 단순히 ‘부끄럽다.’의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공자는 내심으로 자신이 등용되기를 바랐지요. 그러나 그런 바람을 접고 가르침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자위’(自慰)의 뜻이 담겨 있다고 느껴집니다. 다시 말하면, ‘비록 벼슬은 못했지만 군자가 되었으니 만족한다.’라는, 그런 의미가 담겼을 듯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공자를 찾아왔을까요? 학식이 많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나는 여겨집니다. 아무래도 공자에게는 무엇인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나도 어렴풋하게나마 집히는 바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공자는 솔직(率直)하고 담박(淡泊)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때는 열정적이면서도 또 다른 때는 한없이 약한 면을 보이기도 하는 ‘공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심미적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술을 퍽이나 사랑했습니다.
공자의 성격에 대한 이야기가 ‘논어’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습니다.
공자는 온순하면서도 엄격했고, 위엄이 있었지만 사납지 않았으며, 공손하면서도 편안했다.(온이려 위이불맹 공이안: 溫而厲 威而不猛 恭而安)【논어 7-37】
이 외에도 또 하나의 내용이 있지요. 다름 아닌, 공자가 특히 조심한 4가지 일입니다. 즉, 공자가 특히 멀리한 일은, 자기 뜻대로 하는 일이 없었고 기필코 하는 일이 없었으며 고집하는 일이 없었고 자기를 내세우는 일이 없었습니다. ‘네 가지 멀리한 일’을 본문에서는 ‘절사’(絶四)라고 표현했습니다.
공자가 42세가 되었을 때, 노나라의 군주인 ‘소공’(昭公)은 끝내 제나라에서 ‘계평자’(季平子)를 원망하며 쓸쓸하게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노나라의 권력자인 ‘계평자’는 아주 잘 되었다고 손뼉을 쳤지요. 그는, 미리 생각해 두었던 소공의 아우를 노나라 군주의 자리에 앉혔습니다. 그가 바로 ‘정공’(定公)입니다. ‘정공’은 ‘양공’(襄公)의 아들이며, 이름은 ‘송’(宋)이라고 하였습니다.
‘계평자’에 의해 군주가 된 ‘정공’이니, 노나라에 대한 실권이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저 군주의 자리에 앉아 있는 허수아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라는 속담을 알고 있지요? ‘계평자’가 군주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그는 그의 가신(家臣)인 ‘양호’(陽虎)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양호’는 ‘계평자’를 자기 마음대로 주물렀습니다.
그런데 무슨 속셈이 있었는지, ‘양호’가 공자를 만나려고 하였습니다. ‘논어’에서는 ‘양화’(陽貨)라고 했는데, 나는 ‘같은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17살 때인가, 선비들을 위한 잔칫집 문전에서 그리 공자를 푸대접했던 ‘양호’이니, 공자가 그를 무엇 때문에 만나겠습니까? 한 마디로 거절해 버렸습니다. 그러자 ‘양호’는 공자에게 새끼 돼지를 보냈습니다.
참으로 공자가 난처했겠지요. 공자는 ‘양호’가 그의 집에 없는 때를 택하여 사례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돌아오는 길에 그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공자는 운이 없었습니다. ‘옳다구나.’ 하고 ‘양호’는 공자에게 말했습니다.
“이리 오시오. 내가 당신께 할 말이 있소.”
그리고는 그가 다시 말했지요. 아마도 공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지, 아니면 공자가 말할 틈도 주지 않았던지, 그 둘 중의 하나입니다.
“보배와 같은 재능을 가슴에 품고 있으면서 나라의 어지러움을 그대로 둔다면 어찌 어질다고 말할 수 있겠소?”
이 말은 공자가 미덕을 품고 있으면서도 벼슬을 하지 않은 채로 세상을 등지고 있다는 비난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공자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그는 말을 다시 계속했습니다.
“그렇고말고요. 벼슬자리에 오르기를 원하면서 번번이 그 기회를 잃는다면 어찌 지혜롭다고 할 수 있겠소?”
