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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게 자라서 상스러운 일에 능하다
19살의 가장인 젊은이 ‘구’(丘)는, 노나라 권력자인 계씨 집안의 ‘창고지기’ 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이를 ‘위리’(委吏)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창고를 관리하는 말단 관리라고 합니다. 아무튼 그는 열심히 일했지요. 그래서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칭찬했습니다.
“‘구’는 참으로 마음이 바른 사람이야. 여느 ‘창고지기’ 치고 어느 한 사람 곡식 됫박쯤 속이지 않은 사람이 없건만, ‘구’는 쌀 한 톨 속이는 법이 없으니 말이야. 요즘 세상에 저런 사람 보기는 드물지.”
스물한 살이 되었을 때, ‘구’는 성실함을 인정받아서 조금 더 나은 자리로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대단한 일이 아니라, 제사 때에 바칠 짐승을 맡아서 기르는 일이었지요. 사마천의 ‘사기’에는 이를 ‘직리’(職吏)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승전’(乘田) 직을 가리키는데, 목축을 주관하던 직책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 일도 성심을 다하여 열심히 일했습니다. 또, 사람들은 입을 모아서 칭송했습니다.
“‘구’는 창고지기 일을 그렇게 아주 잘 해내더니, 짐승 기르는 일도 이렇게 아주 잘 해내고 있지 않은가! 어린 짐승 한 마리 병들어 죽게 하지 않고 점점 더 가축의 수를 늘여 가고 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야.”
젊은이 ‘구’가 이처럼 여러 방면에 능한 까닭은, 그가 원래 어려서부터 가난하고 천하였기 때문이라고 전합니다. 공자도 후에 말하기를, ‘나는 어렸을 때에 천하게 지냈으므로 상스러운 일에 아주 능하게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듬해, 직리로서 ‘구’는 태묘(太廟 또는 大廟)라고 하는 사당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에 대한 일이 ‘논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자가 태묘로 들어가서 모든 일을 일일이 물었다. 그래서 어느 사람이 말했다. “누가 저 추인의 아들이 예를 안다고 했느냐? 태묘에 들어와서 매사를 물으니.” 공자는 그 말을 듣고 말했다. “묻는 게 바로 예다.”(자입태묘 매사문 혹왈 숙위추인지자지례호 입태묘 매사문 자문지 왈 시례야: 子入大廟, 每事問. 惑曰 孰謂鄹人之子知禮乎 入大廟 每事問 子問之, 曰 是禮也)【논어 3- 15】
여기에서 ‘태묘’(大廟)는 노나라의 시조인 주궁(周公)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을 말합니다. 이때에는 ‘대’(大)를 ‘클 태’로 읽습니다. 그리고 ‘추인지자’(鄹人之子)는 ‘추 고을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추’(鄹) 고을은,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이 지방관(地方官)으로 재임하였던 곳이지요. 그러므로 여기의 ‘추인’(鄹人)이란,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젊은이 ‘구’는 벌써 그 당시에 ‘예’(禮)로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사람이 그렇게 비아냥거렸겠지요. 그에 대해 젊은이 ‘구’는 ‘묻는 게 바로 예’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르면 물어야 합니다. 모르는 걸 묻는다고 부끄러울 게 하나도 없습니다.
어느 사람은 이 일을, 공자가 ‘대사구’(大司寇)가 된 이후인 50대 후반의 사건이라고 말했지요.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자’가 ‘대사구’라는 벼슬을 했는지도 의심스럽거니와, 설령 그렇듯 높은 벼슬자리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 경륜으로 보아서 그 동안 그 정도의 일은 모두 꿰뚫고 있었을 게 분명합니다. 모르는 것에 대해 묻기를 그토록 좋아하는 그였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구’의 이름은 널리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배우려는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들을 모두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서당’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그가 관리하는 마구간 가까운 곳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가르쳤습니다. 내 생각으로, 아마도 그 당시에 배우러 온 사람들은 어린이들이었을 듯합니다. 아무튼 그 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공자’(孔子), 즉 ‘공(孔) 선생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답니다.
앞에서 잠간 말한 바가 있듯이, 원래 ‘구’(丘)는 성(姓)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구’의 증조부가 노(魯)나라 장손씨(臧孫氏)의 채읍(采邑)인 방읍(防邑)의 읍재(邑宰)를 함으로써 그 후에 사람들이 ‘방숙’(防叔)이라고 부르며 그 앞에 ‘공’(孔)이라는 애칭을 덧붙였답니다. 그 후, ‘구’(丘)의 대에 와서야 그 사실을 기념하여 사람들이 ‘공’(孔)을 ‘구’의 성(姓)으로 삼았답니다. 그 당시의 한 이야기가 ‘논어’에 다음과 같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 어느 날, ‘구’가 관리하는 마구간에서 불이 났다. 조정에서 돌아온 ‘구’가 말했다. “사람이 다쳤습니까?” 그리고는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구분 자퇴조왈 상인호 불문마: 廏焚 子退朝曰 傷人乎 不問馬)【논어 10-12】
이는, ‘공구’(孔丘)가 그만큼 사람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있었다는 뜻일 성싶습니다. 그렇다고 자기가 관리하는 말을 등한하게 생각했을 리는 없습니다. 묻지는 않았겠으나, ‘구’는 가축들의 피해상황을 일일이 살폈겠지요. 그 후에, 그는 더 높은 자리인 ‘사공’(司空)이 되었습니다. ‘사공’은 주대(周代)에 설립한 관직인데, 주로 공사(工事)를 관장하였다고 합니다.
맡기는 일마다 척척 해내는 공자의 모습이 그려지지요? 보통은 몸집이 작고 동작이 빠른 사람이 생각날 겁니다. 그런데 젊은이 ‘구’는 그와는 다릅니다. 그의 키는 9척6촌이나 되어서 사람들이 모두 그를 ‘키다리’라고 부르며 괴이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이는, 아버지 ‘숙량흘’을 닮았기 때문이겠지요. 아버지의 키는 10척으로, 지금으로 치면 186센티미터나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구’는 아버지보다는 작아서 9척6촌이니, 우리의 치수로 180센티미터 정도입니다. 그런 정도의 키라면 지금도 ‘키다리’라는 별명을 들을 만합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그 후에 얼마 되지 않아서 젊은이 ‘구’는 노나라를 떠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제(齊)나라에서 배척되고, 송(宋)나라와 위(衛)나라에서 쫓겨났답니다. 그리고 진(陳)나라와 채(蔡)나라에서 곤궁에 빠지게 되자, 노나라로 되돌아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나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착오가 있었겠지요.
그러나 나는 그 여러 나라들에 대해서 궁금증이 있습니다. 그걸 알려면, ‘공구’(孔丘), 즉 공자가 살았던 시대를 알아야 합니다. 그가 노나라에서 태어난 시기는 춘추시대 말엽이었습니다.
춘추시대(春秋時代)란, 기원전 770년에 주(周)나라 평왕이 융구(戎寇)의 침입에 의해 도읍을 낙양으로 옮긴 때를 기준하여 진(晉)나라의 세 족인 ‘한’(韓)과 ‘위’(魏)와 ‘조’(趙) 씨들이 함께 지백(知佰)을 멸망시키고 진을 사실상 3분한, 기원전 453년까지 약 320년 동안의 시대를 말합니다.
그 초기에 1천여 개국이나 되던 제후의 나라들이 나중에는 1백여 개국으로 줄어들었지요. 즉, ‘진’(秦)나라와 ‘조’(趙)나라와 ‘진’(晉)나라와 ‘제’(齊)나라와 ‘초’(楚)나라와 ‘노’(魯)나라와 ‘위’(魏)나라와 ‘연’(燕)나라와 ‘조’(曹)나라와 ‘송’(宋)나라와 ‘진’(陳)나라와 ‘채’(蔡)나라와 ‘정’(鄭)나라와 ‘오’(吳)나라와 ‘월’(越)나라와 ‘위’(衛)나라 등입니다. ‘춘추시대’라는 이 명칭은 공자가 편찬한 ’춘추‘(春秋)에서 유래되었답니다.