또 이 말은, 공자가 다른 나라에 가서 벼슬살이를 하려고 하면서도 번번이 기회를 놓쳐서 뜻을 이루지 못함을 비웃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는 공자가 대답할 틈도 없이, 그는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할 수 없겠지요. 날과 달은 지나가고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양호’, 즉 ‘양화’는 언변이 참으로 좋습니다. 이는, 공자더러 자기에게 와서 벼슬살이를 하라는 뜻이 담겨 있는 성싶습니다. 공자는 더 이상 그의 말이 듣고 싶지 않았겠지요. 그래서 공자는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나는 장차 나라의 일을 맡으리다.”
공자의 이 말은, ‘벼슬을 하게 되면 하겠다.’라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꼭 하겠다.’라는 뜻은 아니랍니다. 공자는 벼슬길에 오르기를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양호’ 밑에서는 일하기 싫을 뿐이었지요.
그런데 ‘양호’(陽虎)와 ‘양화’(陽貨)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 말에 의하면, ‘좌전’에서 ‘양호’는 1백여 개소에 그 이름이 나오는데 언제나 ‘양호’라고 기록했을 뿐이고 한 번도 ‘양화’라고는 기술되지 않았답니다. 그리고 ‘맹자’에서도, ‘양호’와 ‘양화’는 똑같은 곳에 나오지만, 그들의 언행을 보면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어쨌든 ‘양호’와의 그런 일이 있었던 후에도, 공자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제자들을 가르치기에 여염이 없었습니다.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에도 그만의 기준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교육과 학문은, 스스로 뜻을 세우고 그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없으면 이루어지기가 어렵지요. 가르침의 참뜻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잠재되어 있는 ‘앎의 욕구’를 이끌어 내고 그 ‘앎의 욕구’를 눈뜨게 해주는 데 있다고 봅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논어’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발분하는 지경에 이르지 아니하면 계발해 주지 않겠고, 표현하려고 애쓰지 아니하면 일깨워 주지 않겠으며, 한 귀퉁이를 가르쳤는데도 나머지 세 귀퉁이를 미루어서 알지 못하면 다시 가르치지 않겠다.”(자왈 불분 불계 불비 불발 거일우 불이삼우반 즉불부야.: 子曰 不憤 不啓 不悱 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논어 7-8】
위의 글 중에서 ‘분’(憤)은 ‘분발함’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계’(啓)는 ‘터 줌’을 가리키지요. 그러므로 몰라서 분한 생각을 지니지 않으면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정말 모르는 게 있으면 화가 납니다. 또한, ‘비’(悱)는, ‘하고 싶은 말을 나타낼 수가 없어서 더듬거리는 모양’을 이릅니다. 또 하나, ‘발’(發)은 ‘열어 줌’을 말하지요. 이는, 말하려는 내용에 복안이 섰으면서도 잘 표현되지 않아서 더듬거리는 정도에 이르지 않고는 알려 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거일우’(擧一隅)는 ‘한 모퉁이만을 들어 보이는 것’을 가리키며, ‘이삼우반’(以三隅反)은 ‘나머지 세 귀퉁이로 반응을 보이는 것’을 나타냅니다. ‘부’(復)는 ‘되풀이하여 가르침’을 이르는 말이지요. 맞는 말입니다. 가르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을 가르쳐야 성과도 있고 보람도 얻을 수 있는 법입니다. 그렇기에 훌륭한 제자를 만나면 그 스승은 가르치는 데에 저절로 신바람이 나겠지요.
그래서 공자는 각 제자의 사람 됨됨이를 관찰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주의 깊게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펴보았지요. 그 중의 한 방법을 구체적으로 말해 볼까요?
우선은 제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준 뒤에 그의 소망을 자유롭게 말하도록 하고, 공자는 중간에 말을 끊거나 논평하는 일이 없이 그저 미소 띤 얼굴로 끝까지 그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공자는 속으로 그 제자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캐내어서 종합적인 판단을 했지요. 그리고 그에 대하여 어떻게 단점을 극복하게 만들 수 있느냐를 생각했습니다.
이런 스승을 누가 존경하지 않았겠습니까? 선생님이 된 사람은, 제자들이 자기를 존경하고 따르지 않음을 한탄하기보다, 자신이 제자들에게 어떤 행동을 보였는가를 먼저 반성해야 합니다.
옛날 송나라에 ‘정명도’(程明道)와 ‘정이천’(程伊川)이라는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형제는 함께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지요.