그런데 ‘춘추오패’(春秋五覇)란 말을 들어 보았지요? 이는, 춘추시대 때의 강력한 힘을 지녔던 다섯 나라와 그 군주를 가리킵니다. 즉, 제(齊)나라의 환공(桓公)과 진(晉)나라의 문공(文公)과 초(楚)나라의 장왕(莊王)과 오(吳)나라의 합려(闔閭)와 월(越)나라의 구천(句踐)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기록에 따라서는 진(秦)나라의 목공(穆公)과 송(宋)나라의 양공(襄公) 또는 오(吳)나라의 부차(夫差)를 꼽기도 하지요.
전국시대(戰國時代)란, 춘추시대의 많은 국가들이 멸망하고 살아남은 7개국이 패권을 다투다가 진(秦)나라의 시황제가 기원전 221년에 중국 최초로 통일하게 되기까지의 230년 동안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춘추시대 초에 1백여 개국으로 분열되어 있던 중국은 전국시대에 이르러서 한(韓)나라 ․ 위(魏)나라 ․ 조(趙)나라 ․ 제(齊)나라의 4개국과 진(秦)나라 ․ 초(楚)나라 ․ 연(燕)나라 3개국으로 축소되었습니다. 이 7개국을 ‘전국7웅’(戰國七雄)이라고 합니다. 이 일곱 나라들 사이의 오랜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223년, 마침내 진(秦)나라가 초(楚)나라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3년 후에 전국을 통일함으로써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을 세웠지요. ‘전국시대’라는 말은 전한시대에 편집된 ‘전국책’(戰國策)에서 그 이름을 땄다고 합니다.
왜 춘추전국시대가 나타나게 되었을까요? 앞에서 기술했듯이, 중국 무왕(武王)이 상(商) 왕조를 무너뜨리고 기원전 1122년에 세운 주(周) 왕조는, 봉건제(封建制)에 의해 운영되었습니다. 봉건제는, 왕의 가족이나 개국공신들을 군주로 봉하고 일정한 봉토를 주어서 다스리게 하는 제도입니다. 봉토를 다스리는 군주를 ‘제후’(諸候)라고 하였으며, 제후가 다스리는 나라는 곧 ‘제후국’(諸候國)입니다. ‘제후’의 호칭은 ‘공’(公)이었지요. 공은 주로 혈족들에게 그 제후국의 주요 관직을 세습시켰습니다. 또, 그 주요 관직의 독점자들을 가리켜서 ‘대부’(大夫)라고 하였습니다. 본래 주(周)나라는 그 왕이 다스리는 지역과 71개국의 제후국으로 되어 있었답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 처음에는 결속력이 강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점차 분열되었고, 드디어 주(周)를 배반하는 제후국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는 ‘노’(魯)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겠군요.
이미 앞에서 노나라는 주공의 아들인 ‘백금’(伯禽)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노나라의 역대 군주를 살펴보면, 백금-고공-양공-유공-위공-여공-헌공-진공-무공-의공-효공-혜공-은공-환공-장공-민공-희공-문공-선공-성공-양공-소공-정공-애공-도공-원공-목공-공공-강공-경공-평공-문공-경공 등으로 이어집니다.
공자가 애써 정리한 ‘춘추’(春秋)는, 노나라 ‘은공’(隱公) 원년(기원전 722년)에서 ‘애공’(哀公) 16년(기원전 479년)까지 242년 동안의 대사건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책이지요. 공자가 태어난 시기는 ‘사기’에 노나라 ‘양공’(襄公) 22년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자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군주는 양공-소공-정공-애공 등입니다.
양공(襄公)이 죽었을 때, 그에게는 ‘적사’(嫡嗣)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경부’(敬婦)의 몸에서 태어난 ‘자야’(子野)가 군주의 자리를 잇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이 ‘자야’는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계손씨의 집에서 갑자기 죽었습니다. 그 사인에 대해서는 ‘좌전’에 다만 ‘훼’(毁)라고 씌어 있답니다. 이는, ‘자야’가 그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죽었다는 의미이지요. 아무튼 ‘자야’가 죽었으므로, 노나라에서는 ‘경부’의 동생인 ‘제부’(齊婦)가 낳은 ‘도’(禂)를 군주로 세웠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소공’(昭公)입니다.
여기에서 잠깐, ‘적사’란 ‘적출’(嫡出)의 ‘사자’(嗣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적출’은 ‘정실’(正室)의 소생을 말합니다. 또 ‘사자’는 ‘대를 이을 아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 군주의 ‘정실’을 어떻게 불렀을까요? 그 이야기가 ‘논어’에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습니다.
군주가 자기 아내를 부를 때는 ‘부인’이라고 하며, ‘부인’은 스스로를 ‘소동’이라고 일컫는다. 그리고 그 나라 사람들이 부를 때에는 ‘군부인’이라고 하며, 다른 나라 사람에게 말할 때는 ‘과소군’이라고 하지만, 다른 나라 사람이 부를 때는 역시 ‘군부인’이라고 한다.(방군지처 군칭지왈 부인, 부인자칭왈 소동, 방인칭지왈 군부인, 칭저이방왈 과소군, 이방인칭지 역왈군부인: 邦君之妻 君稱之曰 夫人, 夫人自稱曰 小童, 邦人稱之曰 君夫人, 稱諸異邦曰 寡小君, 異邦人稱之 亦曰君夫人)【논어 16-14】
그 후, ‘소공’은 계씨의 종주를 죽이려고 일단의 사람들을 조종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숙씨의 구원으로 제나라에서 망명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계씨는, 소공과 그 일행에게 정기적으로 말과 의복 등을 보냈으나, 오래도록 귀환은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망명 생활 7년 후, 소공은 타국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소공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야 될 사람은 마땅히 태자 ‘연’(衍)이었습니다. 그러나 계손씨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소공의 아우인 공자 ‘송’(宋)을 군주로 세웠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정공’(定公)입니다.
‘정공’은 기원전 509년에서 기원전 495년까지 15년 동안 재위하였습니다. 정공의 재위기간은 공자의 나이로 43세부터 57세까지의 사이라고 합니다. 정공은 매우 여린 성격의 소유자였답니다. 누구보다도 공자를 좋아하고 존경하면서도 공자의 말을 잘 듣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정공’이 죽자, 10세 전후의 어린 나이로 군주에 오른 사람이 다름 아닌 ‘애공’(哀公)입니다. 그가 노나라의 주인이 된 해는 기원전 494년으로, 공자의 나이 58세였을 때라고 합니다. 그의 재위 16년에 공자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물론, ‘정공’이니 ‘애공’이니 하는 호칭은 그들이 죽은 후에 붙여졌지요. 그러니 ‘애공’은 슬픈 일생을 살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면 노나라의 세 권력 가문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을까요?
백금으로부터 13대째로 내려오면, 은공(隱公)이 있습니다. 이 ‘은공’이야말로 슬픈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은공’의 아버지는 ‘혜공’(惠公)입니다. ‘은공’의 이름은 ‘식’(息)이라고 하였는데, 천첩(賤妾)의 소생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식’이 자라서 결혼할 나이가 되었을 때, ‘혜공’은 송(宋)나라에서 며느리를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송나라 여자는 빼어난 미인이었습니다. 그녀를 본 순간, 혜공은 마음이 동하여 자기가 차지해 버렸습니다. 참으로 ‘식’이 불쌍합니다. 그 후, 혜공은 그 송나라 여인에게서 아들까지 얻었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은 ‘윤’(允)입니다. 그러니까, ‘윤’은 ‘식’의 이복동생입니다. ‘혜공’은, 송나라 여인의 지위를 정부인(正夫人)으로 높이 올리고, 그녀가 낳은 아들인 ‘윤’을 태자로 삼았습니다.