어느 날, 두 사람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절로 놀러 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모두 형인 ‘명도’ 뒤만 졸졸 따르고 있었습니다. 동생인 ‘이천’의 뒤를 따르는 제자는 한 명도 없었지요. 학문으로 따진다면, 아우 ‘이천’이 훨씬 넓고 깊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형 ‘명도’의 뒤만 따르는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형에게는 무엇인가 제자들로 하여금 따르게 하는 매력이 있었을 게 분명합니다. 동생 ‘이천’은 크게 탄식하였습니다.
“이것이 과연 내가 우리 형님에게 미치지 못하는 점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형 ‘명도’는 ‘온량(溫良)한 군자인(君子人)’이었고, 동생 ‘이천’은 준엄한 ‘직간(直諫)의 선비’였다고 합니다. 이렇듯 조그만 성격 차이가 마침내 이토록 커다란 결과를 빚게 되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자도 온화한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많은 제자들이 그를 따랐을 거라고 여겨집니다.
공자는 배우려고 찾아오는 사람이면 부자이든지 가난한 사람이든지 차별을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자는 말했지요.
“마른 고기 한 묶음 정도의 예물이라도 가지고 와서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은 내 일찍이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다.”
이는 원문으로, ‘자행속수이상 오미상무회언’(自行束脩以上 吾未嘗無誨焉)입니다. 여기에서 ‘수’(脩)는 ‘마른 고기’, 즉 ‘육포’를 말한답니다. 그러므로 ‘속수’(束脩)는 ‘마른 고기 한 묶음’인데 ‘건포 열 장’을 이르지요. 그리고 ‘미상무’(未嘗無)는 ‘없다.’라는 뜻을 강조한 말이랍니다.
그 옛날, 중국에서는 제자가 되기를 스승에게 청할 때에는 반드시 예물을 지참하는 게 통례였다고 합니다. 당시의 예물로서 군주는 보석, 대부는 양, 선비는 꿩, 서민이면 거위, 그리고 ‘상공’(商工)에 종사하는 사람은 닭 등이 각각 쓰였답니다. 그러니 ‘마른 고기 한 묶음’은 가장 적은 예물을 가리킵니다.
내 생각이긴 하지만, 공자는 그 당시에 가르침의 일에 아주 만족하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왜냐 하면, 그는 피가 끓는 40대였기 때문입니다. 그 시기에 어찌 자신의 뜻을 마음껏 세상에 펴 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은 더 나이가 들어서도 할 수 있는 일이었지요. 공자의 이런 마음을 짐작하게 하는 이야기가 ‘논어’에 실려 있습니다.
공자가 냇가에서 말하였다. “가는 게 이와 같구나. 밤낮없이 멎지 않는구나.”(자 재천상왈 서자 여사부. 불사주야.: 子 在川上曰 逝者 如斯夫. 不舍晝夜.)【논어 9-16】
여기에서 ‘천상’(川上)은 ‘냇가’를 말합니다. 또 ‘여사부’(如斯夫)는 ‘이와 같은 것일까’라는 뜻입니다. 공자는 흐르는 냇물을 바라보며 세월의 무상함과 함께 사람도 이처럼 헛되이 늙어 간다는 생각을 했을 듯합니다. 이는 ‘천상탄’(川上嘆)이라고 하는 유명한 글이랍니다.
그렇듯 세월은 흘러서 공자의 나이는 47세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공자는 제자인 ‘남궁경숙’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남궁경숙’(南宮敬叔)이란 사람은 노나라의 권력자인 ‘맹희자’의 아들이고, ‘맹의자’의 형이지요.
“내 들자니까 ‘노담’(老聃)은 옛 일도 넓게 알고 지금 일도 모르는 게 없으며 예악의 근원에 능통하고 도덕의 귀추에도 밝다고 하니 우리의 스승이다. 나는 장차 한 번 찾아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에서 ‘노담’은 ‘노자’(老子)를 가리킵니다. 주(周)나라 사람으로, 성은 ‘이’(李)이고 이름도 역시 ‘이’(耳)입니다. 자는 ‘백양’(伯陽)인데, 익호가 ‘담’(聃)이었지요.
경숙이 대답했습니다.
“예, 잘 알겠습니다.”