마침내 ‘혜공’이 훌쩍 세상을 떠났습니다. 혜공의 뜻대로 태자 ‘윤’을 임금으로 삼아야 옳겠으나, ‘윤’이 너무나 어렸습니다. 그래서 ‘식’이 군주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가 바로 ‘은공’(隱公)입니다. ‘은공’은 그 위인이 착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태자 ‘윤’이 장성할 때까지 섭정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던 듯싶습니다.
그런데 은공 11년의 일이었습니다. 노나라 군주의 일족인 공자 ‘휘’(揮)가 은공에게 와서 속삭였습니다. 그는, 태자 ‘윤’을 살려 두면 후환이 생긴다며 자기가 ‘윤’을 죽이겠으니 그 보수로 재상(宰相) 자리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착한 ‘은공’은, 자기는 임시로 그 자리에 앉은 것뿐이며 ‘윤’이 크면 그에게 군주의 자리를 넘길 생각이라고 말했지요. 그 말을 들은 공자 ‘휘’는,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그 말이 세상에 알려지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웠지요. 마음이 불안한 그는, 한달음에 태자 ‘윤’에게로 달려가서 말했습니다.
“은공이 태자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내가 그를 제거하겠습니다.”
아직 어린 ‘윤’은, 그 말을 듣고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만, 머리를 끄덕거리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은공이 종무제(鍾巫祭)를 지내고 그 제례와 관계된 신하인 ‘위씨’(蔿氏) 집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에 공자 ‘휘’는 자객을 ‘위씨’ 집으로 보내어서 ‘은공’을 시해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어, ‘은공’에 이어서 ‘윤’이 노나라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곧 ‘환공’(桓公)입니다.
‘환공’은 즉위한 지 3년이 지나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인을 이웃의 강대국인 제나라에서 데려왔지요. 이 여자는 제나라 군주인 ‘양공’(襄公)의 여동생이었습니다. 그 이름을 ‘문강’(文姜)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기막힌 일입니다. 이 ‘문강’은 자기 오빠인 제나라 군주 ‘양공’과 근친상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답니다.
그런 일을 알 리 없는 환공은, 3년이 지난 후에 ‘문강’에게서 아들 하나를 얻었습니다. 그 아들의 출생일이 환공의 생일과 같았으므로, 그 이름을 ‘동’(同)이라고 지었습니다. 물론, 그 아들을 태자로 삼았고, 그가 훗날의 ‘장공’(莊公)입니다.
결혼하고 15년이 지났을 때, ‘환공’은 ‘문강’과 함께 제나라를 방문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노나라의 대부인 ‘신수’(申繻)가 극구 말렸습니다. 그러나 ‘환공’은 그를 뿌리치고 제나라로 갔습니다. 그러니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이 즐거운 사람은 ‘문강’이었지요. 제나라에 당도한 날 즉시, ‘문강’은 자기 오빠인 ‘양공’과 간통의 기쁨을 마음껏 나누었습니다.
그 때에서야 비로소 ‘환공’은 그 사실을 눈치 채게 되었지요. 그래서 ‘문강’과 한바탕 크게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난처해진 ‘문강’과 ‘양공’은, 궁리 끝에 ‘환공’을 위한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는 ‘환공’에게 많은 술을 먹인 다음, 힘이 천하장사로 알려진 제나라 공자 ‘팽생’(彭生)으로 하여금 ‘환공’을 죽이도록 밀명을 내렸습니다. ‘팽생’은,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환공’을 수레에 앉히면서 두 팔로 그의 늑골을 으스러뜨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 불쌍합니다. ‘문강’과 ‘양공’은 ‘팽생’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는 그 일을 끝냈습니다.