경숙은 공자 앞에서 물러나온 후에 노나라의 군주인 ‘정공’(定公)에게 가서 청했습니다. 공자의 가계에 대하여 장황하게 설명한 다음, 그는 다음과 같이 본론을 꺼냈습니다.
“이제 공자님이 장차, 주나라에 선왕이 남긴 제도와 예악의 지극한 바를 상고해 보신다고 하오니 이는 실로 큰 사업입니다. 임금께서는 어찌 그 행장을 돌보아 주지 않으십니까? 신도 함께 가보려고 합니다.”
‘정공’은 공자를 모른 척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레 한 대와 말 두 필과 종 한 사람을 딸려 보냈습니다.
주나라에 가서, 공자는 ‘노담’에게 ‘예’(禮)를 묻고, ‘장홍’(萇弘)에게 ‘악’(樂)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교사’(郊社)가 있는 곳을 지나서 ‘명당’(明堂)의 제도를 상고하였으며 종묘의 조정 법도까지 세밀히 살펴보았습니다. 앞에서 ‘장홍’은 주나라 ‘경왕’(敬王)의 대부입니다. 그리고 ‘교사’는 ‘천자가 하늘에 제사 지내는 곳’을 이르며 ‘명당’은 ‘천자의 궁궐’을 가리킨답니다. 그리고 보기를 다하자, 공자는 탄식하며 말했습니다.
“내가 이제야 비로소 주공의 착하심과 주나라가 천하에 왕 노릇한 까닭을 알겠구나!”
그러면 공자와 노자가 만나는 장면을 한 번 그려 볼까요?
노자는 공자가 올 길목을 쓸게 했습니다. 그러자 공자도 수레에서 내린 후에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예법에 따라서 공자는 노자에게 기러기 한 마리를 예물로 전했습니다. 공자가 ‘노담’을 보고 말했습니다.
“너무 심합니다. 오늘날 행하기 어려운 것은 도입니다. 내가 오늘날 도를 행해 보려고 여러 나라 임금들에게 유세를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내 말을 받아 주지 않으니, 오늘날 행하기 어려운 것은 참으로 도입니다.”
노자가 공자를 향하여 말했습니다.
“대체 말하는 사람이 실수가 있고 보면 듣는 사람도 말을 어지럽게 듣게 되는 것이니, 이 두 가지를 알게 되면 도는 자연히 잊지 못하게 될 거요.”
공자는 주나라를 떠나서 노나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노자는 공자와 작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부하고 귀한 자는 사람을 보낼 때에 재물을 주고, 어진 사람은 사람을 보낼 때에 말(言)을 준다고 들었소. 나는 부귀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재물을 줄 수는 없고, 어진 사람이라는 이름이나 빌어서 그대를 보내는 데에 몇 마디 말을 주려고 하오. 대체 오늘날 소위 선비란 자를 보면 총명하고 세밀한 체하면서 죽을 곳을 피할 줄도 모르니, 이것은 남을 비평하고 책망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오. 지식도 넓고 말도 잘하면서 그 몸을 위태롭게 하니, 이것은 남의 약한 점을 잘 꼬집어 내기 때문이오. 이러한 자는 자기 몸이 있어도 남의 자식 노릇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며, 자기 몸이 있어도 남의 신하 노릇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오.”
“공경하여 가르치신 대로 받들어 행하겠습니다.”
공자는 대답하고 노나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 후에도 공자는 노자의 말이 귀에 쟁쟁하여 좀처럼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새는 하늘을 잘 날아다니지만 화살로 쏘아서 떨어뜨릴 수가 있고, 물고기는 물속에서 마음대로 헤엄을 치지만 낚시로 잡을 수가 있으며, 짐승은 산을 잘 달리나 그물과 덫으로 잡을 수가 있다. 그러나 용은 마음대로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니 잡을 길이 없는 법이다. 노자님은 마치 그런 용과 같은 분이시다.”
노자의 모습을 만나고 온 공자는, 더욱 스스로를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기에 온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따라서 공자의 이름은 점점 더 크게 떨쳐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에 대한 가르침의 말 한 마디를 소개하지요.
공자가 말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근심하지 말고, 내가 (남이 나를 알아줄 만큼) 능하지 못함을 근심하라.”(자왈 불환인지불기지 환기불능야: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其不能也)【논어 13-32】
이는, 세상 사람들이 나의 덕행과 재능을 알아주지 않음을 근심하지 말고 나의 덕행과 재능이 부족함이 없도록 끊임없이 수양에 힘써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공자의 말이 분명합니다. 이 외에도 같은 의미의 말이 세 곳이나 더 기술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들을 한病 번 찾아가 볼까요?
학이편에서는 ‘환부지인야’(患不知人也)라고 했지요. 이는,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하라.’는 뜻입니다. 또, 이인편에서는 ‘불환막기지 구위가지야’(不患莫己知 求爲可知也)라고 했습니다. 이 뜻은, ‘나를 아는 이가 없음을 근심하지 말고, 알려지게 되기를 바라야 한다.’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위영공편에서는 ‘병무능언 불병인지불기지야’(病無能焉 不病人之不己知也)라고 했습니다. 이는 ‘자기 무능을 걱정하고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아니한다.’라는 의미이지요.
위에서 거론한 말들 중에서 ‘병’(病)은 ‘환’(患)과 같은 뜻으로 ‘걱정함’을 나타냅니다. 그러고 보니, 두 말을 합하여 ‘병환’(病患)이 됩니다. 이는 ‘병’의 높임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자, 이만하면 공자가 얼마나 이 말을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짐작할 수 있겠지요?
어느 때, 정공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말 한 마디로 나라를 흥하게 만들 수 있다는데 그런 말이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했지요.
“말로써 그렇게 되기란 어렵지만,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임금노릇 하기가 어렵고 신하노릇 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니, 만일 임금노릇 하기가 어려움을 알면 한 마디 말로 나라를 일으킬 것을 기약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정공이 다시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한 마디로써 나라를 망칠 수 있는 말이 있습니까?”
공자는 또 대답했습니다.
“말로써 그렇게 되기란 어렵지만,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는 임금된 것이 즐겁지 않고 다만 내 말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즐겁다고 하였으니, 만일 그 말이 착하여 아무도 거스름이 없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합니까? 만일 그 말이 착하지 아니하여도 거스름이 없다면 이것이 한 마디 말로 나라를 망치는 말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나라가 흥하고 망함은 임금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임금노릇 하기의 어려움을 알고 성실하게 노력하면 나라가 흥하게 될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어쩐지, 노나라에는 먹구름이 끼어 있었습니다. 정공 5년 여름, 그러니까 공자의 나이 47세 때였습니다. 노나라 권력자 ‘계씨’의 우두머리인 ‘계평자’(季平子)가 죽고, 그의 아들인 ‘계환자’(季桓子)가 뒤를 이었습니다. 즉, 정공 5년에 ‘계평자’는 노나라 동쪽 지역인 ‘방’(防) 땅으로 순수를 나갔다가 도중에 덜컥 병이 들어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환자’(桓子)가 총애하는 사람으로 ‘중량회’(仲梁懷)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중량회’는 ‘양호’와 사이가 그리 매끄럽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계평자’가 죽었을 때, 가신인 ‘양호’는 ‘계평자’의 관 속에 여당 구슬을 넣어서 염습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귀한 사람이 죽으면 시체에 패물을 넣어서 함께 염습을 하였다고 합니다. 염습에 쓰이던 패물은, 공후(公侯)의 경우에는 ‘산현옥’(山玄玉)이었고 대부(大夫)의 경우에는 ‘수창옥’(水蒼玉)이었답니다.
그런데 ‘여당’(與璫)이라는 구슬은, 아마도 ‘산현옥’에 속하는 듯싶습니다. 아무튼 ‘양호’는 그 귀한 구슬을 ‘계평자’의 관 속에 넣음으로써 ‘계손씨’의 참월한 행동을 ‘양호’ 자신이 인정해 주는 동시에 앞으로 자기도 참월하겠다는 뜻을 암시하려고 했었지요. 그러나 그 소식을 들은 ‘중량회’가 펄쩍 뛰었습니다. 이렇게 되었으니, ‘양호’는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아주 화가 났지요. 그래서 ‘양호’는 ‘중량회’를 몰아낼 기회만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산불뉴’(公山不狃)라는 사람이 그리하지 말라고 ‘양호’를 말렸습니다. 이 사람도 ‘계씨’의 가신(家臣)입니다. 그 이름을 ‘공산불뉴’(公山弗狃)라고 쓰기도 합니다.