‘환공’이 그리 허무하게 제나라에서 죽자, 태자 ‘동’이 노나라 군주의 자리에 올랐지요. 그 사람이 바로 ‘장공’(莊公)입니다. 그러나 ‘장공’의 어머니인 ‘문강’은 노나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환공’에게는 ‘동’ 이외에도 세 아들들이 더 있었습니다. 물론, 문강이 아닌, 진(陳)나라 여인에게서 얻은 아들들이었지요. 그러니까 이들은 모두 ‘장공’의 이복동생들입니다. 첫째의 이름은 ‘경보’(慶父)이고, 둘째의 이름은 ‘숙아’(叔牙)이며, 셋째의 이름은 ‘계우’(季友)였습니다. 그런데 ‘열국지’에 의하면 ‘경보’와 ‘숙아’는 ‘장공’의 이복형제로서 ‘경보’는 ‘장공’의 형이고 ‘숙아’는 ‘장공’의 동생이었답니다. 그리고 ‘계우’는 ‘장공’의 동복동생이었다는군요.
어쨌든 세 형제, 즉 ‘경보’는 ‘맹손씨’(孟孫氏)를 이루었고, ‘숙아’는 ‘숙손씨’(叔孫氏)를 이루었으며, ‘계우’는 ‘계손씨’(季孫氏)를 이루게 되었지요. 이 세 집단을, 사람들은 ‘삼환’(三桓)이나 ‘삼가’(三家) 및 ‘삼경’(三卿) 또는 ‘삼손’(三孫)이라고 불렀답니다. 이 세 대부 집안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됩니다. 이 ‘삼가’ 중에서 ‘계씨’(季氏) 집안이 가장 세력이 강했습니다. 이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논어’에 있습니다.
공자는 ‘계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뜰에서 ‘팔일무’를 추게 하니, 이를 참을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 참겠는가!”(공자위계씨 팔일무어정 시가인야 숙불가인야: 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논어 3-1】
여기에서 말하는 ‘계씨’(季氏)는 누구를 가리키는 걸까요? ‘좌전’(左傳) 소공(昭公) 25년의 기록과 ‘한서유향전’(漢書劉向傳)에 의하면, 이 사람은 ‘계손의여’(季孫意如), 곧 ‘계평자’(季平子)를 말하는 성싶습니다. ‘계평자’가 권력을 누린 기간은 기원전 532년부터 기원전 505년 사이입니다. 이는, 공자가 20세부터 47세까지의 기간입니다. 그리고 ‘팔일무’(八佾舞)는, ‘가로와 세로로 8명씩 모두 64명이 늘어서서 벌이는 춤’을 말합니다. 이 춤은 ‘천자’만이 누릴 수 있었지요. 제후는 ‘육일무’(六佾舞)로 모두 36명의 춤을 벌일 수 있었고, 대부는 ‘사일무’(四佾舞)로 16명의 춤을 벌일 수 있었답니다. 그러므로 대부인 ‘계씨’는 ‘사일무’를 추어야 마땅합니다. 공자는 그 사실을 ‘참기 어렵다.’라고 말했습니다. ‘예’(禮)에 어긋난다는 뜻입니다. 이를 ‘참’(僭)이라고 한답니다.
그럼 지금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다시 계속하겠습니다. ‘장공’은 제나라 여자인 ‘애강’(哀姜)과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 ‘애강’이 바로 ‘장공의 어머니인 문강과 정을 통한’ 제나라 ‘양공’의 딸이란 사실입니다. 즉,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딸입니다. 그러니 ‘장공’이 ‘애강’을 좋아할 리가 없었지요. 그 때문에 그녀에게는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애강’과 함께 시집온, 그녀의 동생인 ‘숙강’(叔姜)과는 그리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숙강’과의 사이에 아들 셋을 두었습니다. 그 맏아들의 이름이 ‘계’(啓)입니다.
그런데 ‘장공’은 따로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노나라 대부(大夫)인 ‘당씨’(黨氏)의 딸 ‘맹녀’(孟女)였습니다. ‘장공’은 그 ‘당씨’의 딸인 ‘맹녀’에게서 ‘반’(班)이라는 아들을 얻었습니다. ‘장공’은 이 ‘반’을 자기의 후계자로 삼고 싶었습니다.
군주에 자리에 앉은 지 32년, ‘장공’은 병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동생인 ‘숙아’(叔牙)에게 후계자를 ‘반’으로 삼으면 어떻겠느냐고 의논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숙아’는 ‘일계일급’을 내세우며 후계자는 ‘경보’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일계일급’(一繼一及)이란, ‘아버지의 사후에는 장자(長子)가 대를 잇고, 장자(長子)의 사후에는 동생이 대를 잇는 상속제’를 말합니다. 그 말을 듣고 ‘장공’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막냇동생인 ‘계우’에게 의논했습니다. ‘계우’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어서 ‘반’의 후계를 찬성했지요.
마침내 ‘계우’는 ‘장공’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숙아’를 대부 ‘침무씨’(鍼巫氏) 집에서 기다리게 한 다음, ‘침계’(鍼季)라는 사람으로 하여금 ‘숙아’에게 독이 든 술을 마시도록 협박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술을 마시면 후손의 제사를 받게 되겠지만, 마시지 않으면 죽어도 후손이 없게 된다.”
그 말을 듣고, ‘숙아’는 독주를 마셨습니다. 그리 죽었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봉록을 받을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고 합니다. ‘계우’는 ‘숙아’의 아들을 ‘숙손씨’로 삼아서 일대부가(一大夫家)를 이루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장공 32년 계해일(癸亥日)의 일입니다. ‘장공’이 죽자, ‘계우’는 ‘반’(班)을 군주로 옹립했지요. 그러나 그가 ‘시상’(侍喪)하면서 당씨(黨氏) 집에 머물고 있을 때, 자객의 손에 암살되었습니다. 군주로 옹립된 지 2달도 안 되었을 때의 일이었지요. 이는, 그 모두가 ‘경보’(慶父)의 짓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요? ‘경보’는 전부터 ‘애강’과 통간해 오고 있었답니다. 아마도 ‘애강’이 ‘경보’에게 추파를 던졌겠지요.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 음모는 대강 이렇습니다. ‘경보’는 ‘장공’이 죽자, ‘애강’의 동생인 ‘숙강’이 낳은 ‘계’(啓)를 군주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 말사육사이며 장사인 ‘낙’(犖)을 시켜서 ‘반’을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낙’은 ‘반’을 살해했으나, ‘당씨’ 일가의 가병(家兵)들에게 무참히 죽음을 당했습니다. 경보는 모든 죄를 ‘낙’에게 뒤집어씌웠습니다.
그 일로 하여 ‘계우’는 진(陳)나라로 망명하고, ‘경보’는 드디어 ‘숙강’의 아들인 ‘계’를 군주로 옹립하였습니다. 이가 곧 ‘민공’(閔公)입니다. 그 후로 ‘경보’와 ‘애강’의 통간은 거칠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모양입니다. ‘애강’은 애인인 ‘경보’가 군주의 자리에 오르기를 바랐습니다. 그 때문에, ‘경보’는 ‘복의’(卜齮)라는 대부를 시켜서 ‘민공’을 습격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복의’는 ‘추아’(秋亞)라는 자객으로 하여금 ‘민공’을 시해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결국, ‘민공’은 ‘추아’의 손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한편, ‘계우’가 그 소식을 듣고, 주(邾)나라에 있는 ‘민공의 동생’인 ‘신’(申)을 옹립하여 망명정부를 세웠습니다. 이에 노나라 사람들은 대부 ‘복의’ 일가를 몰살하고 ‘경보’마저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경보’는 ‘어마 뜨거워라’ 하고 거(莒)나라로 부리나케 도망을 갔습니다. 그래서 ‘계우’는 ‘신’과 함께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신’이라는 사람이 ‘희공’(僖公)입니다.
자리를 잡자, ‘계우’는 거나라에 뇌물을 보내어서 ‘경보’를 죽이도록 했습니다. ‘경보’는 거나라에서 도망하여 주나라를 거친 후에 제나라로 갔습니다. 그러나 제나라에서는 그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경보’는 사람을 통하여 ‘계우’에게 용서를 빌었지요. 그러자 ‘계우’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자손을 세워서 대대로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해주겠다.”
그 말을 전해 듣고, ‘경보’는 허리띠로 목을 매고 자살했습니다.