그해 가을이 되었습니다. ‘중량회’는 ‘계씨’를 등에 업고 더욱 교만해졌습니다. 보다 못한 ‘양호’는 그를 잡아들였습니다. 그야 당연히 ‘계환자’가 화를 내었겠지요. 그러자 ‘양호’는 ‘계환자’마저 가두어 버렸습니다. 하는 수 없었습니다. 서로 손을 잡고 일하자는 약속을 한 다음에야, ‘계환자’는 겨우 풀려 나왔습니다.
그러니 노나라에서는 기강이 모두 무너져 버렸습니다. ‘대부’ 이하 모든 사람들이 ‘바른 길’을 벗어난 행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야말로 나라가 어지러워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공자는 그저 묵묵히 ‘시’(詩)와 ‘서’(書)와 ‘예’(禮)와 ‘악’(樂)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시’(詩)는 ‘노랫말의 모음’으로서 지금은 305편이 남아 있다고 앞에서 말했지요? 중국 고대 최초의 시가총집입니다. ‘서’(書)는 ‘상서’(尙書)의 최초 명칭입니다. 선진(先秦) 시대에 ‘서’라고 하였으며, 한대(漢代) 이후에는 ‘상서’라고 하였답니다. ‘서’(書)는 상고(上古) 역사문헌총집이었습니다. ‘예’(禮)는 전국시대 작품이라고 하는데, ‘의예’(儀禮)와 ‘주예’(周禮)와 ‘예기’(禮記)를 포괄하여 ‘삼예’(三禮)라고 합니다. 그 중 ‘예기’는 진한(秦漢) 이전의 여러 의례 논저선집(論著選集)입니다. 또 ‘악’(樂)은 중국 고대 음악에 대한 책이랍니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공자의 제자들은 더욱 많아졌습니다.
노나라의 일은, ‘양호’의 마음대로 되었습니다. 아무 거리낌이 없었지요. 다시 말하자면, 노나라 군주인 ‘정공’은 ‘계환자’가 하라는 대로 하고, 또 ‘계환자’는 ‘양호’가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중량회’가 ‘양호’에게 무너지고 만 다음, ‘양호’와 맞설 수 있는 사람은 다만 ‘공산불뉴’뿐이었습니다. ‘공산불뉴’는 ‘양호’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양호’가 하고자 하는 일을 뒤에서 조금씩 도왔습니다.
자, 이제는 나의 시 한 편을 또 소개하려고 합니다.
흔들리기만 하는 풀들도
사실은 길을 가고 있다.
낮에는
노랗게 열린 햇빛의 길을 걷고
밤이면
하얗게 열린 달빛의 길을 걷는다.
걸어가며 허공에 찍어 놓은
이내 같은 발자국
함께 흔들리지 않고는
결코 볼 수 없는 그 길.
-졸시 ‘흔들리지 않고는’ 전문
공자의 여러 말 중에서 내 귀에서 늘 윙윙거리고 있는 한 마디가 있습니다. 그 말은 ‘환부지인야’(患不知人也), 즉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하라.’입니다. 이를 다시 새기면 ‘남을 잘 알아야 한다.’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그리 실행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속담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게 있습니다. 이는, 사람의 속을 알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지요. 그렇기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렇다고 이 일을 멀리 팽개쳐 버릴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하기는, 남을 알 수 있는 요령도 있을 듯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그 동안에 터득한 게 하나 있습니다. 즉, 흔들리고 있는 물체를 자세히 보려고 한다면 나 또한 그 물체와 같은 방향으로 몸을 흔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나는 가만히 있으면서 흔들리는 물체를 자세히 볼 수는 결코 없다.’라는 뜻이지요. 나는 이를 ‘동조’(同調) 또는 ‘동감’(同感)이라고 말합니다.
풀들은 바람이 불면 일시에 한 방향으로 몸을 눕힙니다. 그러니 풀들은 자기들끼리 늘 넓은 ‘공감대’(共感帶)를 형성하고 살아가겠지요. 아마도 풀들은,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하지는 않을 성싶습니다. 모든 풀이 그렇게 ‘한마음 한뜻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글: 김 재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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