한편, ‘애강’은 주(邾)나라로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제나라의 ‘환공’은 ‘애강’을 처치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수초’(竪貂)를 주나라로 보냈습니다. 주나라에 당도한 ‘수초’는 ‘애강’에게 노나라로 함께 가기를 청했습니다. ‘애강’은 ‘수초’를 따라나섰습니다. 그리고 이(荑) 지방에 이르러서 해가 저물고 관사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녁 식사가 끝났을 때였습니다. ‘수초’가 ‘애강’에게 정중히 말했습니다.
“손수 목숨을 끊는 게 지금까지의 허물을 덮을 수 있는 길입니다.”
‘애강’은 방안으로 들어가서 밤새도록 울다가 새벽녘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로써 ‘경보의 난’(慶父之亂)은 모두 막을 내렸습니다.
노나라 ‘희공’은 ‘경보’의 아들 ‘공손오’(公孫敖)로 하여금 ‘경보’의 뒤를 잇게 하고 그 성을 ‘맹손씨’로 고쳐서 성읍(成邑)의 녹을 받게 하였습니다. 또한, ‘공손자’(公孫玆)로서 ‘숙아’의 뒤를 잇게 하고 그 성을 ‘숙손씨’로 고쳐서 후읍(郈邑)의 녹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계우’는 비읍(鄪邑)의 녹을 받게 하는 동시에 ‘문양’(汶陽)의 전답을 더 받았으며 성을 ‘계손씨’라고 고쳤습니다.
이들이 대대로 노나라의 실권자가 되었지요. 그래서 공자가 15세가 되던 기원전 537년에는, ‘계손씨’가 노국의 반 이상을 차지하였으며, ‘맹손씨’와 ‘숙손씨’는 가각 나머지의 반씩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노나라의 군주는, 그들이 기분 내키는 대로 주는, 희사금 같은 돈에 의존하였답니다. 이들 삼환(三桓)으로서 공자의 삶과 직접 관계되는, ‘맹손씨’의 계보는 맹희자(孟僖子)-맹의자(孟懿子)-맹무백(孟武伯)으로 이어지고, ‘계손씨’의 계보는 계평자(季平子)-계환자(季桓子)-계강자(季康子)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면 이제 나의 시를 소개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좀 떨어져서 바라보았을 때는
그리 힘 있게 보이던 구리때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그 몸 여기저기에
깊은 상처가 숨어 있네.
이 세상 어느 목숨인들
상처를 간직하지 않은 몸 있을까.
아픔을 숨기고 살 뿐이네.
그 슬픔도 잎집으로 감싸면
아름다운 무늬가 될지도 몰라.
- 졸시 ‘가까이서 보니’ 전문
‘구리때’는 깊은 산에서 사는 2년 내지 3년 살이 풀인데 키가 2미터에 이릅니다. 뿌리를 ‘백지’(白芷)라고 하여 감기나 치통 등에 약재로 씁니다. 그 모습이 매우 튼튼해 보이지요. 이 풀은 큰 키와 튼튼해 보이는 몸매로 하여 공자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런데 공자에게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그에게도 아주 많은 아픔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는 4살 때에 아버지를 잃고 편모슬하에서 자랐으며, 그 어머니마저 15살 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어렸을 때에 천하게 지냈으므로 상스러운 일에 아주 능하게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감추기는커녕 떳떳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아니, 그런 역경을 디디고 성실하게 노력함으로써 온 인류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공자는 보잘 것 없는 ‘창고지기’를 하면서도 최선을 다하였고, ‘짐승을 기르는 일’을 맡았을 때도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작은 일에 충실하지 못하면, 역시 중한 일에도 성실하지 못한 법이지요.
‘잎집’은 ‘잎자루가 칼집 모양으로 되어서 줄기를 싸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한문으로는 ‘엽초’(葉鞘)라고 합니다. 이렇듯 지난날의 아픔을 감싸 안으면, 먼 훗날에 그 어려웠던 날들이 무늬처럼 아름다운 ‘추억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글: 김 재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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